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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무기체계(천마~천무)에 바친 일생 -이운동
이 회고는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에 수록할 동기생 현역시절의 자부, 즉 시대별 국가적 국방이슈와 관련해, 각자 어떤 역할과 공헌을 했었던 지에 대한 회고를 수록하는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글은 이운동 동기가 육사교수, 미국유학, 국방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러시아와의 기술협력, 한화연구소를 거치면서 우리 군 무기체계의 발전에 노력하면서, 천마-신궁-천궁-천무의 개발에 성공하기까지의 일생을 회고한 내용이다. 우리 대열 54년 회고록의 취지에 이처럼 맞아떨어지는 내용을 없을 듯싶다. 비교적 긴 분량이지만, 제한 없는 대열 홈페이지에선 모두 실어, 이운동 동기의 명확한 업적을 모두 함께 돌아보며 자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 -주(註) 편집위원 김명수-
♣ 무기체계(천마~천무)에 바친 일생
이운동
★ 육사 전자과 교수로
육사 졸업 후 2년간의 전방생활을 마치고, 1973년 명예롭게 육사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어 서울대학교에서 위탁교육(서울공대 전자과:3·4학년)을 받은 후에 1975년부터 육사후배를 양성하는 교수라는 새로운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후 1981년 8월에 미국 위스콘신대학교(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대학원에서 전자파(EM Wave) 분야의 독일계 Bayer 교수님을 지도교수님으로 모시고 나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려면 먼저 자격시험(Qualifying Exam)을 통과해야 하고, 두 번 낙방 하면 다른 학교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주어진 기간 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나는 첫 학기에 필수과목을 수강하면서 자격시험에 응시했다.
기초를 중요시하는 시험문제들이 출제되었고, 육사에서 기초 전공과목을 가르친 나에게는 난해한 문제가 아니었다.
시험을 마친 후, Bayer 교수님이 엄지손가락을 나에게 보이시며
“Mr. Rhee! 최고성적으로 합격했어!” 하며 자랑스러워 하셨다.
당시,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평균 6.9년이 소요되었으나 핵융합로 관련 연구성과가 미 정부로부터 인정되었고, 한국군 장교로서 엄격한 규정 덕분에 4.5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 육사에서 KIDA(한국국방연구원)로
1986년 3월부터 육사에서 다시 강의를 시작한 이 후, 1988년 초에 갑자기 장준익 육사 교장님의 호출이 왔다. 별다른 생각 없이 교장실에 도착한 나는 육사 18기 선배이시고 KIDA 부원장이신 권태영 박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권 박사님은 한국국방연구원에 국군 전력증강의 계획수립에 필요한 무기체계실을 만드는데 함께 일해 줄 것을 요청했고, 교장님께서도 육사교수로서 생도교육은 다른 교수들에게 맡기고 KIDA에 가서 전력증강 관련 연구를 하는 것이 국가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니 KIDA로 갈 것을 적극 추천하셨다.
1988년 3월부터 KIDA 무기체계센터의 창설멤버로서 국내 무기체계계 중장기계획을 검토하며, 전력증강계획, 앞으로 군에서 배치할 무기체계의 획득방법(국내개발, 해외직구매, 기술도입생산)을 결정하기 위한 ‘비용 대 효과 분석’ 등 과제를 3년간(‘88.3~’91.3) 수행했다.
★ KIDA에서 ADD(국방과학연구소)로
국방과학연구소(ADD:Agency for Defence Development)에서 ‘단거리 지대공 유도무기(SAM: Surface to Air Missile)인 천마체계의 비용 대 효과 분석’을 KIDA 과제로 요청하여 왔다. 과제책임을 맡아 천마(天馬)체계(사거리/고도 10km/5km)의 국내개발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어 ADD가 천마 개발을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Radar 개발기술이 없어 동급의 대공유도무기(SAM: Surface to Air Missile)체계를 개발한 불란서 Thomson과 기술협력을 하게 되었다. ADD의 천마체계
개발관리 담당실장이 국방부로 가게 되어 개발책임자(대공유도무기체계부장)였던 선배가 급히 나를 후임으로 요청하였고, 나는 과학자로서 무기체계 관련 분석 연구보다는 직접 개발에 참여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1994년 4월 ADD(대전) 유도무기체계 개발본부 천마개발 1실장으로 가게 되었다.
