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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朔)의 그림자를 찾는 김민정의 수필세계
강 돈 묵
1. 들어가기
수필가 김민정의 세 번째 수필집을 만난다. 2008년 문단에 데뷔하여 《여백에 핀 꽃(2018)》,《다시, 봄(2020)》에 이어 출간되는 세 번째 수필집이다. 이 글은 세 번째 수필집 《내가 만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수필가 김민정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수필가는 체험 속에서 소재를 찾는다. 체험 속에서 소재를 찾는다는 말은 ‘사실’에서 글감을 취택한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수필을 작가의 고백문학이라고 일컫는다. 왜냐하면 작가 자신이 살아온 삶 속에서 피운 꽃이나 열매는 물론이고, 엉긴 앙금이나 찌꺼기를 가지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언어로 표현한 것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흔히 고백은 자신이 경험한 바나 알고 있는 정보를 스스로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기에 일인칭 시점을 취하고, 허구에는 눈을 감으면서 있는 그대로 솔직담백하게 뇌까린다. 이것은 수필이 생득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숙명이다. 마치 옆의 친구에게 속삭이듯 지나온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를 은연중 드러내는 멋을 부리니 나르시시스트가 수필가이다.
먼저 이 나르시시스트의 행색을 살펴본다. 수필가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체험 속에서 소재를 찾는다. 구석구석에까지 샅샅이 뒤지며 보석이라도 찾아내듯 열성적이다. 그러나 그 행위가 너무 노출되는 것도 꺼린다. 너무 소재에 민감하면 소재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며 경계한다. 여하튼 소재 발굴을 위해서 수필가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항시 새로운 소재를 찾아 나서는 적극성이 있어야 좋은 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이한 소재만 찾지는 않는다. 신기한 것을 찾아 나서기보다 참신한 데 더 관심을 둔다. 참신한 소재란 지금까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특이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심안으로 일상 속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이는 순전히 작가의 소재 수용 자세에서 결정될 일이다. 기존의 방법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면서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문학적 소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수필의 소재는 생활 속에서 찾아내지만, 선택한 그 자체가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작가의 해석이 가해져야만 문학적 소재로 환치된다.
소재의 활용 방법도 그렇다. 선택한 소재라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갖는 의미가 현저하게 차이를 보인다. 어떠한 소재든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동원되는 사물이나 사건들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물에 불과하다. 취택한 우주 만물 중의 하나는 작가의 손을 거쳐 그 특성을 가진 사람으로 형상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작가가 의도하는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소재 사냥의 차별화는 결국 작가의 깨어 있는 눈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똑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다른 뜻을 찾아내는 것은 작가의 발칙한 해석으로 가능하다. 많이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삶을 체질화해야 한다. 독서와 사색은 이런 소양을 길러주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들이다. 이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제 김민정 수필가의 수필집 《내가 만난 세상》속에 나타난 모습을 살펴본다. 그의 일상 속에서 어떤 유형의 모습이 드러나는지를 살피는 것은 작가의 작품세계에 깊이 머물며 진지하게 즐거움을 음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2. 자연에 나름의 색 덧칠하기
우리가 접하는 자연은 시간을 두고 미미한 변화를 시도하지만, 그 속도는 아주 더디다. 언제나 같은 모습이라고 인식되기 일쑤이다. 그뿐 아니라 같은 순간이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육안이 아닌 심안으로 인식할 때는 사람마다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심안으로 문학적 소재라 인식한다면, 그것은 작가의 심성이나 취향, 그리고 살아온 여정에 따라 해석한 것이기에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다르게 인식된 자연은 작가의 내적 요구에 따라 나름의 색을 덧칠하게 된다. 입혀진 옷의 색을 살펴보는 것은 작가의 세계를 알아내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통로가 된다. 이 통로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 작가를 만나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수필가 김민정에 있어서 자연은 어떤 색으로 칠해질까.
