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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선집 - 시인이여詩人이여
▲시선집 [시인이여詩人이여]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시인이여詩人이여 - 시환詩丸
홍해리
말없이 살라는데 시는 써 무엇하리
흘러가는 구름이나 바라다볼 일
산속에 숨어 사는 곧은 선비야
때 되면 산천초목 시를 토하듯
금결 같은 은결 같은 옥 같은 시를
붓 꺾어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시 쓰는 일 부질없어 귀를 씻으면
바람소리 저 계곡에 시 읊는 소리
물소리 저 하늘에 시 읊는 소리
티 없이 살라는데 시 써서 무엇하리
이 가을엔 다 버리고 바람 따르자
이 저녁엔 물결 위에 마음 띄우자.
- 시집『난초밭 일궈 놓고』(1994)
설마설마
홍해리
눈처럼 흰 말
눈 속에 사는 말
눈 속을 달려가는 말
설마 그런 말이 있기나 하랴마는
눈처럼 흰 설마를 찾아
눈 속으로 나 홀로 헤맨다 한들
설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만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말 달려가는 요란한 소리만 들려올 뿐
한평생 허위허위 걸어온 길이라 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하니
말꾼 찾아 마량馬糧을 준비할 일인가
오늘 밤도 눈 쌓이는 소리
창 밖에 환한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해도
나를 비우고 지우면서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설마를 찾아 길 없는 밤길을 나서네.
- 시집『비밀』(2010)
밥
홍해리
밥은 금방 떠서 윤기 잘잘 흐를 때
푹푹 떠서 후후 불며 먹어야
밥맛 입맛 제대로 나는 법이지
전기밥솥으로 손쉽게 지어
며칠을 두고 먹는 지겨운 밥
색깔까지 변하고 맛도 떨어진
그건 밥이 아니다 밥이 아니야
네 귀 달린 무쇠솥에 햅쌀 씻어 안치고
오긋한 아구리에 소댕을 덮어
아궁이에 불 지펴 나무 때어 짓는
아아, 어머니의 손맛이여,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검은 솥뚜껑
불길 고르다 닳아빠진 부지깽이
후둑후둑 타는 청솔가리
설설 기는 볏짚이나 탁탁 튀는 보릿짚
참깻단, 콩깍지, 수숫대
풍구 바람으로 때던 왕겨 냄새 그리운 날
냉장고 뒤져 반찬 꺼내기도 귀찮아
밥 한 공기 달랑 퍼 놓고
김치로 때우는 점심 홀로 서글퍼
석 달 열흘 가도 배고프지 않을
눈앞에 자르르 어른거리는 이밥 한 그릇
모락모락 오르는 저녁 짓는 연기처럼
아아,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
그러나 세상은 그게 전부가 아닐세
시장이 반찬이라 하지 않던가
새들은 나무 열매 몇 알이면 그만이고
백수의 제왕도 배가 차면 욕심내지 않네
썩은 것도 가리지 않는 청소부
껄떡대는 하이에나도 당당하다
배고픈 자에겐 찬밥도 꿀맛이요
밥 한술 김치 한 쪽이면 임금님 밥상
그러니 지상은 늘 우리의 만찬장이 아닌가.
- 시집『황금감옥』(208)
가을 들녘에 서서
홍해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곳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리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시집『푸른 느낌표!』(2006)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홍해리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行과 행行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 시집『봄, 벼락치다』(2006)
무위無爲의 시詩
홍해리
너는
늘
가득 차 있어
네 앞에 서면
나는
비어 있을 뿐 ㅡ
너는 언제나 무위의 시
무위의 춤
무위의 노래
나의 언어로 쌓을 수 없는 성
한밤이면
너는 수묵빛
사색의 이마가 별처럼 빛나, 나는
초록빛 희망이라고
초록빛 사랑이라고
초록빛 슬픔이라고 쓴다
새벽이 오면
상처 속에서도 사랑은 푸르리니
자연이여
칠흑 속에 박힌 그리움이여
화성華星의 처녀궁에서 오는
무위의 소식
푸른 파도로 파도를 밀면서 오네.
- 시집『愛蘭』(1998)
투명한 슬픔
홍해리
봄이 오면 남에게 보이는 일도 간지럽다
여윈 몸의 은빛 추억으로 피우는 바람
그 속에 깨어 있는 눈물의 애처로움이여
은백양나무 껍질 같은 햇살의 누런 욕망
땅이 웃는다 어눌하게 하늘도 따라 웃는다
버들강아지 솜털 종소리로 흐르는 세월
남쪽으로 어깨를 돌리고 투명하게 빛난다
봄날은 스스로 드러내는 상처도 아름답다.
- 시집『투명한 슬픔』(1996)
난초밭 일궈놓고
홍해리
백운봉 바위 아래 한 뼘 땅을 갈아엎고
몇 그루 난을 세워 바람소리 일으키니
그 바람 북으로 울다 피리소리 토해내고
푸른 칼날 번쩍이며 달빛 모아 춤을 엮네.
- 시집『난초밭 일궈놓고』(1994)
은자의 북
홍해리
나의 詩는 북, 은자의 북이다
삶의 빛과 향으로 엮는
생명의 속삭임과
격랑으로 우는,
북한산 물소리에 눈을 씻고
새소리로 귀를 채워
바람소리, 흙냄새로 마음 울리는
나의 시는 북이다, 은자隱者의 북.
- 시집『은자의 북』(1992)
청별淸別
홍해리
창 밖에 동백꽃 빨갛게 피고
구진구진 젖고 있는 겨울비
꽃 속에서 젖은 여인이 걸어나오는
동짓달도 저무는 보길도 부둣가
오후 두 시에서 세 시 사이
차 한 잔 시켜 놓고 바다를 본다
고산이 어부사시사를 낚던 바다
빗사이로 보이는 겨울바다
빗방울 하나에도 바다는 깨어지고
동백나무 아래서 작별하는 연인들
어떻게 헤어짐이 청별일까
예송리행 보길여객 미니버스
낮은 목소리로 경적을 토해내고
청별을 연습하는 나그네도
비와 함께 젖고 있는 겨울바다.
- 시집『淸別』(1989)
난꽃이 피면
홍해리
1
아무도 가지 않은 눈 위를
가고 있는 사람
모든 길이 눈 속으로 사라지고
길이 없는 이승을
홀로서 가는
쓸쓸한,
쓸쓸한 등이 보인다.
2
진초록 보석으로 날개를 달고
눈을 감고 눈을 뜬다
만 가지 시름이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가장 지순한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장산 비자림 딸깍다릴 지날 때에도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어 있었거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투명한 이른 봄날 이른 아침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女人의 中心
실한 무게의 男根이 하늘에 걸려 있다.
- 시집『대추꽃 초록빛』(1987)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홍해리
갈비뼈 하나이던 너
이젠 나를 가득 채우고 압도하여
무명無明인 내가 나를 맞아 싸운다
불타는 뼈의 소리들이
이명으로 잉잉잉 울려오고
천으로 만으로 일어서고 있다
눈에 와 박히는 세상의 모든 물상이
허공중에 둥둥 떠오르고
꽃이 피는 괴로움 앞에 서서
영혼의 그림자를 지켜보면
투명한 유리잔의 독한 액체와
사기그릇의 신선한 야채도
아린 가슴의 한 켠을 채워주지 못한다
밤 깊도록 머리맡에 서성이는
바람소리 빗소리 천둥과 번개
시간이여 절대자인 그대 영원이여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아름답게
아픈 것은 영원히 아프게 아프게.
- 시집『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1980)
우리들의 말
홍해리
거리를 가다 무심코 눈을 뜨면
문득 눈 앞을 가로막는 산이 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에까지
검은 바람의 보이지 않는 손이
부끄러운 알몸의 시대
그 어둠을 가리우지 못하면서도
그 밝음을 비추이지 못하면서도
거지중천에서 날아오고 있다
한밤을 진땀으로 닦으며 새는
무력한 꿈의 오한과 패배
어깨에 무거운 죄없는 죄의 무게
깨어 있어도 죽음의 평화와 폭력의 설움
눈뜨고 있어도 우리의 잠은 압박한다
물에 뜨고 바람이 불리우고
어둠에 묻히고 칼에 잘리는
나의 시대를
우리의 친화를
나의 외로움
우리의 무예함
한 치 앞 안개에도 가려지는 불빛
다 뚫고 달려갈 풀밭이 있다면
그 가슴속 그 아픔 속에서
첫사랑 같은 우리의 불길을
하늘 높이 올리며 살리라 한다.