1) 천마(天馬)체계 개발
1996년 ADD의 천마개발 사업책임자를 하시던 선배님께서 부소장으로 영전되어 자연히 나는 천마개발 사업책임자(3년)로 1998년까지 사업을 마무리 하여 수도권에 초도배치하게 되었다.
무기체계의 국내연구개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초기에 사업화하여 개발을 착수하는 것과 개발 마지막 단계의 군요구성능(ROC: Required Operational Capability) 확인을 위한 군 시험평가라고 할 수 있다.
1997년~1998년 시험평가 기간은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어려운 기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군은 대공유도무기 시험평가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군 시험평가원은 황당한 시험입증 방안을 제시하곤 했다. 군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선진국의 시험평가
사례를 설명해주어도 개발자가 시험평가를 쉽게 받으려고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설득해서 시험평가를 진행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시험평가 방법 결정이 지연되어 어려움이 많았으나,
천마체계는 전천후 무기체계로서 한국과 같은 산악지형에서 기동성이 뛰어나고, 사거리 10km급 단거리SAM 체계 중에서는 최고의 성능(명중률:90%이상)을 가진 훌륭한 무기체계로 평가되어 시험평가 완료 즉시 수도권에 배치하게 되었다.
ADD에서 천마개발 사업관리와 대군 및 국방부 협력 담당 실장을 하다가 1996년 천마 사업책임자를 하시던 선배님께서 부소장으로 영전되어 자연히 내가 천마개발 사업책임자로 1998년까지 사업을 마무리 하여 수도권에 초도배치 하는 것을 담당하게 되었다.
2) 러시아 기술 협력
1992년 구(舊)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이라는 새로운 정치체계로 전환되면서 심각한 사회 무질서와 경제 혼란을 거쳐야 했다.
러시아는 서방국가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한국도 1993년(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많은 차관을 주어 회수방법이 큰 과제가 되었다.
정부는 여러 가지 방법을 검토한 끝에 무기체계 직도입이나 기술협력개발을 통하여 차관을 상환하는 방법을 추진하게 되었다.
1993년 6월부터 나는 ADD 최초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연구원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러시아 방산업체와 연구소를 방문하며 기술협력을 통한 무기체계 개발기술 도입 방안을 수립하게 되었다.
서방세계는 무기체계 관련 기술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톰슨(Thomson)사로부터 천마(天馬) 레이더를 기술도입 생산했지만 삼성전자는 모든 부품을 톰슨에서 수입하여 조립하는 것이 전부였다.
국방부는 통상 무기구매 시 Offset의 기술이전을 통하여 마치 보따리로 싸주는 기술을 받으면 되는 것으로 잘못 활용하고 있었다. 기술은 연구개발을 같이 하면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천마 레이더 기술협력 개발을 통하여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한국국방부의 조달본부와 같은 기관인 로스포르제니와 협조하여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연구소와 업체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차관을 회수하는 방안으로
휴대용SAM(神弓)과 중거리SAM(天弓)의 공동개발 사업화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당시 공산국가였던 러시아의 미사일은 서방국가의 동급 미사일에 비해 파괴력이 큰 반면에 정교함이 크게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미국이 개발한 유도탄의 유효반경이 5m이면 동급의 러시아 유도탄은 50m정도였다.
레이더도 전자부품이 낙후되어 크기가 크고 정확도도 떨어 졌지만
기본기술은 러시아로 부터 배우고, 소형화와 정확도를 높이는 기술은 ADD가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마(天馬)개발 사업을 이끌어가며, KIDA 연구경력과 군 장교로서 공학박사라는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육·해·공군 본부와 합참, KIDA을 오가며 다른 ADD 연구원들은 하기 어려운 군 협조와 새로운 무기체계의 국내개발을 계획하였다.
