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스멀스멀 산그림자가 계곡을 타고 내려올 적에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 보셨는지요. 적막감마저 드는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 보면, 힘없이 떨어지는 석양의 햇살도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발밑에서 나뒹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적이 끊겨버린 적막함, 어쩌면 그건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른다.
털어버린다는 것, 비운다는 것, 그건 허무이며 무상이고, 어쩌면 애끓는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이맘때가 되면 봉정사로 오르는 산골짜기에 저녁노을이 내릴 때면 나는 왠지 모를 허전함에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과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묘하게 대비되는 순간, 그건 화려하게 물든 단풍잎보다 더 처연한 그리움으로 내 가슴을 파고든다.
창암정사蒼巖亭舍와 명옥대鳴玉臺는 봉정사를 찾을 때마다 애틋한 그리움으로 찾는 이의 발길을 끈다. 퇴계선생이 봉정사에 머물며 학문을 닦을 때, 이곳에 내려와 소요했던 곳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즐겨 찾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명옥대를 스치듯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세상 시름을 다 떨쳐내어 주기에 운수행각雲水行脚하는 마음으로 자주 찾게 되는 곳이다.
창암정사, 뒤에 보이는 바위는 명옥대이고 그 위로 난 길은 봉정사로 오르는 길이다.
명옥대와 창암정사를 건축하게 된 것은 이이송(李爾松)의 『개곡집(開谷集)』에 실려 있는 ‘봉정사 명옥대 창건시 통문鳳停寺鳴玉臺刱建時通文’에 잘 드러나 있다.
“봉정사는 안동부 감영의 서북쪽 30리에 있다. 이곳은 퇴계 이황 선생께서 젊었을 때 일찍이 독서하고 도를 강론하던 곳이다. 절 앞에는 폭포가 있어 가장 아름다운 승경을 펼쳐내고, 물이 몇 길의 층진 바위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까닭에 예전에는 ‘낙수대(落水臺)’라 했는데, 선생께서 그윽함을 사랑하여 ‘명옥(鳴玉)’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육기(陸機)의 “나는 샘이 옥을 씻겨 주네[飛泉漱鳴玉]”란 시어에서 취한 것이다. 명종 21년(1566년)에 선생께서 나라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중간에 병으로 사양하고 이 절에 며칠간 머물며 조정의 명을 기다렸다. 그 사이 날마다 문인들과 명옥대에 임하여 느낌을 읊으셨으니, 절구 두 수가 지금까지도 향기를 뿜으니, 마치 무엇이 존재하는 듯하다. 다만 옛 대가 황폐해져 무성한 초목에 묻혔으니,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선생의 유작도 절에 걸려 있으니, 오래전부터 고을의 어르신들께서 대 옆에 암자를 지어 추모하는 곳으로 삼을 것을 생각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지금 우리들이 그 일을 뒤따라 이루고자 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하고 추앙하는 것을 그치지 않게 한다. 그러나 연이어 흉년이 들어 물품과 비용을 대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주관할 사람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마침 절의 승僧 보명普明이 일을 주관할 것을 자원하였으니 이는 우연이 아니다. 이에 승려에게 주관할 것을 명하고 이것으로 감히 고한다. 엎드려 생각건대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즐거이 들으실 것으로 생각하고 각자 조금씩 내어 그 역사를 도와 선현이 왕래하던 곳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바이다.”
명옥대에서 바라본 창암정사
또 미수 허목이 지은 명옥대 기문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주변 경관도 잘 묘사되어 있다. “신라 고찰인 봉정사 입구에 샘물과 돌이 매우 기이하니, 안장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솟아올라 절벽이 되었고, 그 위는 평평하여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절벽의 끝에는 다시 점점 낮아져 지면으로 펼쳐지다 계곡물에 끊겼다. 그 모양은 갑자기 일어섰다 갑자기 엎드렸고, 혹은 가로 혹은 세로로 굴곡져 골짜기가 되어 마치 계곡물이 움푹 파 놓아 이루어진 것 같다. 그 색은 희고 맑아 옥수玉水가 흘러든 것 같고, 가운데는 휘감기고 소용돌이치며 콸콸 소리 내고 떨어져 몇 길의 폭포가 되니 가장 기이한 경치이다.”고 적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의 『퇴계집退溪集』에 실린 명옥대에 대한 기록을 옮겨 적은 편액이 걸려 있다.
퇴계는 나이 16세에 사촌 동생인 수령과 권민의, 강한과 함께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3개월 정도 공부했다. 이때 가끔 절 입구에 있는 명옥대에 내려와 소요했다. 이황 선생의 『퇴계집退溪集』에 실린 명옥대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臺舊名洛水今取陸士衡詩飛泉漱鳴玉之語改之
대의 옛 이름은 ‘낙수’인데 육사형의 시‘飛泉漱鳴玉
(비천수명옥 ;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내리네)’의 시구에서 취하여 명옥대로 고쳤다.
