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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 세계문인 대회
일시 : 2005년 6월 13일 월요일 ∼ 6월 21일 화요일 8박 9일
장소 : 동유럽 슬로베니아 블레드
주제 : 'The Tower of Babel, a blessing or curse'
'Literature as a safeguard of natural heritage'
'Language of peace literature as a lingua franca'
제71차, 2005년 국제펜 행사는 동유럽 슬로베니아의 동화 속 같은 도시 블레드에서 개최되었다. 한국본부에서는 성기조 명예 이사장과 문효치 이사장, 김귀희 사무처장이 대표로 행사기간 내내 참석했고, 그 외 회원 19명이 행사 전날의 환영 만찬식과 행사 첫날의 오픈식에 참석했다.
6월 14일, 현지시간으로 오후 8시부터 슬로베니아 블레드 성에서 진행된 환영 만찬식은 참으로 성대했다. 슬로베니아는 동유럽에서 가장 작은 신생국가이지만 알프스 산맥이 뻗어내린 우람한 산줄기와 빙하가 녹아 흘러들어 이룬 에메랄드 빛 블레드 호수가 천혜의 비경을 이룬 아름다운 나라다.
그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블레드에 모여든 세계 문인들이 알프스 산과 블레드 호수가 한 눈에 보이는 블레드 성에 올라 밤 깊도록 문우의 정을 나누었다. 피부색도 다르고, 인종과 언어가 다르지만 가슴에 단 국제펜 회원증을 보이며 어느 나라 문인이라 말하면 반가워 악수를 청하고, 함께 사진을 찍자하고 '국제펜' 이름 그대로 세계의 문인이 하나됨을 실감했다. 야외 마당 곳곳에 마련된 슬로베니아 특유의 음식과 와인으로 저녁 식사를 하며 유럽풍 의상의 음악 연주와 함께 문학의 향연은 꽃불로 피어 올랐다.
다음날, 6월 15일 오전 11시에 본 행사의 오픈식이 블레드 호수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골프호텔에서 열렸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각국에서 온 문인들이 와인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겨운 풍경이다. 시간이 되자 골프 호텔 세미나장에 마련된 자리에 착석하여 행사에 임했다. 국제펜의 역사를 담은 흑백 비디오 테이프의 상영으로 시작했다. 그 영상물 속에는 1965년도에 참석한 한국의 남녀 문인도 보였다. 뒤이어 축가가 이어지고, 본 행사가 거행되었다. 세계 문인들과 동그랗게 하나되어 한국문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자긍심을 추스르는 뜻깊은 행사였다.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참가자는 본인 김윤자(시인)를 포함한 19명으로 다음과 같다.
주연아(수필), 안영(소설), 홍금자(시), 이경배(시), 권한나(시), 김태호(시), 김수경(시), 김송자(시), 유기섭(수필), 손경호(수필), 권천학(시), 구순자(시), 김상호(시), 김정웅(시), 유재엽(평론), 김선주(소설), 김진수(편집), 박영자(시조).
이상은 스토리 문학 2005년 7월호에 게재된 본인의 취재글이다. 이것으로 국제펜 세계문인대회 행사 참석에 대한 글은 마무리짓고, 행사 후 탐방한 동유럽 4개국 슬로베니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에 대하여 문화 유적지와 자연 환경, 생활 풍습 등을 날짜별로 적고자 한다.
국제펜 세계문인대회 행사장인 블레드 골프호텔 입구에서 수필가인 남편 유기섭님과 함께
2005년 6월 13일 월요일
인천 공항 출발, 프랑크푸르트 공항 도착, 루불라냐 공항에서 블레드까지
* 인천 공항 출발
인천 공항에서 오후 2시 아시아나 항공 OZ541 비행기에 탑승했다. 슬로베니아가 목적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직항노선이 없어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다시 슬로베니아의 수도 루불라냐 공항에 가서 국제펜 행사가 열리는 블레드까지 이동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다. 아침에 짙은 안개로 비행기 이착륙이 힘들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우리의 비행기는 무사히 이륙했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는 약 12시간 소요되고, 동유럽과 한국의 시차는 8시간, 즉 한국이 8시간 빠르다. 3월부터 10월까지는 섬머타임 실시로 7시간 빠르게 계산된다. 그런 관계로 한국에서는 밤이겠지만, 하얀 구름 속을 밤도 없이 지나간다.
* 하늘에서 본 시베리아 평원
한국 시간 오후 6시 20분, 산악지대 그 가운데로 구부러진 뱀처럼 흐르는 강이 보인다. 비행기 날개와, 구름 꽃밭, 푸른 산, 쪽빛 하늘이 우주와 지구의 조화를 노래한다. 저 찬란한 아름다움. 베이징을 오후 4시경 지나 고비사막을 지나 러시아 북쪽, 사람이 살지 않는 산악 평원이다.
이제 겨우 서울에서 4시간 30분을 날아 왔는데, 오후 4시 30분, 산 사이 뽀얀 길과 낮은 지대에 이룬 민가 군락과 계단식 농토가 약간 보이다가 다시 산악지대로 이어진다. 캐나다 갈 때 태평양 바다만 보이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바다는 그 어느 곳에도 없고, 산, 산, 산의 물결이다.
차츰 사람이 사는 부락이 군데군데 많이 보이고, 비행기의 그 높은 고도에서 보기드문 참 신기한 진풍경이다.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야 할 목적지는 아직도 6시간은 더 날아가야 하는데 저렇게 형태가 잡히는 지구의 살갗 풍경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음이 참 행복한 순간이다.
독일의 대학에 초빙 교수로 간다는 한국의 한 교수는 내가 글을 적는 모습을 보며, 비행기 안의 또다른 문화의 장면이라고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이왕이면 나의 명함까지 놓고 찍으라고 그분의 청에 쾌히 응해 주었다. 지금 사람들은 창문을 내리고 대부분 잠을 자는데, 나와 그 교수를 비롯한 몇 사람은 본 좌석을 떠나 비행기 통로에 있는 창문을 열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저 초록 물결. 지구는 아직 싱싱하다. 무한의 생명 지대는 끝없이 이어진다. 소련 땅을 지나는 이 감격, 창가에 고정된 눈이 영롱하다.
한국 시간으로 오후 7시 30분, 지구 살갗은 아직도 푸르다. 붓으로 주욱주욱, 강한 터치로 물감을 그어 놓은 듯한 강의 원줄기와 작은 줄기의 물길, 실을 구불구불 늘어놓은 듯한 산과 산 사이 강줄기, 고속도로인 듯한 쫙 뻗은 뽀얀 길, 사진기에 담아도 담아도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이곳이 시베리아 동토, 툰드라 설원임을 안 것은 해외 여행을 많이 한듯한 나이 지긋한 남자분을 통해서다. 여름이라서 초지이지만, 겨울에는 얼음밭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나의 시 〔인동의 꽃〕에서 자신의 수행을 위해 시베리아 동토로 간다는, 그 칼날선 눈밭 동토를 비행기 위에서 걷고 있음에 큰 감격이었다. 더욱 강한 눈빛으로 시베리아 평원을 내려다 보니 푸르지만 완전한 나무는 아닌 이끼류의 초지이거나, 자잘한 나무나 풀밭임이 분명하다.
오후 8시 30분, 심한 기류로 자리에 착석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나의 자리로 돌아가 벨트를 매고 모니터의 자막을 보니 우랄산맥을 넘어 유럽으로 진입하는 비행기가 보인다. 남은 비행시간 4시간 30분, 10700m 고도, 903km/h, -53℃ 장엄한 비행이다. 한국은 지금 어두워지는 저녁일텐데, 창 밖은 아직도 환한 대낮이다. 우리나라보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그렇다. 소련의 그 넓은 대륙이 실감나게 전개되고 있다.
한국시간 오후 9시 30분, 집단으로 형성된 시가지가 보이기에 여승무원에게 물어보니 모스크바 상공을 지나고 있단다. 교과서에서 배운 구소련을 연상하며 바라본다.
한국시간 오후 10시 30분, 아들아! 너는 지금 자려 하겠지. 지금 여기는 하얀 대낮이다. 모스크바 상공을 지나 시베리아 평원을 아직도 날고 있다. 〔라도가 호수〕라는 글씨가 자막에 뜬다.
오후 11시 45분, 핀란드 만을 지나, 베링해를 지나, 프랑크푸르트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창 밖은 구름바다, 운해설경이 장관이다. 이제는 아시아 상공을 벗어나 유럽 상공으로 들어온 것이다. 참으로 긴 시간 동안 툰드라 지대를 날아왔다. 장장 10시간 정도. 시속 900km 정도로 날고 있는 비행기가 10시간 가까이 달린 평원이라면 가히 그 넓음을 족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늘에서 본 시베리아 평원...여름의 푸른 초지와 강물,길 풍경...툰드라 지대...겨울엔 동토
* 프랑크푸르트 공항
비행기가 독일 상공에 진입했을 때 잘 정리된 시가지와 들판, 그리고 라인강이 길다란 줄기로 보인다. 짙푸른 식물이 무더기로 출렁거리는 물결을 보며 강인한 독일의 힘을 보는 듯 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는 현지시간으로 6월 13일 오후 6시, 한국시간으로는 6월 14일 새벽 1시에 도착했다. 11시간만에 밟은 땅이다. 이곳 공항은 유럽과 연결되는 중앙 지역이기도 하여 상당히 넓다. 실내공간은 물론 실외공간도 기차가 운행될 정도로 넓다. 우리는 다시 루불라냐 행 오후 8시 2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 내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가 탑승할 루불라냐 항공 JP125 비행기의 탑승 게이트 앞에 'Smoking area' 라는 간판이 보이고, 그 테이블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직도 공공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우리나라보다 후진문화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 역겨워서 공항 내부 곳곳을 둘러보았다. 퇴근하는 여직원의 나이가 지긋한 것과 의자에 길게 누운 남자의 남루한 모습은 아이러니컬한 대조적 시각으로 비춰진다. 어느 중년여인은 담배를 물고 일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공항 내부는 인천공항보다는 낮고 어둡다. 오랜 역사를 지닌 흔적이라 이해된다.
슬로베니아 루불라냐 행 비행 시간이 가까워오자 게이트가 열리고 기다란 기차가 우리를 태운 후 한동안 평지와 굴속을 달려 비행기 앞에 내려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넓다고 책에서 얻은 지식이 눈 앞에서 현실로 느끼고 보는 순간이다. 뒤편으로는 'Frankfrut main' 이라는 공항 간판이 크게 보이고 광활한 마당에 우리를 태우고 갈 비행기가 앉아 있다. 계단을 걸어올라 조그마한 슬로베니아의 자국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릴 때 아름드리 푸른 상록수 물결이 장관이다. 라인강의 기적과 나무조림이 잘된 나라라고 배운 교과서적인 지식이 잘 접목되는 순간이다. 독일은 상공에서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나라임을 알게 해 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떠나 눈 쌓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 연이어 펼쳐지는 산림지대 위로 슬로베니아를 향해 비행기는 날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루불라냐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이동하며...기차가 다닐만큼 넓은 공항
* 루불라냐 공항
프랑크푸르트에서 루불라냐까지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비행시간이 그렇다는 것이다. 오후 8시 20분 정시에 이륙한 비행기가 독일 상공을 지나 슬로베니아로 날고 있다. 현지 시간 오후 9시가 넘어가는데도 창 밖은 훤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동유럽 지역의 밤은 10시나 되어야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고 했다.
루불라냐 공항에는 오후 9시 30분,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공항은 서서히 어둠으로 에워싸이고 중국 장가계 공항에서 본 것처럼 루불라냐 공항의 영문 간판이 붉게 빛나고 있다.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의 수도 루불라냐, 그 공항 역시 아담하다.
입국 수속을 밟고 나왔을 때 슬로베니아 여인이 가이드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슬로베니아에는 아직 한국 가이드가 들어오지 않아 현지 여인이 영어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슬로베니아의 독특한 언어 외에 영어를 따로이 배워서 가이드를 하는 것이다. 발음이 완전한 영어가 아니어서 알아 듣기가 힘이 든다. 우리 한글의 경음, 즉 ㄲ, ㄸ, ㅆ … 이러한 발음이 강하게 들린다. 한국에서 함께 우리 일행을 인도하며 온 한창인 다솔항공 부장이 다시 해석하여 통역해 줌으로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슬로베니아가 생소하듯이 슬로베니아 사람에게는 한국인이 생소하리라.
버스를 타고 블레드 리브노 호텔로 향했다. 한적한 거리에는 가로등도 없고 들판과 키큰 나무들만이 어둠 속에서 잡힌다. 루불라냐는 슬로베니아의 수도이고, 블레드는 수도 서북쪽에 있는 작은 호반의 도시다. 그 아름다운 곳으로 버스는 달리고 있다.
루불라냐 공항에서...슬로베니아의 수도 루불라냐...동유럽에서 가장 작은 신생국가지만 예쁜나라
* 블레드 리브노 호텔
루불라냐 공항에서 블레드 리브노 호텔까지는 40분 정도 걸렸다. 그곳에 도착한 것은 6월 13일 오후 10시 30분, 현지 시간으로 그렇다. 한국 시간으로는 6월 14일 새벽 5시 30분이다. 원래 시차는 이곳이 8시간 늦은데 섬머타임으로 현재는 7시간 늦다.
리브노 호텔에 도착하자 문효치 국제펜 이사장님과 김귀희 사무처장님이 호텔 뜨락까지 마중나와 일일이 악수로 환영해 주었다. 국제펜 한국본부 대표로 성기조 명예이사장님과 함께 세 분은 이미 6월 11일에 블레드에 오셨다. 그 다음으로 우리 회원 19명이 뒤따라 도착하여 합류한 것이다.
우리가 이틀간 유숙할 블레드 호텔은 어둠에 싸여 외경은 볼 수 없지만 내경은 모두 목조로 조성된 고풍스런 모습이다. 아담하고, 꼭 캐나다 밴프공원의 어느 주택같은 느낌이다. 안내데스크의 남자 직원은 일본인으로 착각한 듯 일본어로 '어서 오시오' 라는 인사를 건넨다. 한국인이라고 하자, 미안하다며 '안녕하세요' 라고 정중히 인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슬로베니아는 금년 4월부터 한국 여행사에서 유럽 관광지로 오픈한 곳이기에 한국인은 아직 생소하리라. 또 국제펜 대표 세 분은 이 호텔에서 좀 떨어진, 국제펜 행사가 거행되는 호텔에서 유숙하시기에 충분히 직원으로서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의 위상보다 일본의 위상이 높은 것 같아 조금은 씁쓸했지만 다시 정중하게 한국어로 인사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로비 쇼파에 둥글게 앉아 문효치 이사장님과 김귀희 사무처장님으로부터 국제펜 행사 일정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호텔룸을 배정받아 여정을 풀었다. 밤 11시, 한국은 지금 새벽 6시다. 한국의 아들에게 잘 도착했노라는 컬렉트콜 전화를 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한국의 집을 떠난 지 꼭 21시간만에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선 것이다. 6월 13일의 첫 밤은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시차 관계로 일어나야 할 아침시간에 자라 하니 두뇌는 그렇게 빨리 적응할 수 있겠는가.
호텔 베란다에는 덩그러니 가로등이 서 있고 어슴프레 커다란 상록수가 하늘 높이 서 있다. 아름다운 정경이 그려진다. 슬로베니아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블레드 리브노 호텔의 아름다운 내부...모두 목조의 고풍스런 실내장식.이곳에서 2일간 유숙
2005년 6월 14일 화요일 - 슬로베니아
블레드성, 블레드 호수, 포스토이냐 동굴, 블레드성 환영 만찬식
* 리브노 호텔의 아침 풍경
먼 길 여행으로 피곤한데도 시차 적응이 안 돼서인지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곁에 떨어져 있는 침대에 누운 수필가 유기섭, 나의 남편도 따라서 일어났다. 창 밖은 아직 어둠이다. 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큰 나는 아침이 빨리 오길 기다렸다.
이제부터는 이곳 현지시간으로 시계를 맞춰놓았기에, 남편은 다중시계로 한국과 현지 국가의 시간이 동시에 뜨지만, 내가 적는 시간은 모두 현지 국가의 시간이다. 새벽 5시, 동터오는 창밖의 풍경은 침엽수림으로 하늘을 덮는다. 멀리 보이는 높고 긴 능선의 산은 알프스 산맥의 줄기인 듯하다.
목조건물 리브노 호텔은 3층 건물로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의 궁전 같은 느낌이다. 점점 밝아오는 아침에 그 아름다움이 서서히 드러난다. 우리 부부가 머문 곳은 104호실로 2층이다. 유럽은 층수를 계산할 때 한국의 1층을 0층으로, 2층을 1층으로 표시한다. 104호라 함은 2층 4호실이라는 뜻이다.
약간 넓은 베란다에 꽃화분을 늘여놓았고, 아래로 보이는 호텔 입구에는 꽃바구니를 화분으로 주렁주렁 걸어놓았다. 어쩜 록키 매리어트 호텔을 연상케 한다. 주위 풍광도 빼어난 아름다운 경관도 유사하다.
호텔 TV는 거의 영어 방송이고, 슬로베니아 방송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슬로베니아의 고유 언어인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섞은 발음이다. CNN 뉴스로 지구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동양의 그 어느 나라 방송도 없음에 좀 낯설고 정말, 우린 아주 먼 곳에 와 있음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일찍이 호텔룸을 나서 외경을 둘러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내부와 외부가 모두 목조라는 것과 창문마다 가꾸어 늘어놓은 꽃화분의 화사한 모습, 사방이 우람한 상록 침엽수가 울창하다는 것 등등이다. 'RIBNO' 라는 알파벳을 화단에 파란 나무로 심어 어여쁘고, 촉촉이 번져오는 새벽 안개마저 이국적이다. 리브노 호텔의 아침 풍경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리브노 호텔의 아침 풍경...꽃과 나무, 목조의 향기가 동화 속 궁전 같아서...소녀처럼 좋아라 환호성!
