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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난고(益齋亂藁) 이제현(李齊賢)생년1287년(고려 충렬왕 13)몰년1367년(공민왕 16)자중사(仲思)호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櫟翁)본관경주(慶州)초명지공(之公)시호문충(文忠)
益齋亂稿卷第七 / 碑銘 / 有元高麗國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彥陽府院君。贈諡貞烈公金公墓誌銘。幷序。
| 金倫 | 1277 | 1348 | 彥陽 | 無己 | 竹軒, 戇村 | 貞烈 | 彥陽府院君 |
公姓金氏。諱倫。字無己。號竹軒。又號戇村。雞林彥陽人也。曾大父。皇太師門下侍郞平章事贈諡威烈公諱就礪。大父。皇太傅門下侍郞平章事贈諡翊戴公諱佺。考。皇都僉議參理集賢殿大學士監脩國史贈諡文愼公諱賆。妣。皇陽川郡大夫人許氏。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贈諡文敬公諱珙之一女。以至元十四年丁丑夏六月二十有九日丁亥。生公。十七年庚寅。哈丹寇我疆。我遷都江華。文敬爲冢宰。殿國人之後。命公挈家以先。公年十四。指畫如成人。一族賴之。蔭補鹵簿判官。轉典廏丞。由別將陞郞將。爲牽龍行首左都知右中禁二指諭。拜神虎衛護軍兼監察侍丞。累遷獻部議郞,典符令,中門使兼司憲執義,提點,典符,密直,右副承旨。以檢校僉議評理階匡靖大夫。出刺忠,水,益三州。入爲讞選二部典書,密直副使。以慶尙,全羅都巡問使鎭合浦。加僉議評理,商議會議都監事,三司左右使。封彥陽君。階重大匡。號推誠贊理功臣。又加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號推誠守議協贊功臣。遂拜左政丞。未幾乞退。封府院君。階壁上三韓。號加輔理二字。此歷官出處太略也。其爲護軍也。洪忠正子藩。擧以爲辨正都監副使。有巨室與鄕民爭一女奴。子孫百口。公閱其籍曰此某代某相。某歲月與諸子立券者。距今玆若干年矣。齒女奴子若孫以較。先後相懸。而女奴之名。一字微偏。豈改魚爲魯者乎。某相諸子俱有後。當家置籍一本。盍取而考其異同。如其言。巨室遂詘。其爲侍丞也。某甲乙二人爭家口。乙曰。先世嘗訟于臺。知臺姓許忘名。別白而分與之甲所得物。故無由孼。乙家幸得蕃殖因遺。火亡其籍。甲幸災。誣乙爲兼幷爾。公默計歲月曰。所謂許知臺。必吾家文敬公也。命吏檢當時印簿。所分名數俱存。以詰甲。甲亦詘。其精詳多類此。內臣挾憾。手敺五品郞殿門。公劾論甚峻。兼劾證左。言不以實爲內臣地者。內臣者方有寵。證左亦達官大族。排根公左官爲州。時大修宮室及佛廟。驅民就役使者旁午。皆憚公。非不得已。莫敢入境。州人賴以息肩。其鎭合浦也。軍將不敢以緩急私撓於民。州郡不得以喜怒妄加於吏。天子之使來觀之。卒乘之肅。號令之嚴。無不竦然以敬。及與之游畋。左右馳射。舍拔屢中。則又歡然以樂。所至稱道不容口。公嘗從忠烈王入朝。忠宣王日候于邸。從臣慕顧退縮。公身兼數任。獨侍左右。忠烈嘉其志。忠宣亦待以禮。毅陵見留京師五年。瀋王得幸天子。群不逞之徒誘脅國人。上言願得瀋王爲主。公與弟禑。獨不署名狀中。或私於公曰。違衆自異。若後悔何。公罵曰。臣無二心。職耳。何後悔之有。曹頔搆亂。自速兵死。永陵命公訊其黨于巡軍萬戶府。一府嫉其從逆勇。欲栲掠痛理。公曰。此輩詿誤於曹頔指嗾。何足責哉。若使傷肌膚毀筋骨。必謂我枉法強服以欺朝廷。乃弛其刑。囚感悅。首罪無隱。永陵被徵。道召公與偕。公年過六旬。聞命馳赴。數日及之鴨綠江。至則丞相伯顏。奏令五府官雜問。而力右頔黨。頔黨多利口。公折以片言。辭理簡直。五府官改容。目之爲白鬚宰相。永陵得釋東歸。襲爵四年。讒構蝟毛。天子賜以襲衣尊酒而籠普寔來。繼遣朶赤頒德音。王出迎。朶赤露刃扶王。載一騎馳去。公時家居。聞變遽起。痛不及奔問。詣籠普。又知其不可以義感。退與宰相言所以乞哀朝廷者。咸曰。陪臣犯天威。恐有大譴。公慷慨責之曰。君臣。父子也。子而救父。孰以爲罪。畏罪不救。可謂子乎。於是始議上書。卒不果。公終身憤憤。形於言色。公主與嗣王。訪公請諡事。對曰。先王不返。徒以憸壬。斂怨累德。今其禍首猶在。必先擧正厥罪。以明先王非辜。然後可請。因疏其人罪惡上之。兩宮感悟。轉呈朝廷。授公改正贈諡二請表入奏。謝曰。臣桑楡之年七十又二。恐顚擠道路。以辱明命。未死敢不勉。退而理裝行有日矣。遽得風疾。十日不飮水漿。令左右扶起。具衣冠。趺坐而逝。實至正八年戊子二月二日也。訃聞。輟朝三日。官庀葬事。贈諡貞烈公。是月二十四日。窆于大德山感應寺之巽岡。祔文愼公兆域。遵理命也。公喜觀書。