- 시집『우리들의 말』(1977)
무교동武橋洞 1
홍해리
빛나는 물, 빛인 물, 너 물이여
별인 물, 달인 물, 바람인 물, 불인 물,
무의미의 물이여
아득한 심장에 타는 불의
찬란한 불꽃이 잠들 때까지.
안개 속에서 누가 신방을 차리고
하염없음과 입맞추고 있다
바다에 익사한 30대 사내들
일어서는 손마다 별이 떨어지고
달이 깨어지고 있다
킬킬킬 무심한 저 달빛이
귀에 와 죽은 소리로 울며
바람이 되고
불이 되어 타고 있다.
십 년도 천 년도 네게는 꽃잎이어니
아픔과 잊음이 문을 열고
죽음까지도 황홀한 빛으로 빛나느니.
토요일밤과 북소리와 오류와 망각이여
그대들은 언제나 빈객이다
깊디 깊은 늪가의 수목들은 쓰러지고
뿌리마다 뿌리채 뽑히우고 있다.
물과 불의 영원한 친화를 위하여
밝음과 어둠의 평화를 위하여
모래 속을 헤매어 온 너의 의미가
오늘 밤은 꿈을 꾸리라 꿈꾸는 꿈을
빨갛게 익은 사과 두 알이 빠개지는 꿈을.
빛나는 물, 빛인 물, 무의미의 물인 너
아득한 심장에 혼자서 타는 불의
찬란한 불꽃이 죽을 때까지.
- 시집『무교동武橋洞』(1976)
갯벌
홍해리
노을이 타는
바닷속으로
소를 몰고
줄지어 들어가는
저녁녘의
여인들
노을빛이 살에 오른
바닷여인들
- 시집『화사기花史記』(1980)
헌화가獻花歌
홍해리
그대는 어디서
오셨나요.
그윽히 바윗가에 피어 있는 꽃
봄 먹어 짙붉게 타오르는
춘삼월 두견새 뒷산에 울어
그대는 나리에 발 담그고
먼 하늘만 바라다 보셨나요
바위병풍 둘러 친
천 길 바닷가 철쭉꽃
바닷속에 흔들리는 걸
그대는 하늘만 바라다보고
볼 붉혀 그윽히 웃으셨나요
꽃 꺾어 받자온 하이얀 손
떨려 옴은 당신의 한 말씀 탓
그대는 진분홍 가슴만 열고.
- 시집『투망도投網圖』(1969)
시로 쓴 시론
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
洪 海 里
나에게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시에 대하여,
시인에 대해 내가 나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꽃을 들여다보니 내가 자꾸 꽃에게 길들여지고 있다
꽃을 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아름답고 감미로운 꽃의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껍질뿐
껍질 속에 누가 청올치로 꼭꼭 묶어 놓은 보물이 들어 있는가
텅 빈 멀떠구니 하나 아직도 배가 고파
몸 속에 매달려 껄떡이고 있다
자연을 잊고, 잃었기 때문이다
욕심의 허물을 벗어 허물이 없는 詩, 너를 기다리는 마음이 늘 그렇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너무나 많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몰입하는 것이다
마중물 같은 시, 조촐하고 깨끗한 시 한 편을 만나고 싶어
뚱딴지 같이 천리 길도 머다 않고 햇살처럼 달려 나가지만
나는 늘 마중만 나가고 너는 언제나 배웅만 하고 있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해 흘리고 있는 눈물 속에
시가 별것 아니라고 너와 별거를 할 수가 있는가
사람 사는 일이란 길을 트고 길이 들고 길을 나는 것이 아닌가
푸르게 치닫는 치정의 산하로
강 건너 웃는 소리 들리지 않고 산 너머 우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어찌 우리가 하늘까지 닿을 수 있겠는가
마디게 더디더디 익어가는 시도 언젠가는 향기롭게 익으리니
나무가 본능으로 햇빛을 향해 몸을 뒤틀 듯
그리 해야 시가 다가오지 않겠는가.
호박꽃 속에서는 바람도 금빛으로 놀고 있다
호박벌 한 마리 황궁 속에 들어가면
금방 황금도포를 걸치고 활개 치는 금풍金風이 요란하다
둥근 침실로 내려가 신부를 맞이하면 어찌 세상이 환하지 않으랴
금세 젖을 물고 있는 아기가 보인다
푸른 치마를 걸친 시녀들이 줄줄이 부채 들고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하인들은 더듬이손으로 도르르 감고는 놓으려 들지 않는다
사랑이란 기갈나고 감질나는 것이 아니던가
줄줄이 태어나는 왕자와 공주들
이제 천지 사방으로 벋어 나가면 온 세상이 금빛 바람 부는 영토가 되리라
시도 이렇게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으랴.
시여, 너를 꿈꾸다 깬 몽롱한 새벽 나 혼자 아득하다
머리맡의 파돗소리 잠들고 백사장은 텅 비어 있다
꿈이란 내가 꾸는 것이어서 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는 잊어버리기 일쑤지
일수를 빌려 얼마를 갚고 남은 것이 몇 푼인가
도무지 기억이 아물아물 아련하다
꾼다는 것은 잠시 빌려쓰는 것이라서 갚기는 갚아야 하는데
한여름 저녁나절 자귀나무꽃 아래서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자귀나무는 내 꿈속에서 무엇을 꾸려는지 분홍빛 주머니를 흔들고 있다
자귀나무 꽃이 지고 나면 내 시도 콩꼬투리 같은 열매가 맺힐 것인가
꿈이 컸으니 바람만 불어 꿈같은 세월이 아득하게 지고 있다.
천둥은 왜 치는가, 천둥은 언제 우는가
울어야 할 때 천둥은 운다, 천 번을 참고 참았다가 친다
피터지게 울고 통곡한다
아무때나 함부로 우는 것은 천둥이 아니다
번개는 왜 치는가, 번개는 똥개처럼 울지 않는다
옆집 개가 하늘 보고 컹컹 짖을 때 똥개는 따라 짖는다
안개도 울고 는개도 운다, 소리없이 운다
번개는 번득이는 촌철살인의 이론이 있어야 한다
유월이라고 느긋하게 놀면서 보내려 했더니 흐르는 듯 수유인 듯 가고 만다
미끈유월이라고 시를 만나지 않고 미끈미끈 보낼 수는 없다
내가 쓴 시에서도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는가 돌아볼 일이다.
혼자 아닌 것이 없다고 함부로 노래하는가, 시인이여
혼자가 아닌 것이 어디 있던가
어느 시인은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No man is an island!)라고 했지
세상에, 세상에 행行이 무엇이고 연聯이 무엇이란 말인가
행간行間에는 무엇이 있는가, 연간聯間에는 또 무엇이 존재하는가
반평생 너와 살아도 어려운 것은 행간을 읽는 일
연간을 읽는 일이 아니던가
갈 곳이 멀다고 모든 것을 읽고 말면 혼자는 무엇이 될 것인가
혼魂이 자는 자者 행간에 홀로 누워 코나 골고 있을까
나는 혼자인가 혼자가 아닌가
오늘도 욕심 없고 허물 없는 시 속으로 몸 던져 자폭하고 싶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사랑타령인가
네 개의 사랑 가운데 마지막 사랑이 손을 놓았다
하룻밤 잠 못 자고 울음을 토하다 시원히 손 흔들며 보내 주었다
잘 가거라 마지막 사랑이여
이제는 사랑 없이 살아야 하는 남은 삶을 어이 할 것인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 수 있는가
아무 쓸모 없는 사랑이라면 일찍 버리는 것이 좋다.
'이'가 사랑을 만나면 '사랑니'가 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지만
사랑도 사랑 나름이어서 쓸데없는 사랑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시에서도 필요 없는 사랑은 사랑니처럼 뽑아버려야 한다.
입추가 되어 혼인비행을 하고 있는
한 쌍의 가벼운 고추잠자리를 보라
하늘이 제 잠자리라고 그냥 창공을 안아버린다
축하한다고 풀벌레들 목청을 뽑고
나무들마다 진양조 춤사위를 엮을 때
한금줍는 고추잠자리는 추억처럼 하늘에 뜬다
내가 쓰는 한 편의 시도
눈과 머리와 몸통과 꼬리와 날개를 가지고
고추잠자리처럼 푸른 하늘에 자유로이 날 수 있을까.
