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도산골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목실골과 배오지에도 원천과 단천과 내살미 하계마실에도 웃토계와 양평에도 의인 섬마 분강촌에도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가루 떡가루를 쉬지 않고 엄청나게 자꾸 자꾸 뿌려 댔다. 등굣길에 애일당을 지나서 도산서원 앞에 이르자 점차 눈망울이 굵어지더니 조동골을 지날 때는 산천이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했다. 섬마 솔밭과 시사단도 설국 속으로 사라졌다. 서원 강나루를 떠나서 섬마로 건너가던 나룻배가 점점 검회색 점으로 변하더니 이내 엄청난 눈발 속에 묻혀서 잿빛 하늘나라로 노를 저어 올라가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큰 눈이 내리는 도산골 풍경이 만들어낸 도원 같은 장대한 풍광이었다.
♤사진 설명(caption) 및 출처 : 첫번째 사진은 목실골 삽지껄인 걸의 주변 풍광이고 두번째는 원천 동네 전경이고 세번째는 도산국민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길 양쪽으로 논밭들이 보이고 저멀리 다리 건너 하계 마실도 한눈에 들어온다. 네번째 사진은 1975년 수몰 전 도산서원 강 건너 섬마에 있던 솔밭 전경이다. 솔밭 속에는 소각인 시사단의 모습도 보인다. 강나룻터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도산서원 별유사로 있는 도산국민학교 54회 졸업생인 이동채 선배님이 보내주셨다.
다섯 번째 사진은 "나룻배를 타고 미실장터로 향하는 박시골 우지마 여인들"이다. 1970년대 도산서원 정문 아래 강나룻터에서 강 건너 시사단이 있는 섬마을을 무던히 오가던 그 나룻배와 영락없이 닮았다. 그리움이 가득히 묻어나는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사진이다. 2018년 안동시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 "안동댐 수몰마을 생활사 아카이브 사진전"에 전시한 사진이다(2018.12.11~15. 잃어버린 고향, 다시 찾은 마을, 장소: 안동군 와룡면 행정복지센터 2층). 사진의 제목은 "나룻배를 타고 미실장터로 향하는 박시골 우지마 여인들". 여섯 번째 그림은 분천동 아랫마을에 살았던 조각 예술가인 종친 재필이 아재가 2020년에 그린 수몰 전 1970년대의 분강촌 전경이다.
♤사진 설명(caption) 및 출처 : 한겨울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낙동강 강변을 따라 십 리 등굣길을 걸으면서 보았던 신작로 주변 풍광이다. 첫번째 사진은 샅골 앞에서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이다. 옛날 사람들은 샅골을 살골 혹은 전곡이라고도 불렀다. 이 골로 올라가면 석간대가 나온다. 석간대는 지금의 도산서원 주차창 아래 선착장 오른편 산비탈 지대와 주차장 입구 뒷산 일대이다. 사진 오른편 중앙에 섬마 솔밭이 보인다. 솔밭 속에는 시사단이 있었다. 1960년대 촬영한 사진인 듯 싶다. 갓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은 어르신의 모습이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산서원 앞 낙동강물이 고여서 만든 탁영담이 넘쳐 흘러 이 여울을 만들었다. 사진 작가는 미상이다. 두번째 사진은 도산서원 입구 주변 환경이 전혀 정비가 되지 않은 모습이다. 1960년대 이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학교 다닐 때 매일 도산서원 앞으로 등하교를 했지만 이런 도산서원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생소하게 다가온다. 사진 중앙에 오목한 지점이 도산서원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나무는 섬마 솔밭에 있던 소나무들이다. 시사단이 있었던 섬마 솔밭에서 강 건너 도산서원을 바라보며 촬영한 전경이다. 사진 작가는 미상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학교 마당에도 온통 하얀 주단으로 도배를 했다. 널따란 운동장에도 난리가 났다. 참새들과 비들기들과 까치들과 까마귀들과 박새들이 겨울운동회를 한창 열고 있었다. 토계마실에 사는 검둥이와 누렁이와 삽살개와 진돗개와 애누와 야옹이와 살찐이까지 몰려와서 달리기 경주를 했다. 비들기가 심판이 되어 야단을 지겼지만 함박눈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자 까마귀로 급히 바꾸기도 했다. 함박눈을 머리에 가득히 이고 진 플라타너스 가지들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딱~ 딱~ 큰소리를 내며 부러지기도 했다. 점차 굵어지는 왕눈발이 아이들과 선생님들과 겨울운동회를 하고 있는 귀여운 친구들을 더욱 들뜨고 즐겁게 만들었다.