多識典故。有問。響應無疑。仁於宗姻。信於故舊。見其來。必置酒。竟日極歡。聞其病。每市藥。造門相視。悃愊如漢吏。而疾惡嘉善之公。無擇於戚疏。曠達若晉士。而愛君憂民之切。不渝於夷險。故賢者慕其行。不肖者畏其義。街童巷婦。聞稱竹軒。亦能知其爲公也。夫人副知密直司事崔諱瑞之女。先一年沒。贈卞韓國大夫人。生七男二女。曰可器。版圖摠郞金海府使。先沒。曰敬直。重大匡陽城君。曰宗烜。出家爲華嚴師。曰達岑。亦出家爲禪師。曰淑明。開城判官。曰希祖。典理判書藝文提學。曰承矩。通禮門副使。女一適驪興君閔思平。一適宗簿令金輝南。亦先沒。輝南化平人。擧公非一金也。庶出男曰穢迹。二女未適人。某辱知於公。見謂詩友。而希祖又委禽爲子壻。於其謁銘。義不可負。謹取李執義達衷善狀。檃括而爲序。且系以辭。嗚呼。風敎之移世也。剛可使繞夫指兮。方可使內夫枘也。鼎柱車不尙烹兮。冠苴履不愧弊也。允也貞烈兮。溫而厲儼而和也。松柏乎歲寒兮。砥柱乎頹波也。榮慕而瘁擯兮。我獨敦乎信也。害違而利從兮。我獨全乎忠也。化斯民之庶幾兮。有諸己之不啻也。胡登庸而惠疇兮。旋脫去若棄屣也。雖謝事而杜門兮。寧一飯而妄吾君也。惓惓乎刷恥于國兮。汲汲乎除民之賊也。嗚呼如公兮。當求諸古人之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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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집(陽村集) 권근(權近)생년1352년(고려 공민왕 1)몰년1409년(조선 태종 9)자가원(可遠), 사숙(思叔)호양촌(陽村)본관안동(安東)초명진(晉)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이색(李穡)의 문인, 정도전(鄭道傳)ㆍ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유
陽村先生文集卷之三十五 / 東賢事略 / 金政丞諱倫
| 金倫 (1277~1348) | 金政丞諱倫 | 傳 | 權近 | 陽村集 |
公字無己。號竹軒。又號贛村。彥陽人。曾祖門下侍郞平章。諡威烈公就礪。祖太傅平章事。諡翊戴公佺。考僉議參理。諡文愼公賆。母許氏。中贊文敬公珙之一女。忠烈王庚寅。公年十四。時哈丹寇我疆。國人入江都避之。文敬爲冢宰。留守舊都。以殿國人之後。命公挈家以先。公指畫如成人。歷任中外。處事剛明。常從忠烈入朝。忠宣日候于邸。二王皆嘉其志。至治中。忠肅被誣。徵留京師五年。瀋王得幸於天子。誘䝱國人。使上言願得瀋王爲主。公獨不肯署名。或私於公曰。若後悔何。公罵曰。臣無二心。職耳。何悔之有。至元之季。忠肅薨。曺頔搆亂。謀廢忠惠。不勝伏誅。公與韓文節公宗愈治其倘。獄成驛聞。丞相伯顏右頔倘。顧奏徵忠惠。公等從之。至則令五府官雜問。頔倘多利口。公折以片言。五府官皆改容目之。會伯顏死。王得解東歸。累遷至左政丞。至正戊子。得疾。十日不飮水漿。令左右扶起。具衣冠端坐而逝。年七十二。諡貞烈。公喜觀書。多識典故。有問響應。仁於宗姻。信於故舊。見其來。必置酒極歡。聞其病。必市藥相視。
양촌선생문집 제35권 / 동현사략(東賢事略) / 정승 김륜(金倫)
공의 자는 무기(無己)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또 다른 호는 당촌(戇村)인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증조는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으며 시호가 위열공(威烈公)인 취려(就礪)요, 할아버지는 대부평장사를 지냈으며 시호가 익대공(翊戴公)인 전(佺)이요, 아버지는 첨의참리를 지냈으며 시호가 문신공(文愼公)인 변(賆)이요, 어머니 허씨(許氏)는 중찬 문경공(文敬公) 공(珙)의 맏딸이다.
충렬왕 경인년(1290)에 공이 14세였는데, 합단(哈丹)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자 국인(國人)이 강도(江都)에 들어가 난을 피하였는데, 문경공이 총재가 되어 송도(松都)를 지키면서 뒤를 맡고, 공에게 가족을 데리고 먼저 가게 하니 공이 지휘하고 계획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내직(內職)ㆍ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는 처사(處事)가 강명하였으며, 일찍이 충렬왕을 따라 입조(入朝)하였을 적에 충선이 날마다 충렬의 관저로 와서 문후하였는데, 그때 공이 항상 모시고 있었으므로 두 왕은 모두 공의 뜻을 가상히 여겼다.
