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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을 열어 주옵소서(1)
2017년 5월 28일 / 대예배 / 열왕기하 6:14-17
왕하 6:14-17 / [엘리사의 불말과 불수레]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력은 지극히 허약하였다. 아람 왕은 전차 부대를 앞세우고 대군을 출동시켜 밤에 이스라엘의 중심부로 몰고 들어와 도단 성읍을 포위하였다. 15) 엘리사의 시종이 아침에 일어나 성문 밖으로 나가 보니 온 성읍이 전차와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달려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외쳤다. 16) 그러나 엘리사는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 우리 편에는 더 많은 군대가 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리고 `주님, 이 시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였다. 주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자 그 성읍이 위치한 온 산에 불말과 불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에바다 / 1. 어두워진 세상길을 주님 없이 걸어가다 나의 영혼 어두워졌네
어느 것이 길인지 어느 것이 진리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네
주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 실패와 좌절뿐이네 사랑하는 나의 주님 내 영혼 눈을 뜨게 하소서
열려라 에바다 열려라 눈을 뜨게 하소서 죄악으로 어두워진 나의 영혼을 나의 눈을 뜨게 하소서
2.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어
세상에서 방황하며 이리저리 헤메일 때 사랑하는 주님 만났네 어두웠던 나의 눈이 열리고
막혔던 귀가 열리네 답답했던 나의 마음 열리고 나의 영혼 열리네
열려라 에바다 열려라 눈을 뜨게 하소서 죄악으로 어두워진 나의 영혼을 나의 눈을 뜨게 하소서
인간의 구성은 세 가지 요소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영(靈), 혼(魂), 육(肉)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위대한 이유는 동물은 육과 혼만 있는 반면, 인간은 육과 혼 그리고 영이 동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란 부분은 하나님을 깨닫는 부분이요 하나님을 이해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영은 인간 창조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영이 죄악으로 인하여 무뎌지고 혼탁해져서 마비되고 마음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육신의 눈과 혼의 눈은 더욱 밝아져서 남을 이해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 40일을 굶주린 예수님에게 마귀가 와서 유혹하는 것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도 보십시오.
마 4:3-4 / 그때 마귀가 와서 돌을 떡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하며 “그렇게 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될 게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육신의 떡을 먹어야 살지만 이에 앞서 영은 그의 나라와 의(마 6:33 /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를 구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성이 시키는 대로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므로 더러운 생각, 육신의 쾌락을 찾는 마음, 우상숭배, 마술, 헐뜯음과 싸움, 질투와 분노, 언제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일, 불평과 비판적인 태도, 자기의 작은 당파 외에는 모두 나쁜 것으로 인정하는 배타주의와 거기서 나오는 잘못된 교설, 시기, 살인,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기에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살면 우리들은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예수님이 생명(영)을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의 영안이 어두워서 영접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 1:9-13 / 그가 온 후에 참빛이 세상에 들어왔다. 이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10)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는데도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3)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다.
▶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즉 예수님을 죄악에서 건져주실 구세주로 믿을 때, 이 영의 눈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창조주요 역사의 주인공이요, 구원자이심을 알고 성령을 주시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마 16:15-17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 영안이 열리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보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와 예수님의 부활하심 그리고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 믿어지고 세상에 자질구레한 욕망이 하찮은 먼지 찌꺼기로 보이고, 우리의 지었던 죄는 너무도 선명하게 죽음의 근원덩어리인 것임을 생생하게 알게 됩니다.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더럽기 한이 없고 추하기 한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사울이었던 바울의 고백이 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행 9:1-3 / [사울의 개종] 한편 사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다 잡아 죽일 작정으로 살기가 등등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을 찾아갔다. 2) 그는 다메섹에 가서 그리스도인이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올 테니 다메섹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써달라고 요구하였다. 3) 사울이 이 용무를 띠고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였다. ◀ 영안이 열리기 전의 모습
행 9:3-9 / 갑자기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더니 그를 내리비추었다. 4) 사울은 그만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때 한 음성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5)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자,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서 내 명령을 기다려라.' … 8-9) 사울은 겨우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먼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 맹인이 된 채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냈다 ◀ 사울을 만나 주신 예수님
행 9:10-19 /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한 신도가 살고 있었다. 주님이 신비로운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나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셨다. `예, 주님!' 하고 그가 대답하자 11) 주님이 말씀하셨다.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라. 그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 와서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 12) 내가 환상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손을 얹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13) 아나니아가 말하였다. `하지만 주님, 저는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신도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가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14) 게다가 그는 이 다메섹에 있는 신도들을 모조리 체포할 권한이 있는 영장을 대제사장에게서 받아 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15)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가서 내가 시킨 대로 하여라. 사울은 내 복음을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과 그 왕들에게 전파시키고자 내가 택한 그릇이다. 16) 그가 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겠다.' 17)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에게 손을 얹고 말하였다. `사울 형제여, 당신이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나타나셨던 주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이 충만히 성령을 받고 또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18) 그러자 그 순간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 사울
행 9:19-22 / [사울의 다메섹 전도]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신도들과 며칠을 함께 지낸 뒤에 20) 회당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예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전파하자 21)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귀를 의심하였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닌가? 우리가 알기로는 그가 여기 온 것도 신도들을 붙잡아 고랑을 채워서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더 열심으로 전도하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 영안이 열린 후에 복음을 전한 사울
빌 3:7-8 / 그러나 ➊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➋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①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②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1. 영안이 열리면 교만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부부 싸움을 하여도 정말 인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경우는 드뭅니다. 한걸음 나아가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감자를 소금에 찌어 먹어야 하느냐 설탕에 찍어 먹어야 하느냐 때문에 싸우고, 왜 치약을 끝에서 짜지 중간에서 짜느냐? 김치를 담글 때 무를 얇게 썰어라! 아니다 더는 굵게 썰어야 한다!’며 싸웁니다.