교실 안도 분주했다. 눈뭉치가 마루바닥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딩굴고 있었다. 난로에 넣고 지필 장작을 얻기 위해 당번들이 본관 오른쪽 여불떼기에 달린 창고 안으로 우르르 몰려 갔다. 내살미에 사는 순하디 순한 김성년 소사 선생님께서 반별로 다섯 개씩 크고 작은 장작을 타러 온 순서대로 팔 위에 올려놓아 주었다.
난로 속에서 시뻘건 장작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군불처럼 잘도 탔다. 난로 옆에 책상이 있던 원천 흥구와 위자가 제일 먼저 난로 위에 벤또를 올렸다. 이어서 매내에 사는 용필이와 옥화가 토계 응구와 원근이가 양평에 용철이와 혜경이가 배오지에 수갑이 섬마에 석철이 철연이 해수가 의인에 도윤이 용춘이 재열이 옥순이 창우가 목실골에 미화와 재순이 유국이가 연이어 포개서 층층이 마구 가지껏 얹었다. 부내 용규와 재락이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보자기에 싸온 고구마와 감자를 네댓개 난로 옆구리에 갖다가 붙여 놓았다. 난로 위가 금새 쌓아 놓은 도시락으로 천장에 닿을 듯이 높아져 보였다. 재수 옆에는 같이 등교한 백구가 난로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추위를 녹이고 있었지만 주인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영란이와 미영이 종희 매화가 백구한테로 우르륵 몰려가서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순둥이 백구가 나른해진 듯 책상 옆에서 소록소록 잠이 들었다. 따뜻한 교실 안은 도타운 정들이 감도는 진풍경으로 가득했다.
여전히 창밖에는 왕눈발이 쉬지 않고 펑펑 내리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새들과 동물들이 하고 있는 겨울운동회도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난로 위에 올려 놓은 누런 도시락들과 감자 고무마도 한껏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맛나게 구워지고 있었다.
♤사진 설명(caption) : 자하봉 아래 널따란 학교 마당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한 운동장에는 겨울새들과 강아지들과 아이들이 함께 엉겨서 딩굴며 예쁜 겨울 동화를 쓰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산골의 그림 같은 겨울 풍경이었다. 1974년 어느 겨울날 큰 눈이 내리는 도산국민학교 운동장 전경을 묘사해 보았다. 폭설이 내려서 교실 창문까지 수북이 눈이 쌓였다. 난로에 지필 장작을 배급받던 창고가 건물 오른쪽 귀퉁이 아래에 작게 보인다.
♤사진 설명(caption) 및 출처 : 교실 안 난로 속에는 시뻘건 장작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군불처럼 잘도 탔다. 난로 위에 올려 놓은 누런 도시락들과 감자 고무마가 한껏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맛나게 구워지고 있었다. "도산국민학교 58회 동창회 카페", "추억의 마당" 속에 수록돼 있는 사진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땡~땡~땡~ 하고 첫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김옥근 담임 선생님께서 풍금을 타는 음악시간이 시작됐다.