(가) 이른 봄 천변은 목가적이다. 수십 리 하천을 따라 형성된 논과 밭에서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주렁주렁 열리고, 가지마다 방울토마토가 탱글탱글 익어가고 있다. 천변 길로 이어지는 이 길은 인도가 따로 없어 걷기에 불편하지만 군데군데 쉼터가 있어 가끔 차를 세우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망중한에 빠지기도 한다. 서두름 없이 흘러가는 들녘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허허로운 천변은 버드나무와 여러해살이풀과 갈대가 군락을 이뤄 거대한 습지로 형성되어 있다. 가을에 한껏 매력을 뽐내던 갈대는 이제 봄바람을 맞으며 다시 생기를 입는다.
(나) 천변 풍경에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오목하게 팬 왕 버드나무 몸통 안에서 실 버드나무가 뿌리를 박고 기생하고 있는 모습이다. 혹처럼 거추장스러울 법도 하건만 왕 버드나무는 품에 안고서도 강물을 맑게 하고 물고기와 새와 풀을 살리고 있다. -<내가 만난 세상>에서
윗글 (가)는 수필가 김민정이 바라본 일상의 자연이다. 누구나 흔히 바라보게 되는 자연이다. 그런대로 옆의 친구와 어울려 생을 유지해가는 생명체에 불과하다. 작가도 자주 일별하고 스쳤을 법한 자연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그 넓은 자연 속에서 작가가 찾아낸 대상은 천변의 왕버들이다. 작가의 일상적인 삶에 타자에게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전혀 눈에 띄지 않았을 장면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심안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기에 왕버들이 시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나)에서 보면 실버들과 왕버들이 함께 공존하는데 작가의 시선은 왕버들에 꽂힌다. 다른 이에게 기생하는 실버들보다 자신의 아픔과 부담을 감내하며 옆 친구에게 사랑을 베푸는 왕버들의 모습에 애정이 머문다. 왕버들이 실버들만이 아니고 물고기와 새와 풀에까지 사랑을 베풀고 있는 모습이 잡히는 것은 당연하다. 작가가 추구하는 삶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필가 김민정을 만날 수 있고, 그의 마음에 흐뭇해하는 것이다.
혹독한 한파와 싸우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겨울을 이겨내고 봄과 함께 새싹을 돋운다. 그 나약한 뿌리는 종족 보존을 위해 모든 양분을 쏟아부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다. 장다리무꽃 뿌리는 구불텅하게 생긴 데다가 턱없이 짧고 얕게 박힌 탓에 작은 바람에도 꽃대가 쉽게 널브러진다. 가느다란 뿌리는 숨을 다해 씨방이 튼실할 때까지 결코 썩거나 병들지 않는다.
고운 빛 여린 꽃은 소중한 자식을 잉태하고 건강하게 키워낸 뒤 씨앗이 익어갈 무렵이면 잎은 거칠어지고 씨방이 든 껍질은 늙어가는 어머니의 뱃가죽처럼 쭈글쭈글하게 말라간다. 씨방이 잘 맺히면 뿌리에는 바람이 들고 잎사귀는 노랗게 시들어 죽는다. 장다리무꽃을 볼 때마다 자식에게 일생을 쏟아붓는 어머님의 삶을 떠올린다. -<장다리무꽃>에서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는 여기저기 나약한 무가 목숨을 보존하고 있다. 튼실한 것들은 진즉에 주인집 김장거리로 떠났고, 쓸모가 없어 보이는 나약한 것들만이 이삭처럼 밭에 널브러져 있다. 보기엔 처량하지만, 이것들이 추운 겨울의 고추바람까지 이겨내고 장다리꽃을 피우게 된다. 오직 일념으로 지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겠다는 모성으로 해석한다. 그러기에 작가는 씨앗을 익히고 메말라 버린 씨방 껍질을 지켜보면서 자식을 분만하고 터버린 어머니의 뱃가죽을 소환한다.
