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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고가와 도산서당
이현옥 도산(道山)마을 보정 김정회 고가는 고창군 도산1길 16에 있으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도산 자락에 대나무 숲으로 감싸여 있다. 도산마을은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영산기맥에서 서남쪽으로 문수산을 지나 추산봉 줄기에서 북쪽으로 10리를 흘러온 줄기가 태봉산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5리쯤 흘러온 줄기가 마지막으로 멈춘 도산천 앞 보도산(普道山)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도산(道山)은 마을이 평탄한 길옆에 있고, 마을 뒤 작은 산인 보도산(普道山)이 있어서 도산이라 한다. 이재 황윤석은 청풍김씨가 세운‘금정(錦亭)’이란 정자에 자주 들러 ‘도산 8경’을 지었으며 마을 형세를 보고 “길이 산이 될 것이다.”라며 도산(道山)이라 했으며 현재는 고속도로가 높게 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다. 고창에서 유래가 깊고 살기가 좋은 마을하면 1도산. 2갑평. 3독실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다. 앞서 말했듯이 도산은 배산임수 마을이고 들이 넓어 살기 좋은 곳이고 예조참판, 예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지낸 명문 세가가 많았고, 학자들도 많았고 부촌이었다. 고창에서 가장 와가(瓦家)가 많았던 마을이고 관료들이 고창으로 부임해오면 먼저 도산마을로 인사 올 정도였다.
마을 초입부터 담이 둘러쳐 있는 이 일대가 보정 선생의 일가가 살았던 곳이며 현재 마을회관과 주차장은 새마을 유아원과 놀이터가 있던 곳이다.
마을회관 앞 백련지(白蓮地)도 보정 선생의 증조부 오형제가 살았던 집터였다. 훗날 논이 되었고 고가를 지키고 있는 보정의 장손 김경식 교수가 정년퇴임 후, 농사를 짓다가 10여 년 전부터 백련을 심었다.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연차를 나눠주며 정을 나누고 있다. 여름날 도산마을에 들어서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맑고 향기로운 순백의 꽃봉오리를 만날 수 있다. 연지에는 물이 맑은데 연꽃이 없으면 금세 더러워지고 탁해진다. 연꽃은 정화의 힘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정화해준다. 차에서 내려 연향과 함께 돌담길을 걸으며 옛 정취 속에 고가를 둘러보며 보정 선생의 인품을 느껴 본다.
보정 김정회의 생애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1903~1970)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에서 태어났고 자(字)는 중립(中立), 호는 보정(普亭), 연연당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조선개국공신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이다. 14대조는 영모당 김질(金質), 증조부는 만수당(晩睡堂) 김영철(金榮喆)이고, 부친은 회천(晦泉) 김재종(金在鍾)이다. 어려서부터 종조(從祖)인 항재(恒齋) 김순묵(金純黙)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송사 기우만의 학통을 이으며 경서자집(經書子集)을 두루 통달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근대를 살아 온 대 유학자이자 서예가 1929년(27세) 일제 강점기에 시골 선비로 옛것을 지키고 새로운 것을 배척하는 것만이 옳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나라를 잃은 울분을 달래면서 우리가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으니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야 선진 대열에 오를 수 있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성균관 대학의 전신인 명륜 전문학원에 입학하여 국내에서 모인 석학들과 주야로 신구(新舊)학문을 토론하였고, 또 당시 청나라에서 성행하던 새로운 학문인 북학(北學=實學)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성균관에서 경학을 가르쳤다.