"자~ 여러분~ 온 세상이 하얀 눈 세상으로 변했어요. 오늘은 신나게 흰 눈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게 좋겠죠"
"네~~~~"
"여러분~ 모두 일어나서 함께 율동을 하며
'펄펄 눈이 옵니다'를 크게 불러요. 교실 바깥 운동장에서 겨울운동회를 하고 있는 귀여운 친구들도 모두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아시겠죠~"
"네~~ 선생님~"
펄펄 눈이 옵니다
바람 타고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 송이 하얀 솜을
자꾸 자꾸 뿌려줍니다
자꾸 자꾸 뿌려줍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 자꾸 뿌려줍니다
자꾸 자꾸 뿌려줍니다
"자~ 여러분~ 계속해서
"꼬마 눈사람" 이어 부릅니다~"
한겨울에 밀짚 모자 꼬마 눈사람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삐뚤고
거울을 보여 줄까 꼬마 눈사람
하루종일 우두커니 꼬마 눈사람
무엇을 생각하고 혼자 섰느냐
집으로 들어갈까 꼬마 눈사람
"여러분~ 여러분~
계속해서 '눈꽃송이' 입니다~
크게~ 더 크게~ 불러요"
송이송이 눈 꽃송이 하얀 꽃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꽃송이
나무에도 들판에도 동구 밖에도
골고루 나부끼네 아름다와라
송이송이 눈 꽃송이 하얀 꽃송이
하늘에서 내려 오는 하얀 꽃송이
지붕에도 마당에도 장독대에도
골고루 나부끼네 아름다와라
♤아내 앤이 연주한 눈 동요 "펄펄 눈이 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흥겹게 눈 노래를 서너 곡 부르자 금방 또 종이 났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와르르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왕눈발을 헤치고 뛰어다니며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고함을 질렀다. 자하봉 뒷산이 쩡쩡 울렸다. 순희와 영순이 화자와 영희 매화는 시소를 타러 갔고 재향이 옥현이 주희 정숙이 은희는 미끄럼틀 장으로 냅다 달렸다. 영자와 운애 내영이 위자 미영이 영란이는 그네를 타러 선착순 하듯이 달려 갔다. 옥화와 낙구 원근이 동인이 미향이 세운이 동승이 유혁이 창우는 정글 짐이 있는 농구장 앞으로 마구 내달렸다. 철연이와 용철이 건수 호윤이 해수 용춘이 헌철이는 철봉에 매달려 빙글뱅글 풍차돌리기를 해댔다. 송자와 선희와 금향이 명옥이 금숙이 순태 정미 옥희 순옥이 위순이는 태극기 게양대 앞에 있는 연단 옆에서 편을 갈라 고무줄놀이를 했다. 겨울운동회를 하고 있던 까치들과 참새들까지 몰려와서 고무줄 밑에서 팔짝팔짝 뜀뛰기를 같이 했다. 용규와 영일이 응구와 택윤이 성창이 규환이 유국이 윤칠이 기종이 재락이는 미끄럼틀 옆에 있는 웅장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말뚝박기를 했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데도 얼굴에 땀방울이 흥건했다.
남자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기 위해 우르르 선생님한테로 몰려갔다. 재수와 동용이 수갑이 석철이 종구 상원이 동운이 종익이 흥구가 선생님을 향해 하얀 눈뭉치를 연달아 던져 댔다. 하얀 오자미 같은 뽀얀 눈뭉치들이 이곳 저곳에서 선생님이 서 있는 배구장 가운데로 속사포처럼 날아갔다. 선생님께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솜사탕 같은 해맑은 미소를 함박 지으시며 곱게 웃으셨다. 함박눈을 맞으며 눈싸움을 하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마치 일곱 난쟁이들과 함께 하얀 동화나라에서 눈꽃밭 정원을 뛰어다니고 있는 백설공주처럼 보였다. 조그마한 난쟁이들이 하얀 눈나라로 들어오려는 악당들을 물리치며 백설공주를 애워싸는 동화 같은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백설공주가 송이송이 휘날리는 박하색 눈다발 속에 묻혀서 순결하게 빛났다. 백설공주와 도산골 아홉 난쟁이들이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동화나라에서 하얀 무대를 뛰어다니며 아름다운 하얀 동시를 소담스럽게 쓰고 있었다.
이윽고 동네별로 편이 갈려서 눈사람 만들기 시합이 벌어졌다. 양팔을 벌려 넉가래를 만들어 눈뭉치를 모아서 사람처럼 만든 후 영혼을 불어넣는 왕방울 같이 큰 두 눈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는 눈사람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춤을 추는 토속적인 신성한 의식을 치렀다. 이제 우리들처럼 웃고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는 완전한 눈사람이 만들어졌다.
아이들의 신비한 모습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얼굴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겨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학교 마당에 끊이질 않고 울려 퍼졌다. 수업 종소리가 여러 번 울렸는데도 모두가 아랑곳없이 운동장을 떠나지 않자 소사 선생님께서 웃으시며 계속해서 종을 울려댔다. 백설공주가 하얀 눈발을 헤치며 사뿐사뿐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걸어가자 모든 난쟁이들이 순식간에 조용히 공주 곁으로 몰려왔다. 그리고는 참새들도 강아지들도 고양이들도 눈사람들도 아이들도 모두 백설공주의 뒤를 따라 갔다.
