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원수는 없다.
- 철웅 스님 -
참다운 기도란 내 안의 부처를 드러내는 것
‘내가 부처’ 스스로 깨달아야죠.
나와 남 가르면 마음에 독이 생겨요.
편견 놓고 대하면 둘 아닌 하나지요.
먼저 ‘불교는 철학인가 종교인가?’ 하는 해묵은 질문을 말머리로 삼아 보겠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불교라는 종교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교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입장은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불교를 철학과 등치(等値) 하는 것은
종교의 생명이라 할 실천력을 거세시킬 위험을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 할 때, ‘종(宗)’ 자를 한번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종’은 뿌립니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우주와 사물의 실상, 즉 본질을 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아는 것에서 철리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철리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이에요.
그러나 이성과 오관으로 따지는 철학은 인간의 이율배반 의식 위에 서 있어요.
하지만 뿌리를 찾는 일, 다시 말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행위로서의 종교는 다른 차원이에요.
본질 자체를 이치적(理致的)으로만 따지는 것이 철학이라면, 불교는 그것을 체득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 자체를 의인화하면 곧 부처인 거지요.
따라서 불교란 부처를 찾는 종교이고, 부처를 찾는 일이란 자신의 마음을 아는 일인데,
문제는 이 마음속에 든 이율배반 의식, 이게 병이에요.
그런데 이 이율배반 의식을 싹 비워버리면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실상을 딱 깨치는 거지요.
그럼 깨쳤다는 것은 뭐냐? ‘도(道)’에 순응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불교라는 종교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사물의 실상 즉 존재의 본질이란 무엇입니까?
우주와 사물의 본질은 바로 ‘불성’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참마음 즉 ‘내 마음의 부처’ 혹은 도(道)가 그것이지요.
결국 불성의 현현이란, 이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직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른 마음 씀이란 어떤 것인지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성현의 가르침에 의하면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 했어요.
모든 게 마음이 만들어 내는 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마음에는 두 가지 의식이 있어요.
긍정적인 의식과 부정적인 의식. 우주와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나면 긍정적이고 성취적인 의식이 나옵니다.
그것이 뭡니까? ‘내가 부처’라는 자각이지요. 그러면 인생관도 바뀝니다.
마음의 그림자가 하늘의 기운으로 바뀌는 거지요. 자연에 순응하는 겁니다. 그게 도예요.
그다음, 부정적인 사고란 뭐냐. 밉다 곱다, 좋다 나쁘다는 등의 분별심이에요.
이걸 서양 종교에서는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었다’라고 하지요.
선악과를 따 먹었으니, 마음속에는 선·악이라는 두 가지의 이율배반 의식이 딱 붙어 버립니다.
그래서 감정을 일으키고 눈만 뜨면 밉다 곱다, 옳다 그르다를 시비하게 되는 겁니다.
시비 가운데 일으키는 감정이 뭐예요. 칠정입니다.
모양도 냄새도 없는 이 마음이, 격하게 노하고 분별없이 기뻐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다 보면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오장이 상하게 되지요.
본으로 삼아야 할 인격에 세 가지 요소가 있어요. 지·덕·체가 그것입니다.
지혜와 몸과 용기를 단련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건 서양식 도덕률이나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주의니, 뭐니 하면서 까불 일이 아니지요.
유물론적 사고라는 것도 인간의 의식에 기초한 이원론적 철학의 결과 아니에요?
거듭 강조하건대, 긍정적인 사고란 ‘내가 바로 부처’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하대지 초목 총림이 부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주의 생명 활동이라는 건 부처가 부처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초초(花花草草)가 모두 부처인 거지요. 전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그걸 자각하는 것이 긍정적이고 성취적인 인생관입니다.
그리되면 지혜가 용틀임하면서, 된다. 안된다 하는 생각이 사라지고 대 긍정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는 다 알 것 같은데, 돌아서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또 분별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이율배반 의식을 일상의 삶 가운데서 없애 나갈 수 있겠습니까?
부정적인 사고에서부터 나와 남을 갈라 보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에 독이 생겨요.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건데, 이것도 옳은 말은 아니에요.
원수는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원수란 없다!’ 이거예요. 이 도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제까지는 원수와 은인이 있었는데, 오늘 턱 본래 마음을 보고 나니까 전부가 내 몸이에요.
선·악이라는 이율배반 의식이 싹 사라진 것이지요.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부처의 마음과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 ‘인(人)’ 자에 벌써 선악(善惡)이 다 들어 있습디다. 이원론(二元論)이에요.
하지만 불교는 인간의 학문이 아니에요. 섣부르게 불교가 휴머니즘이다. 하면서
어쩌고저쩌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미친 소립니다. 지금 지구의 몰골을 보세요.
인간주의 합리주의 운운(云云)하면서 다 뒤집어 놨잖아요.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질 자체가 신이고 부처예요. 그게 바로 불성입니다.
얼마나 멋있어요. 바로 그러한 일원론적 세계관에 투철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처세론 혹은 구제 원리로서 설명해 주신다면요?
<금강경>의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에 이르기를,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이라 했어요. 뜻으로 풀면,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여러 근기의 중생에 응한다”라는 말인데, 이게 바로 성현의 처세입니다.
무위법으로 처세(處世)하는 겁니다. 무심으로 하는 거지요. 무심이란 뭐냐, 한마음 한뜻으로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묘용(妙用)’인 것이지요. 이 도리를 생활에서 응용해 보세요.
예를 들어, 자신이 아버지라고 칩시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고를 저질렀어요.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질렀다 이거예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심하게 벌을 주면 뛰쳐나갈 것 같고, 그냥 두자니 사람 노릇 못할 것 같고….