* 블레드 성
블레드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조식을 마치고 약 2km 정도 떨어진 골프호텔로 갔다. 골프호텔은 국제펜 세계 문인 대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고, 성기조 명예 이사장님 외 한국 대표분들이 계신 곳이다. 이곳에서 국제펜 행사에 참석하겠노라는 공식적인 등록을 해야만 오늘 밤에 시작되는 환영 만찬식과 내일의 오픈식에 참석할 수 있다.
등록을 마치고 참가 명패와 기념 책자를 받은 후 블레드 성으로 갔다. 블레드 거리는 주택과 정원, 거리의 가로수가 잘 정리되어 있고 꽃과 나무의 물결로 장관이다. 집들이 모두 저층의 아름다운 구조로 지어져 있다. 색상도 파스텔 풍, 아니면 원색의 붉은 지붕, 크림 같은 부드러운 색으로 어느 곳 하나 흠잡을 수 없는 고아한 풍경이다. 이 마을에는 대학은 없고 고교만 하나 있다 하니 작고 아름다운 도시다.
블레드 성에 도착하니 에메랄드 빛 블레드 호수가 한눈에 보인다. 꽤나 높은 곳에 위치한 블레드 고성인데 버스가 그 입구까지 올라와 실제로 걸어오른 길은 그리 많지 않다. 블레드 성은 14세기에 보헤미안의 방어 성벽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철기문화가 발달했고 오랜 세월 동안 블레드를 외세로부터 지켜온 거룩한 성이다.
붉은 색 삼각뿔 지붕으로 우뚝 솟은 성의 건물 뒤편에는 빙하지대가 하얗게 뻗어내린 알프스 산맥이 병풍처럼 길게 펼쳐 있고, 마당 뜨락에는 1600년된 우물이, 절벽 끝에는 바라보기조차 아슬한 낭떠러지에 빙하가 녹아 흘러들어 이룬 에메랄드 젖빛 블레드 호수가 있다. 캐나다 록키산의 페이토 호수 같은 저 물빛, 피를 토할 정도로 아름답다던 페이토 호수의 그 환상적인 물빛을 이곳 블레드 높은 성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호수의 넓이는 상당히 크다. 페이토 호수보다 훨씬 크다. 긴 곳의 길이가 2km라 하니, 성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진풍경이다. 성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아래의 도로에서 보면 바위 절벽 위다. 어떻게 이 높은 바위 절벽이 형성되었는지 놀라운 일이며, 성 구석구석에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흔적들이 소슬하다. 유품들이 전시된 조그만 전시장을 돌아보고 다음 여행지로 떠났다.
블레드 성에서. 성기조 국제펜 전이사장님과 우리 부부. 멀리 알프스산과 시가지, 아래는 에메랄드 물빛 블래드 호수
* 포스토이냐 동굴
블레드 성에서 떠난 버스는 점점 도심을 벗어나 전원 풍경의 들녘을 달린다. 가는 길에 국제펜 회원들에 대하여 서로 잘 모르기에 한 사람씩 버스 기사 곁 앞에 나가 본인 소개시간을 가졌다. 각 장르별로, 시인, 수필가, 소설가, 평론가, 편집인이 모인 문인의 소집단이다. 그래서 더욱 뜻깊은 만남이며, 뜻깊은 여행이 아니겠는가.
포스토이냐 동굴은 루불라냐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내려간 포스토이냐 지역에 있는 동굴이다. 한창인 부장은 요한 스트라우스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음악을 들으며 경부선을 달리는 착각으로, 한국과 닮은 들판을 만나기도 하고, 미등을 켜고 달리는 유럽의 자동차들이 스쳐지나간다.
가끔은 거대한 침엽수림이 보이기도 하고, 초지의 평원에 출렁이는 보리와 밀 재배지가 보이기도 하고, 소를 기르는 농장, 그리고 소먹이 풀을 베어 들판 가운데 막대기를 층층이 꽂아 만든 풀 건조대에 걸쳐 놓은 평화로운 정경이 창가를 스쳐 지나간다.
면적은 한반도의 1/11 인데 인구 밀도는 훨씬 낮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슬로베니아 총인구가 200만여명, 유럽에서 가장 작은 신생국가다.
그러나 보기에는 결코 가난하거나 초라하지 않은 나라다. 풍요롭진 못하다 할지라도 겉모습은 참으로 여유롭고 낙천적이며 목가적인 낭만의 나라다. 물이 없으니 논이라고는 흔적도 없고 모두 밭농사다. 보리와 밀농사가 대부분이고 어쩌다 감자와 옥수수밭이 보이기도 한다.
포스토이냐 톨게이트를 나와 굴 앞에 다달았다. 점심식사를 슬로베니아 특유의 현지석으로(감자 푸딩과 비프 요리) 하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굴 안의 온도는 8도로 좀 춥다하여 반팔만 입은 사람은 7유로를 즈고 모직 망토를 대여하여 입었다.
이 동굴은 세계에서 두 번째 긴 동굴로 21km나 된다. 입구에서 기차를 타고 수많은 동굴 석벽 사이로 달려 들어갔다. 날카로운 석순을 만나며 레일 위를 달리는 굴 안의 기차에서 사람들은 알아서 겸손해진다. 굴의 석순은 고요한데, 머리칼 하나 건드리지 않는데, 알아서 겸손으로 고개 숙이는 사람들, 그건 두려움이기 이전에 장엄한 겸손이다.
한참을 빠른 속도로 달리던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을 내려 놓았다. 앳띤 소녀가 불러모아 영어로 설명하며 함께 1시간을 걸어서 동굴을 관람했다. 슬로베니아의 심볼 석주도 만나고, 하얀 빛, 황토 빛, 푸른 빛, 형형색색의 석주와 수없이 기묘한 형상으로 자라 내려오는 석순들이 지하의 풍경이라고는, 그것도 자연 발생적인 풍경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황홀한 비경이다.
휴먼 휘시, 인간적인 물고기란 이름의 돌덩이가 물 가운데 앉았는데, 그에게도 생명이 있어 알을 깐다는데, 그만 눈이 어두워 자신의 알을 잡아 먹고, 또 알을 낳고는 잡아먹고 자신의 몸통을 키우며 산다 했다. 사람들은 그곳에 애련함으로 동전을 던져 놓았다. 짧은 지면에 나의 기억들을 다 적을 수 없어 대표적인 몇 부분만 적을 뿐이다.
1시간을 걸어가니 다시 기차역을 만나고, 아까 우리를 데리고 들어온 기차가 다시 굴 안으로 우리를 데리러 왔다. 그 역은 지상의 기차역처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기념품 가게도 있고, 화려한 조명으로 사진까지 찍을 수 있었다. 쭈욱 뻗은 기차길, 레일 위를 바람같이 달려 굴 입구로 향해 나아간다. 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 내가 얇은 자켓 하나로 굴 안의 낮은 온도 속에서 2시간여 동안 견딘 것은 포스토이냐 동굴의 신비로운 아름다움 덕분이리라.
누군가 슬로베니아가 어떤 나라냐고 묻는다면 거기 포스토이냐 동굴에 가 보시라고 대답하리라. 중국 장가계 황룡 동굴의 장엄과는 또다른 길고도 휘황한 장엄함이 거기 있노라고.
굴 밖 세상은 금새 더웠다. 여자 직원이 나와 대여해 준 망토를 거둔다. 오후 4시, 버스는 우리를 태우고 다시 블레드로 달렸다. 블레드까지는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고속도로에서 포니엑셀, 우리나라의 자동차도 만나고, 타조 농장도 만나고, 평화로운 말 농장도... 참으로 초원은 아름답다.
오후 5시경 비가 내린다. 차창에 조금씩 흩뿌린다. 그래도 차 안에는 행복함으로 화사하다. 장난감 모형집 같은 집들의 지붕이 얇은 나무판자다. 여전히 아름다운 정경이다.
포스토이냐 동굴 길이 21Km.관람후 굴안에서 기차를 기다는 중 .1시간은 도보,나머지는 기차로 관람
슬로베니아가 어떻더냐고 물으면..<거기 포토이냐 동굴이 있더라고 대답하렵니다.>
* 블레드 성 환영 만찬식
포스토이냐 동굴에서 블레드 리브노 호텔에 돌아온 것은 오후 6시,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블레드 성으로 갔다. 오늘 밤 8시부터 국제펜 행사 주최국인 슬로베니아에서 세계에서 모인 각국의 문인들을 환영하는 만찬식이 블레드 성에서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블레드 성에 들어섰을 때 케잌을 깍두기 조각처럼 썰어, 목판에 들고 선 슬로베니아 남자가 반가이 맞이함에 한 조각씩 집어 물고 마당으로 가니,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두 종류를 잔에 담아 들고 선 또 한 남자가 인사하며 잔을 권한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 든 문인들은 와인 잔을 들고 성의 뜨락과 블레드 호수가 보이는 가장 자리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로 담소를 나눈다. 손님을 맞이하는 첫 방식부터 동양의 우리나라와는 다름에 신비롭다.
거의 모였을 때 성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슬로베니아의 두 남녀 문인이 사회를 보며 축제의 장은 더욱 뜨거워졌다. 언어가 다름에 잘 알아듣진 못해도 모두들 한 시선으로 모아 집중했고,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 남녀들이 악기를 들고 연주하며 벌이는 댄스 파티에 흐뭇한 표정이다. 성기조 명예 이사장님과 문효치 이사장님을 비롯한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들도 통나무 우물 지붕 근처에 모여 기쁨으로 참여하고 있다. 박영자 시인님은 79세의 고령임에도 한국전통의상인 한복을 입으시고 참석하여 참으로 고우신 모습이다.
해는 차츰 서녘으로 빠져들고, 무대를 블레드 성에서 더 높은 한층 위의 뜨락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저녁만찬이 차려져 있다. 그야말로 유럽풍의 낭만적인 파티장소다. 이곳 저곳에 흩어 차려놓은 음식들을 접시에 스스로 담아, 테이블에, 혹은 블레드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성곽의 담벽에 놓고 먹는다. 가슴에 국제펜 회원증을 보이며 어느 나라 문인이라 말하면 악수를 청하며 어눌한 영어일지라도 대화를 나누고, 문우의 정을 나눈다.
성 입구에 양쪽 문에 지핀 불꽃은 밤이 짙어갈수록 더욱 환한 몸짓으로 타오르고, 고기와 스프와 과일, 와인 등의 풍성한 음식으로 세계 국제펜 회원들은 행복에 젖어 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60년대쯤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 기억되는 90세에 가까운 고령의 남자 문인과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고, 참으로 흐뭇한 시간이다.
밤 9시 30분,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내일의 국제펜 행사 참석을 위해, 리브노 호텔로 돌아왔다.
블레드 성 환영 만찬식...뜨락 천육백년 된 우물 곁에서 와인을 준비하는 손길..동그랗게 하나된 뜨거운 만남!
2005년 6월 15일 수요일 - 슬로베니아
목장 박물관, 국제펜 행사 오픈식, 시가지 풍경, 헝가리로 이동
* 목장 박물관
오늘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국제펜 행사 오픈식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행사가 11시에 시작되므로, 조식 후 목장 박물관 견학을 하기로 했다.
어제까지 우리를 안내하던 슬로베니아 여인이 몸이 아파서 못 나오고, 새로운 20세의 여인이 가이드로 나왔다. 어제의 가이드보다는 영어 발음이 정확하고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여 한창인 부장의 통역 없이도 거의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가는 길은 깊은 산골, 아니면 초원의 들녘이 대부분으로 슬로베니아의 진면모를 볼 수 있음에 좋았다. 산에서 내려 오는 물이 맑고, 투명한 하늘과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과 전원적인 풍경이 아름답다. 목가적인 향기가 짙은 나라다.
슬로베니아는 15년 밖에 안된 베이비 컨트리라고 소개했다. 유럽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만 알프스산과 빙하가 흘러 이룬 두 개의 큰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나라다. 이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고, 아이도 낳지 않으려 하여 거리에서 어린이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추이인 것 같다.
거의 블레드 호수 크기만한 보힌 호수에 내려 휴식을 취하고 목장 박물관에 다달았다. 중년 여인들의 안내로 명부에 사인을 하고 관람했다. 우유로 치즈를 만드는 큰 솥과 기구들을 보았다. 소똥이 길가에 즐비한데도 흐르는 물은 투명하다. 3층의 아담한 아파트도 있고, 주변 주택들은 풍요로운 모습이다.
목장 박물관...아름다운 산에서 흐르는 물이 너무 맑아...동물사육 농가라 믿기 어려운데...구순자 시인님과 함께
* 국제펜 세계문인대회 오픈식
우리가 머문 리브노 호텔과 가까운 곳에 있는 골프 호텔에서 국제펜 행사 오픈식이 오늘 11시에 거행된다. 호텔 뷔페로 조식 후 잠시 목장 박물관에 들러 그 곳으로 이동했다. 골프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문구 팻말이 세워져 있고, 호텔 로비연회장에는 세계 각국 문인들이 와인과 차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있다. 참으로 정겨운 풍경이다.
시간이 되자 호텔 세미나장에 미리 마련된 자리에 착석하여 제71차 세계문인대회 행사에 임했다. 피부색도 다르고, 인종과 언어, 나라가 다르지만 'Korean poet' 이라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명패를 보여주며 서로 반가워하고, '국제펜' 이름 그대로 세계의 문인이 하나됨을 실감했다.
조명등이 꺼지고 국제펜 행사의 역사를 담은 비디오 테잎을 흑백으로 자막에 상영해 주었다. 1965년에 참석한 한국의 남녀 문인도 보였다. 한국에서는 2회씩이나 국제펜 행사를 치르고도 영상자료가 보존되어 있지 않음을, 성기조 명예 이사장님은 안타까워하셨다.
이어 축가가 이어지고 국제펜 행사 오픈식은 본격적으로 거행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그 오픈식을 다 보지 못하고 일어선 것이다. 다음의 문학 탐방 일정과 오늘 헝가리로 가야 하는 비행기표 예약으로 인해 중반부에 나와야 했다. 그래도 어제의 뜻깊은 만찬식과 오늘의 오픈식에 참여했다는 것은 국제펜 회원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한 것이다.
블레드 골프호텔 국제펜 세계문인대회 오픈식 행사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문인들...
* 블레드 호수 유람
국제펜 행사가 거행된 골프 호텔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블레드 호수가 있다. 호수 앞 식당에서 슬로베니아에서의 마지막 현지식 점심식사를 하고 블레드 호수 유람선을 탔다. 블레드 호수는 이미 블레드 성 위에서 보았고, 이곳 호수변 도로를 지나며 여러 번 보았지만 목조 유람선을 타고 저 호수 가운데 또 하나의 섬에 간다니 마음이 설레인다.
청남빛 호수 위를, 한국 문인 20명을 태운 보트는 슬로베니아의 한 중년 남자의 노 젓는 손길로 질주하여 나아간다. 기다란 막대기의 노를 뒤에서 저으며 배를 밀고 간다. 알프스산에서 녹아내린 빙하와 석회수가 교묘한 빛을 자아낸다.
10분쯤 후 섬에 도착하고, 높은 성당 건물이 보인다. 긴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호수 가운데 있는 성당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고요하다. 이 성당에서 결혼하면 헤어지지 않고, 아기를 잘 낳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정말로 한 쌍의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려 올라오고 있었다.
성당 안에는 줄이 늘어져 있고 그 줄을 당기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하여 한 사람씩 나가 힘차게 당겼다. 그때마다 야외에서는 댕그랑, 댕그랑 우렁찬 종소리가 섬에 퍼진다. 호수 위의 평화로운 땅, 이 섬은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단 하나의 섬이기도 하단다.
섬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나무 배에 올라 블레드 호수를 가르고 나왔다. 오래도록 향기로운 기억으로 남을 여행 추억이다.
블레드 호수 유람선에서...저멀리 알프스산과 블레드성, 그리고 환상적인 물빛.나의 남편 유기섭 수필가님
* 슬로베니아의 어느 시가지 풍경
블레드 호수의 환상적인 물 위를 유람하고, 비행기 예약시간이 좀 남아 어느 시가지에 갔다. 지명은 정확히 모르지만, 슬로베니아의 어느 중소도시인 듯 하다. 제법 도시 냄새를 풍기는 곳에서 슬로베니아 여자 가이드는, 20세의 다마르라는 이름의 그녀는 우리들보다 더 신기한 눈으로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가로수도 없고 볕은 따갑고, 마땅한 쇼핑가도 없는데 그녀는 연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우리를 끌고 다닌다. 그러다가 슬로베니아 시인 박물관(프레쉐렌.민족시인) 앞에 멈추었다. 고인이 된 이 국가의 한 남자 시인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흉상과 유품을 둘러보았다. 바로 곁의 교회 마당에는 그 시인의 생시 모습이 거대한 상으로 세워져 있다. 어느 곳에서는 문인은, 생시든 사후든 추앙받는 대상임을 새삼 깨달으며, 나 또한 이 지구상의 한 문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끼며, 아울러 사명에 충실할 것을 다짐해 본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혼혈족이 많다. 가이드인 다마르도 부친은 이탈리아인이고 모친은 오스트리아인이라 한다. 스스로 자인한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이지만, 자기네 나라는 여러 나라의 피가 섞인 혼혈족이라고. 와인과 쵸콜렛을 좋아하고, 그래서 국민성이 낙천적이라고, 모두 맞는 것 같다. 지금도 그녀는 보헤미안 집시처럼 웃으며 혼자 싱글벙글이다. 한국으로 치면 어느 면 소재나 읍 소재지 정도의 작은 시가지인데, 그녀의 낭만적인 걸음으로 우린 괜스레 골목을 쏘다닌다. 상가에선 유로화가 통용되지 않아 불편했다.
은행에 가서 슬로베니아 화폐로 환전해 오라는데 절차가 불편하여 그냥 나오곤 했다. 날씨가 상당히 덥다. 거리에는 한 그루의 가로수가 없다. 어느 상가의 야외 의자에서, 박영자 사인님이 남은 슬로베니아 동원을 다 쓰고 가려고 직원에게 주며 쥬스를 달라 하니 4개 중 3개를 집어가고 1개는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원하는 아이스 오렌지 쥬스를 가져다 준다.
