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져서
부모가 종종 전화를 한다 밥 먹었냐고
밥 먹은 나를 재촉하는 부모에게 부모 없이도 행복하다는 걸 설명하곤 한다
출처: 세계일보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아주 노골적입니다. "나 힘들다."라고 소리 내어 말합니다. "힘들고 괴롭고 정말 죽고 싶어요."라고 외치는 시인을 만납니다. 들킨 것이 아니라 힘든 그의 속이 다 보입니다. 왜냐고요, 다음 연에 그 표정이 보입니다.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고추를 찧는 방망이 곁에만 가도 눈이 아립니다. 눈가가 따갑지요. 힘든 걸 들키면 눈물부터 날지도 모릅니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젊은 친구들의 현실입니다. 너무 좋은 옷은 살 여력도 안 되고요. 결혼을 못 했으니 부모가 되지도 못합니다. 현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되는 일이 없는 세상엔 점집이 늘어납니다. 카페만으론 장사가 될 리가 없지요. 점도 같이 봐 주는 카페가 더 유리한데요, 거기에서조차 어깨를 굽히고 다니라고 하는군요. 아니, 반대가 아닐까요? "힘들어도 어깨를 좀 펴고 다녀봐."라고 말하는데도 어깨가 자꾸만 좁아지겠죠.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어깨에 짐을 지우는 자는 누구일까요? 사랑하는 자일까요? 그렇다면 사랑마저도 포기하라고 합니다. 이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헤어질 순 없으니까 좋아하는 복숭아는 포기하라고 하는군요. 복숭아가 워낙 비싸야지요. 과일값도 만만찮아서 청년들은 과일 사 먹기도 어려워요.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원래 좋아하지만 이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직 청년의 자존심은 살아 있습니다. 원래 누구에게나 잘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희망을 점점 잃어갑니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이 시의 압권입니다. "희망을 앓는다." 앓고 나면 회복해야 하는데 과연 희망이 살아날까요?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희망이라고 해야 별다른 게 아닙니다. 국물 요리를 먹는 것,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것이 다입니다. 또 한 가지 희망은 다음에 이어지는 세 연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옷 가게 점원은 옷도 예쁘고 그 옷을 입은 당신도 예쁘다고 합니다. 이런 힘들고 괴로운 시에서 해학이 나옵니다. 시인은 원래는 즐거운 사람이었나 봅니다. 칭찬도 자주 들었을 법 합니다. 그런 칭찬이 듣고 싶다고 합니다. "잘 했어, 수고했어!" 이 한 마디가 청년들에겐 필요합니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져서
힘든 사람을 지나치는 법이 없는 청년이군요.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내가 더 힘들군요. 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집니다. 희망이 점점 절망적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종종 전화를 한다 밥 먹었냐고
밥 먹은 나를 재촉하는 부모에게 부모 없이도 행복하다는 걸 설명하곤 한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안부를 묻습니다. "힘들어요, 다 아시잖아요.", "벌써 힘든 걸 들켰잖아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저 행복해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걱정이나 하세요. 저도 어른이에요. 설명 안 해도 좀 알아주세요."라고 부모님께 넋두리를 합니다.
아, 청년의 미래가 암담합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질 않는군요. 부모님에게 힘든 걸 들켰나 봐요. 결혼도 포기하고 취직도 포기하고 아이도 포기한 이 시대의 청년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그래도 아직 자존심은 살아있습니다. "힘들어요. 그러나 지금은 희망을 앓는 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건강을 회복하고 든든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청년이 보여요. 부모님의 심정이 오죽하겠어요? 다 큰 아이가 이렇게 힘들어해도 도울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도 힘드니까요. 복지가 무엇일까요? 복숭아를 먹고 싶을 때 복숭아를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부모가 되고 당당하게 어깰 펴고 다니는 단순한 건데요, 어머니에게 잘 살고 있다는 걸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요, 그게 이렇게 힘들군요. 오랜만에 시다운 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신춘문예는 이래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전달해야 합니다. 거칠지 않게, 담백하게, 소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던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