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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철, 이순이
평생 동정을 약속한 부부
유중청 : 1779~1801, 세례명 요한. 전주 감영에서 교수
이순이 : 1782〜1802. 세례명 루갈다,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한국 교회가 한창 서양 선박의 청래 운동을 진행하고 있을 때. 유항검의 집에서는 전대미문의 혼사가 있었다. 유항검의 맏아들 유중철(抑重哲. 혹은 重喆,혹은 종석, 요한)과 서울 명문 집안 출신의 규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가 형식으로는 부부이지만 실제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작정하고 평생 동정(童貞)을 약속하는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천주교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집안
유중철은 1779년 전주부 초남리(지금의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부락)에서 아버지 유항검과 어머니 신희 (申喜) 사이의 4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로부터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아버지 밑에서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받는한편,
김제의 가난한 양반인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되던 1795년 5월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주문모 신부로부터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의 집안은 지체 높은 양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대부호였고, 그의 아버지 유항검은 전라도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된 유명 한 사도였다.
이순이는 1782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윤하(마태오)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본가와 외가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던 남인 세족으로 천주교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집안이었다. 큰외삼촌 권철신은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하생들은 모두 천주교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또 작은외삼촌 권일신은 충청도의 사도인 이존창과 전라도의 사도이며 이순이의 시아버지인 유항검을 입교시킨 대부(代父)였다. 아버지 이윤하 역시 이승훈, 김원성과 굳은 우정을 맺고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처남인 권일신과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순이는 어려서부터《효경M孝經) 등 경전(經典)을 읽었고. 179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는 학문과 지식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뛰어난 문필가 집안의 재능도 물려받아, 그녀가 남긴 ‘옥중 편지’ 는 문장이 아름답고 맑고 깊으며, 수식과 표현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이순이가 열네 살이었던 1795년, 주문모 신부는 그해 4월 5일에 있을 부활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 신부는 부활절을 앞두고 망부활날 보례와 고해성사 및 첫영성체 준비자들의 교리 시험 등으로 몹시 바쁘게 지냈다. 당시 한국 신자들은 교육받을 기회가 없어 성체를 모실 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이순이는 나이가 어려서 첫영성체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이에 그녀는 나흘 동안 두문불출하며 방안에 틀어박혀 과거 시험을 준비하듯 첫영성체 자격시험을 준비하였다. 결국 이순이는 주 신부의 마음에 흡족하도록 교리 시험을 무난히 통과한 뒤. 4월 5일 첫영성체의 감격을 맛보았다.
동정 생활을 꿈꾸다.
유중철과 이순이는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동정 생활을 결심한 것은 독창적인 신념에서 나온 생활 방식이 아니라 성서와 복음적 권고의 선택이었다. 당시 신자들이 주일과 축일에 공소 예절서로 사용한《성경직해》와《성경광익》,그리고 신자들의 윤리 생활지도서였던《칠극》과 기도서인《천주 성교 일과》(天主聖敎日課) 등이 하나 같이 동정 생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교회 초기부터 동정 생활은 하나의 신심 생활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문
모 신부가 입국하여 미사가 봉헌되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의식이 깊이 심어지면서 동정의 의미가 한층 더 승화되었다.
1797년의 어느 날, 이순이는 결혼할 나이가 다가오자 어머니에게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딸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동정의 길을 걷겠다는 자식이 대견스러웠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말이 그렇지 삼강오륜을 앞서서 지켜야 할 양반 가문에서 자식을 동정자로 살도록 한다는 것은 패륜 행위였다. 그러나 평소 언행이 갸륵하고 믿음이 깊었던 딸의 선택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딸이 동정 생활을 선택한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승낙이 떨어지자 이순이는 주문모 신부에게 동정 생활을 결심하게 된 자초지종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전주의 유중철을 떠올렸다. 2년 전 주 신부가 전주 유항검의 집에 가서 며칠 동안 머무를 때, 유항검의 아들 중철이 아버지와 주 신부에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었다.
주 신부는 이들이 결심한 생활을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 역시 조선 사회의 여론과 이목이 무섭고 두려웠다.