허리띠를 졸라맬 때마다 수도꼭지를 틀곤 했던 시절
주린 배를 물로 채우고 올려다본 하늘은
늘 푸르고 높아 먼 그리움처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아무리 물 쓰듯 한다지만 수도꼭지는 잠가야 한다
물처럼 쓰고 싶은 시도 꼭지를 잠그고 기다릴 때가 있다
대한大寒도 무섭지만 대한大旱 앞에 견딜 장사가 있는가
물은 생명이다! 라는 구호가 그냥 구호口號가 아니라
구호救護가 되어야 한다
물보다 여리고 욕심 없고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시도 그렇다.
바위는 제자리서 천년을 간다
제 몸뚱어리를 갈고간 조각들이 버력이 되고 모래가 되어
다시 천년을 흙으로 간다
그렇게 간 거리가 한자리일 뿐, 그래도 바위는 울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오고 강물이 흘러가고 번개 치고 천둥 운들 대수랴
바위는 조촐하고 깨끗한 제자리를 하늘처럼 지킨다
바위 같은 시 한 편을 위해 시인은 바위가 되어 볼 일이다
폐허에, 향기로운 흉터에 또 상처를 남기기 위해
가슴속에 자유라는 섬 하나 품고 살거라
너도 상처를 입어 봐야 올곧은 자세로 시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바람은 다리속곳 바람으로 대고 꿈꾸며 불고
물위를 탐방탐방 뛰어가는 돌처럼 우주의 자궁에서 아기별이 탄생하고 있다
웃음이 그칠 때까지, 눈물이 마를 때까지
바람 바람 울어라, 바람 바람 불어라
시도 그렇게 태어나기 마련이다.
시는 자연이 보내는 연애편지, 시가 맛이 가면 사랑은 떠난다
시가 상하고 시는 날에는 사람들이 식상하는 법이다
갓 시집온 새색시 시장바구니에서 싱싱한 참붕어를 꺼내 놓고
그냥 두면 쓰레기 될 퍼런 무청을 말린 시래기에 파 마늘 생강 콩나물 무 감자
인삼 양파 깻잎 쑥갓 밤 대추 기름 고춧가루 사골육수 청주까지
듬뿍듬뿍 넣고 찜을 만들어 새신랑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상 차려 덮어놓고 맛있는 술도 한 병 준비한 다음……,
시는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생선회도 숙성을 해야 맛이 더하듯 시도 잘 숙성을 시켜야 한다.
자리끼가 놓이던 자리에 백지 한 장 펼쳐 놓고
밤새도록 잠 속에서, 꿈속에서 싸우고 있다
그물과 작살을 바다에 던지고 흐르는 물에 낚시를 드리운다
허공에 그물 치고, 앞산 뒷산에 덫과 올무도 설치한다
고래는 못 잡아도 노루 토끼 고라니 멧돼지는 잡아야지
풀씨나 나무열매라도 털고, 멧비둘기 꿩 메추라기라도 잡아야지
버들치 갈겨니 쉬리 동자개 참마자 치리라도 잡고 싶은 밤은 어이 빨리 지새는가
꿈을 깨고 나면 열심히 암송했던 명시(?) 한 편이 간 곳이 없다
詩앗이나 詩알은 때를 놓치지 말고 그때 그때 잡아야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면서 가래 두 알을 달그락달그락 굴리다 보면
살불이 일어 손바닥에 별이 뜬다
시의 별이 가슴에 와 안긴다
무쇠솥 걸어 놓은 아궁이에 발갛게 타는 참나무 장작불
겨울 하늘까지 탁 탁 튀어오르는 불알, 불의 알처럼 영혼이 뜨겁다
시도 푸른 불알처럼 우리 가슴속에서 불타올라야 한다
하늘에 뜬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야 한다.
높이가 없으면 산이 아니고 깊이가 없으면 바다가 아니다
넓이가 없으면 하늘이나 들이 되지 못한다
한 편의 시도 높이와 깊이, 넓이가 있어야 한다
오늘도 새벽 세 시 한 대접의 냉수로 주린 영혼을 씻고 몸과 마음에 촛불을 밝힌다
시는 내 영혼이 피워내는 향기로운 꽃이요, 그 꽃이 맺는 머드러기이다
시는 아무리 마셔도 물리지 않는 물이요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밥이다
보이지 않는 공기와 물과 밥이 만들어내는 한 방울의 뜨거운 피와 뼈다
시는 내 집이요 길이요 빛이요 꿈이다
우리의 영토에 드리우는 시원하고 환한 솔개그늘이다.
이름 없는 풀이나 꽃은 없다, 나무나 새도 그렇다
이름 없는 잡초, 이름 없는 새라고 시인이 말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모든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다
이름없는 시인이란 말이 있다
시인은 이름으로 말해선 안 된다 다만 시로 말해야 한다
이름이나 얻으려고 장바닥의 주린 개처럼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기웃대지는 말 일이다
그래서 천박舛駁하거나 천박淺薄한 유명시인이 되면 무얼 하겠는가
속물시인,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꺼귀꺼귀하는 속물이 되지 말 일이다
가슴에 산을 담고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스럽게 사는 시인
자연을 즐기며 벗바리 삼아 올곧게 사는 시인
욕심없이 허물없이 멋을 누리는 정신이 느티나무 같은 시인
유명한 시인보다는 혼이 살아 있는 시인, 만나면 반가운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될 일이다.
如是我聞!
시인의 말
내 시는 모두가 자연에게서 무이자로 빌려온 것들이다. 한 포기 풀만도 못하고 한 송이 꽃만도 못한 것들뿐이라서 늘 자연에게 부끄럽기 그지없다.
1969년 낸 첫 시집『투망도投網圖』로부터 2010년에 펴낸『비밀』에 이르기까지의 15권에서 83편의 작품을 내 시선으로 골라 이번 시선을 엮는다.
20세기에 낸 11권의 시집에서는 각각 5편씩, 21세기 들어서 펴낸 4권의 작품집에서는 각각 7편씩을 추려 올렸다.
시선 뒤에 올린「난정기蘭丁記」를 써 주신 임보 시인과 洪海里論인「해래海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찾아서」를 써 주신 신현락 시인께 고마운 마음을 여기 적어 남긴다.
2012년 신록이 짙은 세란헌에서.
洪海里 적음.
.♣.
=============== == = == ===============
[ 시인론 ] -
난정기蘭丁記
임 보
세이천洗耳泉 오르는 솔밭 고개
바다만큼 바다만큼 난초蘭草밭 피워 놓고
한란寒蘭, 춘란春蘭, 소심素心, 보세報歲
흐르는 가지마다 그넷줄 얽어
구름을 박차고 하늘을 날다
빈 가슴에 시가 익으면
열 서넛 동자놈 오줌을 싸듯
세상에다 버럭버럭 시를 갈긴다.
졸 시집『은수달 사냥』(1988)에 수록되어 있는「난초 書房 海里」라는 글인데 난정에 대한 인상을 8행의 짧은 시 속에 담아 본 것이다. 그가 난에 심취한 것은 세상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때는 남도의 산하를 매 주말 누비며 채취해 온 기천 분의 춘란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집보다 넓은 온실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蘭丁’이라고 칭호한 것이다. 그러니 난정이 난을 즐긴다는 것은 특별한 정보랄 것도 없다. 이 글의 핵심은 마지막 두 행에 있다.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듯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시를 쏟아내는 그의 열정을 찬미한 것이다. 그의 시는 늘 활기에 차 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음을 잃지 않고 싱싱하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 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 홍해리「봄, 벼락치다」
난정의 시집『봄, 벼락치다』(2006)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봄의 경이를 낭떠러지와 벼락이라는 역설적인 두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적인 급격한 변이를 ‘천길 낭떠러지’로, 봄이 화자의 심리에 던지는 충격을 ‘벼락’으로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벼락은 화자를 혼절케 하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을 환하게 밝히는 광명[昭昭明明]이다. 두 이미지를 작품의 전후에 배치하여 사진의 액자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도 흥미롭다.
