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769호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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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小考 (1)
처음으로 예수 믿고 개신교인이 된 사람은 천주교인이나 불교인과는 달리 누구를 막론하고 예배 모임에서 기도에 대한 심적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표기도는 말 할 것도 없고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할 때도 무슨 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중얼중얼 얼버무리는 고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거침없이 유창하게 기도하는 기신자들의 기도 소리에 할 말을 잊고 우두커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이 지루하고 난처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심적 부담을 느끼는 초신자들은 혹시나 기도를 시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염려하면서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예배 모임에 참석하기를 망설이거나 두려워합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그렇게 유창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터인데 ‘시어미 며느리 적 생각 못하는’식으로 초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부담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들어보라는 듯이 길게 기도하는가 하면, 초신자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사료 깊은 배려도 없이 불쑥 지명하여 기도를 시키는 무례한 기신자들이 있으므로 편안하고 즐거운 신앙적 모임을 불안하고 어색한 분위기로 만듭니다.
자기 혼자서 기도할 때는 짧게 하든 길게 하든 또는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겠으나 초신자와 더불어 기도할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요점만 한 두 마디 정도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식사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헌금할 때는 "사랑하는 성도를 섬기는 물질적인 일에 참여케 해 주신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예배할 때는 "이 시간 예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께는 영광이요 우리들에게는 기쁨 충만한 예배가 되게 하소서" 라는 짧고 명료한 기도라면 초신자들이 처음부터 기도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무릎 꿇는 기도만이 만능인양 성경구절 암송 자랑이라도 하듯이, 신구약 성경의 요절을 한 자도 빠짐없이 인용하는가 하면, 연설이나 강의를 방불케 하는 달변과 미사여구로 회중을, 아니 하나님까지도 설득시키려하고 인간의 육신적인 희망사항을 논리적으로 강요하는 기도에는 초신자들이 쉽게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참 기도는 무엇인가의 정의조차 혼란케 합니다.
기도는 ‘잘 한다’ ‘못 한다’ 또는 ‘할 줄 안다’‘할 줄 모른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부모와 자녀들과의 일상적인 대화를 두고 ‘잘 한다’ ‘못 한다’ ‘할 줄 안다’‘할 줄 모른다’라는 말들을 하겠습니까? 기도 역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들인 성도와의 일상적인 대화입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소위‘시험’에 들거나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초신자는 서리집사로 임명받고 처음으로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미 수일 전에 예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일어서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하고는 말문이 막혀 망설이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당황하여 끝내 기도를 이어가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어색한 시간이 얼마동안 흘렀으나 담임 목사님이 곧 이어 기도를 마침으로 예배는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고개만 떨어뜨리고 앉아 있다가 축도도 끝나기 전에 예배당을 나가 버렸고 그 후로는 교회 출석을 하지 않았으며 목사나 직분자들의 몇 차례에 걸친 심방에도 불구하고 몇 달 후에 어디론가 예고 없이 거주지를 옮겨 이사를 가버린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표기도를 예고 받고는 그 예배에 불참하는 초신자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교인 수가 적은 교회는 어느 교회를 불문하고 이와 같은 기도에 얽힌 사연들이 있습니다. 본인이 알아서 기도할 자신이 없으면 사전에 거부하거나 기권하면 별 일이 아님에도 담임목사님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교인들을 의식한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로 말미암아 피차 어색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공기도에 관한 이와 같은 사연과 또 기도할 자신이 없어서 기도 내용을 필기해서 보고 하는 사람을 보고 무슨 기도를 써서 보고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받기 때문에 대부분의 모임에서 공기도는 직분자의 몫으로, 하는 사람만 하게 되고 따라서 공기도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직분조차 맡기를 망설입니다. 기도하는 것 때문에 직분을 사양하거나 거절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일단 목사나 직분자들의 잘못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기도가 필요불가결한 것이라면 사전에 당사자와의 충분한 대화로, 기도를 남이 듣기에 잘하고 못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존심이나 체면 등과는 무관하다는 인식을, 신앙적인 지도와 인도로 권면해야 합니다. 항상 카리스마적 고자세와 교인들과의 수직적인 관계 유지를 상식으로 알고 기도에 부담을 느끼는 초신자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관심부터 불식해야 합니다.