차기 지대공유도무기(SAM)체계 개발 사업으로 5km급 휴대용SAM 신궁(神弓)과 40km급인 중거리SAM 천궁(天弓)의 군요구성능(ROC: Required Operational Capability)과 개발예산을 군과 협의하여 무기체계 중장기계획에 반영하여 개발을 착수하게 되었다.
3) 신궁(神弓) 개발(1995년~2000년)
신궁체계(사거리 7, 고도3.5km)의 경우 러시아의 기술협력 파트너로 IR탐색기는 LOMO, 유도탄은 KBM으로 정했다.
로스포르제니와 신궁과 천궁 기술개발 계약을 할 때 가능한 러시아 기술자를 ADD에 자주 초청하여 많은 우리 연구원(ADD, 방산업체)들이 전문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연구원들의 러시아 회사 방문 횟수는 줄였다.
당시, 러시아의 무기개발 기술진은 65~75세가 주축으로 대부분의 젊은이 들은 돈을 따라 다른 일(길거리 판매, 택시운전 등)을 하고 있었다. 소련붕괴 직전에는 대학교수와 고급기술자 들이 100불 수준의 월급을 받았으나 그나마 2년이 넘게 무보수로 대학교와 회사에 적을 두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우리와 기술협력은 국방관련 최대 사업으로 그들에게는 구세주를 만난 것과 같았고, 우리에게는 싼 값으로 서방국가에서 얻을 수 없는 첨단 기술을 얻을 수 있
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러·기술진이 ADD방문 시에는 기술협력비를 개별적으로 봉투에 넣어 지급했다.
그래서 인지 경험이 풍부한 러·기술자 들은 한국출장을 서로 오고 싶어 했고,
협의할 기술내용과 관련된 충분한 자료들을 상세히 준비하여 우리 연구원들에게 소상히 설명해주고 다시 한국 측에서 그들을 지명하여 초청해주기를 바랬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궁 유도탄 명중률 90%이상을 달성하며 군 시험평가를 통과하여 2004년부터 양산을 착수하게 되었다.
군 배치 후에는 서해안의 방공무기 시험사격에서도 그동안 국내에 도입되어 운용이던 미국의 Stinger나 불란서 Mistral보다 월등한 명중률을 입증할 수 있었다.
4) 천궁(天弓) 체계개념연구(1998년~2000년)
천궁체계(사거리40km, 고도30km)의 경우, 러시아의 기술협력 파트너로 유도탄과 수직발사 기술은 FAKEL, RF탐색기와 삼차원 레이다(MFR : Multi-Function Radar) 기술은 ALMAZ를 정했다.
유도탄의 경우 수직발사 기술로 Cold Launching을 적용할 경우 높은 고도에서 유도탄 추진기관이 점화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이 나무가 많은 산악에 배치되는 포대에서 유도탄을 발사해도 화재 우려가 없고, 수중에서 작전하는 잠수함에서도 유도탄 발사가 가능한 최첨단의 기술이었다.
RF탐색기와 삼차원 레이더(MFR)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개발품으로 ADD의 레이더 개발부서와 삼성전자 연구원들이 러시아를 오가며 기본 기술과 불가피한 몇 가지 부품들을 제외하고는 최대한으로 한국의 첨단 전자기술이 적용하여 개발함으로서 독자적으로 양산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했다.
5) 차기다연장체계(천무(天霧)) 개발
2004년 6월 ㈜한화에서 나를 찾아와 한화종합연구소 소장 직을 제안했다.
당시 한화는 탄약과 추진기관 전문 업체였으므로 “한화에 가서 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하니~ 한화의 답은 “앞으로 한화는 유도탄 개발 전문업체가 되려고 합니다. 오셔서 기틀을 마련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마침 휴대용SAM 신궁 체계개발이 마무리 되고 양산이 결정되어서 한화에 가서 새로운 유도탄체계를 개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제안을 받아드렸다.