이러한 변론은 결국 ‘내가 당신에게 지기 싫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의 자존심이 상하게 되면 온갖 혈기를 피우는 모습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없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투는 제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하셨습니다.
막 9:33-37 / [누가 제일 높으냐 ; 마 18:1-5, 눅 9:46-48] 일행은 가버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집안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길에서 무엇을 가지고 논쟁하였느냐?' 34) 제자들은 그때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것으로 말다툼하였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35)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신 후에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제일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제일 낮은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6) 그리고 그들 앞에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팔에 안으시며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또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한심스러운 모습은 저들만이 아니라 3년 동안 예수님에게서 배운 제자들의 모습에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저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성찬식을 하시면서 지금까지 3년 동안 제자들과 동거동락하셨던 예수님은 마지막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시면서 ‘이것을 받아먹으라. 이것은 ➊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니’라고 하셨고, ➋ ‘이것은 너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새 계약의 표이니, ➌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를 흘려서 맺는 새 계약의 표’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제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눅 22:14-20 / [최후의 만찬;마 26:26-30, 막 14:22-26, 고전 11:23-25] 시간이 되자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시고 식탁에 앉아 15)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 먹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였는지 모른다. … 17)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잔을 받아 나누어 마시라. … 19) 예수께서는 또 떡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➊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면서 이것을 먹어라.' 20) 식사 후에 예수께서 또 잔을 들고 그대로 하시며 말씀하셨다. ➋ `이것은 너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새 계약의 표이니, ➌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를 흘려서 맺는 새 계약의 표다.
▶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싸우는 제자들의 모습 그 중에 특히 베드로의 모습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눅 22:24-27 / [누가 제일 높으냐; 마 18:1-5, 막 9:33-37, 눅 9:46-48]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선 종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또 종들은 자유가 없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26)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는 남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 너희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27) 이 세상에서는 주인이 자리에 앉아서 종들에게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의 종으로 왔기 때문이다.
▶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씻기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요 13:4-10 / 그래서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는 5)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기 시작하셨다. 6) 이렇게 하여 시몬 베드로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 제 발을 씻기시다니 말도 안 됩니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을 네가 지금은 모르겠지만 훗날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8) ‘안 됩니다. 주님, 제 발은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 하고 베드로가 우겨대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내 친구가 될 수 없다.’ 9) 시몬 베드로가 소리쳤다. ‘그러시다면 제 발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1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이제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이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 베드로를 비롯하여 10제자가 모두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다른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막 14:27-31 / [베드로의 장담 ; 마 26:31-35, 눅 22:31-34, 요 13:36-3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 ’ 29)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➊ ‘비록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3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1) 그러자 베드로는 더욱 힘주어 말하였다. ➋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일이 있더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➌ 다른 제자들도 모두 이와 같이 맹세하였다.
왜 이렇게 베드로가 장담하고 또 장담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신앙고백을 한 자기를 가리켜 칭찬과 더불어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16:17-19 /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3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렇지만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찾아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요 21:14-19 /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이것으로 벌써 세 번째였다. 15) 아침 식사가 끝났을 때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16)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돌보라.' 17) 예수께서는 한 번 더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근심이 생겨서 `주님, 주님은 제 진심이 어떤지를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먹이라. 18)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젊었을 때에는 네가 원하는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늙으면 다른 사람이 네 팔을 붙잡아 벌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맞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은연 중에 알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베드로가 말년에 성도들에게 한 말을 보면 영안이 열린 후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벧전 4:7-10 / 세상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➊ 진지하게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8) ➋ 무엇보다 먼저 언제나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9) ➍ 허기지고 잠잘 데 없는 사람을 보거든 집으로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해 주십시오. 10) ➎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특별한 능력을 주셨으니 그것을 서로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십시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을 잘 관리하도록 하십시오.