어머니를 소환하면 자연스레 자신의 지난 삶이 끌려 나온다. 송구함뿐이다. 어머니가 편안하게 딸을 지켜볼 수 있도록 떳떳한 삶이 되지 못하였다. 언제나 어머니에겐 아픈 손가락이었다. 내 생각, 내 목소리, 내 자리 없이 그저 그렇게 희미한 삶을 살다 보니 꽃을 피워도 눈길을 끌지 못했다. 언제나 어머니의 삶을 닮고 싶은 것은 작가 역시 어머니이기에 그렇다.
작가가 자연에 덧칠한 색은 자신의 색이다. 언제나 자연에서 터득한 진실의 눈빛으로 자신의 내면에 밀어 넣어 소화하는 작가. 그가 수필가 김민정이다. 마치 지렁이가 흙을 삼켜 박테리아를 배양해 밖으로 밀쳐 내놓은 지렁이 똥과 같다. 그러기에 지렁이 똥에서는 지렁이의 냄새가 있듯, 김민정의 수필에는 수필가 김민정의 메시지가 있다.
3. 가족, 영원히 함께인 영혼의 그림자
태어나서 많은 인간관계를 맺고 살다가 떠나는 것이 인생이다. 그중 뗄 수 없이 숙명적으로 맺어진 것이 가족이다. 그만큼 평생을 함께하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또한 영향을 주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고정시키기도 하는 게 가족이다. 그렇다고 모든 가족이 다 똑같이 관계하는 건 아닌 성싶다. 가족 중에서도 특별히 더 밀착되어 산 사람은 기억 속에서 꿈틀거리고, 추억을 곱씹으며 살기도 한다.
수필가 김민정의 수필에는 그 많은 가족 중에서 ‘어머니’, ‘남편’, ‘자녀’, ‘오라버니’가 자주 보인다. 어쩌면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 부부, 자녀의 관계가 가장 밀착된 가족일지도 모른다. 늘 함께하면서 어떤 관계였는지를 살펴본다.
어느 날 고사목이 잘려 나갔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고사목이 병들어 죽은 쓸모없는 나무로 비쳤기 때문이리라. 아직은 수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강고함이 남아있을 터인데 말이다. 자리를 잃은 새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휑한 자리 끝에는 햇빛과 바람만이 잘려 나간 그루터기를 말리고 있다.
이제는 새를 기다리는 일이 사라지니 나의 가슴에 사유의 새가 날아든다. 몸통이 잘린 고사목의 그루터기를 보며 생명의 한계를 읽는다. 푸르름이 성성했던 지난 시간도, 아픔과 상처도 옹이로 키우며 살아냈던 세월도 때가 되면 고사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로병사 이치이련만 그 순리마저 거스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루터기에 앉아 아직은 성성한 나무뿌리를 만져 본다. 등은 굽었지만 차가운 수분이 남아있어 손바닥에 전해져 온다.
어머니가 가신 지도 10여 년이 지났다. 그루터기에 의지하셨던 어머니처럼 나도 떠나신 그녀의 어깨에 기대곤 한다. 마음이 공허할 때나 삶에 불만이 쌓이거나, 길을 잃고 공포 속에서 방황할 때나, 왠지 모를 외로움에 포근한 정이 그리울 때면 내 영혼의 삶터인 어머니의 품을 찾았다. 그곳은 언제나 내 그루터기였다.
요즘에 와서 어머니와의 추억을 자주 끄집어낸다. 점차 닮아가고 있음이리라. 어머니가 앉아 쉬시던 길가의 그루터기처럼 나 또한 내 아이들의 쉼터가 되었고, 아이들의 쉼터로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루터기>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숨탄것은 다 똑같다. 사람이 되었든, 나무가 되었든, 짐승이 되었든 굳이 가릴 바가 아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번성하였다가는 병들고 시들어 종내에는 모두 죽는다. 흔히들 생각할 때 목숨이 다하여 생을 마감하면 모두 끝이라고 속단하는데 그런 것만도 아닌 성싶다.
