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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ep
함리화 - <2003.05.05>
Cr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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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만이라도
당신이 나와 같은 키로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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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평소처럼 허리를 낮게 굽히고 내 머리를 빗긴다.
"은수 머릿결은 정말 좋아. 빗이 닿기만 해도 스르르 미끄러져 버릴만큼"
얼마전 미용사가 다녀갔을때 모두들 이참에 머리를 짧게 잘라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었다.
이제 곧 여름도 오는데 너무 덥고 답답하지 않겠냐고.
나는 고개를 저어 보이고, 그저 말없이 헝크러진 머리를 매만지기만 했다.
[ 아니요. 머리가 짧아지면, 그녀가 내 머리를 만져주는 시간도 함께 짧아져요.]
내 머리는 그녀만이 감길 수 있고, 말리는 것도, 빗기는 것도 모두 그녀 몫이다.
그녀는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이곳을 방문하고, 따라서 나는 화요일, 목요일, 그리고 일요일에만 머리를 감았다.
어쩌다 사정이 생겨 그녀가 오지 못하면 나는 가려운 머리를 나흘이고 닷새고 그대로 내버려두곤 했다.
"언니도 내가 머리를 잘랐으면 좋겠어?"
그녀도 귀찮을테지. 간수도 못하는 주제에 무책임하게 왜이리 길렀느냐고 속으로 나무랄지도 모르지.
"아니~ 언닌 은수 머리 만질때마다 어릴적 기억이 나. 어릴때 언니한테 긴 금발머리를 가진 바비인형이 있었거든. 언니 보물 1호였어. 이름이 수지였는데, 금발의 긴 머리를 빗겨주고 있으면, 내가 그 인형한테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되는듯한 느낌이 드는거야. 그 느낌이 나는 참 좋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간지럽힌다.
그녀의 음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깃털이라도 달려있는듯 언제나 귓가를 지칠만큼 간지럽히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묘한 나른함을 남겨놓으며.
팅커벨처럼 몸에서 빛이나는 요정들이 그녀 속에 한가득 살고 있기라도 한걸까.
"언니, 나 머리 염색할까? 노...란 색으로."
"글쎄, 원장님이 허락하실까? 후훗. 그리고 은수는 검은머리가 너무 잘 어울려."
[ 머리를 빗겨주는 사람.
내게도 당신은 너무나 특별해.
나는 당신의 말없는 바비인형.
당신이 내 머리를 만져주지 않으면 나는 형편없이 망가져 버릴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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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참 불쌍해."
그녀가 나를 내려다 본다. 언제나 그렇듯이 딱 손이 닿지 않을만큼의 높이에서.
머리위 그녀의 얼굴이 햇빛을 모두 가렸는데도 어쩐지 나는 계속 눈이 부시다.
밤이었더라도 여전히 눈이 시었을거다.
"왜?"
그녀가 한주먹 움켜쥐었던 잔디를 털어내며 묻는다.
잠시, 그녀의 하얀 티셔츠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손. 하얀 얼굴.
티셔츠에 초록색 잔딧물이 들었다. 풀물은 지워지지 않는다던데.
순간, 그녀의 손과 얼굴, 그곳에 초록빛으로 물들고 싶다.
"너무 많은걸 가지고 있어서...또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믿고 살아서....
언젠가 그중 하나라도 사라지면 아마 견디지 못하고 꽃처럼 시들어 죽을거야."
그녀는 말이 없다.
"나처럼 없는게 많은 아이들은 잃는게 두렵지 않은데 말야."
나는 그녀의 침묵을 사랑한다.
그녀의 침묵은 곧 연민이다.
나보다 가진것이 많다는 이유로 나에게 늘 미안해하는 그녀의 침묵은 죽은 나를 향한 묵념이다.
"아직은 날이 좀 차지? 그만 들어가자."
그녀는 자신의 무릎에서 내 머리를 거둬내며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미소라도 나는 휘이 흩어져 사라질까 덥썩 끌어 안는다.
음습한 곳에서만 자라는 곰팡이처럼 나는 그녀의 어둡고 습한 미소만을 먹고 연명한다.
"휠체어를 미는 느낌은 어때? 언니? 직접 굴리는 것 보다 재밌을까?"