정직하고 순진하며 평화로운 국민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모두들 하찮은 일이지만 한 마디씩 그 청년을 칭찬했다. 그것은 대충 계산으로 인구 밀도가 한국보다 3배나 낮아 한적하고, 느긋하고, 여유로운 생활에서 형성된 관습인 듯하다. 마지막 아름다운 기억으로 슬로베니아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
슬로베니아의 어느 시가지 풍경..목가적인 가이드, 그녀가 우리보다 더 행복한 걸음으로 끌고다닌 곳
* 헝가리로 이동
루불라냐 공항에서 자국기 MA489 비행기 19:20 분 항공으로 헝가리로 오늘 이동한다. 2박 3일간 우리 국제펜 회원들을 태우고 다니던 대형 버스도, 슬로베니아 가이드도 아쉬운 이별을 고하고 게이트 앞에서 보딩타임을 기다렸다.
루불라냐 공항에서 헝가리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습. 아담한 슬로베니아 자국기 |
2005년 6월 16일 목요일 - 헝가리
도나우강, 겔레르트 언덕, 어부의 오새, 마챠시 교회, 부다 왕궁, 영웅 광장, 성이슈트반 성당, 도나우강 유람
* 도나우 강
도나우강은 헝가리의 여행 코스에서 가장 중요한 명소다. 학창시절에 배운 요한스트라우스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 이라는 노래를 수없이 부르면서, 가슴 속에 흘러온 강이다. 영어로는 다뉴브 강, 독어로는 도우나 강이다. 이 강은 독일에서 발원하여, 8개국(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몰도바)을 거쳐 흑해로 들어가는 아주 긴 강이다.
총 길이가 3000km에 가깝고, 그 중에서 350km 정도가 이곳 헝가리의 남북을 관통하며 서쪽으로는 부다, 동쪽으로는 페스트, 이렇게 두 지역으로 나눈다. 그래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변에 두 도시로 나뉘어져 있다.
헝가리에서 제일 먼저 간 곳은 이곳 도나우강이 잘 보이는 언덕이었다. 멀리 머르기트 섬이 보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도나우강이 장엄한 행진으로 흐르고 있다. 강변 서쪽에는 푸른 나무들이 뭉실거리고, 언덕을 따라 붉은 지붕의 주택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들어서 있다. 이 곳은 부다 지역으로 주로 주거지역이다. 저 언덕, 높은 곳일수록 전망이 좋아 땅값이 비싸다고 한다. 강변 동쪽으로는 페스트 지역으로 나무는 별로 없고 붉은 건물이 주로 보인다. 이곳은 상업지역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잠은 부다에서 자고 일은 페스트에서 한다고 가이드 길명훈 학생은 말한다.
수많은 예술인의 입에서 시로, 음악으로 사랑받아 온 도나우 강, 나는 지금 그 앞에서 꿈처럼 서 있다.
도나우 강...아름다운 다리와 긴 호흡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좌측은 부다, 우측은 페스트
* 겔레르트 언덕
슬픈 언덕이다. 도나우 강이 잘 보이는 곳에 서 있는 이곳이 겔레르트 언덕인데 죄없는 한 사람이 죽어간 곳이다. 겔레르트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수도사로 헝가리 최초 국왕인 이슈트반 1세가 그 아들 임레 왕자의 교육을 위해 가정 교사로 데려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헝가리에 그리스도교를 전도하자 그에 반항하는 무리에 의하여 1046년, 이 언덕에서 산 채로 와인통에 갇혀 저 아래 도나우강에 던져져 죽음을 당했다. 해발 235m의 얕으막한 바위산 중턱에는 순교자 겔레르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언덕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도나우 강을 유람할 때 오른손엔 십자가를, 왼손엔 성경책을 들고 선 그의 입상이 훤히 보였다.
언덕의 정상에는 소련 병사의 위령비가 높이 세워져 있다. 자유의 여신상을 본떠 세웠는데, 소련이 헝가리를 독일에서부터 해방시켰다 하여, 그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아무튼 내 가슴을 울리는 슬픈 언덕이다. 결국 겔레르트가 죽음으로 인해 왕자의 교육도 실패했다 하니, 그 날의 아픈 이야기들이 도나우 강변을 휘감고 있다.
겔레르트 언덕...이곳에서 이탈리아 수도사 겔레르트는 와인통에 담겨 저 도나우강물에 순교당하고
* 어부의 요새
도나우강의 서쪽 부다 지역, 왕궁의 언덕을 오르면 하얀 고깔 모자 모양의 지붕이 7개 보이는데 그곳이 어부의 요새다. 그 앞에는 마챠시 교회가 우람하게 서 있고 뒤로는 도나우 강이 유유히 흐른다. 마당에는 헝가리 최초 국왕인 성이슈트반의 기마상이 용감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푸른 나무와 조화를 이룬 하얀 건물이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건물로, 어부의 요새라는 명칭은 옛날 이곳에서 어부들이 적의 공격을 막았다는 설과 이 언덕의 시장을 지켰던 어부들의 조합이 있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참으로 햇살이 따가운 6월의 폭염 속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곳 난간에서 바라보는 도나우강 풍경이 절경이기 때문이다. 더러는 하얀 뾰족탑 위에 올라가서 보기도 하고, 복도처럼 긴 벽의 구멍으로 응시하기도 하고, 확 트인 절벽 난간에 기대어 보기도 한다.
헝가리 쪽의 이곳 도나우강은 도나우강의 중하류 지역으로 강폭이 상당히 넓다. 세치니 다리와 에르제베트 다리, 등등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다리의 풍경과 강물 위를 오르내리는 유람선 풍경이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지역은 화장실이 모두 유료다. 이곳 어부의 요새 뒤편에 있는 화장실에는 헝가리의 중년 여인이 화장실 입구에 빙빙 돌아가는 철막대의 문을 지키고 있었다. 헝가리화로 50센트, 한화로 700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고 사용했다. 화장실을 나와, 너무 더운 날씨로 팔을 씻으러 다시 들어가려 하니 다시 코인을 넣어야 문이 열린다며 손을 흔든다. 기계 조작으로 불가능하다는 싸인이다.
아름다운 어부의 요새, 이름만큼이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명소다.
어부의 요새...도나우 강변 왕궁의 언덕 하얀 지붕과 헝가리 최초 국왕 성이슈트반 기마상
* 마챠시 교회
어부의 요새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교회다. 유럽 여행 중 최초로 만난 교회이기도 하여, 빼어난 건축 구조의 아름다움이 뇌리에 남는다. 사실 이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고풍스런 중세의 성당을, 오스트리아와 체코에서 만나게 된다.
정면 입구의 오른쪽에는 80m의 마챠시 탑이, 왼쪽에는 36m의 벨러탑이 불균형으로 서 있다. 그 두 개의 탑 사이로 보이는 지붕은 모자이크의 아름다운 색상으로 시선을 이끈다.
이 교회는 벨러 4세 시대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본 교회가 건설되었고, 14세기에 현재의 고딕 양식으로 바뀌었다가, 마챠시 왕의 시대에 80m의 고딕탑이 세워지면서 마챠시 교회로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1867년 헝가리 왕으로 즉위한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고, 음악가 리스트는 이 날을 위해 '헝가리 대관 미사곡'을 작곡하여 직접 지휘했다니, 외형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교회다.
마챠시 교회...어부의 요새 입구에 있는 고풍스런 중세 교회
* 부다 왕궁
헝가리는 총 23구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부다 왕궁은 1구에 있다. 헝가리 면적은 한반도의 2/5 이고 인구는 총 1000만명, 그 중 200만명이 부다에 산다. 쉽게 말하면 한국에서 경상도를 뺀 면적이다. 도나우강변 경관이 빼어난 왕궁 언덕에 우리나라의 세종대왕 격인 마챠시왕이 살던 부다 왕궁이 있다.
부다 왕궁 정원에서...도나우 강변 왕궁의 언덕에 오롯하게 선 장엄한 궁전 |
* 영웅 광장
부다 왕궁을 본 후 세치니 다리를 건너 페스트 지역으로 가서 헝가리 전통식 우야시 정식을 먹었다. 세치니 다리는 1849년 부자인 세치니 백작 작품으로 아름다운 다리다. 입구에 사자상이 있는데, 혀를 만들지 않고는 그것을 바련한 어린이에게 전 재산을 다 주고 도나우강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서리어 있다. 우야시 정식은 한국의 육개장과 비슷한데 밥과 칠면조 고기 그리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아주 맛있는 요리였다.
영웅 광장...버스 안에서 찍은 원경...우람한 가브리엘 천사의 탑과 석주 사이 조각상들 |
* 성 이슈트반 성당
겔레르트 언덕에서도, 부다 언덕에서도 우뚝 솟은 두 개의 탑과 중앙의 녹색 둥근 돔 지붕이 아름답게 보이는 성당이다. 페스트 지역에는 국회 의사당과 함께 두드러지게 높고, 웅장한 건물인 성 이슈트반 성당이 가장 큰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아름다운 주택가 거리를 지나서 갔다. 점심과 저녁 사이, 유난히도 뜨겁던 유럽의 태양빛은 서서히 식어갈 무렵이다. 아까 점심 식사하던 부근의 주택도, 지금 걸어가면서 만나는 주택도 빌라 주거지인데 5층에서 높아야 7층 사이의 고성같은 느낌이 든다. 공간이 없이 길고 넓은 덩어리로 뭉쳐져 지어진 건물들이 아주 튼튼해 보이고, 중세 문화의 고풍스러운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부다에서 페스트로 오며 노란색 전차도 보고, 에펠탑 건축가가 설계하여 지었다는 서부전철역도 만나고, 한국의 압구정동이라는 번화가도 지났다. 그 중앙 도로변 높은 건물 옥상에 거대한 글씨로 세워진 삼성 광고탑 앞에서 한국의 드높은 위상도 발견했다. 국회의사당은 출입금지구역이라서 외곽으로 돌며 건물만 보았는데 대단한 건물이었다. 또 하나의 사실은 노란색 전차가 소련에서 제작하여 북한과 헝가리에서 운행되는 전차의 색과 모양이 똑같다는 것이다.
성 이슈트반 성당 앞에는 큰 광장이 있는데, 그 데아크 광장에서 부다 페스트를 반원으로 그리는 지하 전철이 있는데, 3개 노선이 다 만나, 어느 곳에든 전철을 타면 이곳 성 이슈트반 성당에 올 수 있고, 또한 이곳에서 전철을 타면 부다 페스트 전역을 다 볼 수 있다고 하니, 본 성당은 건물의 외부만 웅장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교통 여건과 건물의 발달이 아주 잘 된 곳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가이드는 자꾸 바질리아 성당으로 부르며 설명하는데 성 이슈트반 성당과 동일한 이름이라 한다. 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 아무리 뒤로 가도 건물의 끝까지 잡히지 않는 카메라의 모니터를 보며, 그 높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헝가리 왕 성 이슈트반 왕에게 봉헌된 대성당으로 정면 양쪽에 80m의 탑이 두 개 솟아 있고, 중앙의 96m 돔 지붕이 하늘을 찌른다. 국회 의사당 돔과 함께 헝가리 건국 896년의 숫자에 맞춰 96m의 건물을 세운 것이다. 헝가리 건물은 최고 96m를 넘으면 안 되는데 3개의 건물이 96m 높이로 지어졌다. 국회 의사당과 에스테르 궁, 그리고 여기 지금 서 있는 성 이슈트반 성당이다.
이 성당은 1851년에 착공하여 1905년까지 3명의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스러운 교회다. 내부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높은 천장에 밝은 빛이 들어오는 돔의 장식이 아름답고, 중앙에는 성 이슈트반 동상이, 좌우 벽면에는 그 아들 임레 왕자와 순교자 겔레르트, 헝가리의 추앙받는 공주 엘리제베트 상이 조각되어 입상으로 서 있다. 임레 왕자가 사냥 나갔다가 멧돼지 습격으로 사망함으로, 또한 그의 가정 교사였던 겔레르트가 순교당하므로 자녀교육에는 실패했지만 헝가리의 지도자 이슈트반은 종교적 성인이면서 정치가로 '성스러워지는 오른손' 이란 그의 오른손 뼈가 미라 유물로 남겨질 정도로 위대한 인물임을 알게 해주는 성스러운 성당이다.
성 이슈트반 성당...페스트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두개의 첨탑과 돔 지붕
* 바치 거리
성 이슈트반 성당을 마지막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적지 관광은 마치고, 도나우강 유람선 일정만 남았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 페스트 도나우 강변의 상가 밀집 거리인 바치거리에 갔다.
이 곳은 한국의 명동과 같은 거리로 국내 및 국외인이 모여 쇼핑을 하거나 데이트를 즐기는 보행자 천국이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도를 건너는데 양쪽 벽면에 헝가리 도나우 강변 부다페스트의 시가지 발전상을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여 대형사진벽도로 전시해 둔 것을 보았다. 이 나라도 허름하던 시대에서 찬란한 현대로 넘어온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 이슈트반 성당 앞 쇼핑가 인도에 있는 의자에 누운 걸인을 비롯한 빈한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보이고, 가이드의 말로도 유럽에는 유랑의 무리 집시가 많다 한다. 이들은 경찰도 손을 대지 않는다고. 잘못을 해도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이 귀찮아 하루만 되면 풀어준다고. 거지는 아니지만 소외된 족속이다.
비타민 C 생산의 종주국이며, 와인으로 수입을 얻는, 그러나 생산업보다는 아직도 농업에 의존하는 고달픈 나라 헝가리, 결혼조차도 비싼 위자료 부담으로 살아보고 한다는 나라, 아직 공산주의 사상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국민성이 게으르지만 불평은 없는 나라, 은행원의 경우 본인의 업무 이외에는 줄이 장사진이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조금은 살벌한 나라, 경적을 울리는 적 없이 되는대로 사는 나라, 부자는 엄청 부자이고, 거지는 앵벌이 등으로 연명하며 사회적 문제가 많지만 치안은 그래도 안정적인 나라... 헝가리는 내부적으로 이런 나라다.
지하도에서 발전상을 살펴보고 바치거리의 입구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발걸음이 활발하다.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회색 국가로 보아오던 것과는 다르게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외국인이 많이 모여든다.
헝가리 인종은 원래는 훈족이었으나, 지금은 다 섞이어 게르만족으로, 육안으로 보아도 이 나라의 백성들은 다양하다. 머리가 검으면서 서양 피부로 백색 얼굴인 자, 머리는 노랑색이면서 얼굴은 동양적인 몽골계인, 아주 정통 유럽인이거나 정통 아시아인 등등, 혼혈족이다.
바치거리에 모이는 헝가리인들의 종합편을 보는 것 같다. 더러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지나간다. 헝가리인을 구별하는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에 대화에서 쉽게 구별된다. 가이드가 독일어만 공부하면 되는 줄 알고 왔는데, 어려운 헝가리 언어의 벽에 부딪혀 한동안 헤맸다고 고백했듯이, 헝가리의 글씨도 독일어와는 다르게 알파벳 위에 ′″¨ 이런 표기가 있다.
헝가리는 주변국을 싫어한다. 외침으로 인해 영토를 많이 빼앗겼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체코만 침입하여 그들 사이는 우리 나라와 일본과 같은 관계다.
아무튼 헝가리는 꼭꼭 닫힌 나라라는 인상이다. 한국의 화려한 거리 풍경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겨우 이곳 바치거리에 와서야 빠른 횡보로 오가는 활발함을 보았으니 말이다.
바치 거리를 거닐고...도나우강 유람선 선착장...승선하며
* 도나우강 유람
학창시절 막연한 그리움으로 노래 부르던 다뉴브강 잔물결에 몸을 싣고 유람하다니, 아! 이건 진정 생애의 축복이다. 시간과 건강과 경제가 허락하여, 국제펜 행사 참석건으로 이곳까지 왔지만 이건 분명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이 내게 임하신 것이다.
오후 6시에 승선하기로 예약된 유람선에 올랐다. 국제펜 회원 20명과 가이드 길명훈 씨, 모두 한국인 21명이 중간 크기의 2층 배 한 척을 1시간 동안 7시까지 세내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2층 선실 난간 앞부분에 앉았다. 그곳이 도나우 강의 풍경이 잘 보이는 곳이다.
승선장은 머르기트 섬 앞에 있고, 유람선은 물의 순방향을 따라 오스트리아 쪽으로 가고 있다. 이 물길을 따라 가면 빈에 다다른다고. 클루우즈 선박 여행도 있을 정도로 도나우강의 규모와 낭만은 대단하다. 노래 가사처럼 푸르고 아름다운 물결은 아니다. 워낙이 긴 길이로 이어져 내려오는 강인지라 진흙과 이끼를 섞어 물에 풀어놓은 듯 투박하다. 수심은 제일 깊은 곳이 5.5m, 평균 5m로 그리 깊진 않다. 한강처럼 강폭이 넓지도 않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안고 수많은 세계인의 입에 회자되어 온 도나우, 다뉴브 강이기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도나우 강 주변은 부다 페스트의 중심지역으로 양쪽에 고풍스런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제일 먼저 그 위용을 드러내는 것은 페스트 지역의 국회 의사당 건물로,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1884년부터 1904년까지 20년 동안 공들여 지은만큼 바람이 솟아오르듯 뾰족한 첨탑들이 찬란하다.
다음으로 밤의 전구가 사슬처럼 보인다하여 사슬이란 뜻의 세치니 다리, 혹은 세치니 백작이 지었다 하여 부르는 세치니 다리와 그 외 여러 모양의 다리도 장관이다. 에르제베트 다리를 지나, 마이클 잭슨이 비디오 제작한 자유의 다리를 지나 유람선은 도나우 강을 따라 고운 물결을 가르고 나아간다.