속도감 있게 번지고 있는 북한산 자락의 진달래꽃들을 타오르는 불, 유격대(파르티잔)의 격전, 창궐하는 역병 등 역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싱그럽게 잎을 피우는 나무는 푸른 불꽃으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인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향불 같다. 한겨울 감추었던 종아리 드러내고 거리로 나온 여성들 다 춘향이처럼 곱다. 벌이며 나비 같은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몸치장하고 짝을 찾는구나. 이 밝은 봄날 그냥 보내지 말라고, 내 속에서도 나를 일깨우는 소리 은은하다.
제4연은 좀 난해한 면이 없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 더듬어 읽어 보면 이런 뜻이 아닌가 짐작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일체가 한 집안 식구와 같다. 그러므로 서로 분별할 일이 아닌데 새의 날개나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처럼 내 마음속에도 잔잔한 파동이 일어난다. 속된 욕망을 잘라내고자 하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이 고뇌, 이 봄에도 북한산의 봄과 더불어 내가 앓는다. ‘화병’의 ‘화’는 火와 花의 중의(重義)를 지닌 시어로 보아 무방하리라.
이처럼 난정의 시는 활력이 넘쳐난다.
이 글을 쓰면서 살펴보건대 난정과 나는 여러 모로 상반된 취향과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난정이 살아 있는 난을 좋아하고 있을 때 나는 생명이 없는 돌[水石]에 빠져 있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해서 많은 생명들을 보살필 수 있었던 반면, 나는 게을러서 처음부터 부담 없는 돌에 기울었던 것 같다. 그는 열정적인 낭만파라면 나는 이지적인 고전파에 가깝다. 그는 내가 못 가진 적극성과 과단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지녔다. 아마도 그가 지닌 이러한 성품이 <우이동 시인들>에 이어『우리詩』를 수십 년 동안 이끌어 왔으리라.
나와 난정이 북한산 밑자락 우이동 골짝(행정구역상 난정은 우이동 나는 쌍문동이지만 지호지간의 거리다.)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970년도 후반 무렵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유를 하게 된 것은 지연地緣이 아닌 인연人緣 때문이었다.
내 맏딸인 우원진이 성신여중 2학년 때 그 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난정을 좋아해서 내 처녀시집『임보의 시들 <59-74>』를 보낸 바 있다. 이로 하여 우원진의 애비가 임보라는 사실을 난정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가 아마 1978쯤으로 기억된다. 이를 계기로 서로를 알게 되었으니 우리의 교유는 30년이 넘은 셈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지를 함께 하면서부터이다.
1986년 가을부터 우이동 인근에 사는 몇 시인들- 홍해리 채희문 신갑선 이생진 등이 자주 만나서 술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의기투합하여 사화집을 만들어 보자는 데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이 탄생하게 되고 이듬해인 1987년 봄에 사화집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그러면서 동인지 출간 기념으로 시낭송을 덕성여대 입구에 자리한 <파인웨이>이라는 카페에서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이동시낭송회(지금의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의 효시가 된다.
우이동 시인들의 사화집은 매년 2회씩 봄가을에 간행되었다. 1999년 ‘우이시회’에 통합되기까지 총 25집을 만들어 냈다. 신갑선 시인은 제6집까지만 참여하고 떠났기 때문에 제7집부터서는 동인들이 네 사람이었다.
우리는 한 동네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틈만 나면 만났다. 꽃이 피면 꽃 핑계로 단풍이 들면 단풍 핑계로, 세이천에서 혹은 소귀천에서, 솔밭에서 혹은 진달래 능선에서 술병을 지고 돌아다녔다.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아서 우이동 한 건물의 옥탑을 빌어 사랑방 ‘시수헌詩壽軒’을 만들어 놓고 북을 울리기도 하고, 삼각산 자락에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로 ‘우이도원牛耳桃源’을 일궈 놓고 흥청거리며 지냈다.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철엔 시화제詩花祭를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에는 단풍시제丹楓詩祭를 천지신명께 올리며 시와 풍악의 잔치를 벌이는 곳도 바로 이 우이도원이다.
우리 네 사람은 매 사화집에 합작시를 만들어 실었다. 하나의 시제를 놓고 한 사람이 첫 연을 시작하면 그것을 보고 다음 사람이 둘째 연을 쓰고 또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쓰는 공동 연작의 형식이다. 다음의 글은 제24집 『아름다운 동행』에 수록된 합작시 「우이동 시인들」이란 제목의 상호 인물평이다. 채희문, 홍해리, 임보, 이생진 순으로 썼다.
홍해리는 애란가愛蘭歌를 부르며 불도저를 모는 ‘난정법사蘭丁法師’
임보는 구름 위에 앉아 마술부채로 시를 빚는 ‘시도사詩道士’
이생진은 섬을 돌며 시를 섬으로 캐는 ‘시詩심마니’
채희문은 버스 끊어진 정거장의 썰렁한 ‘에뜨랑제’
임보 시인은 일경구화一莖九華다, 백운대 청상한 바람으로 향을 날리는.
이생진 시인은 제주한란濟州寒蘭이다, 성산포 청정한 석간수로 꽃을 올리는.
채희문 시인은 중국보세中國報歲다, 인수봉 삽상한 침묵으로 꽃을 피우는.
홍해리는 춘란소심春蘭素心이다, 우이동 옥진의 소주로 향을 씻고 있는.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성산포城山浦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蔡熙汶은 포천抱川의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청원淸原의 들소
나 임보林步는 화산華山의 하찮은 염소
‘산다는 것은 기다리는 거’ 누가 올 것 같아 문을 닫지 못하는 희문喜門
‘애란愛蘭은 혼의 전령’ 시의 생리生理, 시의 열양熱襄, 시의 정자亭子, 시의 해리海里
‘시인은 북이다. 쓰고 싶은 놈 다 써라’ 소리치며 숲 속으로 걸어가는 임보林步
‘갈매기와 나는 한배에서 태어났으니까’ 끼룩끼룩 바다로 떠나는 생진生珍
서로를 공히 부추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보이고 있다. 나는 내가 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더 줄여 「네 마리의 소」라는 제목으로 사단시집 『운주천불』(2000)에 실었다.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蔡熙汶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우이동 시인들 네 사람을 우직한 소에 비유해서 읊은 것인데 이 작품의 말미엔 다음과 같은 짧은 해설이 달려 있다.
* 우이동 사인방四人幇의 인물시다. 고불은 섬에 미처 늘 물을 떠나지 못한 것이 마치 물소와 같다. 포우는 이중섭의 그림 속에 나온 황소처럼 강렬해 보이지만 사실 양순하고,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 나 임보는 굳이 소라고 친다면 보잘것없는 염소라고나 할까. 이분들의 아호는 내가 붙인 것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지낸 네 사람의 풍류를 나는「시수헌詩壽軒」이라는 글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한시로 읊었다.
詩茶酒鼓 佛牛蘭華* 不聽騷音 不問世情 牛耳好日 勝於仙境
(시에, 차에, 술에, 북에/ 시수헌의 네 사람/
세상 소리에 귀 닫고/ 세상 물정에 입 다문/
소귀골의 좋은 나날/ 신선 세상 뺨칠레라!)
* 佛은 古佛 이생진, 牛는 抱牛 채희문, 蘭은 蘭丁 홍해리, 華는 華山 임보인데 이를 붙이면 佛牛와 蘭華가 되는 것이 흥미롭다.
시화집을 간행하고, 사랑방 시수헌을 만들고, 우이도원을 일구며 시제를 올리는 등 이러한 일을 꾸미고 주도한 사람이 난정이다. 그에겐 들소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다.
또한 그의 성미는 곧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초심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킨다. 그가 한번 좋아한 사람은 평생 변함없이 좋아하고 그의 눈에 한번 거슬린 사람은 회복하기 힘들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이런 성미는 글을 쓰는 데도 작용한다. 그는 산문을 쓰려 하지 않는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고 산문에 기웃거리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세란헌洗蘭軒」이라 제한 난정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하늘이 씻은 너를 내 다시 씻노니
내 몸에 끼는 덧없는 세월의 티끌
부질없이 헛되고 헛된 일이 어리석구나
동향마루 바람이 언뜻 눈썹에 차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우이동에서 난을 기르고 있는 달팽이집만한 마루’라고 주를 달았다. <세란헌>은 난정의 당호다. 난은 원래 정결한 식물이다. 그런데도 만족치 못하고 그 난을 더 정결히 하려고 씻는 집이란 뜻이다. 이 작품에서의 난은 난정 자신의 상징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염결 지향의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난정은 담배를 아주 싫어한다. 그 주변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간 핀잔을 듣기 마련이다. 많은 애연가들을 금연토록 만든 금연전도사다. 평교사인 그가 학교의 교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장실의 재떨이까지 추방한 일화는 유명하다. 잡기雜技도 그는 싫어한다. 화투는 말할 것도 없고 바둑 장기 당구 같은 오락을 일절 가까이 하지 않는다.