[ 당신이 더 미안해졌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 난 이보다 더 아플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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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스물 세살이다.
키가 크고, 손목이 얇고, 가까이서 바라보면 파랗고 붉은 실핏줄들이 비출 만큼 하얗고 투명한 얼굴을 지녔다.
청바지를 주로 입고, 가방안에 늘 CD플레이어를 넣어 다니고, 이름을 대면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라고 말하는 대학교에 다닌다.
향수를 쓰지않아 여름에는 종종 땀냄새가 나기도 하고, 어쿠스틱 기타 소리처럼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목소리를 지녔으며, 종종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잘못 부르기도 했었다.
어깨를 살짝 덮는 머리는 아무 장식도 없는 싸구려 고무줄로 질끈 묶고 다니고, 그 나이까지 귀도 뚫지않아 그녀의 귀는 언제나 매끄러운 알몸이다.
그녀는 큰소리로 길게 웃고, 한마디로 남을 웃길 줄 알고, 피아노를 칠 줄 알고,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젓가락질을 엑스자로 하고, 연필을 이상하게 잡고 동그라미를 거꾸로 그려도 글씨는 아주 잘 쓴다.
어릴적 해외여행도 몇번 다녀온적 있고, 지금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는 큰 집에서 살고있다.
그녀가 오지 않는 밤이면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주욱 나열해 보곤 한다.
날이 밝을때까지도 나는 그렇게 그녀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결국 지쳐서 멈추고 말때면 나는 여전히 내가 모르는것들이 훨씬 더 많음을 깨닫고 눈을 감는다.
'언니를 만나면 물어봐야지.'
그렇게 말하고 나면 어루만져지듯 마음이 놓여 순식간에 졸음이 몰려든다.
왠지 내일 떠오르는 해를 맞이해야 하는 이유가 생기는듯 하다.
반면에, 그녀는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라는 의문은 가져볼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를 대할때면 나는 언제나 발가벗고 있는듯한 수치심에 바들바들 떨곤 했기 때문이다.
목도리까지 둘러 나를 가려 보아도 그녀의 눈빛은 늘 나의 깊숙한 곳 더러움까지 꺼집어 내는듯한 착각에 나는 더욱 어깨를 움츠렸었다.
나에게는 나를 숨길 수 있는 낮은 벽 하나 없었다.
엎드리고 엎드려 바닥으로 파고들어보아도 나는,
이토록 초라한 모습 그대로 치부를 내보이며 그녀의 허리쯤에서 한없이 빛나는 얼굴을 올려다 보는 사람이다.
"언니, 내가 꾸는 꿈속에는 해가 없어."
"그건 너 자체로도 너무나 빛나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녀는 내 마른손을 두어번 톡톡 두드려주며 말했다. 내가 빛이나는 사람이라고.
"근데 왜 항상 어둠 뿐인거지?"
"아직 때가 아니라 그런거야. 조금만 더 지나면, 태양보다 더 빛나는 사람이 될거야, 은수는."
[그녀의 거짓말은 너무나 달콤하지.]
그녀는 밤색의 크로스백을 고쳐메고 평화원의 문을 열며 손을 흔들었다. 화요일날 보자며.
"그전에... 언니가 내꿈에 와주면 안될까? 내가 빛을 낼 수 있게 되는 날까지만..."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나는 속삭인다.
[ 당신은 날 몰라.
당신이라는 달콤한 위로를 마시며 썩어가는 내 심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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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그녀가 처음 평화원에 자원봉사를 나온 날은 내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새로이 주어진 생일을 16번째로 축하하는 날이었다.
아침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큰소리로 경쾌하게 축가를 부른 후 코를 파묻고 밥을 먹는 가운데, 나는 멍하니 수녀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키가 큰 여자를 바라보았다.
긴 다리를 지닌 여자.
가늘고 여린 어깨로 무엇이든 당장에라도 해보이겠다는 투지를 보여주듯 긴 소매의 남방을 팔뚝까지 걷어부치고 있던 그녀를 보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힘없는 내 심장속 티슈들이 하나하나 찢어져 나가며 맺히는 핏물처럼 뜨겁고 끔찍하게 흘러내리던 눈물.
"생일날 울면 안되지...이름이 은수라고 했지? 참 예쁘다, 얼굴만큼이나..."