나무는 죽으면 고사목으로 남는다. 물론 어린나무가 죽으면 이내 그 존재가 소멸하고 자취마저 사라지지만, 고목은 그렇지 않다. 숨이 달아난 고사목이지만, 살아 있을 때의 명성으로 오랜 시간을 버텨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잔가지부터 하나씩 없어지고 나중에는 원목 부분만 견디다가 밑동 그루터기는 벌레의 침범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그마저 뽑히어 고주박으로 나뒹굴다가 존재마저 사라지고 만다. 힘든 삶이 마무리된다.
비록 목숨은 다하여 사라져도 그가 버티고 서 있던 곳은 인간의 뇌리에 아직 남아 있다. 흔들리지 않는 강고함으로 많은 사람의 의지할 곳이 된다. 그루터기에 앉으면 아직은 성성한 뿌리가 만져지고, 고사목의 체온처럼 수분이 손바닥으로 차갑게 전해 온다.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이곳에서 쉬어 가곤 했다. 즉, 그루터기는 어머니의 쉼터였다. 이젠 그루터기마저 베어지고 기댈 곳이 없어졌다. 앉아 쉴 곳을 잃은 새들은 어머니의 마음처럼 날아갔다. 내 기대던 어머니의 어깨 같던 그루터기. 나도 힘들 때면 어머니처럼 쉴 그루터기를 찾는다. 어머니가 안 계신 지금, 그 품이 그립다. 부모의 품은 어느 시기나 그루터기가 되어 자식들의 쉼터이길 소망한다.
<어머니의 달>에서도 자식의 어두운 길을 밝혀 주는 등대의 빛이길 희망한다. 그 빛으로 진구렁에 빠지지 않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는 모성. 그 모성의 따뜻함을 알기에 자식들은 보름달 아래서 서성인다.
이런 나목 같은 길목을 넘어온 그가 여기 잠들어 있다. 우리는 고교 3학년 때 만났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내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그는 나의 절친인 남편이 되어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아담한 키, 서글서글한 눈매, 순박한 모습은 누구나 다가가기에 편안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장남의 짐을 짊어지고 아래로 두 동생을 보살펴야 했지만, 긍정적인 성격은 모든 이들을 유쾌하게 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고, 비마저 간직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흘려보내는 욕심 없는 사십여 년 공직생활은 전형적인 서생의 모습으로 그를 서기관으로 임명했다. 치장하지 않은 수더분한 외모에 성실과 열정만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차분한 자기성찰로 친구들이 ‘장 그턱’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위선의 잎을 입고 사는 몇몇 친구들은 내세우지 않는 그의 자존감을 은근히 부러워했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있었고, 대화를 유창하게 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있었으며,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무리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말을 하게끔 만드는 사람이었다. 늘 곁에서 거목처럼 흔들림 없이 몸짓 하나하나에서 풍겨 나오는 여유와 아우라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났다.
정년하면 마음껏 날아다니며 살겠다며 새도 아닌데 산속에 갇혀 살았다. 은퇴 후 전원에서 아침저녁으로 텃밭 채소에 물을 주고 열매를 따면서 그 사랑을 택한 아내를 위해 세계 일주를 꿈꾸며 여유자금을 모아 두었다. -<나목>에서
가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는 부부 사이인 옆지기가 아닐까. 한 가정에서 남편의 존재는 언제나 소중하다. 하지만 수필가 김민정은 이미 혼자이기에 친구의 가정을 소환한다. 친구는 고교 3학년 때 만나 학창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과 결혼했다. 그 결혼은 긴 세월의 사귐 때문이라기보다는 신뢰와 믿음이 쌓였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친구 부부는 질병으로 사별한다. 그리움은 만남이 불가하기에 더 깊고, 절실하다. 같이 함께 할 때는 미처 소중함을 몰랐던 것까지도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냥 내 남편이었을 뿐이던 사람. 그의 자상함이 밀물져 온다. 언제나 아내를 아껴주던 생전의 모습이 날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욕심 없이 견딘 공직생활 40년. 수더분한 외모로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내는 힘의 소유자. 언제나 자기성찰을 하는 사람. 거목의 존재감으로 흔들림 없는 사람. 생각할수록 그의 존재감이 크고 믿음직하다.