점심 시간이 다가왔다. 시꺼먼 제무씨(GMC) 산판차가 커다란 직사각형 대소쿠리에 옥수수 식빵을 가득 싣고 힘차게 크락션을 빵빵 울리며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큰 경적 소리가 마치 "이놈들~ 빵 왔다~ 빵 타러오너라~ 빵 먹거라~"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제무씨 머리에는 가득 쌓인 눈으로 인해 마치 거인이 하얀 큰 모자를 쓴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횡재수가 대통한 날이었다. 도시락에다가 옥수수 통빵까지... 거기다가 잘하면 고구마나 감자까지 얻어걸릴 수 있는 운이 아주 좋은 날이었다. 이 모든 것이 흰 눈이 풍성하게 많이 내려준 덕분이라 생각했다. 어른들도 눈이 많이 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당번들이 옥수수 식빵을 큰 대소쿠리에 가득히 타 왔다. 분단장들이 아이들에게 큰 옥수수 통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구수한 빵 냄새가 교실 안에 진동했다. 신나게 겨울운동회를 하던 참새들이 어찌 알았는지 교실 창밖으로 갑자기 몰려와서 빤히 쳐다 보았다. 창문을 열고 빵조각을 작게 뜯어서 참새들에게 나누어 주는 아이들도 보였다. 교실 안에는 활활 장작불이 타오르고 창밖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 아름다운 동심이 하얗게 익어가는 서정적인 도산골 겨울 학당 풍경이 그림 같이 펼쳐지는 도탑고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굣길에 토계 번화가를 지나 올 때 양쪽 길에 늘어선 지붕마다 건물마다 하얗게 눈을 덮어 쓴 전경들이 마치 눈 퍼레이드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시리 가슴이 설레었다. 유니세프에서 점심으로 나눠준 식빵을 다 먹은 탓인지 오늘은 백운점방에 진열돼 있는 라면땅과 산도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떤 아이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삼립 호빵을 사서 먹기도 했지만 군침이 전혀 돌지 않는 이상한 날이었다. 다만 하얗게 내리는 함팡눈을 흠뻑 맞으며 낙동강이 굽이쳐 흘러가는 아름다운 신작로 길을 따라 걸으며 청랭한 여울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오롯이 떠올랐다. 이는 아마도 흰 눈이 펑펑 휘날리던 아침 등굣길에 도산서원과 시사단 앞을 오가는 나룻배가 하얀 하늘나라로 노를 저어 올라가던 몽환적인 광경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리라. 하굣길에는 더욱 많은 눈꽃송이가 신작로를 따라 펼쳐져 있는 온 산천을 하얀 꽃밭으로 수를 놓았으리라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종회 시간부터 마구 콩콩 뛰었다.
토계 번화가를 미끌어지듯이 빠져 나와서 정류소를 지나 계남고택 앞에 이르니 가로수인 오동나무와 탱자나무들이 눈다발을 가득 뒤집어쓴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까치들이 나무에 앉을 때마다 쌓였든 눈뭉치들이 나무 아래로 밀가루를 뿌리듯이 새하얗게 휘날렸다. 계남댁 왼편 배추밭 바로 밑에 있는 술도가 굴뚝에서는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연신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도 막걸리 술을 만드는 재료인 밀가루 설기들을 찌고 있는 듯 싶었다. 술도가 옆을 지나는데 분강촌 우리 동네에 사는 성기 형님이 손을 흔들었다. 형님은 재작년부터 술도가에서 일을 했다. 형님은 이따금씩 아이들의 호주머니에 찰지고도 노르스름하게 푹 찐 밀가루 설기를 주인 몰래 밀어 넣어 주곤 했다. 쫀득쫀득하고 구수한 누런 설기들은 시장할 때는 식사 대용으로 아주 그만이었다.