그녀의 차고 고운손이 내 피부에 닿았다.
땅을 다지듯 정성스레 눈물을 닦아내고 그 사이로 흐르는 상처를 쓰다듬는 그녀의 아름다운 손을 잡고 나는 16년만에 처음으로 울었다.
수녀님들이 은수가 운다며 수선을 피우는 동안, 나는 16년만에 엄마를 만나기라도 한것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먼 여행을 나설 채비를 하기위해 두손에 눈물을 모아 담았다.
"은수야, 언니랑 처음 만났을때...그때 왜 울었어?"
메니큐어를 칠해주던 손을 멈추고 그녀가 잠시 나를 바라본다.
잊혀질만 하면 한번씩 그녀는 그렇게 이유를 물어왔다. 3년째 한번도 알아낼 수 없었던 비밀을 캐내고야 말겠다는듯 두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눈은 크지 않다. 그래도 내모습 하나 다 담아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을만큼 넉넉한 눈이다.
"난 어릴때 꽤 이뻤어."
"지금도 이뻐."
"찾아오는 사람들이 한번씩은 꼭 나를 안아줬었어. 이렇게 이쁜 아이가 어쩌다가...하면서 꼬옥 끌어안고 눈물 찍어내고 그랬어.
나만 보러 오는 사람들도 몇명 있었어. 언니의 보물 1호였다던 바비인형을 나한테도 사다주던 사람들이 있었어.
하지만 그사람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거나 기대하진 않았었어. 누가 가르쳐 준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지 않는게 좋다는것을 난 어느새 혼자 깨달았었나봐.
특별한 날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었어. 하루동안 북적거리는 건강한 사람들속에서 웃고나면, 그들이 다 떠나고 난 다음날이 두배로 쓸쓸해졌어. 그래도 슬프거나 한건 아니었어. 그런건 아니었어. 그래서 한번도 울지 않았나봐."
내가 이야기를 할때면, 그녀는 항상 하던일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곤 했다.
자연히 나는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단,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만.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아예 메니큐어 뚜껑을 덮은지 오래다.
내가 그녀의 침묵을 사랑하듯, 그녀는 내가 떠들어 대는것을 좋아하는 가 보다.
그래. 그녀는 내가 말이 많을때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말하자. 말하자.
"언니가 다시 오지 않으면, 그러면 미친듯이 언니를 기다릴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언니는 나를 길들인 적이 없는데, 나는 언니를 처음 보고도 언니의 모든것이 너무 익숙해 그리웠던 것처럼 서러워졌었어."
그녀가 나를 꼬옥 끌어안는다.
이것은 그녀의 또다른 의미의 침묵이다. 나를 치유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행위가 깃든 침묵- 그 우월감이 숨겨진 적선에도 나는 마음이 부푼다.
[ 더 꼬옥 안아줘. 차라리 내 심장을 터뜨려줘. ]
"어느날 언니가 더이상 이곳에 날보러 오지 않게되면, 그런 날이 오면, 난 죽을거야."
잠시 그녀의 눈빛에 당황이 스치고, 나를 안고있는 팔이 조금씩 느슨해진다.
그녀가 입을열면 이제 그만 가야한다는 말이 나올것만 같아 나는 더욱 간절히 그녀의 침묵을 바래본다.
그러나 그런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둥근 시계가 혀를 빼물고 말한다. 밤이 깊었다고.
"그런날은 오지 않을거야. 은수보러라도 와야지."
[ 거짓말.]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면 안돼? 언니?"
"후후, 얼른 자. 언니 또 올께."
[ 하룻밤쯤 내곁에서 잠들어도 당신의 심장이 깨어지거나 하진 않잖아.]
어김없이 그녀의 어깨를 가로지르는 갈색 가방.
가끔은 저것만 없으면 그녀가 영원히 머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언니"
"응?"
그녀는 어느새 저만치.
"오늘 밤엔 내꿈에도 해가 떴으면 좋겠어."
[ 기억해. 당신이 오지 않으면, 난 죽어.
내 쓸모없는 두 다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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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다.
그녀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날이다.
"은수야~! 언니왔어!"
나는 바삐 손을 놀려 밖으로 나온다.