벗길수록 더 신뢰가 가는 사람. 친구는 남편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가식의 의상을 다 물리쳐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부부를 지켜보면서 작가는 남편이란 존재를 <나목>에 얹어 긴 시간 간직하려 한다.
나에게도 떠나보내야 할 것을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단 하나 있다.
남편 대신 아이들에게 기대어 사는 나는 아이들이 결혼으로 내 곁을 떠날까 봐 벌써 걱정이 앞선다. 둘 아이 중 하나만이라도 곁에 두고 있어야 안심이 되고 안정될 것만 같은데 모두 떠나면 어떻게 혼자 살아가야 할지 그 무게가 벌써 전이되어 온다. 엄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아들은 결혼하더라도 엄마와 합가하여 살겠다고 한다. 엄마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합가는 서로가 불편할 것 같아 내가 반대하는 처지다. 생각 끝에 아들을 결혼시키게 되면 내가 사는 아파트의 옆 동에 집을 마련하여 언제든지 만나고 서로가 필요할 때 편한 차림으로 드나들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를 두고 친구는 그것은 집착이라며 일침을 놓았다.
“그런 생각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아! 자식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너의 마음에서 우선 자식을 떠나보내야 해, 자기들끼리 알아서 살아가도록 하고, 간섭과 관심도 적당히 끊도록 해야 해.” -<떨켜>에서
여름 동안 무성했던 이파리들은 가을을 맞아 변하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갑자기 줄어드는 수분을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 잎자루의 끝에 차단막을 설치한다. 그로 인해 이파리로 흐르던 수분이 줄기에 머물게 되어 나무는 생명을 움켜쥘 수 있다. 이 차단막을 우리는 ‘떨켜’라 한다. 항시 자유롭게 소통하던 통로를 급작스럽게 차단하는 떨켜. 이 엄연한 현실을 지켜보면서 수필가 김민정은 자식과의 차단을 깨닫는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작가는 그 외로움과 불안함을 자식들에 의존해 살고 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속에서 아이들이 결혼하면 어쩌나 불안해한다. 급기야 결혼시키면 둘 중 하나는 함께 살기는 어려워도 같은 아파트 단지의 이웃 동쯤에 살게 할 생각도 해 본다.
하루는 그런 생각에 젖어 있는 작가에게 친구는 집착하지 말라고 질책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식관에 변화의 철퇴를 가한다. 독립하도록, 자식의 행복을 위해 떼어내라는 충고다. 그동안 어머니의 마음이 흐르던 통로에 ‘떨켜’를 설치하여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라는 지적이다. 작가는 떨켜에서 자식 사랑의 지혜를 읽는다.
수필가 김민정에서 아주 가까운 사람은몇 분에 한정된다.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매진하는 가정의 풍속도를 보는 듯하다. 어려움이 닥쳐도 가족애로 극복하는 지혜가 있어 늘 건강한 웃음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다.
4. 소망하여 곁에 두고 기대고픈 인간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부대끼며 살게 되어있는 사회적 동물이다. 좋든 그렇지 않든 사람은 사람 속에서 먹고 숨 쉬고 배설하며 산다. 감염병 팬데믹으로 한동안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것을 꺼리고, 나름대로 참고 견디며 시간을 죽여왔다.