한강 유람선처럼 30분 정도 가다가 다시 빙그르 돌아 나머지 30분을 유람하는 1시간 코스의 도나우강 선상, 시간은 저녁 7시에 가까워지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시간, 나는 차라리 목이 메인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중세 르네상스 문명의 찬란한 향기가 풍기는 웅장한 건축물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돌아오는 길에 부다 지역의 산자락에 오롯이 솟은 자유의 여신상과 겔레르트 교회의 십자가, 산 중턱에 거다란 덩치로 선 겔레르트 동상이 슬픔을 휘감고 있다. 해는 서서히 산 너머로 기울어가고 석양에 빛나는 도나우강의 물결이 말없이 반짝이는데, 2005년 6월 16일 목요일 역사적인 이 한 도막의 시간 오후 6시∼7시, 일생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그 한 시간이 지금 나의 뇌리 속에 각인되고 있다.
회항하여 다시 출발했던 머르기트 섬 쪽으로 가면서 바라본 헝가리의 서쪽 도시 부다 언덕에는 유명한 건물이 많았다. 최고의 공학도를 배출한다는 미나사에서 스카웃해간다는 부다 공대와 부다 왕궁, 마챠시 교회, 어부의 요새, 김대중 대통령이 유숙했다는 겔레루트 호텔, 등등 줄지어 스쳐 안기는 환상적인 도나우 강변 풍경이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 소녀처럼 세월을 접고 빈 가슴에 하얗게 도나우의 꿈을 담는다. 18세기 낭만주의 헝가리, 어느 시인은 '지구가 신이 만든 모자라면 헝가리는 그 모자 위의 꽃이다' 라고 했단다. 기막힌 표현이다. 그런 명구를 쏟아낼 수 있음은,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도나우강이 있기에 가능하리라.
헝가리는 노벨상을 4번 수상한 나라인데, 사실은 문학상 외 12번 수상했다고 한다. 서글픈 나라였기에 외국으로 망명해서 국가에 기여하지 못하고 사라졌을 뿐이란다. 또한 헝가리 문인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외국 서적을 번역하여 국내에는 많이 알렸지만, 정작 작가 본인의 작품은 외국에 내보내지 않아서란다.
나는 시인이다. 시심이 사뭇 출렁인다. 내 나라, 한국에 돌아가서 내 눈에, 가슴에 담고 가는 저 역사 깊은 도나우강을 찬연히 노래하리라.
유람선은 국회의사당을 다시 지나고 있다. 5층 건물 높이의 조화로운, 바라보기조차 아슬한 첨탑이 공중에 솟구친다. 국방부 건물도 보이고, 이 나라는 군복무 기간이 6개월이라고, 부러움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북한에 관심이 많아 평양에 다녀오는 사람이 있는데, 평양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고 폐허같은 도시라 하더란다.
이제 헝가리는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은 자유국이다. 플레멩고 호텔 TV 채널에서, 십대 여인에서 늙은 할머니까지 나와 자신의 성을 상품화하여 선전하는 화면을 보며 많이 놀라고 당황했다. 오히려 사회주의 냄새가 농후한 나라에서 성의 개방은 한국보다 빠른 것 같다. 잘못된 성 문화가 아닐는지 염려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자유와 낭만이 한국을 능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헝가리 외곽에서 본 어둠의 그림자는 공산 잔재의 허물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기도 하고, 묘한 감정이 도나우강에 흐르고 있다.
어느새 유람선은 우리가 탔던 그 선착장에 도착했다. '도나우여 안녕, 아름다운 물결이여 안녕' 손을 흔들어 작별을 나누고 강 언덕을 올라왔다. 정각 오후 7시에 하선한 것이다. 그 때 회사원같은 한 무리의 남녀노소 헝가리인들이 도나우 강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야경을 즐기려는 계획으로 유람선 선착장으로 향하는 걸음이다. 모두들 깨끗하고 말쑥한 차림의 신사 숙녀들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 밤만 자고 나면 헝가리를 떠난다. 도나우 강변의 추억은 영원하리라.
도나우강 유람선에서...아름다운 첨탑의 국회의사당과...비경의 강변 풍경
* 중세 기사 식당 만찬
원래 도나우강 유람선을 5시∼6시까지 계획했는데 6시∼7시로 변경하여, 저녁 식사 시간이 좀 늦어졌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주로 구시가지의 거리를 보며 예약된 석식 장소로 갔다.
오늘 밤이 헝가리의 마지막 날이기에 근사한 중세 기사 식당에서 중세의 복장을 입고 서빙하는 식당 사람들과, 벽에 온통 장검과 방패 등 기사의 무기를 걸어둔 풍물을 보며 근사한 만찬 시간을 가졌다. 장소 자체가 지하의 굴처럼 스산 곳으로 깊이 들어가 더운 여름인데도 한기가 스민다.
단호박만한 둥근 빵에 윗뚜껑을 자르고 스프를 가득 채워 오는 것으로 식사는 시작되었다. 스프를 먹고 빵도 뜯어먹고, 다음의 음식을 기대하고 있는데 커다란 쟁반에 타조 다리, 칠면조 고기, 생선살 등 수많은 종류의 음식을 한 가득 담아 왔다. 5인이 한 조가 되어 먹는 분량인데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간이 조금 세어 짠데, 유럽인들의 식성이 좀 짜기도 하지만 대부분 염장 훈제식이어서 그렇단다. 감자는 한국에서 삶은 것처럼 굵직한 알맹이 그대로 간기 없이 고기 사이 사이에 있어 고기와 섞어 먹으니 참 맛이 좋았다.
헝가리 특유의 백포도주로 잔을 부딪히며 유럽 문학 탐방을 기념하는 건배를 나누고, 깊은 눈시울로 밤을 사르는 불빛 조명 아래 행복한 시간이자기 헝가리 전통 의상을 입은 30대 초반의 헝가리 여인이 우리의 식당 무대홀을 누비며 춤을 춘다. 10여분 동안 잘레잘레 엉덩이를 흔들며 전통춤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나갔다.
저것도 하나의 직업으로 일정한 팁을 받아, 먹고 사는 생계 수단이란다. 결코 젊지 않은 중년 여인의 주름진 허리살이 자꾸 눈에 밟힌다.
밤 10시경 아쉬운 마음을 접고 호텔로 갔다. 내일이면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넘어간다. 그렇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밤은 아름다웠다.
중세 기사식당 만찬...암흑의 지하방엔 칼과 방패가 즐비한데...대형 접시엔 푸짐한 고기요리.나도 기사처럼...
2005년 6월 17일 금요일 - 오스트리아
시립공원, 링거리, 쉔브른 궁전과 정원,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오페라 하우스, 성 슈테판 성당, 비엔나 숲 호리게이 석식
* 헝가리에서 버스로 국경선을 넘으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갈 때는 버스를 타고 국경선을 넘어 갔다. 슬로베니아 루불라냐 공항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항까지는 비행기로 넘었기에 버스로 국경선을 넘는 것에 대하여 매우 큰 호기심이 일었다. 왜 비행기로 빨리 가지 않느냐 하였더니, 슬로베니아에서 헝가리까지는 도로 개발이 안 돼서 버스로는 11시간 30분 걸리기 때문에 비행시간으로는 1시간, 수속시간까지 합해도 3시간이 소요되는 항공으로 이동하지만,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는 버스로 4시간 30분 걸리는데 비행기로 가도 공항까지 가는 시간과 수속시간을 따지면 거의 동일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아예 한번에 버스로 편하게 넘어간다고 한다.
오전 9시에 헝가리 플레멩고 호텔을 출발하여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부다페스트 시가지를 벗어나자 드넓은 헝가리 시골의 평원이 전개된다. 물이 전혀 없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들판이다. 논농사는 없고 모두 보리와 밀, 옥수수 재배지다. 더러는 유채꽃 노란 물결도 보이고, 보라색 꽃농원과 버드나무 모양인데 꼿꼿한 잎새의 가로수도 고속도로변에 스쳐 지나간다.
오전 11시경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시간상으로는 중간 지점인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했다. 휴게소 상점에는 이 지방이 고추생산지인지 자그마한 고추를 줄에 꿰어 팔고 있다. 무료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15분간의 여유로운 시간을 마지막 헝가리 땅에서 보냈다. 우리를 운전해주는 기사는 49세 슬로바키아 남자다. 미남형이고 키가 크고 아주 친절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그저 버스를 오르내릴 때 감사하다는 영어만 전한다. 우리 부부와 함께 기념 사진을 유럽형 대형버스 앞에서 찍고는 다시 출발했다.
오전 11시 11분, 버스는 멈추고, 어느새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선 앞에 이르렀다. 눈 앞에 보이는 국경선은 우리나라의 어느 톨게이트 출구와 흡사하다. 젊은 검색원 남자가 들어와 일일이 여권을 검사하도는 내려가고, 버스는 유유히 오스트리아 땅으로 달려간다.
기가 막힌 순간이다. 경계선이라고는 톨게이트와 그 곁으로 철조망이 약간 놓여 있고, 초소 건물에는 군복 입은 남자 두 명이 자유로이 서 있을 뿐인데, 이것이 나라와 나라가 대치하고 있는 국경선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의 남북한 동족이 몇 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순간이다.
어느 곳이 헝가리고, 어느 곳이 오스트리아인지 육안으로는 구별이 안 가는, 그냥 대륙으로 이어진 저 경계선, 내부적으로는 대치상태인지 모르나 외부적으로는 고요한 이음새다. 여행은 최고의 효과적인 투자라는 말이, 지금 두 나라의 국경선을 넘으며 본 평화스런 풍경만으로도 증명되는 대목이다.
이것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선...저 톨게이크만 넘으면 오스트리아 땅
* 오스트리아에 들어서며
오스트리아 이민국 직원으로부터 여권검색을 받은 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의 입국을 허가받아 버스는 힘차게 빈으로 달린다. 맨 처음 오스트리아 땅에서, 즉 11시 30분부터 11시 50분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본 남다른 풍경은 수많은 풍력 발전소 풍력 바람개비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20분간의 시간 동안 이어지는 날개가 한국의 제주도와 울릉도에서 본 것과 동일한 세 쪽의 풍력기기가 들녘에 우뚝 우뚝 솟아 돌아가는 풍경이 장관이다. 가까운 곳에 호수가 있는지 운무가 휘감아 함께 돌기도 하고, 이루 숫자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의 무한한 풍력바람개비를 보았다.
조금 있으니 UBC 국제택배운송회사 건물이 커다란 덩치로 서 있고 공장지대의 산업발전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풍경은 침체된 헝가리와는 상반되는 광경이다. 역시 자유로운 나라의 활발한 발전상을 목격하는 것 같아 흐뭇했다.
이제 버스는 고속도로에서 나와 빈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도나우강(Donau) 지류가 한국의 시냇물처럼 좁다랗게 도심 사이로 흐른다. 좀더 깊은 빈 시가지에 들어섰을 때 도나우 강에는 선적이 즐비했다. 알고보니 이곳 도나우 강은 인공으로 파서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는 운하였다. 물론 유람선도 있지만, 도나우 운하라고, 오스트리아 가이드는 부르고 있었다. 그 도나우 강변에서 우리의 가이드, 한국인 김자경을 만났다. 도나우 운하는 빈의 중심가를 길게 흐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들어오며 본 도나우 강변 풍경
* 시립 공원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이다. 한때 합스부르크 왕가가 위력을 떨치던 13세기 말부터는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고 나폴레옹의 몰락 후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동유럽 전역을 지배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시절에는 유럽의 영토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과학까지 전반적으로 주도해 왔다.
그러다가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왕권이 붕괴되고 강대국 미, 영, 프, 소련에 분할 점령당하다가 1955년에서야 주권을 회복한 후 그해 7월 세계 만방에 현재의 영세중립국임을 선포했다. 일체 군사동맹에 가입하지 않고, 수도 빈(비엔나)의 경우에는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도시로 동서대화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역사를 거쳐서 이룬 빈의 거리는 참으로 활기차고 밝은 느낌이다. 화려하던 시절에 이곳에서 예술활동을 하던 예술인의 동상도 많다. 원래는 왕실전용으로 귀족만 출입했으나 지금은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한 공원이다.
시립공원은 도나우강의 지류가 정문에서부터 흐르며 드넓은 녹색 지대다. 왼쪽 영국식 정원에 요한 스트라우스 동상이 황금색으로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을 선사하고 있다. 1862년에 링거리를 딸라 건립되었으니 꽃시계를 비롯하여 울창한 숲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다. 시간이 없어 다 돌아보지 못하고 입구에서 잠시 본 것만으로 비엔나의 시민들에게 큰 휴식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주변에는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인 콘체르트 하우스가 있음도 큰 특징이다.
시립 공원...바이올린을 켜는 요한스트라우스...황금 동상 앞에서 우리 부부
* 링거리
도나우 강변에 자리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2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도시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구시가지를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의 철거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1857년 프란츠 요제프는 관료들을 설득시켜 9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1866년에서야 성벽을 철거하고 현재의 링거리를 완성시켰다. 도나우 운하를 향하여 총 6.5km의 길이인 이 거리는 바지를 벗어놓은 둥근 모양, 혹은 반지와 같은 모양이라 하여 링거리라 불리우는데 링을 따라 새로이 조성된 시가지는 뉴욕 제네바와 어깨를 겨루는 국제 연합도시로 급성장했다.
링거리만 따라 돌면 빈의 관광지는 거의 만난다. 공원, 오페라 하우스, 국회 의사당, 시청사 등 고전에서 바로크 양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건축 양식을 절충한 19세기 후반의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며 감탄하게 된다.
가이드 김자경은 오스트리아 유학생이며 9년 동안 빈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오늘처럼 햇볕이 나는 날이면 모두 거리로 나간다는 것이런날 집에 있으면 '너 미쳤니?' 라고 한다고. 그만큼 흐린 날이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녀는 링거리를 씩씩하게 활보한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육개장으로 점심을 먹고부터는 오후 내내 링거리를 따라 걸으며 주변에 늘어선 관광명소를 관람했다.
링거리...6.5Km의 아름다운 거리...도나우 운하의 다리를 건너는 전차
* 쉔부른 궁전과 정원
쉔부른에서 '쉔' 은 '아름다운' 이란 뜻이고 '부른' 은 '샘물' 이란 뜻으로, 즉 쉔부른 궁전은 아름다운 샘물의 궁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17세기 초 마티아스 황제가 이곳 숲에서 사냥하던 중 아름다운 샘을 발견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보아야 할 것 세가지는 쉔부른 궁전, 링거리, 성슈테판대성당인데, 그 중 쉔부른 궁전과 구시가지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되었다.
궁전문에 들어섰을 때 궁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날개처럼 들어선 건물의 웅장함이 대단하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운 합스부르크가의 전용 극장이 있고 그 외 박물관, 기념관 등이 부속으로 있고 궁전의 방 개수만도 1441개라 하니 쉽게 두 눈에,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궁전이다.
궁전 앞에는 유럽의 고풍스런 마차가 탐스런 말과 마부와 함께 줄지어 서서 손님을 맞으려는 듯 대기하고 있다. 물론 돈을 지불하고 궁전을 도는 관광이겠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화려했던 왕정의 역사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드넓은 궁전의 앞 뜨락에서 국제펜 회원들 단체 기념 사진을 찍고, 궁전의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갔다. 아주 넓은 바로크 양식의 왕궁 정원은 꽃과 나무, 분수, 대리석 조각상들의 조화로움으로 어느 곳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꽃의 종류가 캐나다 빅토리아섬의 부챠드가든만큼 다양하진 않지만, 그 꽃정원과 유사한 아름다움이다. 정원의 끝에는 프러시아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그리스 양식의 기념물이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짧은 시간에 사랑스런 꽃을 보고, 디지털 카메라에 담으려고 매우 분주했다. 여행의 피곤함을 잊은 채 뛰고 걸으며 정원의 원경과 꽃들의 근경을 사진 속에 많이도 담았다. 장미 담장 앞에선 소녀처럼 웃어도 보고, 그 옛날 왕가의 눈길이 머무른 유적지에서 행복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아쉬운 걸음을 재촉하여 쉔부른 궁전 내부로 들어갔다. 1696년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 레오폴트 1세 시대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까지 오스트리아 바로크 양식 최대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궁전은 외형도 웅장하지만 내부의 중요한 방들이 깊은 의미를 담은 채 역사의 웅장한 현장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쉔브른 궁전의 아름다운 정원...쉔브른은 '아름다운 샘물'이란 뜻이라는데..정말 환상
*쉔부른 궁전 내부 - 본 순서대로
① 대연회장
황제의 계단을 걸어오르니 큰 행사가 열리던 대연회장에 들어섰다. 정문에서 궁전 뒤 뜨락까지의 거리를 정 중앙에서 똑같이 나누는 등분의 방이다. 채광 때문에 창이 크고 1901년에는 전기가 들어와 백열등을 사용했다. 벽에는 촛대가 많은데 등불이 반사되도록 크리스탈 거울을 매달았고, 외국인을 영접하는 곳은 이곳은 늘 외국인에 대한 얼굴로 가꾸어 왔다.
천정에 화려한 그림들은 글이 없을 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으로, 구름에 앉은 듯한 신(神)의 모습 그림은 내가 신의 영역에 이르고 싶음을 표현한 것이다.
둥근 원형의 그림에는 하늘과 신, 인간과 지상, 그리고 신과 인간 중간 위치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있다. 그 외 다양한 그림들로 대연회장은 그랜드 갤러리다.
② 소연회장
왕족의 가족 생일 잔치를 하던 곳으로 일명 '동양의 캐비넷' 이라 불리는 곳이다. 가운데는 사각으로 연회장이 있고 좌우 양쪽에는 원형과 타원형의 방이 있는데 '음모의 방' 이라 한다. 이곳 동그란 방에서 밀담을 나누다가 종을 치면 아래로 빠지도록 꾸며 놓았기에 그렇게 부른다.
들어가진 않았지만 은밀한 두 개의 원형 방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화려한 동양 왕조풍의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참 아늑한, 오늘날의 궁전 카페다.