문학단체에서 거들먹거리는 소위 문단정치인이라든지, 조잡한 문예지를 만들어 수준미달의 신인들을 양산하는 문단 장사치들을 그는 혐오한다. 감투나 수상을 넘보지 않으며 아첨과 아부를 싫어한다. 다만 그가 좋아하는 것이 시 이외에 하나 더 있다. 술이다. 아마도 마음에 맞는 사람들의 술자리면 종일 마셔도 사양치 않으리라. 수년 전 난정과 나는 거금도 앞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종일 마셔대며 주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Guenter Eich, 1907~1952)는 자랑했다
사론스키에 내 시를 읽는 독자가 한 사람
바트나우하임에도 또 한 사람 있음을 안다
그러면 벌써 두 명 아닌가!
춘추시대의 악인樂人 백아伯牙는
그의 소리를 아는 유일한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나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귄터는 둘
백아는 하나
오늘 내 소리를 듣는 이는 몇인가?
내가 알기로는 아직
하나도 없다
졸시「지음知音」이다. 한평생 자신을 알아 줄 지기를 얻기가 힘들다. 나는 하나도 없다고 한탄했는데, 그래도 혹 내 소리를 들어 줄 ‘지음知音’이 한 사람쯤 내 가까이에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이동 사인방 가운데서 고불古佛은 방학동으로 포우抱牛는 의정부로 편리한 아파트를 찾아 일찌감치 떠나갔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우이동 골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버티고 있다. 난정이 아직도 세란헌에 머물며 내 소리를 들어 주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두 집의 내외는 매년 4월 25일 전후쯤 자리를 함께 해 서로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또한 자축하는 자리를 갖는다. 나의 기념일을 24일, 난정은 26일이기 때문이다.
[ 시인론 ] -
해리海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찾아서 - 洪海里論
신현락(시인)
이름 없는 풀이나 꽃은 없다, 나무나 새도 그렇다
이름 없는 잡초, 이름 없는 새라고 시인이 말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모든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다
이름없는 시인이란 말이 있다
시인은 이름으로 말해선 안 된다
시로써, 다만 시로 말해야 한다
이름이나 얻으려고 주린 개처럼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기웃대지는 말 일이다
그래서 천박舛駁하거나 천박淺薄한 유명시인이 되면 무얼 하겠는가
속물시인,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꺼귀꺼귀하는 속물이 되지 말 일이다
가슴에 산을 담고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스럽게 사는 시인
자연을 즐기며 벗바리 삼아 올곧게 사는 시인
욕심없이 허물없이 멋을 누리는 정신이 느티나무 같은 시인
유명한 시인보다는 혼이 살아 있는 시인
반가운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될 일이다.
-「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의 일부
1
설날 며칠 후, 밤에 손전화의 신호가 울리어 발신자를 보니 홍해리 선생이었다. 선생을 알게 된 지 10년이 가까웠지만 늦은 밤에 전화가 온 경우는 처음이어서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으니 이미 꽤 거나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부 따위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하는 말이 “시인특집 같은 것은 왜 하느냐?”며 “알잖아. 신 시인, 나는 그딴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 쓰지 말아” 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선생은 마음에 없는 수사만으로 가득한 평론 같은 것을 거들떠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에 대한 정당한 평가까지 마다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라. 선생은 자신의 시뿐만 아니라 시에 관한 평론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있다. 선생이 자신의 시에 대한 평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선생이 늦은 밤 그런 전화를 한 것은 다른 까닭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2006년도에 오랜만에 나온 선생의 시집인『봄, 벼락치다』에 대한 서평을 시작으로 그해에 다섯 편 정도의 평론을 쓰고는 그만 싫증이 나서 한동안 은둔 아닌 은둔을 했었는데 나의 사정을 헤아려서 그러한 전화를 한 것이다.
선생은 거의 산문을 쓰지 않는다. 산문을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마치 황순원 선생이 소설을 위해 수필을 쓰지 않는 것과 같이 시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선생의 지론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선생은 시론도 산문이 아닌 시로 말하고 있는데 그중에「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와「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를 위하여」는 천하의 명문이다. 시에 대하여 여러 말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선생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니 세상살이란 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되겠는가.
내가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 때는 우이시낭송회에 참석했던 2002년 봄이다. 그 무렵 나는 그동안 관계하던 모든 것들과의 인연을 끊고 시골에서 낚시로 허송세월 하고 있었다. 문학도 인생도 다 시들해지던 시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활에 대한 회의감도 없지 않았던 까닭으로 낭송회에 한 번 참석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대의 시인의 제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참석하였던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기억은 신체적인 감각과 결부되었을 때 오래가는데 처음 선생과 악수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른 체구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손이 얼얼할 정도로 선생의 손아귀의 힘이 대단하였다. 얼마 전『우리詩』편집장으로부터「홍해리 시인론」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그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낭송회에 참석한 후 나는《牛耳詩》편집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월 낭송할 원고를 모아서 분류하고 워드로 편집하는 일을 약 1년간 하게 되어 선생과 자주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문단의 생리에 적응을 못하여 변방에서 헤매고 있었던 나는 그 일을 계기로 하여 선생의 시에 대한 열정과 사심 없이 일을 하는 인간적인 고결함에 반하여서 지금까지 우리시회에 몸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2
선생의 시와 인생에 대하여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글은 그의 오랜 지기인 이무원 시인이 쓴 「식물성 말 없는 시인」이다.
그는 순식물성이다. 풀로 말하면 난이요, 나무로 말하면 매화다. 술로 말하면 소주요, 밥으로 말하면 꽁보리밥이거나 순 쌀밥이지 팥이나 콩이 섞인 잡곡밥은 아니다. 그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욕되게 하는 법이 없고, 그는 시를 생명처럼 사랑하지만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기 때문에 좋고도 싫다든가 싫지만 좋다는 어정쩡한 중간 개념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는 직설적으로 짧게 말함으로써 더욱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다. 두루뭉술 굴러가야 살기 편한 세상에 그는 낙락장송이듯 초연하다.
난과 매화는 선생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난을 좋아하는 선생을 보고 임보 선생께서 호를 난정蘭丁으로 지어주셨을 정도로 난에 관한 선생의 사랑은 각별한 바가 있다. 난에 대한 선생의 수집벽은 대단한 것이어서 한때는 자생란을 채집하기 위하여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선생을 보고 마을 사람이 무장간첩으로 오인하여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는 일화는 그 시절에 선생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난과 매화는 선비의 멋과 풍류, 지조를 상징하는데 선생의 삶과 문학을 나타내는데 이처럼 적절한 비유는 찾기 어렵다는데 나는 동의한다.
진초록 보석으로 날개를 달고
눈을 감고 눈을 뜬다
만 가지 시름이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가장 지순한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장산 비자림 딸깍다릴 지날 때에도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어 있었거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투명한 이른 봄날 이른 아침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女人의 中心
실한 무게의 남근男根이 하늘에 걸려 있다
-「난꽃이 피면」전문
선생의 집은 각종 난분으로 가득했었다는데 아쉽게도 구경을 해보지 못해서 그 장관을 표현할 방법이 없지만 선생이 단지 호사가의 취미로 난을 모았던 것은 아니다. 선생에게 난은 단지 군자의 애완물이 아니라 우주의 근원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난의 개화 앞에서 시인은 ‘눈을 감고 눈을 뜬다.’ 육체의 눈을 감고 영혼의 눈을 뜨면 세속의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존재의 근원이 비의의 모습을 보인다. 그때의 공간이 내장산이건 저자거리건 상관없이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고 삼라만상이 투명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시인은 꽃 한 송이 속에 천지의 조화를 엿보는데 ‘여인의 중심’과 ‘남근’의 어우러짐이 그것이다. 음양의 어우러짐은 결국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가 아니던가.