만약 건강한 처녀와 총각이 결혼하지 않고 사는 날에는 천주교 교리의 동정설을 아는 사람들에게 당장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기에 십상이고, 결국에는 화가 불어 닥칠 것이 뻔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킬 방법으로 혼인을 맺어 주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유중철과 이순이의 신덕과 사람 됨됨이를 신뢰하였던 까닭에, 부부로 맺어 주어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틀림없이 동정을 지켜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마침내 주문모 신부는 두 사람을 중매하러 나섰다. 먼저 전주의 유항검에게 아들 중철의 뜻과 같이 동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순이를 소개하는 전갈을 보내, 그의 의향을 물었다. 유항검은 이순이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좋다는 기별을 보냈다. 주 신부가 이순이의 어머니에게도 같은 내용을 타진하자 흔쾌히 동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혼인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혼사가 결정되고, 그 말이 이순이의 문중에 전해지자 속사정을 모르는 친척들은 펄쩍 뛰었다. 문중에서는 자기 집안보다 못한 가문과의 혼인이라 하여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유항검의 가문을 시골에 사는 보잘것없는 미반(微班)으로 잘못 생각하였다. 이순이의 어머니는 문벌보다 그 사람의 영혼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녀는 유항검의 신앙심을 보아서도 그렇고. 동정 생활을 결심하고 준비해 온 청년이라면 더 물을 것 없이 훌륭한 신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문중의 반대에도 꿈쩍 않고 그럴싸한 핑계를 대었다. 자기는 과부라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자식들을 키우기가 힘에 부치니. 부잣집 사위 덕을 보아야겠다며 결혼을 밀어붙였다.
▲유중철과 이순이
유중철의 삶이 곧 이순이의 삶
마침내 1797년 10월 이순이의 집에서 혼사가 이루어졌다. 유중철과 이순이가 형식으로는 부부이지만 내막으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그때 신랑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고, 신부는 열여섯 살이었다.
이순이는 당시 서류부가(婿留婦家)라 하여 여자가 결혼식을 올린 후 친정에 머무르는 결혼 풍습대로. 1년 동안 친정에 있다가 이듬해 9월 전주 초남리 시댁으로 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부모
님 앞에 꿇어앉아 장엄하게 동정 서약을 하였다.
첫날밤을 맞은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꿈꾸어 오던 생활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면서, 이 은혜를 박해가 닥치면 순교로서 보답하자고 굳게 맹세하였다. 두 사람은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앞날을
설계하였다.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면, 네 몫으로 나누어 한 몫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한 몫은 동생들에게 주고. 세월이 좋아져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나머지 재산을 가지고 각자 따로 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서로의 약속을 어떤 일이 있어도 깨뜨리지 말자고 서약했다. 이제 유중철의 마음과 생각은 이순이의 마음이요 생각이었고, 중철의 삶은 순이의 삶이었다.
이 순이는 어려서부터 약골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덕으로 나아가는 데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부인으로서의 덕에도 충실하였다. 그리고 매사에 찬찬하고 자상하였으며,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아랫사람들에게 겸손하였고. 시부모와 남편에게 공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가족들과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그래서 이 순이의 부덕에 대한 칭찬은 천주교를 믿지 않는 초남리 사람들의 구전을 통하여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한편 이순이가 시집온 이후 교회의 사정은 날이 갈수록 심상찮았다. 인접한 충청도에서는 계속 박해가 일어나 나날이 들려오는 소식마다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어수선한 시국도 시국이지만 오누이로 살겠다며 각오했던 의지가 막상 유중철과 한 방에 있는 밤이면 그게 아니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마음이 혼미하고 음욕의 불길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그러나 욕정에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다. 이들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육신의 사욕을 극복해 갔다. 이들에게 있어 일상은 매순간, 매시간이 자기 극복의 단련으로 이어진 영신 수련의 삶이었다. 발하자면 가정이 곧 수도원이었고, 매순간이 유혹과 투쟁하는 수도 생활이었다.
누이여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1800년 11월 정조의 국상(國喪)이 끝나자 노론 벽파에서는 남인 가운데 친(親/천주교파와 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어린 임금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는 1801년 1월 10일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박해의 불길은 2월 11일 이순이의 큰외삼촌인 권철신을 덮쳤고, 이 비보가 초남리에 당도하기 무섭게 유항검이 체포되었다. 전라도 천주학의 괴수가 무사할 리 만무하였던 것이다.
유항검은 3월 초 체포된 즉시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유관검과 유중철도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9월 17일 유항검과 관검은 전주 풍남문 밖 지금의 전동성당 터에서 능지처참 되었고, 유중철은 큰 칼을 쓴 채 무한정 옥에 갇혀 있었다.
한편 이순이와 가족들은 애간장을 녹이며 기다리던 시아버지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집안일을 정리하며 머지않아 닥칠 환난을 준비하였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9월 15일 드디어 전주 감영에서 포졸들이 떼 지어 몰려와 이순이와 가족들을 체포하였다. 이순이는 처음에 수급청(守給廳)에 갇혔다가 반나절이 지나서 장관청(將官廳, 또는 將廳)으로 이감되었다. 거기에는 시어머니 신희, 유관검의 처 이육희. 시동생 유문석(요한), 유익검의 아들이며 서울에 자주 거주하던 강주 도령 유중성(마태오) 등이 갇혀 있었다.
가족들은 서로 마주 보고 아무 말 없이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다.
이순이는 지필묵을 챙겨 들었다. 주문모 신부는 평소 이순이에게 유항검 집안이 박해를 당하거든 박해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하도록 일러두었었다.