지치(至治) 연간에 충숙이 무고를 당해 경사에 불려가 5년간 머물러 있었는데 심왕(瀋王)이 천자의 굄을 얻어 국인을 위협하여 ‘심왕으로 임금 삼기를 원한다.’고 상언(上言)하게 되었으나 공만이 서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사적(私的)으로 말하기를,
“그러다가 후환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니, 공이 꾸짖기를,
“신하는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직책대로 할 뿐인데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였다. 지원(至元) 말에 충숙이 훙(薨)하매, 조적이 난을 일으켜 충혜왕을 폐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베임을 당하자, 공이 문절공(文節公) 한종유(韓宗愈)와 그 무리를 다스려 옥사(獄事)가 성립되어, 역마로 승상 백안(伯顔)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백안은 적(頔)을 옹호하여 도리어 황제에게 아뢰어 충혜왕을 불렀으므로 공 등이 따라갔는데, 이르자마자 오부(五府)의 관리를 시켜 여러 가지로 심문하였다. 적(頔)의 무리가 교묘하게 잘 꾸며댔지만 공이 한마디로 결단하니 오부의 관리가 모두 얼굴빛을 고쳐 예우하였다. 마침 백안이 죽었으므로 왕이 풀려나서 귀국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좌정승(左政丞)에 올랐고, 지정(至正) 무자년(1348, 충목왕4)에 병이 들어 10일 동안 물 한 모금 못마시다가, 좌우(左右)로 하여금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는 의관(衣冠)을 갖춰 입고서 단정히 앉아 죽으니, 나이는 72세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공은 글읽기를 좋아하여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므로 묻기만 하면 곧 대답하였다. 친척에는 인애(仁愛)하였고, 친구에는 신의가 있어 친구가 찾아오면 반드시 술을 내어 마음껏 즐겼으며,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약을 사 가지고 가서 문안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기태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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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稼亭集) 이곡(李穀)생년1298년(고려 충렬왕 24)몰년1351년(충정왕 3)자중보(中父)호가정(稼亭)본관한산(韓山)초명운백(芸白)시호문효(文孝)특기사항이제현(李齊賢)의 문인
稼亭先生文集卷之十九 / 律詩 / 哭竹軒
| 金倫 | 1277 | 1348 | 彥陽 | 無己 | 竹軒, 戇村 | 貞烈 | 彥陽府院君 |
一身存沒寄安危。此日那堪爲國悲。紀德異時窮竹帛。質疑無處覓蓍龜。勤勤濟物閑中藥。往往驚人醉裏詩。恨不壽公留數歲。三韓會有太平期。
가정집 제19권 / 율시(律詩) / 죽헌(竹軒)을 애도하며
일신의 존몰에 국가의 안위가 걸린 분 / 一身存沒寄安危
이날 어찌 나라 위해 슬퍼하지 않을쏜가 / 此日那堪爲國悲
그 공덕 뒷날 사책에 가득 전해질 터이지만 / 紀德異時窮竹帛
이제는 시귀를 잃어서 질의할 곳도 없구나 / 質疑無處覓蓍龜
부지런히 병을 구제한 한가함 속의 약물이요 / 勤勤濟物閑中藥
이따금씩 사람을 놀라게 한 취중의 시구였네 / 往往驚人醉裏詩