풍류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인데 정말이지 선생은 술을 좋아해서 꽃 보고 술이요, 사람을 만나면 술이요, 시를 보고도 술이다. 선생은 술을 즐기지만 술로 인하여 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자신과 상대방을 욕보이지 않는다. 주량은 말술이지만 60년대의 전설적인 시인들처럼 만사를 제치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폭음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나는 황정산 시인과 함께 선생을 찾아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낮술 탓도 있지만 이상하게 금세 취하여 나는 선생에게 “선생님의 시는 왜 그렇게 청상과부처럼 슬프냐”, “왜 그렇게 비슷한 시를 많이 쓰느냐”는 등 말도 안 되는 주정을 부렸다. 선생은 그저 고요히 미소만 짓고 있었을 뿐,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은 시간에서 또 어떤 주정을 부렸는지 다음날 깨어나서도 도통 가물가물한데 “괜찮으냐?”며 전화를 먼저 걸어온 쪽은 오히려 선생이었다. “죄송하다”고 어물거리는 나에게 선생은 “취하지도 않는 게 시인이냐?”며 껄껄 웃는 것이었다. 선생의 스승이었던 조지훈 시인은 술을 마시는 격조와 품위에 따라 주도의 단계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선생은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낙도樂道의 단계에 든 것이니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통제를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더불어 대작하는 것만으로도 송구스러울 뿐이다.
선생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식물적인 특성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선생과 함께 오랫동안《牛耳詩》를 이끌어오던 임보 선생은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菜熙汶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 임보,「네 마리의 소」전문
이 시에서 홍해리 시인을 평가하기를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임보 선생의 깊은 뜻은 헤아릴 길 없지만 선생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을 보면 ‘들소’란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작년 11월 말경 우리시 청주지부 창립식에 참석할 때의 일이다. 선생은 인사말 중에서 청주지역에 변변한 동인지가 없어서《내륙문학》 창간을 주도하고 2년간 네 권의 책을 만들어 낸 후 계간지로 만들려 하던 중 서울로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만약 자신이 계속 청주지역에 머물고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계간지로 만들었을 거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선생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시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우이시회를 25년간이나 지켜오고 키워온 열정과 추진력은 들소와 같은 저돌성과 순수한 정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3
홍해리 시인은 1942년(실제는 1941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에서 태어나 1969년 시집『투망도投網圖』를 통해 등단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15권의 시집과 두 권의 시선집을 출간하였다. 청소년기를 청주에서 성장한 그는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세광고와 청주상고 교사를 거쳐 서울 동덕여고에서 교편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동안 청주지역에서《내륙문학》창간을 주도하였고 서울로 이사한 후에는《진단시》동인,《우이동시인들》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최근에는 우리詩진흥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문학 활동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문학 내외적으로 기념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에 비하여 선생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에 대한 평론은 주로 시집 해설이나 서평 및 개별 작품에 대한 감상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점은 문학을 하는 우리들이 반성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부분이다.
선생은 등단부터 남과 달랐다. 그 당시 대부분의 시인들이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추천제도를 통해 등단한 반면 선생은 시집으로 등단하였다. 양채영 시인이 쓴 평론을 읽어보면 ‘등단 문제로 선생이 어떤 상처 같은 것을 받았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도 없고 선생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선생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고려대에는 김종길 시인이 영문학을, 조지훈 시인이 국문학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두 분들은 문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어서 추천을 받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보는데 선생은 그 길을 접고 다른 등단과정을 거쳤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나는 이 부분에서 선생의 고집을 느낀다. 그것은 시인은 오직 시로 인정받아야지 문단정치나 인맥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나는 읽는다. 선생의 이러한 고집이 입때껏 선생의 문학적 성과에 비해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래에는 다행스럽게도 선생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이 늘어나고 있으며 심심찮게 평론에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니 시인이 올곧은 신념으로 시를 써나가는 일이 결코 외롭지 않은 길임을 선생을 통해 나는 깨닫는다.
선생의 초기시에 대한 평가는 주로 문우인 안수길 소설가, 양채영 시인, 이영걸 시인이 쓴 시집 발문과 해설 및 평론에 의해 이루어진다. 양채영 시인은「맑은 감성과 삶의 원환」이란 글에서 초기시의 심미적인 특성을 지적하면서 시집『투망도投網圖』에서는 ‘신선한 관능의 육화를 역사 속의 여성으로부터’ 찾아내고 있는 점을 주목하였다. 이러한 미의식은 제2시집『화사기花史記』에서 추상성을 벗어나 구체적인 깊이를 얻게 되었다고 보면서 ‘삶의 한 양상으로 반복과 소멸과 생성의 원환’을 시의 주조로 결론을 짓고 있다. 선생의 초기시의 특징을 전통적인 세계에 대한 향수와 심미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한 삶과 자연의 탐구로 보는 견해에 이견은 없는 것 같다.
종일 피릴 불어도
노래 한 가락 살아나지 않는다.
천 년 피먹은 가락
그리 쉽게야 울리야만
구름장만 날리는
해안선의 파도소리.
물거품 말아 올려 구름 띄우고
바닷가운데 흔들리는 순금 한 말
가슴으로 속가슴으로
모가지를 매어달리는 빛살
천년 서라벌의 나뭇이파리.
달빛을 흔들어 놓고
조상네 강물을 울어
손가락 입술까지 적신다만
금빛 가락 은빛 가락은
눈물 뿌리던 사랑.
먼지 쌓이는 한낮에 놀다 가는
그림자뿐.
-「善花公主」전문
선생과《내륙문학》동인으로 함께 활동했던 소설가 안수길은「무교동의 클리토리스」란 선생의 ‘시인론’에서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연대로 보아 그의 시작 초기에 해당 할 이「선화공주」는 김용호金容浩 시인의 말대로 '옛 설화를 詩化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면서도 표현과 구성면에서 특이한 기교를 보여 주었던 것 같다. …(중략)… 이 시기에 그가 쓴 시편들에서는 자주 그런 경향, 즉 전통적인 질그릇에 새로운 유약을 칠해 놓은 듯한 인상을 받게 하였다.
김용호 시인의 글을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어떤 문맥에 의하여 ‘옛 설화를 시화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전통적인 질그릇에 새로운 유약을 칠해 놓은 듯’하다는 안수길의 조심스런 언급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이 작품의 소재가 ‘선화공주’라는 인물이라고 해서 이 작품이 단순히 전통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인은 선화공주와 서동에 얽힌 사랑에 관한 노래를 감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현대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이 바닷가에서 ‘종일 피릴 불어도’ 옛노래의 사랑의 가락은 ‘살아나지 않는’ 것이다. 그곳에서 시인이 보는 ‘바닷가운데 순금 한 말’은 ‘속가슴’으로 흘러오는 ‘천년 서라벌’의 ‘금빛 가락 은빛 가락’이겠지만 그것은 시인에게 새로운 노래로 부활하지 않는다. 시인은 단지 그곳에서 ‘먼지 쌓이는 한낮에 놀다가는/ 그림자’일 뿐이다. 시인은 전통적인 가락에서 ‘모가지를 매어달리는 빛살’을 보고 ‘손가락 입술까지’ 동화되어 가는 자신을 느끼지만 그것은 그저 ‘눈물 뿌리던 사랑’이었으므로 더 이상 옛 노래에 연연하지 않는다. 전통은 금가락지처럼 빛나고 아름답지만 시인은 그저 그 빛 속에서 그림자로만 남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아마도 선생이 이 작품 이전에 썼을 전통지향적인 경향과는 다른 시세계에 대한 탐구의 시발점으로 읽는다. 전통과 토속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은 이후 선생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과는 변별되는, 이미지와 생동감 있는 리듬을 바탕으로 한 심미적 세계의 가치 추구라는 홍해리 시세계의 출발은 이미 초기시부터 형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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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시풍은 제3시집『무교동武橋洞』편에 와서 사회적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문명비판의 방향으로 변화하지만 ‘이미지의 연상적 전개와 수사적 자세와 활달한 리듬은 거의 변화가 없다’는 이영걸 시인의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선생은 사회적인 비판을 주제로 시를 쓸 때에 일부 직설적인 어법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미지를 생동감 있는 리듬에 실어서 상황에 대한 분위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아스팔트와 시궁창으로 내리는
자정의 불빛
숨을 자들 다 숨어버리고
오줌 먹은 담벼락과 오물찌꺼기가
텅 빈 도시를 지킬 때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달빛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린다
-「무교동 · 12」의 일부
‘무교동’은 도시문명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시인은 ‘아스팔트와 시궁창’, ‘오줌 먹은 담벼락과 오물찌꺼기’ 등 ‘어둠’의 이미지로 그 공간을 묘사한다. ‘숨을 자들 다 숨어버린’ 자정의 시간은 아마도 70년대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시대상황을 뜻하는 것으로 읽히는데 그 상황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자연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끄러움은 윤동주의 시가 그렇듯이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과 자기반성에서 오는 감정이지만 선생은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 이후에 자연을 반성의 주체로 놓는다. 암울한 도시의 공간과 시대의 어둠을 시인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달빛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새로운 출발을 위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영원한 종말
영원한 시작을 위하여
불의 꿈, 물의 꿈, 바람의 꿈, 모래의 꿈, 소리의
꿈, 빛깔의 꿈, 사람의 꿈, 죽음의 꿈, 하늘의 꿈,
꿈의 꿈들을 싣고
바다로 바다로 달려가는
끝없는 한강줄기
물빛에 반짝이는 허공의 불빛
절망의 하얀 손들이
그 불빛을 잡고
허허로이 나부끼는 덧없는 깃발이 되어
하염없이 펄럭이고 있다
영원한 끝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자궁
서울의 클리토리스
숱한 뉘우침을 만나
질긴 어둠이 되고 있다.