1931년(29세)에는 당시 서화로 유명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문하에서 글씨와 그림을 익혔는데 그의 그림에는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이 서려 있었으며 불과 몇 해 사이에 시, 서, 화(詩, 書, 畵)에 일가(一家)를 이룰 정도이다. 해강 김규진은 당시 중국 유학에서 대륙적인 필력과 호방한 서화를 배우고 돌아와 명성을 떨치면서 왕실에 출입하여 영친왕에게 서화를 가르치면서 ‘해강 서화연구회’를 설립하여 서화를 지도하신 분이다. 스승인 해강 김규진이 늘 말씀하셨던 “서화는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요. 문명은 국력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화가 발전하는 것이 곧 국력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예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또한 세계가 지극한 보배로 여기는 것이다.”라 하여 서화발전이 곧 부국강병이다. 라는 신념으로 사셨다. 이는 일찍 문화의 발전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 주장한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작품
1938년(36세) 3월에 권위가 있는 일본 서화전에 ‘풍죽(風竹)’을 출품해서 특선(1등)하였다. 높은 선비정신이 담긴 풍죽화는 일본은 물론 국내 서.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스승인 해강 김규진으로부터 “풍죽은 당대 제일”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어느 날 보정이 ‘풍죽’치는 걸 보고 스승인 해강 선생은 “ 보정! 이젠 자네 앞에서 풍죽은 그만둬야겠네.” 하며 제자의 능력을 인정하였고 그 후로는 풍죽을 그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그린 묵죽 한 폭이 지금 성균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보정은 어떤 물체를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학문으로 응집된 예술혼 즉 내면의 마음 상태가 붓끝을 통하여 나오고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성균관대학교에 소장된 작품 보정 선생은 一幅畵蘭五日成, 墨香初散筆花生 ( 일폭화란오일성, 묵향초산필화생)이라 하였다. 즉‘한 폭의 묵난을 닷새 만에 완성하였는데 그때야 비로소 묵향이 발산되면서 붓끝에서 꽃이 생겼네.’ 매화, 난초, 국화를 즐겨 그렸지만,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세인에게 진한 묵향을 느끼게 한다. 현재 고창 군립미술관에 선생님의 서예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뱃심있는 대 유학자 1940년 일본은 보정에게 유도(儒道)를 진작시키는 순회 강연을 강요했으나 그들의 속셈이 학도병지원과 징용임을 알고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완강히 순회 강연을 거절하였다. 그 후 그는 벗들과 20일간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면서 기행 연작시 20여 편의 명시를 남겼다.
1941년(39세) 성균관에서 재직할 때, 일본이 당시 우리나라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 일본 유람을 시킨 일이 있었는데 지명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서는 “고창의 보정도 일제에 넘어갔구나.” 비판하면서도 아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어떻게 하면 일본을 이길 수가 있는가?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긴다는 마음이 앞서 적지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당시 그들의 사정과 외국 문화 수입의 양상을 관찰하였다. 일본에서 촌철살인(寸鐵殺人) 풍자시를 지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다. ‘海國風光 最勝頭’(해국풍광 최승두) 즉 ‘섬나라 풍광이 으뜸이로다.’라는 시(詩)를 짓자, 일본의 조선총독부 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海(해)자를 內자로 (당시 일제는 일본을 내지(內地)라 했다)고치라고 강요했으나 보정은 정색하고 “ 일본은 지리적으로 섬나라(海國)가 아니요? ”하고 고치지 않았다. 그 시(詩)가 동아일보에 발표되자 국내의 유학자들이 모두 음송(吟誦)하며 그의 지기(志氣)를 장하게 여겼다.
1945년 서울로 올라가 인촌 김성수, 근촌 백관수, 몽양 여운형등과 교유하면서 김구 선생 환영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좌우 이념대립에 크게 실망하고 결국 낙향한다. 1956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도 출품 입선하였으며 이어서 1957년에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나 국전의 실상에 크게 실망하고 이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정부의 출사를 권유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지방 교육에 힘쓰며 부귀를 멀리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연을 벗 삼아, 서화와 거문고를 벗 삼아 지내시면서 10권의 연연당 문고를 집필하였다.