그래서 이순이는 진술 기록들을 적어서 시동생 유문석을 통해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9월 27일에는 옥졸들의 눈을 피해 어머니에게 유서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10월 9일(양 11월 14일) 이순이는 아침부터 마음이 산란하였다.
옥졸이 와서 같은 감방에 있던 시동생 유문석을 불러냈다. 이순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옥졸은 “관장의 명령이다. 유문석을 큰 옥으로 데려가서 제 형과 함께 가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순이는 문석에게 “서로 잊지 맙시다" 하고는, 가거든 형에게 같은 시간에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기를 원한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유중철과 문석 형제가 교수형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 식을 들은 이순이는 인정이 참혹한 것은 둘째였다. 중철이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 것 같기는 한
데. ‘과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이러기를 반나절.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렸을 때 초남리 집에서 편지가 왔다. 유중철의 옷에서 이순이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유중철이 사형되기 전에 남긴 이 편지는. "나는 누이를 권면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순이는 더 이상 바랄 나위 없이 기뻤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4년이나 되어 염려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이었다.
치명 자가 되는 그것이 가문의 영광
1801년 10월 13일은 의금부의 판결에 따라 가족들이 귀양지로 떠나는 날이었다. 이순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전주 감영에 들어가 "우리들은 하느님을 공경하였으니 모두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 하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그들을 떠밀어 내쫓았다. 그러자 이순이는 다시 판관에게 “국록을 먹으면서 임금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소리쳤지만, 판관은 이번에도 포졸들을 시켜 이순이를 내쫓았다.
아무리 간청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순이와 가족들은 별도리 없이 유배지를 향해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겨우 백 리쯤 갔을 때 포졸들이 쫓아와서 이들을 다시 체포한 것이” 다. ‘하마터면 치명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겠는가 라는 생각에 이순이는 한없이 기뻤다.
전주 감영에 당도한 이튿날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하느님을 공경하며 죽기를 원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에 감사는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몽둥이로 정강이를 치고 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 이순이의 정강이는 살이 터져 피가 낭자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멎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4〜5일 뒤에는 상처가 깨끗이 나았고, 20일이 지나서는 맞은 상처의 통증도 완전히 가셨다. 이순이는 집에 있을 때보다 평안하고 행복하였다.
전라 감사가 의금부에 장계를 올린 지 20일이 지났으나, 아직 이들을 처형하라는 기별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순이는 사형을 집행한다는 소식이 올 동안 소일 삼아 친정 언니와 올케 등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편지를 받거든 나를 본 듯 읽어 달라고 하였다. 꿈에도 그리운 친정이었다.
이순이는 친정 식구들에게 자기가 유배지인 벽동(碧潼)의 관비가 되는 것보다 치명자가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으며, "내가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알고, 산 것을 죽은 것으로 알라”고 하였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어찌 두렵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의(義)를 배반하고 사는 것은 천지의 죄인이라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않다"는것이었다.
그래도 인간적인 시름은 가시지 않았다. 호강하며 자란 시누이는 부모 동생 다 잃고 초라한 초가집에서 불쌍한 큰어머니와 노쇠한 할머니에게 의지하며 고생이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아직 친정에 머물러 있는데, 시집에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있으니, 그 가련한 신세를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유배지로 귀양 간 어린 시동생들의 참혹한 정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잘 견뎠고, 시숙모와 사촌 시동생 유중성은 혹독한 고문을 훌륭히 견뎌냈다.
드디어 사형 판결이 났다. 1801년 12월 22일 조정에서는〈토역 반교문〉(討逆頒敎文)을 발표했고, 이날 형조에서는 전주 옥에 있는 죄수 네 명을 해당 읍에서 처형하도록 대왕대비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의금부는 사형을 집행하도록 전라 감사에게 명령을 내렸고, 감사는 사형 집행일을 12월 28일(양 1802년 1월 31일)로 잡았다. 천지가 얼어붙는 섣달이었다. 형장은 군사 훈련장으로 군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는 전주 숲정이였다.
이순이는 형장에 도착하여 먼저 몽둥이로 정강이를 맞는 고문을 받았지만,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사형을 받을 때는 관례대로 망나니가 이순이의 옷을 벗기려 하였다. 그러나 죽는 마당에서도 남자의 손이 몸에 닿는 것이 못마땅하였던 이순이는, 아주 정숙하고 품위 있게 "내가 비록 네 손에 죽기는 한다만은 어찌하여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하고는 자기 손으로 옷을 벗었다. 또 망나니가 손을 묶으려 하자 다시 망나니를 물리치고 나서 손을 가지런히 몸에 붙인 뒤 맨 먼저 머리를 도끼 밑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편안한 모습으로 참수형을 받았는데. 잘려진 목에서는 젖빛 같은 피가 쏟아져 홀렸다. 그때 그녀의 나이 갓 스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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