꿈에서 나는 그녀를 맞기위해 천번이고 맨발로 뛰어나오지만, 현실에선 그녀에게 가기위한 손과 마음만이 바빠질 뿐, 나는 고자리를 맴도는 고장난 테옆 자동차와 같다.
"어, 니가 은수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
"어머, 정말 예쁘게 생겼다. 혜인이가 니얘기 정말 많이 했었어."
그녀는 가오리연처럼 세개의 꼬리를 달고 나타났다.
"언니 친구들이야. 여기 이 오빠는 정훈이오빠구, 이 언니는 희정이언니, 그리구 저기서 수녀님하고 얘기하는 오빠는 유천이오빠야. 은수 언니 오빠들한테 인사해야지?"
나는 왠지 저렇게 웃는 그녀가 밉다.
자신과 똑같이 웃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과 똑같은 자리에서 나를 마주보고 웃고있는 그녀가 미워진다.
그녀는 내옆에 서서 그들을 향해 웃는것이 아니라,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그들과 함께 날 바라보고 서있다.
순간 그들과 나 사이에 유리벽이 놓이고, 나는 소리없이 박제되어감을 느낀다.
"언니 친구들이 오늘 언니랑 같이 아이들 목욕도 시키고, 은수랑 얘기도 하고 싶다고 따라왔어. 은수도 언니 친구들 궁금하다고 했었지?"
그녀는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언제나 궁금했다.
이곳에 오지않는 월,수,금,토요일에는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고, 나를 만나러 오는 화,목,일요일 4시 이전에는 그 긴다리로 어디엘 다녀오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가본적이 없는 곳에서의 그녀는 어떤 말을 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고, 설겆이를 하고, 내 머리를 감기는 일 외에, 그녀는 어떤일들을 하고, 또 하고 싶어하는지 궁금했었다.
저런 사람들이 그녀를 '혜인아' '혜인아'라고 부르는구나.
꼭 그녀처럼 아무 거침없이 웃는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북한산에 가고, 강촌이란 곳에서 자전거를 탔구나.
나는 때때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혜인아'라고 부르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마치 내게 없는 모든것들이 새살처럼 돋아나 나의 흉진 곳을 덮고 그녀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착각이 든다.
"정훈아. 넌 나랑 저녁상 차려야 되니까 애들하고 축구는 적당하게 해야된다!"
"예스, 맴!"
야외로 피크닉이라도 나온듯 마냥 들떠있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 조소가 새어나온다.
"쳇. 놀고들 있어, 아주."
왕발이 아저씨의 침을 닦아주던 그녀가 손을 멈추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은수,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짐짓 화난 표정을 해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내주고 싶다.
"꼴값들이야. 다들."
나는 몸을 돌려, 아니, 나의 낡은 휠체어를 돌려 이를 악물고 휠을 돌렸다.
마음은 그녀로부터 이미 멀리 도망가 있는듯 하지만, 그녀는 단걸음에 나를 잡아 세운다.
나는 빠르고 싶어도 빠르지 못하는 병신 달팽이다.
"은수 뭐 화나는거 있어?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차라리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따귀를 날리시지. 위선자."
그녀가 선(善)이면 나는 악(惡)이고, 그녀가 양(陽)이면 나는 음(陰)이고, 그녀가 정(正)이면 나는 역(逆)이다.
그녀가 선심을 베풀수록 나는 더욱 악해지고, 그녀가 내손을 잡고 치유의 정을 불어넣을수록 나는 망가져갈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나를 욕해. 난 당신의 마음처럼 매끄러운 하얀 귓볼을 깨물어 뜯어버리고 싶어.]
나는 저녁을 거르고 어두운 방안에 틀어박혀 비뚤어진 나 자신을 저주했다.
그녀는 틀어진 나에게 더이상 아무말 하지않고 발길을 돌렸다. 돌아서는 순간에도 가여운 아이라고 마음 한구석으로 안타까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렇게 바르고 고운 사람이라서.
눈물이 흐른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라서.
정훈이라는 사람이 건넨 쌕쌕이캔을 따 한모금 마시고 나는 잠시 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 당신을 부르러 갈 발이 없어 난 비명을 질러야만해.]
"은수야!!!!!!, 은수야, 얘가 왜이래. 수녀님! 혜인아!"
