2024년 9월 2일 화요일
금연
김미순
나는 3층짜리 건물이 두 채나 있는 부자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지역에서 유명한 국밥 맛집 사장이다. 종업원도 안 쓰고 엄마와 둘이서 운영했다. 무엇보다 신선한 재료와 친절을 무기로 손니을 이끌었다. 나도 순대국밥과 콩나물 국밥을 자주 먹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 경쟁상대가 있었다. 그 집도 어머나와 둘이 장사했는데 우리집 만큼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 그 집 아들은 공부를 그다지 잘 하지 못 하여 대학에 진학을 하지 못 하고 바로 어머니 가게에 취직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내려왔을 때 그 사라을 소개했다. 얼굴도 잘 생기고 성실하고장사 수와도 있다며 남편감으로 최고라고 했다. 나는 별부다없이 오케이 했다.
그래서 결혼에 골인했다.
시내에서 저일 크고 멋진 예식장에서
올리고 번 검색해봐요른 건축물을 보았다.신혼여행을 갔다. 스페인! 나는 가우디의 가정성당에 반했다. 남편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검은 성모상은 줄을 성서 차례로 손을 대보있다. 뭔가 축복받는 기분이었다. 나도 천주교 신자가 되 불까? 생각만해도 성스럽게 여겨졌다. 여행의 삼분의 일이 셍당 구경이었다. 다음으로는 피키소의 진짜 작품이 전 시 되어밌는 미술관 탐험이었다. 미술학도로서 필수적인 코스였다. 축소해둔 작품도 다수 샀다. 내 갤러리에 걸어 놓으면 좋을 거 같아서 고르고 골랐다. 여기에서 하뭉과 와인을 질리게 먹었다. 10박 11일의 신혼여행은 정말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다.
나는 1층 국밥집, 2충 치과,3층 우리집 건물을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고, 근교에1층 카페, 2층 갤런리, 3층 작업실을 오갔다.
우리 집은 그이 집과 합쳐 매장을 넓혔다. 손님들은 배로 늘었고 시어머니의 빠른 손놀림으로 그 많은 손님을 감당했다. 매장에서 쓰이는 기물들은 새로 갈았고 간판도 새로 했다. 나는 살림을 배우지 않아 밥과 반찬은 남편이 다 해 줬다. 나는 차려먹기만 했다. 심지어 침대 침구나 베게 갈기 맟 손톱 깎기, 심지어 내 속옷과 철마다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해줬다. 그야마로 공주의 살을 살았다.
복이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건강검진에서 나는 폐암 3기였다. 담배도 아 피고 음식 조리도 인덕션이 하는데?
의사는 간접흡이 9십 프로라고 진단했다.
그때부터 남편은 냄새를 보내지 않았다. 지금은 의료 수준이 많이 좋아 생존률이 배로 높아줬다고 희망을 가지리고 주위사람들이 위로했다. 나는 그래도 믿을 수 없어 처음으로 전시회를 계획했다. 내 갤러리이므로 작품을 걸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을 선정하고 조명 각도를 정하고, 팜플렛 제작히고,, 오는 손님 드시리고 차와 쿠키, 방명록 준비하느라 오히려 피곤하고 아팠다.
다시 병원에 갔다. 4기였다. 그러나 남편은 내가 항암제를 맞고 집에 돌앙온 날 나타나지 않았다. 삼일 만에 우리 아버지 산소 앞에서 발견되었다.사망 원인은 과다 수면제 복용이었다. 갓슴에는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가 꽂혀 있었다.
"어머니, 임실이를 잘 부탁해요"
단 한줄의 나에 대한 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