효심과 덕망이 두텁고 후진 교육에 심혈을 쏟은 근대교육 후원자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새로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선진 대열에 오를 수 있고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부친께서는 현 고창고등학교를 설립할 때 막대한 자금을 희사하였고 보정은 1934년에 도산 보통학교(현 전북대학교 고창 캠퍼스)를 설립하는데 임야 2천여 평을 희사하였으며 교사를 신축하는 동안 증조고 정사인 만수당에서 본교 입학식을 하고 1년 동안 수업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보정 김정회, 회천 김재종, 김재홍 불망비
광복 후에는 고창 여자 중학교 설립에 2만여 평의 전답도 아낌없이 희사하였으며 생존 시까지 학교 이사를 역임하면서 고창 여자 중학교의 발전에 열정을 쏟았다.
집안 대대로 효심이 극진하고 늘 베풀면서 살았으며 증조부 오형제 우애가 엄청 좋았다. 자연스레 보고 배운 터라 지금까지 후손들이 많이 베풀고 우애가 남다르다. 1939년 대흉년이었을 때 곳간 문을 열어 굶주린 사람들을 널리 구제하고 탕감해주어 많은 주위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사람들은 현 전북대학교 고창 캠퍼스에 들어가는 길옆에 보정 김정회, 부친인 회천 김재종, 그의 사촌 김재홍 세 분의 불망비를 세워 주었으며, 타계한 후에도 사람들은 김정회의 두터운 덕망을 기리고자 도산서당(만수당) 앞에 경모비를 건립하였다. 어느 현감의 공적비보다도 의미가 있고 귀하다고 볼 수 있다.
한 예로 1945년 한가위 날 차례를 마치고 보정 선생은 수십 명의 소작인을 모두 불러 모아, 주연을 베풀고 즉흥시(詩) 한 수를 지어 읊었다. 皆爲自由平等何 上下階級之有哉 ( 개위자유평등하 상하계급지유재 ) -이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되었는데, 어찌 상·하의 계급이 있겠는가! 시를 읊은 후 소작인들에게 전답을 나누어 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서해의 절해고도 상왕등도(위도)로 들어가 자연과 서책을 벗 삼아 1년 남짓 한적하게 세월을 보냈으며 귀향하여 다시 서당을 개설하고 초빙된 훈장들과 더불어 후진 교육에 힘썼다.
또한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선대의 묘각(廟閣)인 경선재(敬先齋)와 양지재(養志齋)를 세우고 영모당(永慕堂) 도암사(道巖祠)의 제전(祭田)을 마련하였다. 나의환 등과 함께 스승인 기우만의 년보(年譜)를 작성하였고 또 만수당 왼편에 회천정사(晦泉精舍)를 지어 선영의 유업을 이어갔다.
대 유학자로 선비로 서예가로 은은한 연향(蓮香)을 맡으며 진한 묵향(墨香) 속에 덕향(德香)까지 겸비한 고결한 기품의 보정 김정회는 1970년 향년 68세에 세상과 하직하였고 고창 문인장으로 그의 가시는 길을 열어드렸다.
보정 선생이 타계한 뒤 8년만인 1978년에 보정 선생의 유고 문집 <연연당문고>를 출간했지만 모두 한문으로 돼 있어 그의 학문과 예술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장손인 김경식 박사는 대학 강단에서 정년퇴임 후 조부의 문집을 우리말로 번역해나갔고 2018년에 첫 번째 결과물 보정 김정회 시집 <梅妻(매처)를 찾아가네> (감수: 연정 김경식, 번역·주해: 호당 이정길) 출간하였다. 이 우리말 번역본은 보정 선생이 쓴 260여 수의 시(詩)와 장문인 2편의 부(賦)로 되어 있다. 시의 주제와 형식이 다양하다. 선생의 시에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자연과 일상 그리고 지인, 친구, 형제, 자신에게 어렵지 않으면서도 꾸미지 않는 진솔함이 돋보인다. 백미는 금강산 절경을 유람하면서 지은 기행 연작시 23수(69~92번)이다. 전체적으로 먹물이 화선지에 배어들 듯 가슴으로 스며드는 한시의 운치가 느껴진다.
