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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9장10~19a절
제목 : 준비된 사람 아나니아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복음을 전할 사울의 역할을 알리시며 그를 도우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즉시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갑니다.
1.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심(10~12절)
1) 주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야 불으십니다(10절)
“[10]그때에 다메섹이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있나이다 하니”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 - '제자'로 언급되는 '아나니아'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5:1;23:2).
*행5:1절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23:2절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이 이름의 히브리적 본래 의미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에 걸맞게 아나니아는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경건한 자였습니다(22:12).
그런데 그가 어떻게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한편 '제자'는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22:12을 볼때 아나니아가 다메섹에 오랫동안 거주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루살렘 박해 때 피신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오순절 때 기독교인이 되었거나(2:5-11),
아니면 그 이전 예수님의 활동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환상(幻像)중에 불렸습니다” 성경에서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서 계시 전달자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납니다.
본절에서 아나니아가 본 환상은
(1) 사울을 택하기 위한 주의 치밀한 섭리를 강조하며,
(2) 아직도 의구심에 사로 잡혀 있을 사울에게 증거가 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예수님의 부름에 대한 아나니아의 대답은 구약적인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창 22:1;삼상 3:4).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따라서 본절에서 사울의 소명 사건을 구약 시대의 소명 사건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직가로가 유다의 집에서 사울을 찾으라 하심(11절)
“[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
예수님이 가라고 지시한 거리 '직가'(直街)는 동서로 곧게 뻗은 거리로서, 현재는 '다르발 무스타킴'(Darbal Mustaqim)이라고 불리어집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9절에서 언급된 사울의 금식 행위를 예수님은
기도하는 중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절박한 기도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9절 주석 참조)
3) 사울은 환상에 아나니아라하는 사람이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12절)
“[12]그가 아나니아라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하는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와서 안수를 통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여 줄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환상으로 이미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아나니아의 일을 보여주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사울은 두 번째 환상을 본 셈이 됩니다.
이같이 치밀한 과정을 통해 사울의 회심시키는 사실을 볼 때 사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애착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철저한 유대교적 사상과 기독교를 탄압하였던 광신적 열정만큼이나 사울의 회심은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깊은 고뇌와 예수님의 집요한 노력이 사울의 회심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2.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13~16절)
1)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하여 주님께 보고합니다(13~14절)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사람에게 듣사온 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아나니아가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사울을 직접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또한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많은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이미 이전에부터 있어 왔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은 사울의 악명이 이방 지역에까지 알려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잔악하고 반(反) 기독교적인 사울의 행위에 대한 강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악명 높은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예수님의 지시는 충격적인 사실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사울의 회심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지닙니다.
주의 성도 - 이말은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 하나로
'구별된 거룩한 자'를 의미합니다.
32절과 41절에서는 단순히 '성도'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에 대한 박해가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며(5절) 따라서 사울이 예수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절)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14절)는 기독교인에 대한 또 다른 명칭입니다.
누가는 기독교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이야기의 지루함을 피할 뿐 더러 기독교인에 대한 당시의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의미합니다(몸 10:13).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2) 예수님으로부터 사울의 소명(召命)이 극적으로 선포됩니다(15절)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3, 14절에서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사울의 반 기독교적 행위가 언급된 후 예수님으로부터 사울의 소명(召命)이 극적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사울의 선교 대상이 크게 세 가지로 언급되었습니다.
(1) 이방인. 여기서 예수는 유대 이외의 모든 나라에 대한 선교를 첫번째 관심사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이며 광신적인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소명은 사울의 회심에 걸 맞는 매우 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임금. 이는 세속적인 권력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26장), 가이사(딤후 4:16, 17)등 집권자들 앞에서 증언하였던 사울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 이 소명이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스라엘 자손들. 사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으며 회심 후에도 그 애정을 잃지 않았습니다(롬 9:1, 2).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다만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유대인을 상대로 전도 활동을 했으므로, 사울 자신은 이방인을 상대로 그 사역을 감당했습니다(갈2:8).
*갈2:8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택한 나의 그릇” - 선택된 그릇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법으로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렘 22:28;51:34).
사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께 선택된 자임을 의미합니다.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갈 1:15~24.