저녁을 따로 챙겨 방안으로 들어서시던 수녀님이 미친듯이 내손에 들린 은색의 금속체를 낚아챘다.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느끼며 나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녀가 달려오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구급상자를 찾는 가운데, 그녀가 젖은손을 채 털어내지 못하고 달려오는것이 보인다.
"은수야 너 왜이래...은수야, 언니가 미안해, 언니가 미안해...."
날 안고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의 하이얀 웃옷위로 번지는 핏물을 보며 나는 그제서야 웃었다.
[ 날 혼자두지 마. 난 나와 단둘이 있는것이 너무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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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야, 언니랑 산책나갈까?"
그녀는 눈에띄게 나를 어려워 하고있다. 혹 터지는게 아닐까. 잔뜩 팽창한 위태로운 나의 모습 앞에 그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나를 더없이 날카롭게 한다.
"산책은 거닌다는 뜻이야. 나한테 그말은 적합하지 않아."
"요즘 우리 은수가 기분이 많이 안좋은가 보다. 은수, 언니한테 화난거라도 있어?"
창살 너머 스며드는 햇살에 눈을 찌푸린채 머리에 닿는 그녀 손의 감촉을 느낀다.
금방이라도 스스르 잠에 빠져들것만 같이 노곤해진다.
[ 내 머릴 그렇게 쓰다듬지 마.
그 손길에 눈을 감게 하지 마.
나를 이제 그만 길들여줘. 눈을 떴을때 당신의 부재를 깨닫게 하지 말아줘. ]
"아니."
"그런데 요즘 왜이렇게 날카로울까..?"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끌어다 얼굴을 기대어 본다.
이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눈을 감고 그녀 손에 베인 체취를 마음껏 느낀다.
"그렇지 않아. 그냥 언니가 있어서 난 너무 좋아..."
"은수야."
"나중에 여름오면 저쪽 화단에 피는 봉숭아 꽃잎 따다가 내 손톱 물들여줘, 언니.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그래. 근데 은수야."
"어제 승현이 녀석이 이불에 쉬야를 했어. 밤에 화장실 가기가 무서워서 그랬대. 승현이는 스무살이 될때까지 계속 겁쟁이일것 같아."
"은수야."
"왕발이 아저씨 발이 계속 자라나봐, 언니. 그 아저씬 나처럼 걷지도 못하는데 발만 커서 얼마나 억울할까? 그래도 아저씬 '왕발이 아저씨'라고 부르면 항상 웃는다?"
[ 말하지마. 난 당신의 침묵을 사랑한다고 했잖아.]
"은수야, 언니 이제 여기 그만 와야 할것 같아."
눈을 떴다. 그녀만큼이나 눈부신 태양이 눈이 멀어라 빛을 쏘아댄다.
"언니...이제 은수 보러 못 올것 같아..."
"왜? 이제 병신들 보는게 지긋지긋해?"
"은수야..."
"언니 평생 병신들 돌보며 천사노릇 하겠다고 장애복지학과 들어간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않와? 왜, 전과했어? 남자친구 생겨서 이제 나같은거 만나러 올 시간따윈 없어? 왜 못 온단 거야?"
"다 은수 위해서 그러는거야..."
"언니가 없으면 죽어버릴거라고 했었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아보고 싶다.
이제 나를 보기 싫다하는 그녀의 눈물도 내것처럼 짜다면, 그녀의 단 한가지라도 나와 같은것이 있다면.
"그래서 언닌 더 은수를 볼 수가 없어...은수야...언닌 사실 많이 무서워...."
그녀는 내가 보기 싫어지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나는 그녀에게 태어날때부터 죽어있었던 나의 두 다리와 왼쪽 팔처럼 아무 쓸모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언제든 갈색 크로스백만 둘러메면 저 문을 열고 씩씩하게 걸어 나갈 수 있는것이다.
나처럼 자신의 머리를 감겨주기를 사흘동안 기다리지도 않고, 이불위에 눕혀주지 않아도 스스로 누워 잠들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떠날 수 있다.
"내가 언니를 사랑하는게, 언니는 무서워?"
"은수야...."
"그래서...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이, 이제는 날 보러 오지 않겠다는 거야...?"
[ 왜. 내가 병신이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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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도, 목요일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일주일동안 나는 예전처럼 해가 뜨지 않는 꿈만 꾸었다.