꽃담길 (맞담길) 고가로 들어서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정겹게 하는 돌담길을 만난다. 흙과 돌 그리고 암키와와 수키와를 조화롭게 꾹꾹 눌러 박고 훈훈한 마음까지 담아 투박하면서도 절제된 소박함에 심신이 편안해진다. 9월에 가면 양쪽 담벼락에‘온화한 미소’의 꽃말을 가진 ‘흰 꽃 사프란’이 향기를 내고 ‘환영’과‘축복’이라는 꽃말을 지닌 ‘설악초(雪嶽草)가 반갑게 맞이한다.
보정 김정회 고가 보정 김정회 고가는 고창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 후기 고택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29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82년에 축조되어 진사 오도환(吳道恒)이 살았고 사위인 예조참판을 지낸 정택신(鄭宅臣)과 후손들이 살던 집이었는데, 그분들이 지동으로 이사를 가고 1862년(157년 전)에 보정 김정회 선생의 증조부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보정 김정회의 증조부 때부터 살아온 양반가 옥으로 5대째 살고 있다.
김정회 고가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및 2채의 곳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동쪽에 행랑채가 있다. 사랑채 뒤에는 안채가 1m 정도의 높은 기단 위에 위치하며 마당 양측에는 2채의 곳간이 마주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7칸의 규모로 용마루를 얹은 팔작지붕의 남향 건물이다. 정면에서 보면 왼쪽부터 건넌방과 대청. 안방. 부엌 순으로 칸살이 구성되어 있어 일반적인 ‘一’자형 집 같으나 부엌 뒤쪽에 2칸의 방을 덧달아 내어 뒷마당에서 보면‘ㄱ’자 집의 형태를 하고 있다. 대청과 부엌은 각각 2칸의 크기로 상당히 크다. 김정회 고가가 문화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통 가옥구조로 울안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곳간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고가의 특징을 보면 첫째는 일반적으로 안채가 사랑채와 같이 평지에 있거나 안채가 조금 높을 뿐인데 이 고가의 안채는 1m 정도의 높은 기단 위에 있는 것이 다른 집에 비하여 특이하며 색다른 멋이 있다. 또한 안방에 흔히 볼 수 있는 벽장이 아니라 공로가 있다. 요즘 말로는 낮은 다락 같은 거다. 일종의 비밀창고 겸 보물창고다. 안방에 공로가 있는 경우가 드물다. 전통적인 한옥을 보면 안채의 대청과 사랑채의 대청 크기가 다르다. 어디가 더 클까? 안채의 대청이 크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안채의 대청은 안사람의 로비활동 공간이다. 둘째는 마루 전면이 두리기둥(圓柱)이고 주춧돌이 자연석 그대로여서 한층 더 고풍스럽다. 기둥 사이가 짧고 기둥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다. 지붕을 보면 용마루를 높게 꾸미기 위해 수평 마루 하부에 층단을 두어 2단으로 쌓은 층단 마루(層段마루)로 되어 있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착고(着高: 지붕마루의 적새 밑의 기왓골을 막는 숫기와)와 부고(지붕마루에 있어서 차꼬막이 위에 옆 세워 대는 숫기와)를 쌓고 그 위에 암기와 적새(지붕마루를 덮어 쌓은 암기와)를 놓은 다음 처마처럼 내림새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적새를 쌓고 수키와를 덮었다. 이 고가의 용마루는 지네 발 형국이다. 이런 용마루는 그 당시 참판 이상의 가옥에서만 볼 수 있다. 지네 발 형국은 그 집의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기도 하고 지네는 많은 발을 달고 있어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지네가 물을 좋아하듯 화재를 방지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합각에 지네철을 부착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용마루의 암키와를 몇 장씩 쌓느냐에 따라 그 집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암기와는 홀수로 쌓는다. 보통 용마루에 암기와 3장을 쌓지만, 이 고가는 5장을 쌓았고 사찰의 대웅전은 7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셋째는 안마당 한쪽에 팔각형의 돌 세숫대야와 2개의 돌확이 눈에 띈다. 돌 세숫대야에는 일신(日新)이 새겨져 있는데 날마다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새롭게 다짐했으리라. 살아가면서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얼굴빛이 달라진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큰 돌확은 주로 떡 치기 용도이며 작은 돌확은 먹거리 갈기 용도이다. 돌확 앞에는 목간통과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넷째는 양쪽에 곳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만석꾼 집안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곳간 안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양쪽 곳간에 다 저장을 못 해 마당에도 쌓아둘 정도였다. 특히 수천 석의 쌀을 보관했다는 큰 항아리 몇 개가 그 당시 부(副)를 느끼게 한다. 안방마님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물건들과 오래된 농기구들이 자리하고 있다. 30여 년 전에 영화‘과부’를 촬영했던 곳이다.
