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를 주인공으로 한 토마스 해리스의 베스트셀러 한니발 시리즈의 최근작인 [한니발 라이징]은 그 시간적 배경을 2차대전 말기인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니발의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을 다루고 있다. 모든 특징적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다. 한니발 렉터의 비참한 유년시절에는 그가 식인 살인마가 된 정신적 상처의 뿌리가 숨어 있다.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 렉터라는 독특한 캐릭터 속에 깃들어 있는 상처의 원형을 탐구해 들어간다.
1944년 리투아니아. 소련군에 밀려 퇴각하던 독일군들이, 폭격을 피해 산 속에 숨어 있던 렉터 가족들을 위협한다. 부모를 비롯해서 어른들은 모두 죽고 어린 한니발과 여동생 미샤만 겨우 살아 남지만, 독일군 패잔병들은 어린 미샤를 살해한다. 연합군의 폭격이 벌어지면서 독일군들로부터 도망친 한니발은 목숨을 부지하지만 어린 여동생 마샤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고아원에서 도망친 한니발(가스파르 울리엘 분)은 프랑스에 있는 삼촌 집을 찾아간다. 삼촌은 죽었고 미망인 레이디 무라사키(공리 분)만 있었다. 무라사키 역시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가족들을 잃고 유럽으로 혼자 건너 온 상처를 갖고 있어서, 비극적으로 가족을 잃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은 쉽게 가까워진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한니발은 밤마다 악몽을 꾸다가 미샤를 살해한 범인들을 찾아나선다.
[한니발 라이징]은 표면적으로는 한니발 렉터가 자신의 여동생 미샤를 살해한 독일군 패잔병을 찾아 복수를 하는 것을 기둥 줄거리로 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가 식인 살인마가 되었는가를 독자-관객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결과가 먼저 보여진 뒤, 작가는 그 원인을 만들었기 때문에 잘못 하면 억지 합리화가 될 수도 있다. 토마스 해리스는 그 함정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치밀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니발 라이징]의 한계는 사후구성이기 때문에 자기합리화의 치명적 약점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니발의 정신적 내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들은 짜여져 있지만, 심리학 교과서 교본대로 진행된다. 또 하나의 약점은 화가 베르메르의 일생을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피터 웨버 감독과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피터 웨버의 연출은 너무 착하다.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여러차례 등장하고 있지만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장면 묘사가 싱겁게 끝나는 것도 감독의 성향 탓이다. 조나산 드미(양들의 침묵), 리들리 스콧(한니발), 브랫 라트너(레드 드래곤) 등의 역대 한니발 시리즈 감독에 비해 가장 장르 성격에 맞지 않는 감독이다.
레이디 무라사키의 역할도 애매모호하다. 왜 그녀는 동양인이어야 했을까? 한니발에게 신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토마스 해리스의 선택은 훌륭한 것이 아니다. 서구 관객들에게 오리엔탈리즘을 충족시켜주는 것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 그녀의 등장이 한니발이 엽기적 살인마로 성장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불분명하다. [양들의 침묵]에서 스털링 요원과 렉터 박사 사이의 정신적 교감에 어떤 동기부여를 하려고 했다면 잘못된 것이다. 레이디 무라사키의 등장은 한니발 렉터 캐릭터에 오히려 불필요한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청년 한니발 렉터를 연기한 가스파르 울리엘의 아우라도 부족하다. 안소니 홉킨스의 눈빛만 흉내내려고 하지 내면의 무시무시한 포스는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열심히 한니발 렉터의 캐릭터를 흉내내고 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