또 다른 경우를 볼까요. 죽마고우가 찾아왔습니다. 대뜸 와서는 돈 10억을 빌려 달라는 거예요.
물론 나는 백만장자예요. 하지만 선뜻 응할 수가 없어요.
작은 돈도 아닌데 주면 떼일 것 같고 안 주자니 원수가 될 거 같고,
이리도 못 하고, 저리도 못 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에요. 이게 세상살이예요.
해야 옳으냐 말아야 옳으냐, 죽어야 옳으냐 살아야 옳으냐, 죽을 때까지 이런 갈등 속에서 사는 겁니다.
왜냐, 이율배반 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중생의 분별심이 만든 것이 중생계인데,
이런 분별심을 가지고는 아무리 정치를 잘하고 좋은 약을 만들어도 분란과 병은 끊이질 않아요.
그러면 성현의 마음 씀, 즉 무심의 묘용(妙用)이란 어떤 것이냐? 생각을 비워나가는 겁니다.
선한 생각도 하지 말고 악한 생각도 하지 말고 맹렬히 비워나가는 겁니다.
그러다 어느 단계에 가면 선악이 뚝 떨어집니다. 그러면 부처 마음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때,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용서하라면 용서하고 빌려주라면 빌려주고, 꾸짖으라면 꾸짖고 말라면 말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안에 다 갖춰져 있는 불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묘용이지요.
부처의 성품에서는 칠정(七情)도 구경각(究竟覺)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요, 무위법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은 마를 날이 없어요. 병이 있다고 믿는데 병이 없어질 턱이 있습니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데. 병도 죄도 본래 없어요. 이 도리를 생활에 응용하라 이겁니다.
딴 거 아니에요. 마음 바꾸기가 묘용이예요. 도를 모르고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한 구제는 불가능합니다.
‘기도’도 그러한 마음 씀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까? 갈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참다운 기도란, 내 마음 안에 있는 부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내 생명은 위대하다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도하는 걸 가만히 보면, 늘 상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 주세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한단 말이에요. 이 얼마나 딱한 노릇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모자란 몸이, 모자란다. 모자란다. 하는데 이루어질 리가 있나요?
필요라 하는 것도 성취라 하는 것도 다 마음이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 이겁니다.
내 마음 안에 이미 모든 게 다 이루어져 있다는 위대한 생각을 하라 이겁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돼요.
죽은 말이 많이 나오면 마음도 죽은 거예요. 마음이 죽어 있는데 잘 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나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해 나가면
이 마음에 자석 같은 힘이 생기는 겁니다. 살아 있는 기도를 하세요.
내가 본래 부처임을 선언하는 기도를 하세요.
그것을 모르고 붙들고 매달리는 것은 그림자를 실체로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자신을 포함하여 흔히 사람들은 깨달음의 세계를 신비화 내지 절대화시켜 놓고는,
방금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차원의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물의 실상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사물의 실상을 바로 보면 그런 소리 못해요.
바로 못 보니까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물속에 막대기를 꽂고 보세요.
밖에서 볼 때는 굽어 보일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막대기가 굽었나요?
실제로는 안 굽었잖아요. 바로 그런 겁니다.
자신이 부천데 그걸 모르고 거꾸로 보는 거예요. 바로 본다는 것은 모든 편견을 놓고 본다는 겁니다.
지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가 부처예요. 어떻게 그런가?
다음 소동파의 오도송이 그걸 말합니다.
섣부른 알음알이나 지식이라는 게 원숭이 재주와 다름없음을 환히 보여 주는 그런 게송이지요.
저 흐르는 물소리는 부처님의 다함 없는 법문이요.
산빛은 그대로 부처의 몸이로다.
어젯밤 들은 (여래의) 팔만사천법문을
다른 날 그대에게 어찌 전할까.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누굽니까.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한 시대를 문장으로 풍미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 그가 66세에 불문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계기가 이렇습니다.
천하의 소동파가 상총(東林 常總, 1025-1091) 스님을 찾아가 법을 청합니다. 그러자 상총 스님은,
“왜 무정 설법은 듣지 않고 유정 설법만 들으려 하느냐, 저 나무와 돌도 설법하거늘” 하고 말했단 말이에요.
여기에 소동파가 탁 걸렸어요. 어떻게 나무와 돌이 설법하는가? 이걸 화두 삼아 물고 늘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걸 선가(禪家) 에서는 닭이 알을 품을 때의 모습에 비유합니다.
여하간 그 절절한 심정은, 과부가 잃어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대롭니다.
알고 모르고도 다 떨어진 상태가 된 거지요.
오직 돌과 나무가 어떻게 설법하는가 하는 한 생각뿐인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곡을 지나다 폭포 소리를 듣는 순간, 탁 깨닫습니다.
그러고 나서 읊은 깨달음의 노래가 바로 조금 전에 일러 준 오도송입니다.
소동파의 노래에서도 봤듯이, 사물을 바로 보면 부처를 보는 겁니다.
실상을 보는 순간부터는 부처가 부처를 보는 것이지요.
귀한 말씀 소중히 새겨듣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면을 통해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될 불자들을 위해서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세요. 의식이 건전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예요. 오직 마음뿐이잖아요. 공부하세요.
절에만 다닌다고 불자 아닙니다.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에요.
글자의 노예가 되는 게 문제지.
이 몸 그대로 법당인 줄 알고 자꾸 그렇게 노래하세요.
물러 나와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스치는 나무와 바위들이, 올라올 때 그대로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 불교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