이런 관계로 기존의 가치관에 변화가 초래됐고, 심지어는 기존의 질서에 변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수필가 김민정은 어느 땐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측은지심이 일기도 한다. 사람과의 관계도 단순하고 그 범위도 그리 넓지 않다. 사람과의 교유를 살펴보면 작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인간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단순하면서도 그 안에서 추구하는 인간형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작가의 세계를 판독하는 데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필집 《내가 만난 세상》 전편에 흐르고 있는 강렬한 메시지는 수필가 김민정은 언제나 희망을 움켜쥐고 산다는 점이다. 꿈을 내려놓는 법이 없다. 항상 순리대로 차분히 진행할 뿐이다. 특별히 드러난 도전적 취향은 없어도 자신의 삶을 관리하며 너그럽게 진행한다. 이것은 수필가 김민정 자신이 매사에 긍정적 사고로 다가오는 삶의 역경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는 성장 과정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생 총량제의 법칙>에서 보면,
사람마다 평생에 걸쳐 경험하는 수량이나 무게가 정해져 있다는 총량의 법칙. 어릴 적 내 성격은 내성적이며, 혼자 있기 좋아하고 멘탈에 약했다.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 없었던 유년 시절은 그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교에서는 존재감마저 희미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성격이 급격하게 변했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생겼는지 남자친구들과 밤거리를 누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럼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 인생은 망가졌을까. 아니었다. 내 인생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요즈음 MBTI로 말하자면 ESFP(자유분방)에 해당했다. 그때 마음껏 지낸 시간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는 차츰 성격이 다시 ENTJ(목표지향적)로 변해갔다. 살아가면서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형성되는데 성격도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략>…이렇게 사람마다 일생 소비하는 희로애락의 양이 같다고 보면, 지금 잘나간다고 들떠 있을 필요도 없고, 초라하다고 기죽을 이유도 없다.
그리하여 좋을 때는 오히려 겸손해지고 힘겨울 땐 그것도 끝이 있다고 달래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불행의 구슬을 먼저 집었고 행복의 구슬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살면서 희망을 품었다. 이것들은 수치나 정량으로 매길 수 없는 다분히 주관적인 감정들이지만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는 위로와 위안이 되고, 방황이 지난 자리에 등장하는 나의 본래 모습을 찾아갔다. -<인생 총량제의 법칙>에서
‘인생 총량제의 법칙’을 철저히 신뢰하는 삶의 태도이다. 어찌 보면 자신의 삶을 운명이나 숙명으로 인식할 위험성이 있는데도 작가는 신기하게 그러질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신뢰가 긍정적 요소가 되어 작가의 삶을 지탱해 준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받아야 할 사랑의 부피가 똑같고, 신에게 부여받은 능력도 똑같다. 다만 그것을 채우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인생은 결정된다는 사고와 윗글은 너무도 흡사하다. 모든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능력은 똑같은데, 그것을 어느 사람은 좋은 일로 채우고, 또 어느 사람은 나쁜 일 하는 것으로 채운다는 식이다.
아주 어려서는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로 살았고, 사춘기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실컷 놀았는데 바뀐 건 하나도 없었다. 자유분방하던 생활이 성인이 되면서 목표지향적으로 그동안 채우지 않은 쪽으로 넘어왔다. 그로 인해 생각이 바뀌고 제대로 된 가치관도 형성되었다. 그의 긍정적 사고의 단면을 ‘이렇게 사람마다 일생 소비하는 희로애락의 양이 같다고 보면, 지금 잘나간다고 들떠 있을 필요도 없고, 초라하다고 기죽을 이유도 없다.’는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수필가 김민정은 좋을 때는 겸손을 찾고, 힘들 때는 곧 끝이 보인다고 믿고 자신을 달랜다고 했다. 지금 힘든 것은 불행의 구슬을 먼저 집었을 뿐이고, 남은 것은 행복의 구슬뿐이라며 희망을 품는다.