-「무교동 · 15」의 일부
무교동은 ‘대한민국의 자궁’인 ‘서울의 클리토리스’이다. 부정적이고 어둠뿐이던 그 공간이 단숨에 대한민국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가 되는 것은 ‘숱한 뉘우침’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 뉘우침의 색인에는 ‘물, 불, 모래, 사람, 죽음’ 등 삼라만상이 다 들어 있다. ‘클리토리스’처럼 무교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숨어 있지만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시대의 뉘우침을 듣고, 인간과 자연의 꿈을 품으며, 새로운 출발을 향한 시간을 예비하고 있다. 그 출발의 방향이 무교동과 같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미적 자연의 세계라는 것은 앞의 시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무교동 연작시편은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겪게 된 갈등의 산물로써 선생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시대와의 불화의식, 문명비판 등을 주제로 하고 있음에도 무겁게 읽히지 않는 것은 리듬 때문이다. 예로 든 시들은 대부분이 한 행이 2음보, 혹은 2음보가 중첩 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속도감은 전언의 정확성이나 진실성 보다는 독자들에게 상황에 대한 시인의 정서적 반응에 더 주의를 갖도록 하는 효과를 가진다. 운율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적 특징은 세계가 아무리 부정적이고 분열적이어도 그 세계를 긍정하고 통합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세계관의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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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시는 아무래도 현실세계의 체험의 가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심미적 가치를 중시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으로 본다. 선생의 시를 초기시부터 후기시까지 일독한 후 나는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시인들이 한 번쯤은 언급하고 있는 가족, 혹은 가족사에 대한 시편이 거의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몇 편이 보이긴 하여도 아주 단편적인 것뿐이다. 또한 현실의 경험적 세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편은「무교동」연작시편 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2월말 시낭송회가 끝나고 행한 뒤풀이에서 나는 이 점에 관하여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은 조금 생각해 보더니 “정말, 그렇네.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아주 없는 편이지.” 라며 선선히 인정하였다. 나는 그 까닭을 더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선생은 우리나라 시단에서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자연과 심미적 세계의 미학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로 일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미학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의 절정에 난蘭이 자리하고 있다. 70년대에 시작해서 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선생의 난에 대한 사랑과 탐구는 선생이 자부하듯이 현 시단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선생이 난에 열정을 쏟았던 이유를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시인으로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으로 보았다. 나는 얼마 전에 이런 점을 말씀드리고 난을 탐구하게 된 계기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선생은 “그런 거창한 뜻 보다는 선인들의 시서화에 나타난 난이 어떤 것인가를 캐보고 싶었고 또 어느 책에서 읽었던 '東國無眞蘭'(우리나라에는 난다운 난이 없다)이란 구절에 의혹과 충격을 받고 나서 조선시대 문인인 강희안의『양화소록養花小錄』을 읽다가 ‘우리나라에는 난초와 혜초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本國 蘭蕙 品類不多). / ~ / 그러나 호남 연해의 모든 산에서 난 것은 품종이 아름답다(生湖南沿海諸山者 品佳)’라는 구절을 보았는데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난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내심 그럴 듯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실망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역시 탐미주의자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집에 난분이 많이 남아 있는지 물어보았다. 선생은 난농장을 하는 친구에게 그냥 다 주어버렸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선생은 “그 친구가 내 아들 결혼할 때 신세를 갚기는 했지.”라며 “난은 풀일 뿐이야. 풀을 풀로 보아야지 돈으로 보는 순간 난은 사라져버리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연이다. 자연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살아야 한다. 인격으로 대하고 같이 대화하며 생활해야 한다. 약간의 무관심과 적당한 게으름이 약이다. 자연은 그런 것이 아닌가. 자연은 가장 오묘하고 아름다운 詩이다. 우리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시이다. 난은 시이다. 서정시요 서사시이다.”
- 시집『애란愛蘭』의 서문에서
선생에게 가장 아름다운 미는 자연이다. 자연 중에서도 선생의 마음을 사로잡는 난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이다. 자연은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가장 오묘한 시인 까닭으로 난이야말로 시인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선생에게 난과 자연과 시는 하나이다. 시집『애란』은 난과 자연과 시에 대한 선생의 미학적인 탐구의 결정체이다.
수천 길
암흑의 갱 속
반짝이는 언어의 사금
불도 없이 캐고 있는
이,
가슴엔
아지랑이
하늘엔
노고지리.
-「애란愛蘭 -시인詩人」전문
난이 자연의 보석이듯이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언어의 광맥을 찾아 ‘수천 길/ 암흑의 갱 속’을 광부처럼 파고 들어가야 한다. 동료도 없고 ‘불도 없’다. 수천 길 지하에서부터 하늘에 이르는 수직적 높이, 그러한 절대고독의 경지에서 ‘반짝이는 언어의 사금’ 하나를 시인은 가슴에 품지만 정작 그 언어는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노고지리’의 지저귐처럼 노래의 여운만 있을 뿐이다. 만약 시인이 ‘언어의 사금’에 집착한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정주할 거처가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에서 정금같은 언어를 발굴하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노래할 뿐이다. 시의 언어가 그렇게 노래처럼 아름답고 자유로운 것이기에 난초처럼 무소유의 향기를 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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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애란愛蘭』을 출간한 8년 후에 선생은 시집『봄, 벼락치다』를 출간한다. 이전에 2년마다 시집을 출간한 간격으로 보면 꽤 오랜 공백 기간이다. 나는 그 까닭에 대하여 물어보았으나 “뭔가 꺾이어서 그랬다”는 대답 이외의 소득은 얻지 못하였다. 아마 선생에게 그 기간은 시세계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과연 선생은 같은 해에『푸른 느낌표!』를 출간하고, 2년 후『황금감옥』과 뒤이어 시선집『비타민 詩』를 연속해서 간행한다. 그리고 2010년에는『비밀』을 출간하는 등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창작욕을 선보이는데 출간하는 시집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가 깊이를 더하고, 시와 시론에 대한 시가 자주 눈에 뜨인다. 시집『비밀』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명창정궤의 시를 위하여」는 시로 쓴 시인의 시론으로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그 중에 선생의 시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이 글의 요점은 ‘시인은 선비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선비는 누구를 말하는가? 선비는 우선 독서하는 사람이다. 독서를 게을리 하는 시인은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선비가 물질보다는 정신에 가치를 더 두는 사람인 것처럼 시인은 감투와 명예와 같은 외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시인이라 할 수 없다. 선비가 시서화를 통하여 교양과 정신세계를 가꾸어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듯이 시인은 시를 통하여 맑고 깨끗한 정신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선비는 이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고 의로움을 추구한다. 다라서 시속에 따라 자신의 처세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선비이고 시인이다. 선비의 양심과 정신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구태의연한 가치가 아니다. 선비가 한 나라의 정신문화의 뿌리이듯이 시인은 현시대의 정신문화의 뿌리이다. 시인의 정신이 썩으면 한 나라의 정신문화가 썩는 것이다. 현재 시인의 수가 몇 만 명을 상회한다고 한다. 가히 시인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본분을 잊고 외적인 이로움에만 눈길을 돌리는 시인들이 없지 않다. 선생은 그런 시인들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선생이 다른 문학단체의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창정궤明窓淨几’는 시인이 거처하는 정신의 서재이다. 오늘날 가끔 선비정신을 말하고 있는 시인은 있지만 선생처럼 삶과 문학이 소슬한 한 채의 집을 이루고 있는 시인은 거의 없다. 나는 가끔 마음이 어지러울 때 선생의 이 글을 자경문 삼아서 읽는다. 나는 아직 선생의 서재에 초대를 받지 못하였지만 글을 통해서나마 시인의 품격과 향기가 배어있는 차의 맛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느끼고 배울 수 있게 된 점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조지훈 시인을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라고 하는데, 그 분의 제자인 선생이야말로 선비의 진면목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山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의 산이다.