3) 사울이 겪어야 할 고난을 보이리가 하십니다(16절)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복음전파를 위한 소명과 함께 사울이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서 그 고난이 필연적인 것으로서 언급됩니다.
이 같은 예고는 13절에서 언급된 아나니아의 말과 상응하는 표현으로 사울이 기독교인들에게 해를 입혔던 것처럼 자신도 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해'(害)는 고난의 의미로서 보복의 차원이 아닙니다. 즉 기독교인이 당하게 될 의로운 고난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예수의 명령을(마 16:24;막 8:34;눅 9:23;14:26, 27) 실천해야 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보이리라'는 '지시하다', '증거하다'의 의미도 지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사울에게 보이시겠다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겪어나갈 실제적인 고난을 말합니다.
즉 사울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어떠한 고난을 얼마나 당하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기 보다는 실제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사울에게 안수하고 세례를 베품(17~19a절)
1)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심합니다(17절)
“[17]아나니아가 떠나 그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니 ”
아나니아는 예수의 지시에 따라 사울을 방문하여 안수하고는,
'형제'라는 호칭으로 사울을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형제'(아델포스)라는 칭호가 암시하는바 그 의미는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나니아는 사울의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인해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13, 14절).
따라서 여기서 '형제'라는 호칭은 사울의 모든 악한 과거가 용서되고,
사울을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하신 아나니아의 이 말은,
① 사울의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과
② 사울에게도 사도적 능력이 부여됨
③ 그리고 그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성령이 임하는 방편으로 이해됩니다(8:17).
*행8: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본절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을 했으나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울의 눈이 치료되어 세례 받은 사실과 이 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2)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집니다(18절)
“[18]즉시 사울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레를 받고 ”
사울이 다시 보게 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가 보지 못하게 된 원인이 제거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사울의 눈이 치유된 기적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며,
그 사건을 사울의 부름 받음에 대한 증거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 기독교인 됨에 대한 의식으로서 사울은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다메섹에 침례 할 만한 강이 없었다는 점에서 볼 때 침례가 행해질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현대에 행해지는 형식의 간단한 예식을 치렀을 것이라(Lenski)고 말합니다.
또한 어떤 학자는 다메섹에 있는 유다의 목욕탕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Earn).
그러나 이러한 추정들은 확실한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요점은
사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믿음의 공동체에 가입했다는 사실입니다.
3) 사울이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집니다(19a절)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
사울이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다는 본문은 9절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사울의 금식이 끝났다는 단순한 의미 외에,
사울의 내적 갈등과 고뇌의 종결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 구절은 사울의 변화된 새로운 모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강건하여지니라'라는 단어는 사울의 변화가 매우 긍정적으로 나타난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사울을 유용한 그릇으로 빚기 위해 신중하게 계획하시고 세심하게 일하십니다.
길 위에서 결정적으로 사울을 굴복시키시고, 다메섹에서 그를 도울 신실한 아나니아를 준비하시고, 아나니아를 통해 이적을 행하고 세례를 베푸서서 사울의 회심이 진정한 것임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한 영혼을 새 사람으로 빚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 덕분에 사울은 위대한 전조자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십니다.
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자’를, 주의 이름을 전하며 ‘박해 받은 자’로 살게 하십니다(15,16절).
주님의 복음은 삶을 완전히 바꿀 힘이 있고, 고난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습니까?
복음의 가치를 인식하고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며 복음에 헌신하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까?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울은 극심한 혼란 중에서 기도합니다(11,12절).
평생의 확신이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고, 그 확신으로 쌓아왔던 삶의 공든 탑이 무너졌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처분에 자신을 맡깁니다.
보지 못하고 먹고 마시지 못해 그의 몸은 철저하게 무기력했고, 그의 마음은 자책감과 두려움으로 떨렸을 것입니다.
이 와중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주께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를 통해 자신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으답을 듣습니다.
온 힘을 다해 당면한 문제와 씨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거룩한 낭비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2) 아나니아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기꺼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13,14,17~19절).
성도들 사이에서 사울의 악명이 자자했고, 그가 성도들을 소탕하려고 다메섹에 왔다는 것을 알고서도, 마음속 두려움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신뢰했습니다.
지금 내게도 두려움을 떨치고 순종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