진주가 약한 여자의 눈물로 형상화되지만, 사실 진주를 만들어 내는 모체 조개가 건강하지 않으면 절대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없다. 평생을 끌어안고 고통을 승화시키는 일상을 견뎌낸 진주조개만이 진주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눈물겨운 아름다운 모성을 말해 준다. 이 세상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진주의 눈물’로서 가정을 이뤄내고, 세상을 환하게 밝혀 나가고 있다.
…<중략>…험한 세파를 견뎌내며 보석으로 탄생한 진주처럼 이 나이가 되어 순결, 사랑, 부귀가 느껴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 거울 앞에 서 볼 일이다. 생김새도 낱낱이 다르고, 겪어 온 세월도 다르겠지만, 자신이 살아온 삶의 왕관에 고귀한 진주로 장식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진주 목걸이>에서
눈물겨운 아름다운 모성을 그려주고 있다. 평생을 끌어안고 고통을 승화시키는 일상을 견뎌낸 진주조개만이 진주의 어미가 될 수 있다는 기술은 단연 돋보인다. 흔히 진주를 약한 여자의 눈물로 형상화하지만, 그것이 뭉쳐져 진주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같이 인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작가이기에 지금도 거울 앞에 서기를 원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진주처럼 순결, 사랑, 부귀가 느껴지는 사람인가를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진주로 장식된 왕관을 쓸 수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남편의 사후 정리를 하면서 오히려 몸은 바빠졌다. 상속에 대한 각종 서류와 씨름하며 달포를 정리하고 나니 그제야 현실의 무게가 엄습해왔다. 그러다가 무작정 떠났다. 전국을 떠돌다가 이곳 밧개해변에서 일몰을 보는 순간 온갖 잡색을 감춰버린 붉은빛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붉지만 타지 않고, 붉지만 뜨겁지 않은 빛깔, 그 빛깔은 천상과의 미친 사랑이자 생명의 색이었다. 이 붉은 노을을 매일 볼 수 있다면 이 고통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훗날, 그녀를 두고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잘 살았노라고 박수를 보낼 것이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도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세상앓이를 이렇게 이겨내며 온갖 잡색을 품고도 찬란하게 비추는 저 노을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는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바보 카페>에서
어찌 보면 ‘방황’은 자기 자신에 가장 충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같이 살던 옆지기가 떠난 자리. 허전하고 외로운 자리이다. 이 자리의 괴괴함을 몰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을까. 이 글에서는 다른 이의 홀로된 자리를 기술했지만, 작가의 공간이기도 하다. 여행으로 메우던 시절에 밧개해변의 일몰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것에서 위안을 받는다. 붉지만 타지 않고, 붉지만 뜨겁지 않은 빛깔, 그 빛깔은 천상과의 미친 사랑이자 생명의 색으로 다가온다. 일몰에서 위안을 받는 것은 작중 화자와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밧개해변에 공간을 마련하고 그 카페를 ‘바보 카페’라 칭한 것은, 어쩌면 ‘바보’의 의미가 자기 자신에 가장 충실해지는 ‘방황’과 같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음력 매월 초하루에는 지구와 달과 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인다. 이날은 달이 지구와 태양의 사이를 운행하면서 태양과 동시에 출몰하기 때문에 달빛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구에서는 달을 볼 수 없다.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달. 이러한 상태를 삭(朔)이라 한다.
