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 암·중풍·관절염 등 수많은 환자 생명 살려 의술의 대가는 덕담 한 마디 들려주는 것 20살 무렵 장안사에서 이보법으로 의술 통달 일제시대 때엔 독립운동가로 공적 세우기도
고산준령(高山埈嶺)이 첩첩이 싸인 1월의 태백산맥. 그 너머 외딴골 울진 찾아가는 길은 한겨울의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험한 산을 넘기에는 버스도 힘에 부쳤을까. 허름한 여인숙의 불빛만 가물거리는 산골에서 발이 묶였다. 마을은 고립되고 산악의 휑한 바람은 휘몰아치고……. 울진은 그렇게 어렵사리 찾아갈 수 있었다. 그곳 에서 만난 최창웅(崔昌雄 취재 당시 93세) 옹은 이 시대의 이인이요 기인이었다. 어릴 적 한학과 의술을 무불통달(無不通達)하고, 성인이 돼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일이라든지, 광복 후에 첩 첩산중 울진에 은거햐며 젊은 시절 터득한 독특한 의술로 암을 비롯해 고혈압·당뇨·중풍·신경병 등 각종 난 치병에 걸려 찾아오는 병자를 귀신같이 고쳐 내는 일이라든지, 최 옹에게는 기이하고 별난 데가 많았다. 여기에 억만금을 주고도 못 고칠 죽을 병을 치료해 주고 받는 대가(?)로 환자들에게 도(道)에 대한 말이나 덕담을 들려 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모습은 기인의 풍모를 더해 주었다. 이에 걸맞게 최 옹에 대한 세인의 평가와 별호(別號) 도 '신침' '도인' '도사' '명의' '상투쟁이 영감' '숨어사는 기인' 등 다양하였다. 최 옹을 처음 마주 한 느낌은 이웃집 할아버지의 따스함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상투를 틀고 하얀 수염 을 날리는 모습, 아흔 넘은 노인답지 않은 꼿꼿한 자세, 당당한 체구, 건강이 넘치는 혈색, 고른 치아, 카랑카랑 한 목소리, 형형한 눈빛 등 예사롭지 않은 노인의 모습이 번뜩이었다. 최 옹의 집은 울진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깔끔하게 단장된 양옥집. 그곳의 서너 평쯤 된 사랑방에는 대여섯 명의 환자로 가득 차 있었다. 암을 비롯한 각종 난치병을 치료해 내는 최 옹의 의술은 이날 연이어 찾아오는 환자들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생명의 은인을 대하듯이 최 옹에게 정중하게 큰절을 한 김인환(취재 당시 35세, 경북 울진군) 씨와 이 정임 씨 부부는 최 옹에게 치료 받고 죽을 병을 고친 사연을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필자와의 대화 내용을 간략 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디가 아파 오셨습니까?" "저는 별로 아픈 데 없고 집사람이 폐암으로 죽을 고생했죠. 암으로 판정받고 병원에 다녔는데, 3주 만에 가 망이 없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보기에 건강한 것 같은데……." "처음에 할아버지한테 올 때는 죽은 사람 한 가지였어요. 집 앞에 차를 대놓고, 떠메고 들어왔어요. 한 석 달 간 침을 맞고 화제 적어 준 대로 약을 썼는데, 점차 복수가 빠지고 나중에 죽은 피가 오줌으로 엄청나게 쏟 아져 나왔어요. 그러더니 숨이 편하다는 거라요. 할아버지가 생명의 은인이지요." 최 옹의 치료를 받고 암을 고쳤다는 말은 뒤이어 도착한 강영수(취재 당시 53세 남자, 부산시 동래구) 씨에 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강씨는 최 옹으로부터 간암과 백혈병을 고친 장본인. "작년에 부산 모 양방병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고 항암제다 방사선이다 해서 다섯 달 간 치료를 받았어요. 그런데 치료는 안 되고 오히려 나중엔 백혈병까지 얻었어요. 병은 못 고치고 가산은 탕진하고 낙담해서 집에 와 있는데, 동네사람이 문병 와서 말하길 '울진에 있는 할배 찾아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못 고친다' 하는 거라요." 그래서 그는 최 옹을 찾아와 진맥을 받았는데, 갈비 속의 피주머니가 고름으로 변해 입으로 올라오면 죽고 침을 놔 피주머니가 다섯 푼만 떨어지면 산다는 말을 들었다. 