신앙적 모임이나 교제할 때의 초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부담감이나 기피증도 문제려니와 그렇다고 유창하게 잘한다는 직분자들의 보편적인 기도는 그 내용들이 과연 바람직한 기도인가? 성경적인 기도인가? 물론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사람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하는 기도가 아닌 이상 회중의 귀에 들리므로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연히 나와 함께 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도(?)가 트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공기도는 짧게 하든가 자신이 없으면 메모지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남들이 듣기에 기도를 유수같이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좋거나 큰 것은 아닙니다. 오랜 훈련과 연륜이 쌓이면 그 분야에서 선수나 달인이 될 수 있듯이 장로나 권사가 공기도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일 뿐 그렇다고 그들의 믿음이 그와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기도는 잘하나 믿음이 별로인 사람과 공기도는 서툴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 중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바리세인은 분명 회중을 의식하는 의인(?)의 기도이며 세리는 하나님만을 의식한 겸손한 죄인의 솔직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회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개신교의 공기도(대표기도)에 대한 의미나 방법을 재고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중을 의식하다 보면 그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도란 일반적으로 비유하기를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호흡이 끊어지면 그것으로 육신의 삶은 끝납니다. 이와 같이 교인들의 기도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절대적인 과제입니다. 만일 기도가 끊어진다면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만사 제쳐놓고 기도에 전념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의 대화를 뜻합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기도는 곧 기독교인의 영적 생명입니다.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마귀가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인간의 영을 그들의 종으로 삼으려는 마귀의 유혹과 도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도전과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이란 오직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에 기독교인은 영원히 죽어야 할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영적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귀신이 들려 자주 경련을 일으켜 고통 받는 한 아이를 제자들이 능히 고칠 수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 내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묻기를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하니 대답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막 9:17-29) 이는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해서 마귀가 그대로 방임하고 도전과 유혹을 단념하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기도의 내용을 교묘한 수단으로 변질시켜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못한 기도로, 즉 기도하는 자의 사욕이나 교회를 타락시키는 기도로 유도하는 끈질긴 훼방을 시도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란 인간의 생명이 존속하는 한 그 곁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롬 7:14-2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어떤 초신자로부터, 묵상 기도할 때 자꾸만 여러 가지 잡념이 일어나 개운한 기도를 할 수 없다고 근심하면서 자신에게 무언가 큰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있으나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러한 잡념에 굴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므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악착같은 마귀의 도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경고하면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엡 6:11-18).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의 어떤 훼방에도 능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하므로 초신자들은 기도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영감으로 모색하기에 앞서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통독과 정독을 한 후라면 큰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황하거나 주위에 구애됨이 없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차근차근히 만족스러운 기도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말씀을 기억하면서 대화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관심도 없이, 막연한 어떤 신비스러운 영감(?)에 의한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애쓰는 사람은 자칫 잘못된 신앙으로 기복적이고 이단적인 신앙생활에 빠질 염려가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지 못한 기독교인의 삶은 마귀들의 최적의 유혹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입어야 할 전신갑주입니다.
철모르는 어린아이는 배가 고프면 밥 달라고 떼를 씁니다. 아프면 죽는다고 울며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자라면 배고프고 몸이 아파도 참고 견디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배가 고파도 배부른 척 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안 아픈 척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모르게 배고프고 몸 아픈 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모르고 믿음이 없을 때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조금 믿음이 생기면 불편해도 참고 견디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많이 보고 믿음이 장성하면 나에게 불편하고 부족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모두 아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표현하기를 삼가게 됩니다.
또한 부모와의 대화에서 부모의 경험과 교훈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내가 무엇을 요구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베푸시는 은총이라는 말도 합니다.
영감에 의한 환상과 계시를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감에 의한 모든 신앙행위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실제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유익보다는 폐해의 염려가 더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고 많았지만 그것을 나타냄으로 말미암는 부정적인 결과를 두려워하여 자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고후 12:1-13)
바울 사도는 온갖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영광스러운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자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며 오직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만을 전파하면서 자신의 약한 것과 고난과 멸시받음을 자랑하며 이방 전도자의 사명을 완수한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호하는 기독교 이단들의 공통점은 성경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영감에 의한 환상과 계시로 비롯되는 것임을 성도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령의 검이기에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마 4:1-11)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 무엇이 필요하니 달라고 부탁하거나 어떤 일을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 등은 경우에 따라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그러한 기도는 유치하거나 저속한 기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의식대로라면 기도란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시도록 부탁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성도들을 구원하시려고 기도하고 계시는 분은 곧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서에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요 17:9) 그 기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성도들이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고 (요 17:15) 성도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요 17:21)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세상에서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를,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할 수 있기를 위하여 항상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진정한 기도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아멘’으로 화답할 때 성령께서 친히 간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면 즉시 회개하고 그 열매를 맺는 것도 또한 기도의 응답입니다. 이렇게 하여 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응답을 받게 되면 무시로 유혹하는 마귀의 궤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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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기도에 관한 합당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길...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한 동안 바쁜 핑계로 쉬었습니다.(주님 용서해 주세요)
기도에 관한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할렐루야~~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아 보게 됨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