공이 몇 년이라도 더 사셨으면 좋았을걸 / 恨不壽公留數歲
삼한이 지금 마침 태평의 기회 맞았으니 / 三韓會有太平期
[주-D001] 죽헌(竹軒) : 김륜(金倫 : 1277~1348)의 호이다.[주-D002] 시귀(蓍龜) : 점을 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으로, 국가에서 그처럼 믿고서 의지할 수 있는 원로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
稼亭先生文集卷之十九 / 律詩 / 次韻哭竹軒
喬木東韓有世臣。年來不慗嘆何頻。竹軒風月三千首。鐵卷山河五百春。自是銛鋒能挫物。不妨偉量解容人。燕臺聞訃已成哭。此日題詩恨轉新。
禮義門中詩酒塲。黑頭功業笑馮唐。不知造物將何意。人不如公老更強。
[주-D001] 慗 : 憖
가정집 제19권 / 율시(律詩) / 차운하여 죽헌(竹軒)을 애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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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한에 있는 교목의 세신들 / 喬木東韓有世臣
연래에 자주 발하는 불은의 탄식 / 年來不憖嘆何頻
죽헌에서 읊은 삼천 수의 풍월이요 / 竹軒風月三千首
철권에 기록된 오백 춘의 산하로다 / 鐵券山河五百春
분명한 언설로 상대를 제압하였나니 / 自是銛鋒能挫物
큰 도량으로 포용한 것도 무방했어라 / 不妨偉量解容人
연경에서 부음 듣고 이미 애도하였지만 / 燕臺聞訃已成哭
오늘 시를 지으려니 한이 더욱 북받치네 / 此日題詩恨轉新
예의를 지키면서 시주의 풍류를 즐기시고 / 禮義門中詩酒場
흑두의 공업 세우면서 풍당을 냉소하신 분 / 黑頭功業笑馮唐
조물의 뜻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네 / 不知造物將何意
공보다 못한 사람들은 늙을수록 강해지니 / 人不如公老更强
[주-D001] 교목(喬木) : 몇 대에 걸쳐서 크게 자란 나무라는 뜻으로, 누대에 걸쳐 경상(卿相)을 배출한 명가(名家)를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주-D002] 불은(不憖)의 탄식 : 하늘이 국가를 위해서 원로를 이 세상에 남겨 두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원로 한 분을 아껴 남겨 두어서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는 말이 나온다. 또 공자(孔子)가 죽었을 때에 노나라 애공(哀公)이 내린 조사에도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나라의 원로를 조금 더 세상에 있게 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와 임금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구나.〔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屛余一人以在位〕”라고 탄식한 구절이 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주-D003] 철권(鐵券)에……산하(山河)로다 : 철권은 옛날에 임금이 공신에게 내려 주어 면죄(免罪) 등의 특권을 누리게 한 증명서를 말하는데, 철제(鐵製)의 계권(契券)에 단사(丹砂)로 썼으므로 보통 단사철권(丹砂鐵券)이라고 부른다. 