그뒤 침으로 한 보름 다스리니 다행히도 피주머니 가 다섯 푼 가량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최 옹이 화제(和劑)를 써 주기에 그대로 약을 지어 먹었다. 그걸 먹 고 나니 피주머니가 터져서 오줌으로 하혈하기 시작했다. 이웃 사람들은 그걸 보고는 남자가 하혈하면 죽는다고 말을 하였다. 너무 무서워 최 옹에게 다시 찾아와 이야기하니, "이제는 살았으니 안심하고 온천에 가서 목욕이나 하라"고 했다. "할아버지 이야기인 즉 뜨슨 기운을 온몸에 돌려 주고, 다음날 점심때쯤 오줌 싸 보면 본색이 나온다는 거 라요. 실제로 그 다음날 오줌을 싸보니 본색이 나오는 거라요. 그래서 '아하 이 할배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다'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한 번은 온천욕하던 중 허리가 뜨끔하더니, 주저앉은 채 움직일 수 없는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겨우 울진에 실려 와 침을 맞았는데, 간에 맺혔던 사혈이 뒷허리 골각에 맺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침을 찌 르니, 핏물이 물 나오듯이 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빠지고 나니 아픈 것도 덜 하고 이젠 다 나은 것 같다고 한다. 암이라면 전 세계 의학계가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병인데, 그 어려운 병을 척척 고친다니 놀라지 않 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암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최 옹의 침술을 받고 중풍·신경통·관절 염 등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당연한 이야기로 들렸다. 사실 이런 병만 해도 그 어딜 가나 제대로 고치는 곳을 찾 기 힘든 난치병이 아니던가.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차 포항에서 왔다는 한금애(취재 당시 63세 여자)씨는 지난 한 달 간 침을 맞으러 다 니면서 최 옹의 침을 맞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낫는 것도 여럿 보았다고 한다. 자신도 지난 십여 년 간 다리 통증이 심했는데, 침을 맞은 뒤로 통증이 덜하고 무릎에 톡 불거져 나온 혹도 가라앉았다고 한다. 울진 에 사는 이순인(취재 당시 53세 여자) 씨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지난 수 년 간 외지 병원으로 전전하며 낫지 못 했던 신경통을 최 옹의 침을 맞고 간단히 나았다고 들려주었다. 이렇게 돈을 싸 짊어지고 병원을 찾아가도 못 고칠 병을 고치고 환자가 지불하는 대가는 고작 정중한 인사 정도. 그곳에서 앉아 20여 명의 환자를 지켜 본 결과, 두 명의 환자만이 담배 사 피우라고 3천원과 2천원을 놓 고 갔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최 옹의 며느리 이수희 씨는 집에 찾아오는 환자는 시골의 가난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암 등을 병원에서 고치려다 못 고치고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것을 최 옹이 안타깝게 생각하 고 환자에게 일절 대가를 바라는 것 없이 "다 낫거들랑 한 번 찾아오라"고 하는 정도가 고작이라고 말한다. 환자 들 또한 최 옹의 생신이나 명절 때 찾아와 인사하는 게 고작이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날 어느 누구도 쉽게 고치지 못하는 '죽음의 병'인 암까지 치료해내는 최 옹의 의술 실체는 무엇일까. 최 옹은 여러 가지로 궁금해 하는 필자에게 의술은 간단히 설명할 게 못되고, 옛날 이야기 듣 고 가는 셈치라며 하나하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암이나 여러 어려운 병을 어떻게 해서 고쳐 냅니까?