-「자벌레」전문
선생의 블로그에 실린 시편 가운데 한 편이다. 4연 8행의 형식에 한 연은 2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4연은 기승전결의 구조로 시에서 가장 많이 차용되는 형식이며 1연 2행으로 이루어진 형식은 정지용과 청록파의 초기시에 많이 보이는 것으로 시의 운율성을 살리고 의미의 통일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벌레’는 서정적 자아의 투사물이다. 1연과 2연은 자벌레의 운행을 시인의 시작과 연관지어 비유적으로 나타냈다. 자벌레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앞으로 나가는데 수축할 때는 ‘산’처럼 몸의 중앙이 솟아오르고 이완할 때는 평지가 되는 것처럼 몸을 ‘무너뜨리며’ 간다. 시인도 시를 쓸 때는 자신의 온몸을 바쳐 한 편의 시/산을 세우는 것이며 다음 시를 쓸 때는 다시 자기가 쓴 시를 무너뜨려야만 새로운 시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자벌레가 자신의 몸길이만큼 앞으로 나아가듯이 시인도 자신의 ‘온몸으로 세상을 재’며 ‘한평생’ 시를 써왔다. 산은 시인이 평생을 쓴 시이다. 그 산/시는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몸속’에 ‘무등無等’의 형태로 존재한다. 무등이라! 시를 온몸으로 쓴다고 한 김수영 시인도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리라. 감히 온몸으로 시를 쓴다고 선언하기도 힘든데 온몸으로 쓴 시를 선생은 ‘무등’이라고 정의한다. 시/산과 시 아닌 것/평지의 경계가 사라지는 놀라운 순간을 나는 이 시에서 목격한다.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본질을 담고 있지만 정작 시인은 그 속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지은 집을 끊임없이 허물고 새로운 집을 향해 가는 게 시인된 자의 숙명임을 아는 시인이 얼마나 되는가. 더군다나 그것이 무등이라면 이미 선생은 무애无涯의 경지에 든 것이란 말인가.
선생의 시는 아직 진행형이므로 이 시기를 후기시라고 말할 수 없으나 연륜을 더할수록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인 조화에 매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선생은 목월 이상의 스타일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형식의 유기적 조화와 완결미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선생은 고전주의자이다. 이러한 시적 경향은 아무래도 선생의 스승인 조지훈 시인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지훈 시인의 중기 이후의 시가 현실과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으로 선회하면서 다소 형식적인 느슨함을 보이는 반면에 선생의 시는 후기에도 형식의 일탈이나 이완은 심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선생의 작품 중에서「봄, 벼락치다」를 좋아하는데 다소 자유로운 형식을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자연에 대한 통찰, 생명에 대한 경이를 선시적인 비유와 압축으로 마무리하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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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본명은 봉의峯義이며 필명으로 해리海里를 쓰고 있다. 연보를 보니 60년도부터 필명을 쓰고 있었는데, 그 연유를 물으니 선생의 답변은 의외로 소박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클레멘타인인데, 거 왜 그 노래에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가 나오잖아. 넓을 홍洪자에 바다 해海자가 거기에서 나온 거야.” 물론 바다가 없는 충북이 고향이어서 미지의 바다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해리라는 필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까닭은 그 때문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범박하게나마 선생의 문학적 경향에 대한 일단을 이해하게 되었다. 선생의 시는 지금 이곳에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해리라는 필명이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선생의 시적 출발은 현실세계에 대한 탐구보다는 심미적 세계의 가치 추구가 우선한다고 진술하였다. 선생의 미의식은 현실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가 충돌할 경우, 때로는 비장미를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는 세계와 있어야 하는 세계를 조화롭게 보려고 하는 우아미가 우세하다. 그런 면에서 선생은 형식적으로는 고전주의자이며 기질적으로는 낭만주의자이면서 전통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찾는 이 시대의 미학주의자요 멋과 풍류를 온몸으로 즐기는 선비의 시인이다.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行과 행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전문
해리는 누구이며 해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흔한 문학상 하나 받은 일 없는 무관의 제왕이 해리이다. 적절하게 타협하며 살아가야 편한 세상에 홀로 낙락장송처럼 푸른 귀를 가진 시인, 가슴에 우주를 품고 자연의 이법을 자벌레처럼 온몸으로 재면서 살아가는 시인, 유명한 시인 보다는 혼이 살아있는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시인이 해리이다. 해리는 진정한 시의 나라이다. 임보, 채희문, 이생진 시인과 함께 시와 술로 풍류를 즐기며 사는 우이도원이 해리이다. 선생의 시에 그토록 많이 나오는 찔레꽃 피는 마을이 해리이다. 선생이 시작에 몰두하느라 허리를 다쳤던 곳, 그곳에서 우이시낭송회를 20년 이상 이끌고, 자연과 생명과 시를 목숨처럼 여기는《우리詩》의 모태가 되었던 시수헌詩壽軒이 해리이다. 매실이 열리면 매화술을 담그고, 술이 익으면 벗들을 불러 꽃잎 띄운 술잔을 돌리는 곳, 시인들의 얼굴에 은은히 난초향이 어리는 곳, 세란헌洗蘭軒이 해리이다.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온몸으로 시를 쓰고 다시 부수며 새벽 세 시면 어김없이 한 사발의 냉수와 같은 시를 쓰기 위해 선정에 드는 마을, 그곳이 해리이다. 서정시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시대에 서정시의 불을 살리려고 온몸으로 불쏘시개가 되는 서정시의 순교자, 그 사람이 해리이다.
자연으로 가는 길에 시인의 마을이 있다. 해리는 시인의 마을의 촌장이다. 나도 그 마을에 물처럼 바람처럼 가서 살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 해리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다.
◆ 표사의 글 ◆
세이천洗耳泉 오르는 솔밭 고개
바다만큼 바다만큼 난초蘭草밭 피워 놓고
한란寒蘭, 춘란春蘭, 소심素心, 보세報歲
흐르는 가지마다 그넷줄 얽어
구름을 박차고 하늘을 날다
빈 가슴에 시가 익으면
열 서넛 동자놈 오줌을 싸듯
세상에다 버럭버럭 시를 갈긴다.
― 「난초 書房 海里」, 임보(시인)
홍해리 시인의 시적 출발은 현실세계에 대한 탐구보다는 심미적 세계의 가치 추구가 우선한다고 진술하였다. 선생의 미의식은 현실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가 충돌할 경우, 때로는 비장미를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는 세계와 있어야 하는 세계를 조화롭게 보려고 하는 우아미가 우세하다. 그런 면에서 시인은 형식적으로는 고전주의자이며 기질적으로는 낭만주의자이면서 전통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찾는 이 시대의 미학주의자요 멋과 풍류를 온몸으로 즐기는 선비 시인이다.
― 신현락(시인)의 시인론 중에서
▶洪海里 시인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1964)하고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를 내어 등단함.
∙사단법인 우리시 진흥회 초대 및 2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현제 평의원으로 한운야학閑雲野鶴처럼 살고 있음
∙시집『투망도投網圖(선명문화사,1969)』『화사기花史記(시문학사, 1975)』『무교동武橋洞(태광문화사, 1976)』『우리들의 말(삼보문화사, 1977)』『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민성사, 1980)』『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청별淸別(동천사, 1989)』『은자의 북(작가정신, 1996)』『난초밭 일궈놓고(동천사, 1994)』『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애란愛蘭(우이동사람들, 1998)』『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푸른 느낌표!(우리글, 2006)』『황금감옥(우리글,2008)』『비밀(우리글, 2010)』
∙시선집『洪海里 詩選(탐구신서 275. 탐구당, 1983)』『비타민 詩(우리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