寺之洞門有奇巖數層, 高可數丈, 水從上瀉下, 最爲一境佳處, 往在丙子春, 余與從弟壽苓, 棲寺讀書, 屢游於此, 貢生權敏義姜翰從之, 旣去無因再來, 而吾弟不幸早世, 權姜二生, 死亦已久, 余今旅因之餘, 踽踽獨來, 撫事興懷, 寧不慨然.詩云
봉정사 동문에 두어 층 기이한 바위가 있어 높이는 두어 길이나 되고, 물은 위에서 내리쏟아져 매우 아름다운 경계를 이루었다. 지난 병자년(1515) 봄에 나는 사촌 동생 수령과 함께 절에 머물며 글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아 놀았다. 공생 권민의와 강한이 따라왔다가 돌아간 뒤에 다시금 오지 못했다. 사촌 동생도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친구들도 세상을 버린 지 오래되었다. 내 이제 나그네로 지친 나머지 홀로 와서 옛일을 추억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시를 지어 그 심경을 적는다.
此地經遊五十年 오십 년 전 그 어느 날 이곳에 와서 놀 제
韶顔春醉百花前 온갖 꽃 그 앞에서 봄빛에 취했더니
只今携手人何處 손잡고 함께 온 사람 이젠 어디 갔단 말고
依舊蒼巖白水懸 푸른 바위 흰 폭포만 예와 다름이 없을 뿐일세.
白水蒼巖境益奇 푸른 바위 흰 물굽이 그 경계가 기이하거늘
無人來賞澗林悲 구경 손님 가고 나면 시내와 숲도 슬퍼하리라
他年好事如相問 다른 때 호사자가 와서 묻거든
爲報溪翁坐詠時 일찍이 계옹이 시 읊었다 일러다오
右二絶卽退陶先生原韻而舊板以先生手筆始揭於顯廟丙午失於四甲丙寅後十六年辛巳四月日追刻
이 시는 선생께서 66세(1566년) 정월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가시다가 죽령竹嶺 고개에 얼음이 얼어 풍기에서 새재鳥嶺로 가기 위해 예천까지 갔지만 병이 더하여 학가산 광흥사에 머물러 계시다가 봉정사에 옮겨 계시면서 지은 시이다. 앞의 절(絶)은 소년 시절(16세)에 봉정사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회상하셨고 뒤의 절(絶)은 원시에 제목이 ‘出山題鳴玉臺’ 이므로 산을 떠나며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을 예상하고 지은 시이다. 옛 시판은 선생의 친필로 현종 병오(1666)년에 처음으로 걸었던 것인데, 네 갑자가 지난 병인년(1926)에 잃어버려서 16년 뒤 신사년(1941) 4월에 다시 새겨 걸었다. (原詩 : 陶山全書 內集 四卷)
정사의 당호를 ‘창암(蒼巖)’이라 한 것은 ‘이끼 낀 푸른 바위’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당시에도 바위 한 곳은 푸른 이끼가 끼어 운치를 더했던 것 같다. 퇴계의 시는 계곡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바위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계곡물의 형상과 소리’가 이 경관의 주제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이 주제에 집중하여 단순히 물 떨어지는 바위인 ‘낙수대’의 ‘소리’에 취한다. 소리를 가슴으로 새겨듣는 귀는 ‘바위’를 ‘옥玉’으로 치환할 수 있었고, 시끄럽게 떨어지는 물소리를 ‘옥돌 울리는 소리’로 들을 수 있었으니 ‘낙수대’를 ‘명옥대’로 바꾸어 부른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667년 처음 창암정사로 세워질 때의 형태는 방 1칸, 누각 2칸의 3칸 건물이었으며 이 건물 뒤에 3칸의 승사(僧舍)를 지어 승려들이 상주하며 창암정사를 관리했다는 기록이 보이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현재의 건물은 자연석의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운 정면 2칸, 측면 2칸에 사면으로 계자난간을 둘렀고 사면을 모두 개방하여 주변의 경관을 두루 볼 수 있게 한 것은 당시의 건물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도 1920년 고쳐 지었다.
기록에는 방 1칸, 누각 2칸의 건물(창암정사), 3칸의 방으로 된 승사, 동쪽으로 건너는 계곡 위의 수각(水閣)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명옥대의 내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명옥대 한편에 자리 잡은 정자도 이 경관의 중심 주제인 ‘폭포수의 소리와 모양’을 듣고 보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주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의 감흥’에 초점이 있지만, 명옥대의 정자는 오히려 ‘청각의 감흥’이 더듬이가 되어 시각의 감흥을 끌어들이는 곳이다. 이 청각의 정자는 명칭에서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 이 청각의 정자에서 시각을 사로잡을 전경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전경에 사로잡히면 청각의 감흥으로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퇴계의 자취를 찾는다면, 전경을 보거나 정자의 글을 읽을 게 아니라 푸른 이끼가 낀 바위 곁에서 폭포수 소리를 듣고 그것이 옥돌 울리는 소리로 들을 만큼의 열린 가슴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퇴계가 진실로 바라는 것이 아닐까?
명옥대와 명옥대에 새겨진 바위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