- "그건 이보법(利步法 또는 耳報法)이지. 진맥도 이보법에서 나가고 침도, 약도 이보법에서 나가지." -이보법이란 무엇입니까. - "이보법이란 쉽게 말해 정신통일법이지. '천지조화태을경 일월성신조화정(天地造化太乙經 日月星神造化定)'이 라고 독송하면서 한껏 정신을 모으는 거지. 마음·정신·간담·지혜 이 네 가지를 한 데 묶어 완전 정신통일을 이루면 머리가 환하게 열리고, 스스로 머리 속에서 생각치도 않은 게 튀어 나오고 그러지. 이건 말로는 쉽지 천 번 만 번 어려운 일이야. 우리 증조부도 국의(國醫)를 지냈지만, 예전에 국의들은 이보법을 배워 가지고 왕의 병 을 보고 했거든. 손목에다 실을 매어 가지고 방안에 있는 병자가 무슨 병인지 알아냈어," 최 옹은 자신이 말한 14자의 경문(經文)은 태을주(太乙主)라 하는데,우주와 통하는 경문이라 한다. 따라서 남 녀노소 할 것 없이 아무 곳에서나 태을주를 독송하면서 정신수양을 하면 나라의 큰 재난도 막을 수 있고, 앞으 로 일어날 일도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이런 철학의 힘으로 난리를 막은 이들도 많았 다고 한다. -이보법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습니까?- "이보법은 8문법에 나와 있으니 제갈 선생의 비법이지. 이보법은 소축법(小縮法)인데, 그걸 통하면 의술로 들어가지. 칠성보법(七星步法)은 대축법(大縮法)인데, 축지(縮地)하는 법이지." -이보법은 언제 터득하셨습니까?- "나는 열아홉 살에 금상산 장안사에 들어가서 팔 년 동안 있었어. 그 때 의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지. 당시 는 일제 때여서 사람들을 모여 있지 못하게 했어. 장안사에서 불교대학이라고 간판을 내걸고 학도를 모집했는데 그 때 들어갔지. 당시 의술을 가르치던 송필수 선생이 '뭐든지 머리 속에 들어있다. 다 머리 속에서 나오니 알려 거든 깨달아라'라고 하면서 말씀해 주신 게 이보법이지." -송필수 선생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송 선생은 내가 들어갈 당시 82살 잡수셨어. 22 살에 장안사 들어와서 그 자리에 계신 어른이라. 몸 체격은 얼마 안 됐는데, 눈이 호안(虎眼)이고 수염이 길어 바람이 불면 어깨 너머로 훌훌 날려. 그 선생은 특별한 가르 침 없이 일체 자생자각(自生自覺)하라 했어. 내 호(號)도 그 선생이 지어 주신 거지." (참고로 최 옹의 호는 晩悟 이다.) -이보법을 어떻게 완성하셨습니까?- '"이보법을 터득하는 건 독송과 자기 노력뿐이지 다른 게 없어. 주위에 있는 모든 게 마(魔)라. 조용한 암자 나 토굴에 찾아 들어가야지. 처음 백일 공을 들였는데 실패했어. 두 번째도 실패했고. 두 번째 하고 가만히 생각 하니 정신에 뭐가 돌고 있긴 있는데,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 세 번째는 고성 장터에 가서 극약을 사 가지고 몸 에 지녔어. 만약 세 번째 실패하면 아무 쓸모도 없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심으로 들어갔지. 세 번째는 자리 를 유점사 쪽에서 금강산 옥녀봉 쪽 여덟 아름 되는 큰 소나무가 있는 넙적바위로 옮겼어. 그래 거기서 백 일을 지냈는데 어느 순간에 세상이 '휘떡' 뒤집어져 버리는 거라. 그리고 갑자기 모든 세상이 환히 들어오게 되니까 그제사 깨달았지. '아하, 이래서 선생님의 특별한 가르침이 없었던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 그건 말이 필요없어. 그건 직접 해봐야 알아.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말 이보법은 어려운 일이라. 예전에 선학(仙學) 공부하다가 병 신된 사람 많았지. 콧물 질질 흘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리 되어 버려. 깔아지면 정신이 귀신 돼 버리는 거라. 그때 나만 이보법했지 다른 사람은 힘들고 안 되니까 포기했어." 최 옹은 당시 이보법을 깨치고 나자 스승인 송필수 스님이 <대설천기(大洩天機)>라는 책을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그 책은 우주의 비밀을 기록한 비서(秘書)로, 천기가 흩어지고 몰리는 이치가 적혀 있었다. 