③ 마차 놀이방
전속 화가들이 노트해서 그린 대형 풍경화가 걸려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세히 그림으로 기록한 것인데 엘리자베스 황후, 즉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가 중앙에 큰 위치로 걸려 있고, 주위엔 말과 사냥을 묘사한 커다란 풍경화가 있다. 19세기에는 궁정에 있는 장군들의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④ 세레모니 홀
합스부르크 가의 높은 귀족들이 결혼식을 올렸던 방이다. 로마 제국에서 왕조시기를 거쳐 합스부르크 가 왕조 시기였던 976년부터 1246년까지, 우리나라의 고려왕조(918년부터 1392년) 같은 시대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주변국과 정략 결혼을 해서 힘의 균형을 맞추었다. 94개 마차가 이끄는 축제의 그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인 왕자와 이사벨라 공주의 결혼식 장면으로 얼마나 찬란한 잔치인지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화와, 그 왕자 결혼식에 참석했던 예닐곱 살 적 모차르트의 아기사진도 있다. 모차르트 부모님과 함께 수많은 참석자들의 대열 속에 조맣게 모습이 보인다.
⑤ 블루 차이니즈 룸
1700년도의 중국 벽지로 장식한 방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하니 놀라운 일이다. 벽지는 푸른 중국 취향의 색이 농후하고, 그림 내용은 쌀 농사 짓는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세계 유일의 중국 역사 보존 벽지로, 그때 이미 합스부르크 왕조는 중국과도 친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스트리아 역사의 마지막 왕조는 1276년부터 1918년까지의 바븐베르가 시대다. 우리나라의 조선왕조(1392년부터 1910년)와 유사하며 이때 비엔나가 형성되었다. 1916년 요제프가 사망했고 30대 초반의 카알 1세는 1918년 11월 11일에 이 방에서 마지막 황제로 왕권을 포기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카알 1세의 흉상 동상이 들어앉은 소슬한 곳이다. 한마디로 비운의 방이다. 그후 오스트리아는 1918년 11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선포함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맞이하였으니 음과 양이 교차한 방이다.
⑥ 자개방
1740년부터 1780년까지 집정하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1765년에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자 15년간 과부황후로 지내면서 남편을 추모하던 방이다.
미망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로 기거하던 방으로 나무 조각으로 만든 상과 옻칠 자개의 벽면이 화려하다. 황후의 동양적 취향이 엿보이기도 함에 정겹다.
⑦ 나폴레옹의 방
나폴레옹은 빈을 1805년과 1809년 두 차례 정복했는데 그때 사용했던 방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본부인 사망 후 유럽을 다 제압하고는 신성로마제국을 넘보고 있었다. 그러자 프란츠 1세 황제는 딸 루이즈를 나폴레옹에게 결혼이라는 명목으로 바쳤다.
그러나 나폴레옹 프란체스카가 낳은 아들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2세 ; 1811∼1832)은, 그의 아버지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6세부터 21세까지 이 방에 갇혀 새와만 지내다 죽었다. 권력과 권력 사이에서 잘못 태어난 운명의 한 소년이 인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어둠의 그늘 속에서 시들어갔을 이 공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를 위해서라고는 병약하고 파리한 얼굴의 하얀 동상이 유리 상자 속에 보관되고 있다는 것, 차마 바라보기조차 눈물겹다.
⑧ 밀리엔 룸
쉽게 말하면 이곳 여러 개의 방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들여 지은 방이라서, 즉 수억원이 들었다 하여 '백만의 방' 이란 뜻으로 이름지어진 방이다. 공사비가 당시의 통화로 백만굴덴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곳 방들은 다 문화재에 들어간 방들이지만, 각각 사연도 많고 특색도 다양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더해준다.
자단목, 즉 장미목으로 16세기∼17세기에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졌는데 중후한 분위기가 감돌고 벽에 걸린 인도의 세밀화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것으로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⑨ 고벨렝 싸롱
10년에 걸쳐 실로 짠 그림으로 꾸민 방이다. 벽면과 의자 등, 모두 사용된 천이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짠 것들이라는데 믿기지 않는다. 그림으로 그렸어도 저렇게 정교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한땀 한땀 손으로 짜서 일구어낸 그림들이라 하니 그저 놀라움에 발이 정지된다. 그림 크기와 정교함에 유럽 왕실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⑩ 조피 대공비의 서재
1916년에 86세로 황제 프란츠 요셉이 사망했는데, 이 방은 그의 모친인 조피가 사용했던 방이다. 즉 부모님 서재다. '나는 공복이다' 라며 새벽 4시면 일어나 해질 때까지 움직여 일했다는 일화와 함께 아름다움이 서린 방이다. 코너에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는데, 저 벽난로는 사실 방마다 있다고 한다. 특이한 사실은 벽난로에 지피는 불은 시녀가 뒤에서 보이지 않게 지피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사뿐사뿐 걸어다녔을, 보이지 않는 여인네의 걸음이 벽난로 사이로 기웃거리는 듯하다.
⑪ 레드 싸롱
나폴레옹의 장인인 프란체스카와 왕후의 도서관이다. 붉은 벽지로 장식되어 '붉은 방' 이라 부른다. 이 공간은 쉔브룬 궁전의 뒷정원이 잘 보이는 곳이다. 드넓은 뒷뜨락을 바라보며 학문을 닦았을 왕가의 흔적을 본다.
벽에는 합스부르크 역대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⑫ 침실
침대가 중앙에 놓여 있고 좌측엔 마리아 황후가, 우측에 그의 남편인 프란츠 황제가 화사한 모습으로 있다. 일명 '애 잘 낳는 침대' 라는데 그들 사이에는 11명의 딸과 5명의 아들로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어려서 사귄 남자와 결혼하여 그리 많이 낳았다 한다.
다리를 뻗고 자면 영혼이 빠져나간다 하여 침대가 아주 작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지붕이 달린 아담한 침대다. 이 방에서 1830년 프란츠 요제프도 태어났다.
방의 정면에는 마리아에게 소중한 여인 3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우측에는 왕비의 언니, 가운데에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황후, 다음에는 자녀들을 길러준 보모의 얼굴이다. 16명의 자녀를 길러준 보모는 사후에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왕가에 묻혔다고 한다. 참으로 인간적인 향기가 나는 방이다.
48세에 과부가 되어 홀로 15년간을 살다가 죽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후일에 남편과 합장되었다.
이것으로 쉔브룬 궁전 내부의 방은 다 보았다. 더 많이 있지만, 우리가 본 방은 침실이 마지막 방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모두 독일어로 쓴다. 궁전도 모두 독일어로 씌여졌다. 이 왕실에서 사용하던 유품은 옷과 그릇, 가구 등등을 따로이 구분하여 1918년부터 1938년까지 박물관으로 이동시켜 보관하고 있다.
1938년에 나치스가 침공하여 왕권이 무너진 1918년부터 1938년까지의 제1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방선언한다. 나치 당원들이 밀입하여 밤새 오스트리아를 뒤엎고, 재판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1945년까지 히틀러가 지배하며 오스트리아에게 군수물자와 군인을 요구했다.
그 당시에 오스트리아는 2천년 철강 산업으로 철강 기술이 발달된 상태였다. 오늘날도 차량은 수입하지만, 자동차 부품과 굴삭기, 휘슬러 압력솥 등 철강산업은 세계적으로 크게 발달되어 있다.
군인 문제도 1750년대부터 마리아 테레지아가 육군사관학교를 세워 이미 군인을 길러냈다. 이런 크게 두 가지 연유로, 철강과 군인,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지배해왔다. 독일의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부흥해 갔지만, 오스트리아는 나라를 잃어 지명까지도 '오스토마크', 즉 동쪽 경계선이란 뜻으로 바뀌고 7개 마을로 행정개편되었다.
이미 80%의 도시가 파괴되었는데, 후일 2차 대전 후 연합군의 승리로 남은 것은 아이와 여자 노인 뿐이었다. 1945년부터 1955년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연합군 4개국이 분할 소유하며 오스트리아를 신탁통치해 왔다.
1955년 10월 26일 연합군이 떠남으로 이 나라는 어떤 전쟁에도 휘말리지 않겠다고 영세중립국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오늘의 오스트리아는 외부적으로 보아도 평화가 드리워진 평온한 나라다. 빈의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의 걸음에서도 여유로워 보이고, 거리 표정도 밝고 활기차다.
자주 눈에 띄는 것은 큰 개를 줄에 묶고 끌고 다니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조그맣고 귀여운 개가 아니라 송아지만한, 얼핏 보면 사나운 야생동물 같이 소름이 돋는 무서운 개가 주인과 함께 거리를 활보한다. 나도 검은 개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스트리아의 슬픈 역사와는 대조적인 아름다운 한 단면 앞에서 나도 미소를 지으며 사진 속에 담겨 있다.
쉔브른 궁전 앞에서.국제펜 문인들 단체 기념사진.앞줄 중앙의 빨간 티가 본인 김윤자
*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광장 한가운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커다란 좌상이 높은 위치에 우람하게 서 있고, 아랫 부분의 둘레에는 4인의 장군 기마상과 하이든, 모차르트 등 음악가들의 부조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1888년에 만들어진 거대한 조각상은 그 규모도 웅장하지만, 높이가 상당하여 바깥 도로에서 차 안에서도 이 광장 앞을 지날 때마다 영롱하게 솟아오른 마리아 테레지아의 조각상이 훤히 보인다.
광장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거의 구별이 안 가는 건물이 아주 큰 덩치로 에워싸고 있는데, 좌측에는 1881년에 완성된 유럽 최대의 미술관 중 하나인 미술사 박물관이 있고, 우측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프란츠 1세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세운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이 곳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높았던 위상이 육안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여인, 그의 아버지는 딸을 파격적으로 아들이나 오르던 왕좌에 앉힌 것이다. 물론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강한 설득력으로 이루어낸 것이리라.
나는 지금 그녀 앞에서 훌륭한 여성의 면모를 보고 있다. 나의 아버지도 이들 부녀만큼은 아닐지라도, 선구적인 교육관으로 재산이 있어도 딸은 교육을 시키지 않던 시대에 나를 대학까지 교육시켜 교사로 만드신 분이다. 여러 면에서 숙연해지는 광장이다.
* 왕궁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 걸어가면 아치형의 아름다운 부르크 문이 있고, 그 문을 들어서면 관광마차가 줄지어 서 있는 헬덴 광장이다. 드넓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궁이다. 광장 중앙에는 터키군을 무찌른 프린츠 오이겐 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상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카를 대제 동상이 용감하게 서 있다.
1220년경에 세워진 최초의 성관을 중심으로 역대군주들이 증축하면서 각기 다른 양식의 건물 집합체가 되었다. 왕궁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가와 함께 6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세기에 성벽이 철거되고 광장과 정원이 형성되었다. 건설 공사는 제1차 세계대전때까지 계속되었고 2000개실이 넘는 현재의 거대한 왕궁이 공개되고 있다.
더운 날씨로 다 돌아보지 못했지만, 왕궁에 들어오는 문도 특이하고, 문 앞에서 바라본 건물만도 광대했다.
왕궁. 합스브르크가의 찬란했던 왕궁에는 마차도 다니고
* 브르크 왕궁 정원
왕궁에서 새로이 증축된 신왕궁을 돌아가면 링거리에서도 보이는 곳에 특이한 정원이 있다. 푸른 잔디 광장에 꽃으로 가꿔만든 높은 음자리표가 선명하게 보인다. 어마어마하게 큰 모양이어서, 그렇게 가꾼 손길이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음자리표가 들어앉은 화단 윗쪽 끝에는 모차르트의 동상이 있다. 서서 높은 음자리표를 바라보는 자세다. 금방이라도 내려와 오선지 위에 음자리표를 그리고 환상적인 선율의 곡을 작곡할 것 같은 표정이다.
정원의 한쪽 끝에는 68년이라는 최장의 통치기간 동안 빈을 가장 번영시킨, 최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상도 있다.
합스부르크의 통치 기간 동안 예술의 꽃을 피웠던 흔적을 브르크 정원, 즉 왕궁 정원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높은 음자리표 화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 순서를 기다리던 것도 명소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브르크 왕궁 정원...높은 음자리표가 선명한 잔디 정원에서.뒤에는 모짜르트 동상
* 오페라 하우스
성벽을 철거하고 링거리를 완성한 후 링거리 양식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지은 건물이 국립 오페라 하우스다. 르네상스식 건축 양식을 재현하여 아름답다.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 파리와 밀라노 오페라 하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곳이다. 1869년에 완성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화재로 불타버려 다시 재건된 모습이다.
무대가 객석보다 2배나 커서 매년 적자라는데 연초에는 관람객이 많이 모여 수입을 올리고 있다 한다. 입장권이 80유로로 한화 10만원 정도의 비싼 요금이지만, 더 비싼 치장은 관람객의 의상과 보석이다. 아직도 누가 얼마짜리 옷과 보석을 달고 왔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객석은 1642석, 총 2000여명 정도의 입장이 가능하다. 손님이 입장하면 문 앞에서, 그 옛날 귀족의 겉옷을 받던 관습 그대로 두터운 외투를 입은 자에게 다가와 옷을 맡기시라고 권한다는데,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그래서 가능하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가이드의 부연 설명이 있었다.
링거리의 중심부에 자리한 건물, 전철인듯한 지하도를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가 바로 곁에 있다.
오페라 하우스 문 앞에서.건물의 웅장함이 대단하여...겨우 문 근경만.남편 수필가 유기섭님
* 성 슈테판 성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주택과 상가가 밀집되어 사람과 물건이 즐비한, 화려한 거리를 따라 걸어가서 만난 건물이다. '빈의 상징' 이라 불릴 만큼 외형과 내형의 아름다움이 대단하다. 링거리의 안쪽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하며 8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빈의 얼굴로, 12세기 중엽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교회가 건설된 것을 시초로 14세기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4세에 의해 고딕양식의 대표교회로 개축되었다.
원래는 큰 탑이 두 개였으나 전쟁으로 북탑은 무너져서 61m의 낮으막한 탑으로 남아있고, 남탑은 고딕식으로 137m의 거대한 첨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까이 이르기 전 멀리서부터 보여 도심 중앙의 명소임을 확인케 한다. 지붕은 23만장의 구운 벽돌로 유화를 발라서 보존하고 있어 정문 앞에서 바라보면 참 아름답다.
비엔나를 수도로 정하면서, 슈테판 이름을 따서 지은 이 성상은 역사적인 성당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결혼식과 장례식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북탑과 남탑에 올라가 시내를 구경할 수 있도록 했고, 북탑의 둥근 원형 지붕 아래에는 큰 종이 있어 연말이나 새해에 울린다는데, 우리는 성당 내부만 둘러 보았다.
성당 정면에 대성당의 긴 네이브를 받쳐주는 기둥은 천장에서 곡선으로 만나 아치의 문을 이루며, 여러 조각상들과 모자이크 창문으로 수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다.
성 슈테판 성당 앞에서...너무 높아 원경으로...저 뒤의 첨탑이 성당
* 괴테 동상
분주한 걸음으로 다녀서 어디쯤인지 거리의 위치는 잘 모르지만 그리 크지 않은 도로변에서 괴테의 동상을 만났다. 의자에 앉은 긴 머리의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고뇌하던 모습만은 아니다. 나의 젊은 학창시절 하룻밤에 다 읽으며 눈물을 쏟던 소설, 한 여인을 짝사랑하다가 슬픈 운명을 맞이하던 남자, 그가 실제의 괴테였다고 알고 있는데, 오늘 만난 괴테는 우람하고 씩씩하고 남자다운 건장한 사나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괴테를 만난 것은 뜻밖의 행운이다. 여행일정 속에 있는 것도 아닌데, 우연한 길목에서 훌륭한 대문호의 얼굴을 마주하며, 한 시인으로서 숙연해졌고 한 줄의 싯귀에도 충실하리라 다짐했다.
괴테 동상.'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밤 새워 읽던 기억...괴테는 슬픈 표정만은 아니었다
* 카를 교회
오스트리아 빈의 링거리를 버스로 돌며 자주 눈에 띄는 높은 건물의 성당이다. 내가 빈에서 제일 먼저 바라보게 된 높은 첨탑의 비상하는 건물이었고, 직접 내려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깊은 정이 느껴졌다.
오스트리아에 1619년과 1926년, 2회에 걸쳐 페스트가 번져 휩쓸고 감에 그 후 감사의 뜻으로 곳곳에 기념탑을 지었다. 카를 8세는 지구상에서 흑사병이 완전히 소멸하길 기원하는 뜻으로 1739년에 본 교회를 세웠다.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다. 아버지 카를에서 아들 카를 브로메우스까지 2대에 걸쳐 완성했다 하니 그 당시에도 백성의 안위를 위해 얼마나 큰 정성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고, 기둥에는 흑사병의 보호 성인인 카를 브로메우스의 일생이 조각되었다 하니, 백성으로부터 추앙받았음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스트리아는 남한에서 제주도 혹은 경주시 정도의 땅을 뺀 면적의 크기로 인구는 750만명이고, 빈에는 160만명이 산다. 기원전 800년, 철기문명시대부터 발전해 왔고, 도나우강 남쪽은 로마제국, 북쪽은 게르만족이 다스렸다. 침입을 방지하는 게르만 경계선이 도나우강이었다. 도나우강의 역할은 그 강이 흐르는 나라마다 깊은 역사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원래의 언어는 독어였으나 대부분은 영어를 주로 사용하며 영세 중립국을 선포한 지 금년이 50년 되는 해로, 눈부신 발전상을 곳곳에서 보게 된다. 주권회복과 카를 교회의 인간애는 깊은 정감으로 다가온다.
카를 교회...페스트가 물러간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세운 교회
* 비엔나 숲 호이리게 석식
짧은 시간에 참으로 많은 명소를 보았다. 원래 오스트리아의 관광 명소는 링거리 근처에 밀집되어 있어 반나절이면 다 본다는 사전 지식을 얻어 왔기에, 직접 발로 걸으며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 풍의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지은 국회의사당 건물은 두어번 지나고, 그 외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카를 교회, 도나우 강의 운하는 여러번 만났다.
머리 속에 확실한 지도가 그려지지는 않지만 링거리 구역이 그리 넓지 않음은 사실이다. 거리 바닥에는 전차가 다니는 레일이 줄줄이 깔려 있고, 비좁지만 복잡한 빈의 중심 교통수단은 대부분 전차로써 수시로 기다란 전차를 만난다.