벧후 3:10-15 / 주님의 날은 마치 도둑이 오는 것같이 생각지 않은 때에 옵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천체는 불에 타서 없어지고 땅과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불타 버릴 것입니다. 11) ➊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녹아 버릴 것인데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 14) ➋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이렇게 닥쳐올 일과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부디 죄를 멀리하고 모든 사람과 늘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그리하여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기쁘게 맞아 드리십시오. 15) ➌ 주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시간을 주고 계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의 많은 편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2. 예수님은 미래를 보십니다.
1. 베드로의 미래를 보신 예수님
씨를 뿌리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씨앗만 보면 초라합니다. 별 것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씨앗 하나를 보면서 그것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펼쳐질 농장을 기대합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손에 잡힌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마치 실물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환상이 아니라, 실상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많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 13:23, 31-32 / 좋은 땅은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깨달아 삼십 배, 육십 배, 또는 백배로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킨다. 31) 예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32)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믿음의 삶이 깊어지면, 멀리 있는 것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느낍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히 11:1 /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합니까? 영안이 열리지 않아 까마득하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면, 내 앞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손에 잡힌 것처럼 느껴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망합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마치 그것이 내 앞에 펼쳐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므로 뒤로 물러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데, 왜 뒤로 물러납니까?
믿음은 미래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본 사람은 미래에 일어난 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과거형보다는 미래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반석’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처음 만났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42 /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고 42)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 갔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그러나 이제 너를 게바(원문에는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이다'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이다)라고 부르겠다.”
사실 시몬은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반석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굉장히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불안정한(unstable)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시몬을 향해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왜 이렇게 이름 지어주셨을까요? 현재의 모습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모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름을 바꿔주셨을지라도 현재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촐랑거리는 시몬의 모습은 반석과 같은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주역(主役)으로 뛸 견고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고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미리 보시고, 시몬에게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미래를 바라보시며 시몬을 만나 제자로 삼으셨을 때부터 ‘베드로’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에서 나오는 믿음의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만을 보면서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준비하면서 나아갑니다.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 너머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려갑니다.
♬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 1.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새 힘을 새 힘을 얻으리로다
독수리 같이 날개를 치며 높이 높이 푸른 하늘 날으네 뛰어가도 고단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네
2. 누구든지 우리 주를 믿는 자 새 나라 새 생명 얻으리로다 천사들 같이 노래를 하며
소리 높여 기쁜 찬송 부르네 우리 주님 계시니 슬픔 눈물 고통도 없네
▶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베드로가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선포했습니다(행 3:6).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계속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40세 정도 되었습니다. 과거에 묶여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입니다. 미래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 역시 얼마 전까지 아담의 후손인 자기의 욕심에 빠져 있었고, 인간의 연약함에 얽매어 예수님을 3번이나 작은 여자 아이 앞에서 부인했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인간의 실패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닷가로 간 것은 과거로의 회귀(回歸)를 의미합니다. 물고기 잡던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실패자요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는 낙오자의 모습으로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과거 속으로 숨으려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후에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난 후 과거에 사로잡혀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사로잡혀있는 사람을 믿음의 선포를 통해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미래를 향해 믿음의 눈을 뜬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만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베드로, 인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는 환경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미래의 세계로, 절망에 빠져 있는 거지를 미래의 세계로 이끌어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베드로가 영안이 열려 믿음의 눈으로 보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믿음으로 말씀들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을 때,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이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고 고민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에서 짜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흘러나왔습니다. 말씀이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성경말씀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주야(晝夜)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머리와 마음에 말씀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밥 한 끼를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와 같이 한 주일 동안 말씀을 읽지 않았는데 어찌 우리의 믿음이 쌩쌩할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을 계속 먹어야 힘든 상황이 다가와도 말씀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냅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적합한 말씀이 떠오르면 힘이 생깁니다. 진리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고난을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시 1:2-3 / 얼마나 복되랴! 여호와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그 가르침을 밤낮으로 읽으며 늘 명상하는 이는. 3) 이런 이는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나날이 푸르리니 하는 일마다 끊임없이 번창하리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눈이 열리듯이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향해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음의 세계로 이끌어갑니다. 현재는 암울하고 힘들어서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매일같이 영적 만나를 공급받음으로 샘물과 같은 영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성경에 보면, 역사서도 있고, 예언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서 우리에게 익숙한 성구(聖句)는 계속해서 읽어야 합니다. 암송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도 하고 깊이 묵상하십시오. 기도할 때에도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보세요. 자신의 말로 주절주절 기도하지 말고,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하십시오.
조지 뮬러(George Müller)의 기도 방식이 이러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기도하기 전에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확신이 생기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5만 번 기도응답 받은 조지 뮬러의 기도의 힘은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할수록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그 확신은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기도가 강력해집니다.
감사와 불평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뜻을 맞출 때 진정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불평 불만합니까?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할 때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현실만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때에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보면서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께 뜻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뜻이 일치되면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믿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미래를 본 사람들은 순종하게 됩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 미래를 향해 달려갑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본향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은 미래를 보게 하고, 미래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합니다. 아무나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마리아의 믿음이 돋보였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요 2:5). 마리아는 이미 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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