술도가 앞길을 완만히 우회전 해서 돌아나오자 눈 내리는 고요한 도산오곡과 도산사곡들이 하얀 도화지에 산수화를 그려놓은 듯이 시야에 들어왔다. 술도가 맞은편 포플러 나무 사이로 피어나는 뿌연 눈안개 장막 때문에 형체가 보이지 않는 사련진과는 달리 시커먼 먹물을 찍어 놓은 듯한 의촌리 번남고택과 살얼음 아래로 흐르는 청아한 의인 앤떼이 맑은 여울소리에 취해서 비스듬히 누워 있는 가설극장 공터와 뱅기장은 바로 시야에 파노라마처럼 확 들어왔다. 얼굴에 휙휙 부딪히는 눈발을 피하기 위해 잠시 등을 지고 걷느라 학교 쪽을 바라보았더니 신선이 붉은 모래를 먹고 산다는 전설을 지닌 우뚝 솟은 갈선대와 단사 동네 그리고 예던길로 들어서는 삽지껄인 천사마실 내살미는 눈 내리는 비경 속에 파묻혀서 형상만 흐릿하게 잡힐 뿐 실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 서서 다시 앞을 보았더니 옥양목 빛깔의 길다란 안동포에 작은 도산골을 옮겨 놓은 듯한 진경산수화가 광활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살이 찐 큰 뱀처럼 굽이굽이 느리게 흘러가는 낙동강과 아카시아나무가 방풍림 같이 떼 지어 서 있는 길다란 강변과 저 멀리 강 건너편에 자리한 아름다운 섬마 솔밭과 시사단 그리고 도산서원 앞에 강물이 고여서 만들어 놓은 널따란 호수 같은 탁영담 아래로 그림 같이 하늘과 강에 걸쳐져 있는 도산사곡 분강촌이 희끄무레하게 나타났다. 그야말로 온 산천이 하얀 캔버스를 빙 둘러서 깔아 놓은 듯한 거대한 백색 무대처럼 느껴졌다.
눈이 발목까지 마구 차올랐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거리는 맑고 야무진 소리가 났다. 적설량이 많은 날씨라 기온은 그다지 차지 않고 포근했다. 산과 강과 들과 나무들은 전부 뽀송뽀송한 하얀 솜으로 누빈 도두룩한 흰옷으로 갈아 입었다. 성탄절을 열흘 정도 앞두고 있어서인지 산천의 나무들이 온통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였다. 참남배로를 돌아나와서 바라보는 도산서원을 애워싼 은빛깔색 취병산 풍경과 저멀리 하얀 세상으로 들어가는 성곽처럼 우뚝 솟아 있는 애일당과 그 밑으로 길게 뚫려 있는 흰소나무 가로수 터널들이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과 클로드 모네의 '고요한 겨울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는 함박눈을 타고 긴 여운을 남기는 고적한 토계 예배당 종소리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왔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주님의 복음을 고요히 전하는 듯한 큰 울림이 있는 아름다운 종소리였다. 성탄절을 앞둔 도산골 산야에 주님의 은혜가 온 생명들에게 하얀 눈이 되어 내리는 경건한 순간이었다♧.
♤사진 설명(caption) ☆: 1976년 안동댐 준공을 눈앞에 두고 촬영한 사진이다. 우리가 매일 등교하던 신작로 길이 도산서원 앞 소나무 가로수를 지나 참남배로까지 낙동강 옆으로 선명하게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왕복 이십 리 등하굣길이었다. 도산서원 별유사로 있는 도산국민학교 54회 졸업생인 이동채 선배님이 보내주셨다. 오른쪽 소나무 아랫 길로 1km 정도 내려가면 필자의 고향인 분강촌이 있었다.
유년시절 저 아름다운 신작로 길을 매일 등하교하면서 살찌웠던 감성과 정서가 얼마나 은혜로운 인생을 가져다주었던가. 왕복 이십 리 등하굣길이었지만 사계절 나름대로 추억과 애환이 가득했다. 산과 강과 나무와 새들과 동무들이 있었기에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수북이 잉태시길 수 있었으리라.
♤사진 설명(caption) : 참남배로를 돌아나와서 바라보는 도산서원을 애워싼 은빛깔색 너머로 펼쳐지는 서취병산 풍경과 저멀리 마치 하얀세상으로 들어가는 성곽처럼 우뚝 솟아 있는 애일당과 그 아래로 길게 뚫려 있는 흰소나무 가로수 터널들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과 클로드 모네의 '고요한 겨울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 윗 사진(☆사진) 오른쪽 소나무 아랫 길로 200여 미터 내려가면 분강촌 입구에 농암 선생이 부모님과 마실 노인들을 즐거이 봉양하기 위해 건립한 애일당이 산중턱에 수려하게 걸쳐 있었다.