이것으로 오스트리아의 여행 일정은 마치고, 마지막 석식은 비엔나 숲 입구에 가서 호이리게 현지식으로 했다. 점점 빈의 중심을 벗어나면서 거리는 한적했고, 조금 높은 지역으로 서서히 올라가며 도로변의 아름다운 꽃과 숲을 만났다. 이곳이 오스트리아의 부자가 사는 마을이라고 김자경 가이드는 부연 설명했다. 비엔나 숲이 시작되는 곳으로 땅값이 비싸고, 우리가 가는 식당은 클린턴 대통령 외 세계 유명인이 다녀간 곳이란다.
호이리게 석식은 우아한 룸에서 집시풍의 음악 연주자들이 각 팀마다 돌며 악기로 연주해 주는 선율을 감상하며 먹는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이다. 석회제거용으로 음식이 좀 짜고, 그래서 소금, 술, 커피 이 세가지를 이곳 사람들은 애호한다. 헝가리에서 마지막 밤 먹은 중세기사 식당의 현지식과 유사한 것으로 감자와 야채, 햄, 고기류와 스프다. 한국인임을 알고 '아리랑' 을 연주할 때는 함께 박수치며 불렀다. 아름다운 비엔나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비엔나 숲 호이리게 식당에서 만찬 석식 후 아름다운 문앞에서.유명인들이 찾는다는 곳
2005년 6월 18일 토요일 - 체코
빈에서 체코로 이동, 체스키크롬로프 성, 프라하 도착
* 비엔나 하모니 호텔
유럽의 호텔은 한국에서 계산하는 1층을 0층으로 계산한다. 모든 건물이 다 그렇다. 지금까지 유숙한 호텔 모두 그랬다. 그래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1층을 누르고 호텔 식당에 가려하면, 룸만 즐비하여 다시 엘리베이터로 들어오곤 했다. 우리 의식 속의 1층은 O, 혹은 P로 표시하고 있었다.
또 하나 비엔나 하모니 호텔은 특이한 엘리베이터였다. 호텔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찾지 못하여 안내원에게 물으니 벽에 부착된 상단은 젖빛 유리로, 하단은 나무판으로 된, 어느 부엌문 한 짝의 형상 같은 벽문을 엘리베이터라 했다. 그 문 앞에서 상층으로 올라가려 오름 버튼을 눌러도, 0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고장인 듯 하여 황당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며 문짝을 당겨보았다. 그때 열리는 것이 아닌가. 후유 안도의 숨을 쉬고 탔는데 내려야 할 층에 다달았는데, 이번에는 종만 '땡' 치고는 또 문이 그대로 닫혀있다. 참으로 난감했다. 알고 보니 다시 인공으로 문을 안에서 밀어야 열리는 것을 그대로 서 있었으니 열리겠는가. 그 문제로 우리는 한바탕 씁쓸하게 웃었다.
비엔나 호텔의 외경은 상당히 오랜 전통을 드러내고 있다. 창문과 출입문만 제외하고는 벽면 거의 전면에 담쟁이 넝쿨이 파란 잎새를 나풀거리며 싱싱하게 붙어 자라고 있다. 층수도 상당히 높다. 지금까지 보아온 유럽의 건물들이 틈새가 없이 다 이어져 있음은 이제 생소하진 않지만, 하모니 호텔 역시 옆의 건물과 길게 붙어있다. 어디까지 호텔이고, 어디까지 아파트이고, 어디까지 상가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한국으로 치면 한 주인이 통째로 높고 길고 우람한 덩치의 건물을 대형으로 지은 듯하다. 저렇게 큰 건물의 소유주가 하나일까. 그건 절대로 아니리라. 너와 나의 경계선을 그어야만 안심하는 우리나라, 한국의 정서와는 다름에서 오는 차이라고 해석되어졌다. 하모니 호텔 주변 건물들이 대부분 다 그렇게 지어졌다.
또 하모니 호텔은 수신자 부담의 컬렉트콜 전화를 한국의 집에 있는 아들에게 했을 때 사용료를 받았다. 슬로베니아와 헝가리에서는 체크되지 않았는데, 비엔나에서는 미화불 1달러를 지불했다. 전화 요금은 한국에서 부담하고 호텔룸의 전화기 사용료란다. 오스트리아 화폐로 300원 정도의 돈을 요구하는데 소액의 돈이 없이 미화 1달러를 주니 거스름돈 없이 2대로 받고는 가란다. 유럽에서의 호텔 전화는 비용이 비싸니 가급적 사용하지 말라던 주의사항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대신 음성 상태는 깨끗하게 잘 들렸다.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아침시간이 아쉬워, 버스가 올 동안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구두 상가에는 구두 한 짝씩 값을 붙여 진열해 놓았고, 중학교에는 토요일 휴교로 수위 혼자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수위였다. 나무 그늘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겸손한 자세로 다가와 나가주시라는 당부를 했다.
오늘은 오스트리아에서 체코로 이동하는 날이다. 모든 것이 아쉬워 빈의 풍경들을 가슴에 담는다. 고급호텔 하모니는 나의 기억 마지막 장에 고고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비엔나 하모니 호텔...온통 담쟁이 넝쿨이 건물을 휘감아 오르고...그 아름다움.정문 앞에서 떠나던 날 우리 부부
* 빈에서 체코의 국경선을 넘으며
오스트리아에서 체코로 가는 길도 항공이 아니고 버스다. 빈에서 체코의 남쪽 동화 속 같은 도시 체스키크롬로프 성까지는 3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오전 9시에 호텔에서 출발했다.
어떻게 국경선을 넘을까, 그것이 궁금하여 절대로 잠자지 않기로,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스트리아의 시골 들녘, 역시 헝가리나 슬로베니아의 들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광활한 초지에 소를 기르기도 하고, 밀과 보리 등 물이 없는 밭곡식을 재배하고 있다.
빈의 외곽 시가지에서 본 신호등 중에 보행자를 위해서도 큰 배려를 해준 신호표시가 보였다. 파란등 속에 화살표를 두 군데의 길을 동시에 건널 수 있도록 표시해 두었다.
버스는 점점 체코의 국경선에 가까이 가고 있다. 너른 평원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려간다. 이곳 평원에서 헝가리 평원과 다른 점을 보았다. 헝가리의 들판에는 나무가 없이 끝없이 펼쳐졌는데, 오스트리아 들판에는 가끔씩 큰 나무들이 밭과 밭의 경계선인양 울타리처럼 줄 서 있다. 사람들이 나누어서 관리하는 것 같다.
깊은 초원을 지날 때는 카우보이가, 영화에서나 본 말을 탄 남자가 멋진 모자와 의상으로 들녘을 돌아보며 순시하고 있다. 정말 유럽에 머무르고 있음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드디어 국경선이 보인다.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 올 때 본 것처럼 길다란 톨게이트가 두 나라의 경계선이다. 슬며시 넘어왔는데 멈추어 선 곳은 주유소였다. 여권을 꺼내들고 검색받으려 준비했는데, 그런 절차 없이 체코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프라하에서 만난 가이드로부터 후에 들은 사실인데, 체코는 한국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이어서 한국인에게는 까다로운 절차없이 그냥 통과시켜 입국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그만큼 한국인이 체코 땅에서 신뢰를 쌓았음이라 생각하니 이곳에 사는 우리의 동포에게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쉽게 빈에서 체코로 넘어왔다. 지금 시각 낮 12시, 코발트 빛 하늘과 초록 자연이 싱그럽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체코의 국경선을 넘어온 주유소.여권수색도 없이 넘어 오다니.. 한국인에 대한 배려라고
* 체스키크롬로프 성
체코의 초원 지대도 오스트리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십 마리의 젖소가 풀밭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고, 말을 타고 농장을 거니는 광경이 목격된다. 땅에서 땅으로 분리됨이 없이 이어지기 때문일까. 철책선도 군인도 없는 국경선이라니,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에 갈 때와 동일하다. 경이로운 평화다.
차는 어느덧 붉은 지붕 물결이 초록 나무 사이로 출렁이는 체스키크롬로프 성에 다달았다. 공용 주차장에 헝가리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로여행 버스로 우리를 이끌고 다니는 슬로바키아 운전기사는 편안히 진입했다. 그곳에서 체코 가이트 현지 한국인 박은주 학생을 만났다. 체코어를 공부하려고 4년전에 대학을 한국에서 졸업하고 왔는데,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어려운 체코어에 부딪혀, 헤매고 있다 했다.
체스키크롬로프는 체코의 크롬로프라는 표현의 지명이고 그 한 마을을 성으로 잘 보존하여 작은 프라하다. 우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문을 들어섰다. 한 동안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걸어온 길가의 식물 중에는 우리 나라의 민들레와 머위, 고들빼기 같은 동일한 모양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만난 식물이기에 반가웠다. 역시 동양에 가까운 유럽이기에 풍토가 우리와 유사한가보다.
작년까지 무료입장이었다는데 거대한 돌판을 쌓아붙여 세운 성문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초록띠를 받아 손목에 찼다. 체스키크롬로프 성의 관람을 마칠 때까지 그 띠를 차고 다녀야 한다. 아담한 음식점에서 체코 현지식으로 중식을 했다. 이곳 동유럽의 현지식은 거의 동일하다. 스프가 먼저 나오고, 넓은 접시에 감자와 고기, 야채를 담아 온다. 후식으로는 밀가루로 얇게 붙인 것에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발라 나온다. 깔끔하고, 각자의 몫을 알맞게 먹을 수 있어서 참 좋다.
오늘 따라 체스키크롬로프 성은 사람이 많이 모여 북적거렸다. 가이드가 알아보니, 어제부터 내일까지 3일간 축제기간이라 한다. 반은 현지인이고 반은 외국인이 모여 백인에서 흑인까지 세계인이 가득하니, 성을 관람하는 것 못지 않은 유쾌한 만남이다. 또한 이곳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옛날, 우리의 고유한 전통 한복과 같은 그들만의 고유한 의상을 입고 거리를 거닐며 중세의 화려한 문화를 재현하고 있다.
그 사람 물결 사이로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성 위로 향했다. 체스키크롬로프는 체코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으로, 전역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지다. 구시가지에 들어서면 마치 동화 속의 성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붉은 중세풍의 기와 지붕 건물들이 잇고 있어 참으로 아름답다. 그 건물 사이로 흐르는 블타바 강은 아름다움을 한껏 더해준다. 북에서 남으로 흘러야 할 강이, 통념을 깨고 저 블타바 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체코의 최남단인 이곳 체스키크롬로프에서 발원하여 프라하까지 흘러 북 보헤미아 지방까지, 체코의 전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강이다. 구부러지며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이어져 흐르는 낭만의 강이다.
체스키크롬로프에서 '체스키' 는 '체코의' 라는 뜻이고 '크롬로프' 는 독일어로 '구불구불한 모양의 강 옆에 있는 풀밭' 이란 뜻이다. 이름이 길어 외워지지 않는 지명인데 풀이하여 알고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체스키크롬로프는 13세기부터 도시가 형성되어 남 보헤미아 영주들의 영향을 받으며 귀중한 건물과 미술품 등, 특히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거리 모습은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우둑 솟은 블타바 강 북쪽의 체스키크롬로프 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람하게 보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동상이 서 있는 블타바 강의 다리를 건너 성곽 위에 오르니 둥근 공원이 있고, 그 곳에서는 뱀을 사람 목에 걸어주는 여인과, 음악 연주 악단, 그 외 여러 가지 토산품 가게가 즐비하다. 아래로는 나무와 지붕이 초록과 붉은 색으로 그림처럼 전개된다. 아름답다고 감탄하니 박은주 가이드는, 프라하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 한다. 이곳은 프라하의 축소판으로 보면 된다는데, 우리의 눈에는 눈부신 저 아름다운 도시가 시리도록 곱다.
성문 아래 습지에는 커다란 곰 한 마리가 오수를 즐기며 누워있고, 좀 더 높은 지대에 오르니 오스트리아의 쉔브른 궁전을 본떠서 만든 자흐라다 궁전과 좌우대칭이 정확한 왕실의 정원은 아름답다.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러 물줄기가 흐르는 분수가 있고, 그 곁으로 포도송이를 든 사람의 동상과, 보리 이삭을 들고 선 사람의 동상이 있다. 이 지역의 토산물 상징이란다.
다시 구시가지 중심으로 내려와 축제의 물결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전통복을 입은 그들과 사진도 찍고 중세의 문화를 체험했다. 돌을 깔아놓은 좁은 골목길, 아기자기한 고운 집들, 향기로운 사람들, 모두 정겨운 곳이다.
체코의 남쪽 체스키크롬로프 성. 동화 속 같은 마을 풍경.성벽 위에 올라...남편 유기섭 수필가님
체스키크름로프 성의 축제 행사.중세 의상을 입은 현지인과 함께.세계에서 모인 사람들
* 프라하 도착
체스키크롬로프 성 관람을 마치고 오후 4시경 프라하로 떠났다. 체코 최남단에서 중심부에 위치한 수도 프라하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보아온 동유럽의 평원과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야트막하지만 산도 보이고, 나무 숲 무더기도 만나고 가끔씩 물줄기도 만난다는 것이다. 숲과 들풀 사이로 흐르는 블타바 강, 몰다우 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420km의 긴 강은 독일까지 이어지고, 북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것이 비경이다. 초지가 대부분이고 재배농작물은 보리, 밀, 감자 등 지금까지 보아온 동유럽과 비슷하다. 푸른 하늘과 투명한 햇살, 싱그러운 풍경은 캐나다의 록키를 연상케 한다. 북쪽으로 캐나다와 거의 동일한 위도상에 있어서일까.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는 침엽 상록수가 고속도로변에 끝없이 이어진다.
프라하까지는 약 3시간이 소요되며, 그 달리는 시간 중에 한국여인 박은주 가이드는 친절하고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체코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체코는 1620년부터 1918년까지 300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여 오스트리아의 풍물이 많다. 이곳 생활은 영어, 독어, 체코어 세 개를 알아야 하고,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며 연간 1억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독일인과 이태리인, 그리고 한국과 일본인도 가세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은 350명 정도 거주하고 있는데 한국 교포수가 점점 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 사는 교포 3천명에 비하면 적은 숫자지만, 한국인이 뭉쳐서 자체 행사를 자주 열고 있다고 한다.
체코는 2004년 5월에 EU에 가입하였고, 2004년 5월 15일자로 대한항공이 입항을 시작하여 주3회 운항되고 있는데 7월부터는 주4회로 늘릴 계획이다.
체코에서 삼성 핸드폰은 부의 상징이다. 디카 핸드폰은 두달 봉급 액수다. 대학에서 교수들은 학생들이 삼성 핸드폰을 사지 않도록 유도하는데 수업 중, 핸드폰에 대한 애착으로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란다. 또한 한국의 기아 자동차도 체코에서는 인기다.
오스트리아에서 넘어온 국경선 부근 비행기 공항 예정지인 질리나에는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좋게 배어 있어 한국인 여권만 내밀면 무사통과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늘 아무런 제시없이 자연스레 넘어온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경계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인과 체코인의 개념은 서로 친구이고 상당히 우호적임을 알았다.
동유럽의 날씨는 이상 기온의 잦은 변화로, 며칠 전까지는 추운 겨울 온도였다가 오늘은 한여름 날씨로 덥고, 하루의 일교차도 15도∼16도 차이가 나며, 햇볕이 났다가 비가 오는 등 한국과는 다른 기후라 한다. 햇볕도 한국과는 달라서 강한 자외선을 잘못 쪼이면 백내장에 걸릴 수 있고 피부 보호를 위해 썬크림을 두텁게 발라야 한다.
체코는 우리나라의 80% 면적으로 프라하는 서울의 1/4 크기다. GNP는 8500불이고 봉급은 대졸자 기준으로 60만원 정도 낮은 임금이다. 살인적인 물가상승에 생활고가 심한 편이다. 그러나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어 노후걱정이 없는 나라다. 하지만 현재의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관광인들이 와서 뿌리는 돈을 보며 괴리감을 느낀다고 한다. 3년전만 해도 물가가 쌌는데, 세계적인 추이에 따라 체코의 물가도 고공으로 치솟아 서민들은 허덕이고 있다.
손바닥 모양의 체코 지도에서 프라하는 구 보헤미안이다. 그래서 체코 중앙역에는 특히 집시가 많이 모이고, 전체적으로도 집시가 많은 편이다. 집시가 많은 것은 유럽 공통적인 듯하다.
체코에는 한국인 가이드가 17명 있는데 7월에 공식적인 시험을 치를 예정이란다. 발음 하나 잘못하면 전혀 의사 소통이 안 되는 힘든 체코 언어의 벽을 넘기가 힘들어 고생하는 한국 가이드다. 그녀는 말했다. 여러 관광객 중에서 국제펜 문인 집단의 가이드로 본인이 자청했노라고. 한 문인의 글로 평생의 힘이 되는 수가 있다고. 한국의 작가분들을 만난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기록될 것이며 개인적으로도 큰 기쁨이라 고백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힘찬 박수를 보냈고, 문인으로서의 깊은 사명감과 자긍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홍금자 시인은 김기림 시인의 '길'을 낭송함으로, 김정웅 시인은 '고창 선운사' 자작시를 낭송함으로, 그녀에게 보답해 주었다.
체코에는 노벨 문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두명 있는데 '야로슬라브' 라는 동명이인이란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이란 시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 체코의 프라하는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오후 7시 10분 체코의 프라하 시가지에 진입했다. 고층 건물이 보이고 도심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고층 아파트와 고층 사무실 샅은 건물이 몇 개 보인다. 생각했던 체코의 인상과는 다르게 화려함이 흐른다. 마침 토요일 주말이라서 길이 막히지 않았다.
10시나 돼서야 해가 진다는 도시 프라하는 저녁 8시가 다 되는데도 낮이다. 해가 저물어가지만 한국의 저녁만큼 짙은 어둠이 아니다. 록키매리어트 호텔의 밤도 10시나 되어야 밤이 되던 작년 이맘때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리고는 새벽 4시면 해가 뜬다고. 지구의 상층부라서 태양빛을 많이 쪼이고 있음이 증명되는 대목이다.