다섯째 안채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솟을대문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축대의 높이가 약 150㎝이고, 장대석으로 높게 기둥을 쌓고 원형의 장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각 칸에는 2짝 빗살문이 있고 박공판 면에 풍판(風板)을 볼 수 있다. 옛날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선영을 받들어 모시는 데 있어서 고조 이하 아버지까지 4대를 제사하게 되고 가묘가 있는 집안은 4대를 가묘에 신주로 모시고 봉제사(奉祭祀)해 왔다. 그리고 5대조부터는 묘전(墓前)에서 제를 지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전통 의식이다. 이곳 사당에 4대조가 모셔져 있으며 보정 김정회의 장손인 김경식 교수는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매안제(埋安祭)와 길제(吉祭)를 드리며 정성으로 선영을 모셨다. 매안제는 가묘를 모시는 가정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상기(喪期)가 끝나면 부모를 사당에 입묘하기 때문에(사당에 들어가심) 5대조는 출묘하여 산소 옆에 매안(埋安) 하는 제례이다. 또한 길제는 사당의 봉사자였던 부친이 입묘함에 따라 사당 봉사자가 본인(김경식 교수)으로 바뀌기 때문에 사당의 선영 앞에 이제 부친의 상기(喪期)를 끝내고 부친을 입묘하게 됨을 고하고 또한 신주에 대해 개제(改題)하게 됨을 고하는 제례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이른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은 사대부의 의무였지만 핵가족화로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는 요즈음 이렇게 제례를 드리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명문가로서 전통을 지켜나가도록 대대로 후손에게 남긴 훈교가 있다. 고가를 둘러보면 가풍을 엿볼 수 있는 글귀들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대대손손 살아가면서 집안 특유의 분위기와 생활 태도, 윤리적 규범들이 만들어진다.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이 고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특히 안방 벽에‘육조목’이 눈에 띈다. 보정 김정회의 증조부가 공음면에서 도산으로 이사 온 후 150여 년 동안 전설로 된 가훈을 보정 선생이 돌아가시던 날 (1970년) 아침 일찍 일어나 직접 써서 벽에 붙여 놓으시고 그날 오후에 운명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示璟孫輩六條 (시경손배육조)- 손자 경식 형제에게 가르치는 육 조목
1.出言以信 (믿음 있게 말하라) 2.行己以潔 (깨끗하게 행동하라) 3.御家以法 (법도 있게 집안을 이끌어라) 4.奉先以誠 (정성으로 선영을 받들어라) 5.處事以愼 (일은 신중하게 처리하라) 6.接人以和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이 6개 조목을 나는 한 가지도 능히 행하지 못하였다. 내가 능히 행하지 못했기에 너희들에게 바라는 바이니, 너희들은 그 점을 가슴에 새기고 힘써야 한다. 증자가 말하기를 “새가 죽으려 할 때는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라고 하였다. 아! 내가 장차 죽게 되어서 하는 이 말이 헛되지 않는다면 생사에 아무런 유감이 없겠다. -경술년 시월 상순 늙은 할아비가 보도 산실에서 쓰다. -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남기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남은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해나가야 할지 메시지를 주고 있다.