2004년 8월 연구소는 한화인천공장 내에 있었고, 연구원 50여명과 기술원 20명으로 인천공장 철거 후에 대전공장 내에 200명이 들어갈 새 연구소 건물을 지어서 이전할 계획 이었다.한화 연구소
당시 한화 대전공장은 미국의 227미리 다연장로켓체계(MLRS : Multi-Launching Rocket System)를 기술도입 생산하여 군에 공급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사거리 45km 무유도 로켓 이후에 사거리 60km 유도로켓을 개발 완료하여 배치 중이었다.
머지 않아 한국군에도 새로이 개발된 유도로켓 배치를 권할 것으로 판단되어 미국의 유도로켓 보다도 사거리가 길고 성능도 우수한 유도로켓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2005년 10월 연구소가 대전으로 이전한 후 한화의 새로운 분야인 탄약계열의 유도폭탄과 지능 대인지뢰/대전차 지뢰를 선행개발하고, 유도탄도 적당한 품목을 선택하여 자체 선행개발을 착수하기로 했다. 본사에서 150억원이 넘는 차기다연장체계 선행개발(3년:‘06~’09년)과 50억원이 넘는 탄약계열 개발비를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은 그룹의 김승연 회장님께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하여 한화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야한다’는 의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국방중장기계획에도 반영되어있지 않았던 차기다연장체계의 개발사업화하기 위하여 육군과 합참을 오가며 군요구성능(ROC)과 획득시기 및 개발예산을 반영했다. 국방부의 사업화 결정을 위하여 KIDA와 ADD에서 개발적합성 의견을 얻은 것은 그동안 내가 근무한 KIDA, ADD의 무기체계 소요제기 및 비용대효과분석 등의 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개발사업(‘06년~‘13년:1300억원)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미국 MLRS와 차별화하기 위해 유도로켓의 구경은 239미리로 하였고, 자탄의 불발 율을 줄이기 위한 자폭신관, 기동성이 좋은 차륜형 탑재차량 및 탄운반차량을 개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227미리 MLRS와 239미리 유도로켓, 130미리 구룡도 탑재가능토록 포드화해서 재장전시간을 단축했고, 군단과 사단별로 작전임무에 맞추어 탄종을 선택하여 탑재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개발 유도탄 성능시험은 서해안에 있는 안흥시험장에서 할 수 있지만 해상에서 정확하게 탄착오차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지상시험이 가능한 곳을 찾아 호주, 터키, 남아공과 이스라엘 시험장의 사용 가능성을 타진한 후 가장 시험여건이 좋다고 판단된 이스라엘과 발사시험 계약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시험장은 미즈 페라몬(Mitzpe Ramon)에서 가까운 황무지로 30km~80km 사격이 가능했고, 모든 탄착이 5m이내에 집중될 뿐만 아니라 표적 중앙에 꽂은 깃대를 직접 날려버리기도 했다. 이스라엘 시험장 책임자는 시험결과를 보고 놀라며 한국 유도탄 기술의 우수성을 이스라엘 내에서 삼성 핸드폰과 현대/기아 승용차의 인기도와 함께 수차에 걸쳐서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2014년 2월 천무 개발완료로 나의 무기체계 개발을 모두 마치게 되었다.
내가 연구소장직을 떠난 후 즉시 양산이 착수되어 한국군에 배치되었고, 아랍에미레이트(UAE)에 수출도 하고, 사우디아라비아도 계약을 준비하고 있다.
내가 사업화해서 개발한 한화의 천무와 국과연에서 개발한 천마, 신궁, 천궁의 양산물량을 모두 합치면 수십조 원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화 종합연구소에서 탄약 이외에 유도탄, 지능탄(유도포탄), 로봇, 관성항법장치, 무인항공기 선행개발로 연구인력을 400명 이상으로 증원하였고, 한화연구소의 미래 연구개발 방향과 이에 따른 연구인력을 700명까지 확대하는 발전방안을 한화그룹 회장님께 보고 드려 11,000평의 연구소 부지를 북대전IC에서 가까운 곳에 마련하고 연구소를 떠났다.
한화연구소 퇴직한 후에는 KAIST 기계과의 로봇개발에 참여하는 연구교수(4년)로서 2016년 말에 나의 모든 직장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
2021.7.30. 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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