한 고조 유방(劉邦)이 개국 공신들을 책봉하면서 “황하가 변하여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바뀌어 숫돌처럼 될 때까지, 그대들의 나라가 영원히 존속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할 것을 맹세한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家永寧 爰及苗裔〕”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김륜(金倫)은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옹립하려는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하고 처리할 때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고,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에도 군신의 의리를 강조하며 구명 운동에 앞장섰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등공신에 추성찬리 공신(推誠贊理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주-D004] 분명한……제압하였나니 : 원나라에 잡혀간 충혜왕을 구명하기 위해 청원 운동을 벌일 적에 김륜이 “신하는 임금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처는 지아비에게 마땅히 그 은의(恩義)를 다할 뿐이다. 그 아비가 처벌을 받는데 아들 되는 자가 차마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제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이냐.”라고 하여, 반대 의견을 제압하고 여론을 주도했던 것을 말한다. 《高麗史 卷110 金倫列傳》[주-D005] 큰……무방했어라 : 조적의 당여(黨與)를 신문할 적에 혹형(酷刑)을 없애고 형신(刑訊)을 완화하며 부드럽게 대하자, 수인(囚人)들이 감복하여 죄상을 자수함으로써 옥사가 원만히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을 가리킨다.[주-D006] 흑두(黑頭)의……분 : 김륜이 목숨이 위태로운 불리한 상황에서도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여 난국을 잘 수습했다는 말이다. 송나라 구양철(歐陽澈, 1097~1127)이 선화(宣和) 4년(1122) 12월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사람들과 높은 누각에 둘러앉아 차를 달여 마시고 있었으며, 좌우에는 돈이 쌓여 있었다. 차를 다 마신 뒤에는 함께 시집을 읽었는데, 시는 선현이 지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영숙(永叔)이 읽으라고 쓰여 있었으므로 읽기 시작하였는데, 3수를 읽고는 퍼뜩 꿈에서 깨었다. 그 시들 중에서 단지 한 구절만 기억났는데, 그것은 “동야(東野)가 늙고 병들어 초록색 옷을 입고 돌아가네.”라는 것이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의논하는 자들이 길조가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구양수가 동야의 의사에 의거해서 불길한 그 뜻을 뒤집어서 절구 4수를 지었는데, 그중의 한 수가 “동야가 늙고 병들어 초록색 옷을 입고 돌아가니, 분주히 치달리는 일에 지쳐서 평릉으로 은퇴하려 함이라네. 머리가 검은 나는 공명을 세우려고 하니, 백발을 드리운 풍당은 냉소한다네.〔東野龍鍾衣綠歸 平陵投老倦奔馳 黑頭我欲功名立 冷笑馮唐白髮垂〕”라는 것이었다. 《歐陽修撰集 卷6 宣和四祀季冬夢與人環坐……》 영숙은 구양수의 자이다. 동야는 한유(韓愈)의 절친한 친구로 불우한 일생을 보낸 맹교(孟郊)의 자이다. 초록색 옷은 하급 관원의 복장이다. 풍당(馮唐)은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부터 이미 장년의 나이로 벼슬하여 계속해서 세 조정을 섬기다가 무제(武帝) 때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으나 이때는 그의 나이가 90여 세나 되었으므로 다시 임용될 수 없었던 불우한 사람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