사랑채 본래는 초가였으나 새마을 운동 때 기와로 다시 올렸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옛 분위기가 덜하다. 문틀 위에는 ‘보정서실(普亭書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시. 서. 화 일가를 이루었고 그 옛날에는 많은 시객과 주위의 선비들이 밤을 새워 논했으리라. 사랑채 툇마루 옆 평상이 이 집에서 제일 시원하다고 한다. 사랑채는 정면 6칸의 일자형 집이다. 전후 툇집 구조로 전퇴에는 마루를 깔았고 후퇴는 주로 뒷방과 벽장 등 수장 공간이 있다. 칸살은 책방. 대청. 큰방. 아랫방 순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쪽 끝 칸은 안대문을 만들었다. 본래 여기는 사랑 부엌 자리였으나 안대문을 옮긴 것이다. 사랑채 동편에는 행랑채가 사랑채와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도산서당(道山書堂)-고창군 향토 문화유산 2호
도산서당은 17c 후반에 세워진 전북의 대표적인 서당이다. 영조(英祖) 때 진사 오도환(吳道恒)이 세워 자신의 자제와 인근 아이들을 교육하였고 예조참판인 사위 정택신(鄭宅臣)이 물려받아 관리하였으며 1862년 보정 선생의 증조부 만수당 김영철이 매수하여 옛 서당을 헐고 새 건물을 짓기를 원하자 장손인 회천 김재종이 1907년에 새롭게 건립하고 부친 호를 따 만수당(晩睡堂)이라 하였다. 도산서당을‘섬뜸 서당’이라고도 한다. 이는 인가로부터 50ⅿ쯤 떨어졌고 주위에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 학동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했으며 1934년 도산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교실이 준비되기 전까지 1학기 동안 수업을 하던 곳으로 서당교육과 근대교육을 연결해주는 과도기의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당대 명사들 교우의 장으로 교우 관계를 보여주는 많은 시문과 송사 기우만이 쓴 「만수당기(晩睡堂記)」가 만수당 안에 걸려 있다. 후대에까지 많은 선비가 이곳에서 배출됐고 향촌의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1940년 말까지 계속됐으며 보정 김정회의 장손인 연정 김경식 교수의 7형제들이 대학생 때 방학이 되면 이곳에 모여 인근 학생들과 토론도 하고 추억이 있는 교육의 장소였다고 한다.
편액은 조선 말기의 정치인이자 서예가인 해사 김성근이 행서로 썼고, 만수당기는 기우만이 짓고 썼으며, 만수당 후기는 금성 오준선(吳俊善)이 썼다. 만수당에 대한 내력을 적은 시문과 주련이 있다. 주련은 윤두수의 11대손이며 구한말 대사성,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던 문신이며 서화가였던 석촌 윤용구(石村, 石邨 尹用求·1853∼1937)가 썼다. 인륜의 도리인 삼강(三綱)인. 의. 예. 지. 의와 오상(五常)을 확고하게 세운다는 의미의 글이 적혀 있다. 기단의 네 모퉁이에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받기 위한 돌확이 놓여 있다.