사람 관계에서도 삭(朔)을 볼 때가 있다. 곁에 있어도 드러나지 않게 붙잡아 주는 그런 달 같은 사람이다. 늘 만날 수는 없지만 나를 끌어당기는 사람, 곁에 없지만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파수를 보내주고 있는 사람이다. -<삭(朔)>에서
그는 삭(朔)과 같은 사람이었다. 곁에 있어도 드러나지 않게 붙잡아주는 그런 달 같은 사람이었다. 나를 끌어당기는 사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파수를 보내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가진 사랑의 깊이를 말하고 싶다. 직원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깊이가 그랬다. 대표님의 기조력은 밀물과 썰물로 직원들의 주위를 공전했다. 그는 젊고 푸른 바다였다. 숲을 이룬 섬을 품기 위해 바다가 되어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달은 태양의 빛을 빌려 어둠을 밝히며 앞뒤를 구별하게 하고 바닷물을 밀물과 썰물로 만들어 그 시간과 양을 바꿔 놓는다. 밀물은 달이 위치한 곳으로 끌어당겨 그 힘을 작용한다. 그의 믿음은 밀물이 되어 모두에게 새 힘을 나게 했었다. -<모래성>에서
분명 존재하면서도 그 존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그것이 부정적 이미지라면 모르데, 언제나 숨어서 사회를 밝히는데 이바지하는 존재라면 다시 한번 찾아볼 일이다. 마치 태양과 지구의 사이에 끼어 있어 보이지 않아도 밀물과 썰물을 관장하는 달과 같은 존재.
우리 사회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 곁에 있어도 드러나지 않게 다른 이의 어려움을 붙잡아주는 달 같은 존재. 나를 끌어당기는 사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파수를 보내주고 있는 사람. 이 수필집에는 <삭(朔)>과 <모래성>에 그런 사람으로 K와 회사의 대표가 나온다. 두 사람의 이미지가 같아서 한 자리에 모셔 본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똑같다. 남편을 여의고 가장 절실했던 시절에 없는 듯이 나타나서 힘이 되어준 K나 밀물과 썰물로 직원들의 곁을 공전한 대표. 태양의 빛을 빌려 어둠을 밝히고, 늘 푸른 바다가 되어 주위 사람을 품어준 사람. 마치 삭(朔)과 같은 존재이다. 수필가 김민정은 남들 앞에 나서서 설치는 사람보다, 숨어서 조용히 세상을 밝혀 주는 존재에 더 의미를 두었다.
5. 나가기
이상에서 수필가 김민정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았다. 작가는 늘 성찰하는 삶을 꾸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세상의 빛깔을 관찰하고 사람들에게 보낼 메시지를 위해 분주하지 않은 날이 없다. 다만 그 몸짓이 요란하지 않을 뿐이다.
김민정 수필가의 눈빛도 언제나 깨어 있다. 그 눈빛이 자연 풍물에 닿아도 그 옆에는 작가가 있고, 사람들이 서성인다. 자연의 현상도 그냥 일별하는 게 아니고, 작가화에 선을 대고 노력한다. 작가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데 게으를 수 없다. 김민정 수필가 역시 분주히 움직였기에 이 수필집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김민정 수필가의 가족애는 남다르다. 그 사랑이 집약되었기에 여타의 사람에겐 시선을 주지 않는다.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준 어머니. 그분은 남아 있는 작가에게 커다란 삶의 지혜를 주신 분이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다. 언제나 자상하고 성실했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떠난 후에 더 절실해진다. 남편이 떠난 뒤 홀로 설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사랑이 언제나 옆에서 지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우면서도 자식은 독립을 위해 떼어내야 한다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수필가 김민정의 면모를 읽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 시각이 작가에게는 커다란 힘의 원천임을 알 수 있다.
수필가 김민정이 추구하는 인간형은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이다. 매사에서 이것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내하는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남들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조용히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삶에 손을 얻는 작가가 김민정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기에 다음에는 더 따뜻한 수필집이 나오려니 기대한다. 다음번 수필집에서는 그동안의 안온함에서 조금만 빠져나와 활기찬 소재 사냥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비전환적 표현이라는 수필의 특성에서도 자유로워 다양한 형식도 보여주길 주문한다면 결례일까. 이번 수필집 《내가 만난 세상》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나에게 맡겨진 임무를 접는다.
교수님 수필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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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민정수필집(내가 만난 세상)에 대하여 평론하신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