어둡고, 무섭다.
우물속에 갇힌듯, 빛이 까마득히 멀다.
그녀의 보물 1호였던 바비인형 '수지'도 그녀가 고학년이 됨과 함께 잊혀지거나 버려졌을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보잘것 없는 인형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빗겨주던 머리를 잡히는대로 잘라냈다. 나의 오른 팔 근육이 허락하는데 까지.
[ 아냐. 난 당신을 이대로 보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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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 혜인이언니한테 전화좀 해주세요. 긴히 할얘기가 있다고, 한번만 들러달라고."
나는 수녀님의 긴 치마자락을 붙잡았다.
잡을 수 있는것은 다 잡아야 사는 나는, 무엇이든 잡으면 놓아서는 안되는 거다.
수녀님께 말한다.
'제발요.'
[ 나에게 당신에게 진 빚을 갚을 기회를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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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이주일만에 평화원을 다시 찾았다.
여전히 길고 가는 다리로 당당하게 평화원 문을 젖히고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늘 그랬듯 눈이 시려온다.
"언니, 오랫만이야."
나는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듯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내 머리를 보고 돌처럼 굳어있는 그녀를 무시한채.
"은수야...머리가 그게 뭐야..."
그녀가 울상이 되는것을 보면 난 행복해진다.
[ 당신도 나처럼 아픈게 무엇인지 알아야해. 그러면 나를 온전히 이해하겠지.]
"보고싶었어, 언니. 언니랑 산책나갈려구, 나 신발도 신었다? 봐."
그녀는 내 발을 내려다 보곤 설픈 미소를 머금었다.
걷지도 못하는게 신발을 신고 당장에라도 의자에서 일어나 뛰어나갈 듯이 기세가 등등해 있는 모습이 우스웠는가 보다.
"그래, 우리 오랫만에 산책가자."
그녀는 제자리로 돌아와 내 뒤에 섰다.
나는 언제나 그녀의 앞에 있는 사람이다. 앞서 걸으며 수시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하는 불안감을 업보처럼 어깨에 지고 태어난 사람.
나는 이제껏 단 한번도 그녀와 산책하는것을 좋아한 적 없다.
움직이는 동안에는 그녀를 마주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늘 함께 머물렀던 느티나무 밑둥에서 멈추었다.
얼마전까지, 봄햇살이 그녀의 희고 슬픈 피부를 간지럽히던 곳.
"언니. 지난 3년이 나에겐 생애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어. 언니가 있어서."
그녀의 침묵.
그녀의 피곤한 얼굴.
그녀의 긴 다리.
긴...다리.
"언니, 나 한번만 안아줄래? 그리고 입술에 입맞춰줘. 그럼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마법에서 깨어나 기적처럼 벌떡 일어설 수 있을것 같아."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와 팔을 두르고 가슴을 밀착시켰다.
나를 밀어낸 그녀의 심장은 아직 따듯하고도 포근하다.
[ 당신의 따듯한 심장에, 내 한몸 뉘일 곳 마련해줘.]
그녀의 눈과 만나며 나는 가까워 지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본다.
폭주하는 심장을 느끼며 나는 무릎위에 가지런히 모아두었던 오른 손을 쇼울 밑에서 빼냈다.
그리고....그녀의 입술이 내것에 닿았다.
[ 이제 당신은 날 필요로 하게 될거야.]
늦봄의 햇살이 칼날에 부딪혀 반짝. 서린 빛을 뿌린다.
언젠가 그녀의 하얀 티셔츠를 초록빛으로 물들였던 잔디에게 복수라도 하듯 잔디는 금새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그녀는. 그녀는 단마디 비명과 함께 무릎을 움켜쥐고 서있다.
나는 스트링에 메여 의사와 상관없이 움직여지는 매리어넷처럼 그녀의 왼쪽 다리에 차갑고 날카로운 그것을 쑤셔넣는다.
그녀는 더이상 서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그녀의 눈이 나의것과 마주본다.
같은 높이에서.
[ 기적이 일어났어. 이제 당신은 나와 같은 사람이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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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만이라도
당신이 나와 같은 키로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럼 날 사랑할 수도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첫댓글 표현들이 아주 예리하군요. 섬뜩하고도 매력적인 이야기,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