세계 최고의 세계 문화 유산 보유국인 체코의 프라하는 929년부터 1929년까지 1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 프라하는 걸으면서 찬란한 중세 문화의 유적지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며, 우리는 내일 많이 걸어야 한다고 했다. 체코는 한국처럼 가부장적 사회로 맞벌이 부부인 여자가 고달프단다. 체코 여인은 대체로 미인이고, 특히 백러시아 여인은 참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으며 프라하 땅을 최초로 밟았다.
해넘이의 비경을 등 뒤로 하여, 조금 먼 거리에 위치한 시가지 도심 중국 식당에 걸어가서 중국식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호텔로 돌아올 때 본 강의 풍경은 자작자작한 불빛과 함께 비경이었다. 국립박물관 앞의 바츨라프 광장을 지나며 바츨라프는 할머니가 키웠고, 그의 어머니는 종교문제로 그 할머니를 죽였다는 비사를 들었다. 프라하 도심의 석양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프라하에 도착하여 저녁식사 하러가는 국제펜 문인들. 전차와 현대식 건물 풍경
2005년 6월 19일 일요일 - 체코
TOP 호텔, 카를교, 구시청사, 천문시계탑, 구시가지 광장, 얀 후스 동상, 틴교회, 프라하 성, 성 비투스 대성당, 황금소로, 구왕궁, 발렌쉬타인 궁전, 바츨라프 광장, 프라하의 봄, 블타바 강 야경
* 프라하 TOP 호텔
어젯밤에 들어올 때부터 범상치 않은 호텔임은 알았다. 외적인 규모도 대단하고 내적인 규모도 대단하다. 건물과 내부의 아름다움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닌데, 우선 객실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우리가 2일간 유숙한 B동만도 열쇠 걸이 번호가 천에 가까울 정도로 안내데스크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지금까지 해외 여행 중 머문 호텔 중에서 가장 대규모 호텔로 각인된다.
프라하 시가지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상당한 고급 호텔이고, 이곳에는 정치 지도자들이 자주 머물던 곳이라 하니 그 위세의 드높음을 짐작케 한다. 객실도 상당히 넓고, 곳곳에 엘리베이터도 잘 설치해 두었고, 비상 계단도 잘 보이는 중간 지점에 만들어 두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종류다. 오스트리아의 하모니 호텔에서 보았던 수동식과 한국의 건물에서와 같은 자동식 엘리베이터인데, 우린 자동식 엘리베이터만을 이용했다. 층의 표시만 다를 뿐, 즉 5층이어도 한국의 6층이라는 것 빼고는 우리나라의 엘리베이터와 동일하다.
아침 식사는 매일 호텔 뷔페식인데, 조식을 하고자 식당으로 가다보면, 호텔의 복도 이곳 저곳에서 객실의 손님들을 만나게 된다. 식당에 들어갈 때는 방 호수가 적힌 카드를 보여야 하는데, 한번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 어렵다. 모르고 카드를 소지하지 않고 물을 먹으려 갔을 때 종업원 젊은 남자는 내게 룸카드를 보여달라 했다. 영어로 '나는 이미 식사를 했고, 물을 먹으러 잠시 들어가길 원한다' 고 어눌하게 표현했더니, 그는 알아듣고 들어가라고 했다.
이곳 체코 사람들은 자기 집안의 인테리어도 못 하나 허락없이는 박지 못한다고 들었다. 철저한 규범 속에서 생활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찌보면 억압인 것 같아도 차라리 그런 아름다운 구속은 오히려 더 큰 이로움과 자유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호텔 밖 정원 입구에는 분수가 넓은 자리로 놓여있고 그보다 차도 가까운 길쪽에는 외국기가 걸려 있는데 한국의 태극기가 우측 첫 번째에서 펄럭이고 있다. 체코에게 한국은 그만큼 우호적이고, 한국의 위상을 높이 평가함에 흐뭇했다. 맥주가 유명한 나라, 체코의 버드와이저는 세계적인 상품이라는데, 그 맛 역시 부드러웠다. 체코의 여정은 국경선을 넘을 때부터 따스했다. TOP 호텔 또한 포근하다.
체코 프라하 Top 호텔 정원 분수대에서.내부의 객실이 헤일 수 없이 많음
* 카를교
프라하의 블타바 강 위에 놓인 환상적인 다리다. 아침 일찍 카를교에 갔다. 프라하의 햇볕 속에는 특이한 자외선이 있어 피부를 손상시킨다 하여 마후라로, 모자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하늘은 캐나다에서 본 것 같은 온전한 투명함으로 파랑 물감을 칠해놓은 것 같다. 프라하에서 볼 거리 중 구름을 빼놓을 수 없다는데, 정말 파란 하늘에 뜬 하얀 구름은 어느 곳에서 만나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프라하 성 쪽에서 구시가지 쪽을 향해 카를교를 걸으며 블타바 강의 낭만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의 조각상들을 관람했다. 이 다리는 중세 건축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원래 이름은 프라하 다리였으나, 강이 여러 번 범람하여 12세기 목제교에서, 석재교로, 다시 1357년 카를 4세 때 건축가인 피터 팔레지에 의해 완공되어, 1780년부터 이 다리의 축조를 명한 카를 황제의 이름을 따서 부름으로 오늘의 카를교가 된 것이다.
총 516m 길이, 9.5m 너비에 30개의 조각상이 서 있다. 이 조각상들은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제1호 프라하의 성인 얀 네포무츠키의 상을 비롯하여 유명한 성인에서 지방색 강한 체코의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가장 오래된 조각상은 1657년에 제작된 예수 십자가 상이며 예술적으로 뛰어난 조각상은 1710년에 제작된 예수상이다.
그 외 여러 조각상들이 담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터어키인의 이교도에 속박되어 있는 기독교 신자들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16개의 반원 교각 위에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성스럽고 웅장한 조각상들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독특한 형상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끝과 끝의 교각문 또한 성대하여, 들어서면서 나오기까지 생생한 중세 유럽의 문명을 체험한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 다리의 재료로 계란과 밀가루를 섞어서 더욱 견고하다고 한다. 19세기에는 전차가 다녔으나 현재는 청소차만 다닐 뿐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도보용으로만 사용하는 프라하의 상징이며, 프라하의 자긍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체코의 역사 속에서 카를 대제는 프라하의 영웅적 인물로 은광이 대량개발되면서 은화를 개발하여 카를 4세가 부흥시켰는데, 알렉산더를 존경함으로 그 보답으로 카를교를 제작했다는 설도 있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책과 인터넷을 통해서 이토록 특별한 카를교에 대해서 충분히 공부하고, 지금 이곳에 서 있다. 내 두뇌 속 상상보다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낮으막한 물줄기로 긴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블타바 강과, 유람선, 낚싯배, 보트, 높은 지대의 프라하성, 다리 위에 선 세계 관람인들, 활기찬 소리의 상인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무언의 조각상들의 성스러움에 한껏 취하여 향기로운 꿈의 세계로 유입되고 있다. 내 자취 하나, 이곳에 남기고 떠난다는 추억은 두고두고 생애의 행복으로 떠오르리라.
카를교에서 우리 부부.블타바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저런 조각상이 다리 양편으로 30개가 장염한 모습으로 서 있음
* 구 시청사
체코는 한반도의 1/3 크기로, 인구는 1030만명이다. 14세기에는 카를 4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를 정도로 부강했고, 수많은 역사를 간직한 프라하는 전쟁을 치르지 않음으로 작은 골목 하나에서도 중세의 향기가 신비롭게 흐르고 있다. 시내 곳곳에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프라하는 EU가 지정한 2000년 유럽 문화의 역사 중심지로 명명된 9개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구 시청사 건물 |
* 천문시계탑
구시청사의 외벽에 장치된 시계로, 1410년 최초의 시계를 1490년에 칼레르 대학의 수학 교수 하누슈가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매시 정각이면 종소리와 함께 높은 곳의 작은 창문에서 12사도가 차례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룬다.
맨 아래에는 보헤미아 농민의 달력표가 있고, 그 위에는 천동설을 기초로 만든 천문시계가, 그 다음 위에는 두 개의 창문, 그리고 맨 위에는 황금닭이 서 있다. 양 옆 난간에는 허영, 구두쇠(탐욕), 터어키인(정복욕)상들이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정각이면 20초 동안 우는 닭의 울음과 시간의 종소리에 죽기 싫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지만, 해골은 이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한갓 소용없다고 줄을 당기며 춤추고 있다.
뼈다귀만 앙상한 해골 조각상은 죽음의 신이고, 금자루를 쥔 남자는 허영을 상징하는 조각상이라는데, 이 천문시계탑은 세상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담고 영롱한 메시지를 함께 전하고 있다. 속설에 의하면 이 기묘한 시계를 제작한 기술자는 눈을 멀게 했다는데, 그 이유가 다시는 이토록 위대한 시계를 제작하지 못하게 함이었다 하니,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을만큼 외형적으로도 큰 장치의 천문시계와 부속물들이 대단한 존재의 가치로 다가온다. 작은 두 개의 창이 열리고 예수의 12제자가 얼굴을 보이며 지나갈 때는 고요한 미소로, 평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곁에는 구시가지 광장이 있어 이곳을 지나며, 우리는 천문시계탑을 몇 번 볼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구 시청사 외벽에 장착한 천문 시계탑 앞에서.(좌)권천학 시인님.본인 김윤자 시인
* 구 시가지 광장
구시청사 앞의 큰 광장으로 민중봉기와 처형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곳이다.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인 주변에는 상가가 즐비하고, 광장 중앙에는 보헤미아 독립 운동의 투사인, 얀 후스 동상이 서 있는데 '프라하의 봄' 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검은색 휘장이 둘러 새겨져 있다. 동상 뒤편으로는 아름다운 틴교회가 첨탑으로 솟아 있다. 구시가지 광장은 그야말로 프라하의 심장부로서 10세기 이래부터 지금까지 낮과 밤 구분없이 활기찬 곳이다.
우리 일행은 주로 흩어져서 주변 명소를 돌아보다가, 또는 쇼핑을 하다가 이곳 광장에서 만나곤 했다. 두 아들에게 줄 PRAHA 마크와 함께 카를교를 수놓은 기념 T셔츠와 우리 부부가 쓸 기념모자도 이곳에서 샀다. 프라하 성의 상징물인 성 비투스 성당 조각품과 기도하는 성직자 부조품도 좀 비싼 값이지만 역사교사인 큰 아들에게 줄 선물로 샀다.
시간이 좀 남아 곁에 있는 공원 벤취에서 편안한 휴식도 취하고, 프라하 시민의 발걸음을 가장 많이 본 잊지 못할 여행지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우리 문인 부부. 뒤에는 얀 후스 동상. 민중봉기 집회 장소였던 곳
* 얀 후스 동상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다. 프라하 대학에서 1370년에서 1415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던 얀 후스는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하다가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화형당한 종교개혁가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상에는 승리를 거둔 전사들과 체코를 대표하는 어머니상이 조각되어 있다.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지켜라' 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거룩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거대한 입상으로 서 있는 얀 후스(Jana Husa)의 눈에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정의의 빛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얀 후스 동상 앞에서.국제펜 한국본부 회원들 기념사진
* 틴 교회
구시가지 광장을 사이에 두고 천문시계가 장착된 구시청사와 정면으로 마주 서 있다. 광장의 아름다움을 쥔 압도적인 건물이다. 1365년에 지은 고딕 건물로 1620년까지 프라하의 주요 후스파 교회였다. 후스파 왕가의 성찬식으로 이 교회에서 빵과 포도주가 처음으로 신도들에게 제공되었다. 이는 후스 온건파의 기본 교리이기도 했다.
개혁주의 성직자 얀 후스의 신봉자들이 황제의 카톨릭 십자군과 싸워서 승리한 후, 다시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었다가 1434년 전투에서 급진파가 패배한 이후 온건파에서 조지 왕이 나온 것이다. 본 이름은 '틴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 로 여기서 틴은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학교로 쓰이던 건물인데 현재는 세관 건물을 지칭한다.
80m 높이의 뾰족한 두 개의 탑이 솟아 있고, 두 탑 사이에 황금으로 녹여 만든 성모 마리아 상이 빛나고 있다. 또 4개의 작은 탑들이 첨탑을 2단으로 에워싸고 있는데, 그 첨탑과 작은 탑들 꼭대기에 별 모양 판을 세워 놓아서, 석양을 받았을 때 찬란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구시청사와 구시가지 광장, 얀 후스 동상, 틴 교회, 이런 프라하의 명물이 이곳에 모여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한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는 오전에도 보고, 오후에도 보는 행운을 얻어 특히나 영롱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틴 교회. 구시가지 광장에 거룩하게 솟은 첨탑과 석양에 빛나는 별모양 장식물
* 프라하 성
틴 교회까지 보고 버스를 타고는 프라하 성 북문 앞까지 올라갔다. 여름 궁전은 잠시 스쳐지나가며 보고 북문으로 입성하여 성 비투스 성당을 중심으로 찬란한 프라하 성과 프라하 시가지의 붉은 기와 지붕 물결을 감상했다. 눈 앞에 전개되는 광경들이 어느 곳이든, 이곳에서는 한 폭의 명화로, 수채화로 다가올 만큼 아름답다.
유럽의 십자로상에 위치한 프라하는 선사시대 이래로 해외 무역상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도시였는데, 대규모 시장인 구시가지 광장과 프라하 성채를 중심으로 번화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도시 곳곳에 아름답게 자리한 궁전과 공원은 프라하의 자랑거리로, 전쟁으로 손실된 궁전수가 적으나 복원과 확장의 과정에서 양식상의 변화를 겪었는데 17세기에는 궁궐에 정원을 짓되 반드시 궁전 바깥에 두었다. 프라하 성도 이러한 경우에 속하여, 성곽을 벗어난 아랫녘 구왕궁 뜨락에서나 정원을 만났다.
1918년부터 체코 공화국 대통령의 거처로 쓰이는 프라하 성은 블타바 강 상류의 아름다운 언덕에 높게 자리하여 서쪽 정문과 동문, 정원 쪽의 북문이 있고 각 문에는 위병 2명이 7시부터 23시까지 1시간마다 교대하는데, 우리는 북문으로 들어가서 프라하 시가지를 보며 아울러 그 교대식까지 보았다.
성 비투스 성당 앞 현대식 건물, 한국의 빌라와 비슷한 건물, 그 어느 곳에 지금 이 나라 대통령이 계실 거라고. 어느 날, 운이 좋으면 그 분을 만나게 되고, 그때 그분은 프라하성 곳곳을 돌며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박은주 가이드에게 그게 정말이냐고 따지듯이 물었더니 사실이란다. 그만큼 체코의 대통령은 수수하다고 강조한다. 그 분이 거처한다는 건물도 2층 베란다 난간에 조각상들을 몇 개 세워둔 것 말고는 화려함이 없다.
성 비투스 성당과 대통령 관저 집무실 사이 그늘진 곳에 앉아 쉬며, 행운을 기다렸으나 그분은 나오시지 않았다. 아직도 거대한 성비투스 성당에서 예배에 참여하고, 지금 바라보고 있는 아치형 저 아름다운 성문이 대통령이 들어가는 문이라 하여 그분의 빈 그림자만 훑어보고 나왔다.
체코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라하 성은 그 자체만도 대단한 명소이지만, 주변에 황금소로와 구왕궁 등 볼거리가 많다.
프라하 성 정문 풍경.뒤에는 성 비투스 성당과 대통령 집무실
프라하 성에서 바라본 프라하 시가지의 붉은 기와지붕 물결
* 성 비투스 성당
프라하 시가지 곳곳에서, 블타방 강 다리 위에서 체코의 중후한 역사적 상징물로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성당이다. 프라하 성의 주 건물인 이 성당은 현재 대통령의 집무실과 연결되어 있어 그 의미를 더욱 깊게 한다. 대통령이 드나드는 문은 일반인은 통제되어 있어 바라보기만 했다.
1344년 카를 4세의 명으로 프랑스 건축가의 설계로 지어지기 시작해서 1929년까지 계속 증축하여 완성된 건물이다. 이 성당은 비투스 성인의 유물이 있던 곳으로 외부의 거대함도 장관이지만 성당 안에 발을 들여놓눈 순간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문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벽면 곳곳에 신의 손길로 이루어진 듯한 원색의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은 성당 내부를 화사하게 빛내주고 있었다. 예배당 벽은 황금색으로 옻칠이 되어 있고 석류석, 자수정, 에메랄드 등 1372개나 되는 크고 작은 보석이 박혀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 바츨라프 생애를 그린 벽화와 조각상이 있고 보석 제단과 황금 성궤 등은 높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성당 내에서도 가장 가치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동유럽 여행 중 들어가 본 성당 중에서, 육안으로 보아도 웅장함보다는 화사한 예술의 향기가 스며있음을 느꼈다. 체코의 기념물로 구시가지 광장 상가에서 이 성당의 조각품을 사 가지고 왔다.
성 비투스 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지금도 대통령이 예배드리는 곳
프라하 성에 있는 성 비투스 성당. 첨탑의 드높은 건물
* 황금 소로
프라하 성의 주 건물인 성 비투스 성당을 나왔을 때 마당 끝에서 만났다. 이 좁은 골목은 성의 사수들이 살았던 작고 아기자기한 집들로 유명하다. 집들은 16세기에 방어용 성벽으로 지어졌는데, 전설에 의하면 루돌프 2세 치세 동안 황제를 위한 금, 영원한 젊음의 영약, 현자의 돌을 제조하는 연금술사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금 소로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는데 19세기에 사람들은 이곳의 신비한 매력을 평가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몇몇 유명한 예술가가 거주했다. 문학가와 미술가 등인데 1916년과 1917년 겨울에 소설가인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22번지에서 <시골의사> 등 몇편의 단편을 집필했다.
파스텔 색조의 나즈막한 집들은 현재 관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되었다. 나도 이곳에서 중세 십자군 병사 동상을 샀다.