만수당(晩睡堂) 주련(柱聯) -석촌 윤용구
維持道義詩書在(유지도의시서재 )도의(道義)를 유지하는 힘은 시.서에 있고 扶植綱常日月照(부식강상일월조 ) 강상을 바로 세우니 일월이 비치네 時建徽言爲士則(시건휘언위사칙 ) 때에 따라 아름답게 말하는 것은 선비들의 철칙이요 世傳淸德有人知(세전청덕유인지) 대대로 전하는 맑은 덕을 사람들이 알아 주는구나 茶煙半榻寫墨竹(다연반탑사묵죽) 차 달이는 자욱한 연기 속에 탑사에서 묵 죽을 치고 花雨一庶觀白鷗(화우일서관백구) 키질하듯 꽃잎들이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갈매기를 보네. 敎幅靑山世外患(교폭청산세외환) 청산의 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세상 밖의 근심이요. 一輪明月心中照(일륜명월심중조) 둥두럿이 떠 있는 밝은 달이 마음속을 비추 는구나
만수당 옆 연못가에 아담한 정자가 있다. 정자 주변에는 고목인 이팝나무가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최근에 고사하였다. 돌로 축대를 쌓은 연못이 있어‘수정’이라 붙인 것이며. 수(水)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으로, 수성(水性)만 잘 지키면 화난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 ‘수정’이란 편액은 보정 김정회가 행서로 썼다. 아주 작은 편액이지만 글씨는 수려하며 단아한 필획으로 구사했다. 상낙세가(上洛世家)와 증손정회(曾孫正會)라고 각자 되어 있어 증조를 향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 참고 > 김영철(金榮喆 1842(헌종 8년)~1911)은 고창 출신의 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삼(明三)이고 호는 만수당(晩睡當)이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와 무장현감 미암 유희춘(眉巖柳希春) 등과 유유상종했던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의 후손이고 진사(進士) 김양대(金養大)의 장남이다. 1842년(헌종 8)에 공음면 선동리(扇洞里)에서 출생하여 20세 때 고창읍 도산리(道山里)로 이사했다. 자질이 총명하였고 효심이 깊어 부모를 잘 섬겨 정성을 다했다. 또한 부모의 상사(喪事)에 시묘살이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남다르며 선영에 묘비를 세우고 제전(祭田)을 갖추었다. 그는 1895년 명성황후(明星皇后)가 시해되어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의병을 일으킬 때 고창의 책임자로 추대되어 소임을 다하였고 흉년에는 구휼에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53세에 진사가 되고 만년에 만수당(晩睡堂)을 일으켜 향리 자제를 가르쳤다. 저서로는 만수유고(晩睡遺稿) 1책이 있다. 회천 정사(晦泉精舍)
만수당 동편에는 회전 정사가 있다.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는 본가 앞에 부친을 위해 회천정사를 건립했는데 광복 후 만수당 동편으로 이전하니 만수당이 더욱 규모를 갖추었다. ‘회천정사’ 편액은 보정이 아버지를 위하며 썼고, 바로 밑에 있는 ‘회천정사기’는 노탄 송규헌이 무인년 가을에 짓고 썼다. 회천이 주자를 흠모하면서 덕을 기르고 인(仁)으로 삼았는데, 이는 아들 김정회가 글을 부탁하여 지어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1947년 보정의 장손인 김경식 교수가 이곳 회천정사에서 글을 배울 때 훈장님이 “쇄소응대(灑掃應待)를 중히 여겨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개고 물을 뿌리며 마당을 쓸고 집안 어른이 부르면 얼른 손을 놓고 달려가 공손히 말씀을 기다리는 것은 모든 배움의 시작이란 뜻으로 아무리 훌륭한 공부를 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부터 배워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공부할 때는“항상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해보라.”라고 말씀하실 때 어린 나이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가르침은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하셨다.
< 참고 > 회천(晦泉) 김재종(金在鍾): 만수당 김영철의 손자로 호는 회천이다. 숙부인 항재 김순묵(보정선생 종조부)에게 글을 배우고 20세에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배웠다. 또한 1922년 현 고창고등학교를 설립할 때 막대한 자금을 희사했으며 설립재단 초대 이사를 지냈다. 일찍 학문을 성취했으나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할 뜻을 접고 부모를 모시면서 후생 교육을 사명으로 알고 도산서당에서 강학하면서 당대의 석학인 고당(顧堂) 김규태(金圭泰 1902~1966),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 1901∼1960), 석농(石儂) 이동범(李東範) 등과 시문으로 교유했다. 저서로 회천집(晦泉集) 4권 권 1책이 있다. 고가를 지키고 있는 연정 김경식 교수는 “ 내 고향의 산, 물, 공기, 내가 보고 마시기에는 언제나 질리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탁하지도 않다. 내 조상이 보고 마셨고 나 또한 그분들의 뒤를 이어 보고 마시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 참고 문헌 > 梅妻(매처)를 찾아가네-보정 김정회 시집 황혼의 강변을 거닐며(연정 김경식) 고창의 교육문화(연정 김경식) 전북중앙신문 민족 대백과. 고창군지. 고창군 마을집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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