[사진은 분강촌의 애일당과 강각 주변 풍광을 강 건너 즉, 섬마 아랫 지역에서 촬영한 것이다(애일당 강 건너에서 촬영한 전경). 일제강점기 때 관청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작가는 미상이다. 애일당 아래 긴 수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인(의촌리) 앤떼이(보막이 혹은 물막이)에서 시작된 수로를 분강촌까지 완성한 후 준공 자료를 남기기 위해 촬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진 설명(caption) : 도산국민학교로 오가는 등하굣길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산수화이다. 그림 왼편 상단에 있는 분강촌을 출발하여 오른쪽 도산서원 강나루터 위에 있는 천연대 앞을 지나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동강 강변길을 따라 십 리를 걸어가야 토계에 있는 도산국민학교가 나왔다. 도산국민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의열단 소속 독립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인 청포도 작가 육사(陸史 李源祿ㆍ1904 ~1944) 선생이 1회로 졸업한 유서 깊은 학교이다.
그림은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으로 통하는 겸재(謙齋 鄭敾ㆍ1676~1759) 선생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이다. 겸재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며 문신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인왕제색도 등 다수의 명작을 남겼다.
계상정거도는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풍광을 조망한 그림이다. 이 산수화는 서원 마당 오른편 천연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산서원을 중심에 두고 왼편 상단에 산과 강이 길게 접한 지대에 있는 농암 선생의 고향 동네인 애일당과 분강촌까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농암(聾巖 李賢輔ㆍ1467~1555)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시호는 효절공孝節公이다. 농암가聾巖歌ㆍ어부가漁父歌 등 다수의 강호시가를 남겼으며 현재 도산골 농암종택(분강서원)에 있는 숭덕사에 배향되었다. 분강촌은 농암과 일생을 함께 한 선생의 터전인 고향 동네이다.
계상정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도산서당 속에 앉아서 서책을 대하고 있는 퇴계 선생도 보인다. 퇴계(退溪 李滉ㆍ1501~1570ㆍ도산서원 상덕사 배향)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농암과 퇴계는 족질간이며 서른네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잊은 채 학문과 문학을 담론하는 등 벗으로서 도산골 분강촌에서 강호지락을 나누며 탈속적인 삶을 살았다.
♤사진 설명(caption) 및 출처 : 청송에 있는 덕천장로교회 전경이다. 유년시절 도산골 토계 예배당과 흡사한 모습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및 덕천교회 홈페이지에 수록된 사진이다. 함박눈을 맞고 있는 고요한 시골 교회의 전경이 세월 속으로 잊혀져간 먼 옛날 그리운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첫댓글 지금 눈오고 있는데 분위기가 딱 와닿네...
장작난로에 뺀또 올려서 차워진 밥을 데워 먹었던 기억이 솔~솔~ 나네
정말 억수로 너무 정겹다
흥구는 뻰또를 젤 먼저 올려나서 누룽밥 비슷하게 꼬두밥으로 먹었을 껄...
그때 당번이 뻰또를 아래 위로 바꾸어 주던 추억도 떠오르네~~
좋은글 고마워 잘 보겠습니당~^.^♡
난로 속에서 시뻘건 장작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군불처럼 잘도 탔다. 난로 옆에 책상이 있던 원천 흥구가 제일 먼저 난로 위에 벤또를 올렸다. 이어서 매내에 사는 용필이와 하계에 응구와 원근이, 양평에 용철이, 배오지 수갑이, 섬마 석철이 철연이 해수가, 의인에 도용이 용춘이 옥순이 창우가, 목실골에 미화와 재순이 유국이가 연이어 포개서 층층이 얹었다. 용규와 재락이는 보자기에 싸온 고구마와 감자를 네댓개 난로 옆구리에 붙여 놓았다. 난로 위가 금새 쌓아 놓은 도시락으로 천장에 닿을 듯이 높아져 보였다. 재수 옆에는 같이 등교한 백구가 난로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추위를 녹이고 있었지만 주인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들이 백구한테로 몰려가서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순둥이 백구가 나른해진 듯 따뜻한 책상 옆에서 소록소록 잠이 들었다. 따뜻한 교실 안은 도타운 정들이 감도는 진풍경으로 가득했다.
여전히 창밖에는 왕눈발이 쉬지 않고 펑펑 내리고 있었다.
도산초58 카페 "이종구교수의 에세이 산책/ 함박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의 동화" 중에서 231216 발췌
MZ세대들
노오란 뻰또가 뭔지 알지 못하겠지만 우리들는 점심시간 이전에 뻰또 까먹던 추억 빼 놓을수 없지~
하얀눈이 자꾸자꾸 오네요~
올해 첫눈이 엄청 많이도 내리네~~
추워진 날씨에 모두들 건강 잘 챙기세요
지금 독감 유행하고 있다고 하지요
각별히 건강 유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