황금 소로 그 작은 골목에서. 예술인들이 살았다는데...지금은 상가
* 구 왕궁
황금소로의 단단한 돌바닥을 걸어내려 오면, 현대식 긴 계단이 있고, 그 계단 아래 작은 정원을 거쳐 들른 곳이 구 왕궁이다. 프라하 성을 중간쯤 내려온 지점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품고, 남쪽 프라하 시가지를 바라보고 서 있다. 건물 자체는 그리 아름답진 않으나 길다랗고 우람한 건물이 정원 입구에서 정원 끝까지 이어져 서 있다. 그 정문 앞에는 프라하 시가지 관망대가 있어 바라보니, 성 위에서 보았던 프라하 시가지의 붉은 지붕 물결 아름다운 풍경이 바로 눈 앞에서 보였다.
이 건물은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3동의 건물을 연결해 로코코 양식으로 개조한 궁전으로 지금은 대통령의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쓰고 있다. 외관상으로는 단단하게 잘 지어놓은 아파트 건물처럼 보였다.
구 왕궁 정원에 들어서며.아파트 모양의 대통령 집무실 건물
* 발렌쉬타인 궁전
프라하 성을 앞에서 가로막으며, 왕권을 넘보며 추종하던 보헤미아 귀족 출신의 거부 발렌쉬타인(발트슈타인)이 지은 궁전이다. 독일어를 잘해 30년 전쟁에서 황제군 지휘를 하는 등 페르디난트 2세의 마음에 들어 점차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265채의 민가를 사들여 궁전을 짓고 자신의 관저로 사용했다.
문호 실러는 그의 생애에 흥미를 가지고 3부작으로 <발렌쉬타인>을 썼고, 그 외 많은 작곡가들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남겼다.
들어서는 입구에 커다란 연못과 분수, 그 곁으로 꾸며놓은 수려한 미의 나무와 꽃들의 뜨락, 인공 동굴, 조각을 배치한 기하학 모양의 정원은 실제의 황제 궁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불러들여 지은, 현재의 콘서트 홀인 '기사의 방' 천장의 프레스코화에는 자신을 싸움의 신 마스로 칭하며 승리의 마차에 타고 있는 발렌쉬타인 모습이 담겨 있다.
그는 결국 황제의 명으로 암살되었다는데, 사실은 한달 뒤쯤 매독으로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눈이 멀면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도 있다는 암시적인 곳으로 소슬한 그림자가 서리어 있다.
발렌쉬타인 궁전 연못.거부 발렌쉬타인 백작이 왕권을 노리며 프라하 성 바로 아래에 지은 궁전
* 바츨라프 광장
맨 처음 프라하 시가지에 들어왔을 때 호텔로 이동하며 잠시 버스 안에서 보았다. '프라하의 봄' 으로 세계적인 명소가 된 이 광장은 한국의 여의도 광장(구)을 연상케 했다. 거대한 국립 박물관 건물이 광장 끝에 웅장한 위상으로 서 있고, 그 앞으로 무척 긴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중간 중간에 화단을 인공으로 조성하여 아름다운 장미꽃의 고운 꽃들이 웃고 있지만, 박물관에서 가까운 곳 광장 중앙에는 학살당한 희생자 청년 두 사람의 슬픈 얼굴이 있다. 겉으로 보아서는 둥글고 작은 나무 화단같이 보이나 건장한 두 남자의 사진과 비문이 평면으로 누워있고, 그 아래 유골이 묻혀 있다고 한다.
체코의 근대사를 지켜보아온 이 광장은 1348년 카를 4세가 조성한 신시가의 중앙 시장으로, 말이나 곡물을 거래해 오던 19세기 중반까지 '말시장' 이라 불렸다. 광장의 이름은 성 바츨라프에서 유래된 것이고, 그의 동상이 4명의 수호성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말 위에서 깃발을 높이 든 기마상으로 서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가 다시 소련의 감시로 40년 동안 공산 치하에 있다가 1989년 '벨벳 혁명' 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체코의 멀고도 험난한 독립 회복의 길로 이끈 사람은 극작가인 바츨라프 하벨이었다. 결국 대통령 후사크는 사임하고 대중의 요규에 따라 바츨라프 하벨이 취임하게 된 것이다.
이 광장은 여러차례 프라하 시민의 집회 장소가 되었고 혁명의 붉은 함성이 일던 곳이기에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지금은 프라하 시민의 평화로운 만남의 장소로 북적거리고 주변에는 화려한 상가, 백화점, 은행 건물로 활기차다.
바츨라프 광장...붉은 장미꽃은 '프라하의 봄'... 그날을 알까. 뒤의 건물은 국립박물관
* 프라하의 봄
오늘의 대한민국이 굳건한 주권을 찾아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듯이, 체코 역시 우여곡절의 슬픈 역사를 거쳐 오늘의 굳건한 주권을 찾아 평화롭게 사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합스부르크가 지배에서 독립, 독일에 점령, 소련의 감시 체제를 거치면서 1960년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는데 1968년 봄, 검열 폐지와 언론의 자유 등이 인정되면서 급속한 개혁이 추진되었다. '프라하의 봄' 이라 불리는 이 정치 개혁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사태가 동유럽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소련은 1968년 8월 20일 심야에 무력 침공을 했다. 프라하 시민들은 바츨라프 광장에 모여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5개국 20여만명이 탱크 군대 부대의 무자비한 힘에 눌려 결국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으로 시작된 자유의 물결은 1989년부터 소련의 개혁 훈풍을 타고 무혈시민 혁명인 벨벳 혁명(벨벳처럼 순조롭게 개혁이 진행되어 붙여진 이름)이 전개되어 공산당의 정치 지도권은 힘을 잃었다. 그리고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시장 경제로의 이행, 유럽 통합에의 참여를 갈망하는 체코슬로바키아는 그해 12월 민주 지향의 지도자, 비공산주의자인 바츨라프 하벨을 대통령으로 했다.
1992년 연방을 해체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1993년 1월 1일에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이라는 주권 독립 국가가 새로이 탄생된 것이다. 1992년에 잠시 사임했던 바츨라프 대통령은 1993년에 다시 체코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 2003년 2월 3일까지 재임했다. 그의 집무실이 프라하 성 대통령 관저에 있다. 1936년 생인 바츨라프는 격동기의 체코를 굳건하게 주권국가로 세운 위대한 지도자임을 알았다.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로부터 문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으로 노래하는 체코 자유화의 상징적인 이 고유 문구는 유난히 푸른 체코의 하늘빛만큼 푸른 영상으로 아로새겨진다.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바츨라프광장.뒤에는 바츨라프 기마상.희생청년의 비문곁에서.수필가인 남편 유기섭님
* 블타바 강 야경
겨울이 6개월이고, 4월에서야 봄을 느끼는 나라 체코, 특히 변덕스런 날씨로 비와 해를 순간 순간 마주 대한다는 나라 체코, 이곳 사람까지도 변덕스럽다는데, 묵묵히 흐르는 블타바 강을 보고 있노라면 체코의 아름다움만 한 가득이다.
우리 일행은 낮에 본 카를교 아래 블타바 강을 해가 진 밤 10시에 다시 찾았다. 프라하의 여름 6월, 무던히도 덥던 하루의 태양은 지지 않고 늦은 저녁 시간까지 프라하의 하늘에 머물더니 밤 9시가 넘어서야 어스름 기운이 돈다.
프라하의 성을 내려와 바츨라프 광장을 거닐며 프라하의 향기를 취하고, 현지식으로 석식 후 잠시 TOP 호텔로 이동하여 어두운 밤을 기다렸다가 구시가지 광장 번화가에서부터 블타바 강으로 걸어갔다. 프라하의 야경을 보지 않으면 프라하를 보지 않은 것이라며, 가이드는 중심시가지의 길목으로 가로질러 이끌고 다닌다.
낮에 본 카를교를 그 맞은편 다리에서 블타바 강의 야경을 보았다. 강이 그리 크진 않지만 물 속에 빠진 화려한 불빛과, 카를교에서 발하는 빛, 그리고 더 아름다운 것은 높은 곳, 프라하 성의 진주빛으로 발하는 빛들이 고성 건물을 어둠에서 솟아올리고 있다. 체코의 마지막 밤은 블타바 강의 야경 축제로 마감하였다.
프라하 블타바 강 야경.저 건너 카를교와 프라하 성의 찬란한 불빛
2005년 6월 20일 월요일
프라하의 옛성 비셰흐라트, 비셰흐라트 묘지, 프라하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프랑크푸르트 출발
* 프라하의 옛성 비셰흐라트
이 곳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흔히 데리고 오는 곳은 아니라 했다. 우리는 모두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으로서 문인작가들이기에 꼭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라서 체코를 출발하기 전 잠시 들른다 했다. 비셰흐라트에는 예술가의 묘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블타바 강 위에 우뚝 솟은 험한 지대의 비셰흐라트는 '고지대에 있는 성' 이란 뜻인데 한때는 요새화한 이 성을 프라하성보다 더 좋아했다고 한다. 체코 사람들에게 신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버스 주차장에서 한참을 걸어가니 시원한 비셰트라 공원이 나오고 여러 동상이 서 있는데 리부셰 공주와 그의 남편이 프라하를 향해 바라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공주가 '저 곳에 가면 밭을 일구는 농부가 있을테니 그곳에 성을 지으면 흥하리라' 는 예언을 했는데, 정말 그 곳에 지은 것이 오늘날의 프라하 성이라 한다. 프라하 성을 탄생시킨 공주는 프라하를 향해 손을 높이 들고 있다.
블타바 강이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아슬하게 지은 공주의 목욕탕이 돌출되어 있었다. 긴 물살을 잇고 흐르는 블타바 강과 아름다운 프라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비셰흐라트 옛 성이다.
프라하의 옛성 비셰흐라트 공원 리부셰 공주 부부의 동상.저 곳에 성을 지으라고 프라하를 가리키는 모습
* 비셰흐라트 묘지
버스에서 내렸을 때 풀밭 둔덕에 빨간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무덤으로 가는 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따가운 여름 햇살을 머리에 이고 한참을 걸어가니 상상도 못할만큼 수많은 묘비가 진열되어 있었다. 크고 작은 석상과 이름들, 세상의 고운 꽃다발들에 싸여 검은 비석의 주검이 아닌 아름다운 조각작품으로 보여진다.
이곳에는 특히 음악, 미술, 문학가 등 예술인이 많이 묻혀있고 정치가도 있다고 한다. 유명한 작곡가 드보르작에게 바쳐진 정교한 기념비가 높은 단 위에 흉상으로 앉아 있다. 학창시절 배웠던 신세계 교향곡, 그 외 은은한 선율이 잔잔히 흐르듯, 드보르작은 불후의 명작을 작곡해 세상에 선사해 놓고, 지금 무언의 침묵으로 세인을 바라보고 있다. 그 외 골골마다 들어선 검은 대리석 돌비들이 아름다운 천상의 하모니로 호흡하고 있다. 누가 저토록 눈부신 죽음을 슬프다 하리. 걸어도 걸어도 아름다운 길, 고이 잠드소서.
묘지에서 나오니 성 베드로와 성 바울 교회가 쌍탑으로 서서 바라보기조차 아슬한 공간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승화시켜 올리고 있다. 산 자가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지만 내 눈에는 묘지의 순결한 예술인의 혼을 평온하게 다스리는 듯한 첨탑이 더 가까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무 사이로 블타바 강은 묵묵히 흐르고, 성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곳, 프라하에 가거든 꼭 들리라고 권하고 싶다.
프라하 비셰흐라트 묘지 드보르작 기념비 앞에서.수필가인 남편 유기섭님과 함께
* 프라하에서 프랑크푸르트로
땅과 하늘과 햇살과 구름까지도 투명한 아름다움이고, 그리고 그 사이 공간에 보석처럼 들어선 세계문화유산의 산실 프라하를 떠나는 순간이다. 동유럽 4개국 문학탐방에서 마지막에 찾은 나라여서일까. 곱고 고운 추억들이 벌써 가슴을 흔들며 이별의 아쉬움을 잠재우려 한다. 안녕∼ 프라하여! 나는 진실한 손으로 이별을 고했다.
프라하 공항에는 낮 12시경 도착했다. 14:15분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서다. PRAHA라고, 영문으로 선명하고 커다란 글자가 프라하 공항 건물 위에 걸려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샀다. 나는 두 아들에게 줄 쵸콜릿 종류를 많이 샀다. 동유럽의 낭만이 배인 달콤하고 부드러운 쵸콜릿을 한국으로 가져가고 싶어서다. 슬로베니아 가이드 여인이 남편보다 좋아한다던 쵸콜릿, 그 말을 떠올리며 샀다.
프랑크푸르트 행 항공 루프트한자 LH3263 비행기를 타고 프라하의 상공에서 독일로 넘어왔다. 상공에서 보는 들녘 풍경은 동유럽 4개국 모두 유사했다. 나무가 많고, 초지의 들녘, 붉은 기와 지붕 물결 등등이다.
프랑크푸르트에는 15:25분 도착, 프라하에서 1시간 10분 동안 날아온 것이다. 드넓은 프랑크푸르트 공항 활주로 주변엔 여전히 짙푸른 상록 침엽수림이 외인을 반기고 있다.
프라하 공항에서 수필가인 남편 유기섭님과 시인 김윤자(본인)
* 프랑크푸르트 출발
맨 처음 한국에서 슬로베니아 갈 때 내린 공항이라서 좀 친숙하게 다가오는 독일의 공항이다. 비행기에 타려는 사람들은 늘 여유로운 시간으로 움직여야 함에, 우리 일행도 그 범주에서 좀 지루하리만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시간을 보냈다. 공항 내의 기차를 타고 탑승게이트 앞으로 갔다.
인천행 아시아나 항공 OZ542 비행기로, 독일 현지 시간으로 19:00 시에 출발한다. 이미 짐가방은 프라하 공항에서 인천 공항까지 연계시켜 부쳤기 때문에, 이 공항에서는 가볍게 입국수속을 밟았다. 오후 4시경 공항내에의 공중 전화를 찾았다. 한국 시간으로는 밤11시다.
프라하에서는 호텔에서 컬렉트콜 전화를 걸기가 힘들었고, 공중전화도 카드사용만 가능하여 이틀간 한국의 아들에게 전화를 못했기 때문이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독일의 여직원에게 영어로 물었더니 한국 서울로 거는 방법과 공중 전화의 위치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는 호텔 룸에서 한국으로 걸 때 000+82+한국지역번호0를 뺀 한국의 전화번호를 누르면 곧바로 아들과 연결되었는데 이곳 독일의 공중 전화에서는 0800+0800+082+한국지역번호0을 뺀 한국의 전화번호를 눌러야 통화가 가능했다. 이것도 이색 체험이다.
이곳저곳 독일 상가의 물건들을 돌아보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보낸 아름다운 시간들을 가슴 속에 소중히 품고,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 창공에서 본 달과 해
비행기를 탈 때마다 보는 비경은 창공에서 보는 구름이거나 푸른 하늘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특이한 현상을 보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현지시간으로 저녁 7시 정각에 이륙한 비행기가 올 때와 같은 시베리아 평원 상공으로 날고 있었다. 기내석 석식을 하고, 자야 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 비행기 창문 가리개를 모두 내려 기내는 어두웠다.
나의 좌석은 창문 쪽 중앙이었다. 양쪽으로 한 사람씩 있고 나는 그 가운데였다. 호기심 많은 내가 잠이 오겠는가. 하늘이 궁금하고, 구름이 궁금하고, 해는 졌는지... 등등 궁금한 것들로 인하여 조금 눈을 붙여 휴식을 취하고 좌석에서 일어섰다. 비행기 비상통로 쪽에 난 창문가로 갔다. 그곳은 공간이 넓어 사람들이 나와 맨손 체조로 긴장과 몸을 푸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보다는 창문을 열고 싶어서다. 지난 번 유럽으로 갈 때도 이곳 창문에서 시베리아 툰드라 지대를 보았다. 살짝 창문을 열고 창밖 우주 공간과 눈이 마주쳤을 때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둥근 달이 덩그러니 하늘가에 걸쳐있음을 보았다. 하늘은 파랗고, 달은 하얗고, 평면으로는 구름이, 아래로는 희미하게나마 초지의 툰드라 지대가 나의 가슴을 흔들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시야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분명 지금 지구의 마을은 밤인데 창공은 밤이 없다. 하늘이 너무 밝아 해인줄 알았던 저 달, 달무리진 풍경과 진하지 않은 흰빛으로 겨우 구별될 정도였다. 달은 내 눈과 수평으로 있다. 10km 정도의 지표 위에 뜬 비행기 고도가 달과의 위치를 수평으로 놓은 것이다. 시속 900km 전후로 날아가는 비행기인데 달과 비행기는 정지된 공간에서 만난 듯 위치변동이 없다. 달려도 달려도 날개 위 돌출된 구멍이 뚫린 비행기 부품 곁에서 달은 계속 머무르고 있다. 창공의 달은 눈물겹도록 시리고 아름답다.
또 하나, 나는 맞은 편 하늘이 궁금했다. 달이 보이는 창문 맞은 편으로 가서 창문을 열었을 때 엄청난 비경이 나의 눈을 의심케 했다. 저녁 노을은 아니겠고, 동트는 아침의 새벽 붉은 빛이 수평선 끝에 쫙 깔려 있다. 저렇게 짙은 색깔의 붉은 빛은 본 적이 없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만난 끝점에서 놀라운 우주의 비경을 만난다.
좌측엔 해가, 우측엔 달이, 그들이 만들어낸 우주 공간의 비경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밤이 없이 넘어가는 비행기, 지구의 자전속도보다 빠름에 이런 형상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나 나름대로 해석했다.
한참을 양쪽 창문으로 관찰하다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잠시 눈을 감고 잔 후 창문을 여니, 어느새 태양은 비행기 위로 솟아 눈부신 낮이었다. 그 순수한 빛은 모든 것을 마비시키고 창가로 날아 들어왔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하는 투명함에 다시 창문을 닫아야 했다. 이제 아시아나 항공은 종착지와 인천에 가까워지고 있다.
창공에서 본 달
창공에서 본 해돋이
* 인천 공항 도착
프랑크푸르트에서 저녁에 탄 비행기가 어스름 밤을 잠시 거치고 밝은 대낮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12시간을 날아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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