그는 다른 책은 다 버렸지만, 이 책만은 소중히 지니고 있다고 한다. 최 옹은 이 비서의 내용을 거침없이 설명하였으나, 내용이 난해하여 생략한다. -이보법으로 정신통일이 되면 의술뿐만 아니라 다른 술법으로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그게 아녀. 이보법을 해서 의술을 하겠다고 했으면 의술로만 나가야지, 다른 건 바라지 말아야 돼. 욕심이 많으면 병신 된다고. 그건 영(靈)이 통해서 그리 된 거지." -영이 통하게 되면 세상을 보는 게 많이 앞서 갈 것 같은데…….- "그걸 내가 이야기하면 내 이야기가 뭐가 뭔지 못 알아들어. 물체가 있을 것 같으면 눈으로 보여 줘 안다지 만 물체가 없는 이야기는 해봤던들 웃음거리라." 최 옹은 세상 일을 미리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하였다. -통령한 의원 환자가 오기 전에 오늘 어떤 환자가 올 거라고 안다던데요.- "철학을 가지고 얘기하려면 직접 그 길에 들어서 봐야 알지 남이 한 것을 알려고 애쓸 것 없어. 애써 봐야 안 되는 거라. 만약 김 기자도 정신통일 해 가지고 뭐를 알게 되면 친구가 와서 물어도 얘기 안 하게 될 거야. 자연적으로 아야기하기 싫어지고 해봤던들 상대방에겐 헛소리라. 상대가 영을 통해서 같이 알아야 되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죽 꿰봐야 소용없는 거라. 그리고 자기 자신도 벌 받을 짓 하기 싫고." -의술공부를 위해 이보법을 한 것 외에 의서를 보기도 했습니까?- "의술은 이보법 공부가 제일이지 뭐 다른 게 있나. 한 가지 결론을 내고 나니 <방약합편.> <동의보감> <소문 영추> 같은 것들은 아무 필요도 없고 도움이 될 게 없어. 완전 통해서 보니 거짓말하듯 환하니 그저 내가 한 그 것만 가지면 그뿐이지. 그때도 스승이 우리에게 이르길 '정신을 통해라 책이 무슨 필요 있느냐. 정신을 통해 가 지고 알아 버린 뒤에는 책이고 뭐이고 이야기할 게 없다'고 했어." -이보법만으로 의술을 다 터득했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데요.- "그건 직접 해봐야 알지 그러지 않곤 모르지. 공부해 가지고 성공을 해봐야 '아하, 이러니까 나한테 이야기 못했던가 보다' 하고 알지. 그건 이야기로 안 돼.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십승지지가 한국 땅 어디에 있을까? 그건 바로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거라. 철학도인(哲學道人) 산중객(山中客)이라 했는데, 실제로 철학도인은 산중에 있는 게 아니고 바로 머리 속에 있는 게지. 그리고 의서를 펴놓고 의술하려면 어려워서 못해. 달통하면 거침없이 의술을 할 수 있어." 참으로 알 듯 말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있는데, 최 옹은 장안사에 있을 당시에 이 보법으로 우주도(宇宙圖)를 완성했다며 보여 주었다. 이 우주도에 대한 설명도 있었으나, 내용이 복잡하므로 여 기에 옮기는 건 생략한다. -이보법을 통해 침과 약으로 암이나 어려운 병이 낫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모든 병의 원인은 혈적(血積)이라. 신경줄에 죽은 피가 맺혀서 그리되는 거지. 그걸 풀어주면 되는 거라. 그래서 내 침법은 활혈침(活血針)이라 할 수 있지. 약도 마찬가지고." -활혈침은 오행의 원리와도 관련이 있나요.- "오행의 원리와도 관계는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의술은 진맥이 주장이지. 진맥을 통해 병이 든 데 를 정확히 찾아내 거기에 맞게 침을 놓고 약을 쓰면 되는 거지." -진맥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이보법을 하면 환자의 병을 정확히 알 수 있지. 옛날 국의들은 왕의 팔에 실을 묶고서도 병을 알아냈는데, 지금은 직접 진맥하니 더 쉽다 할 수 있지. 죽은 피가 신경선에 맺히면 신경이 통하는 게 끊어져 병이 되고, 또 병은 신경선을 따라 퍼지거든. 진맥법은 바로 죽은 피가 맺혀 있는 신경선을 찾아내는 것이지. 진맥하는 것도 쉽 게 설명할 순 없어." 그러면서 최 옹은 진맥하는 법을 간단하나마 설명해 주었다. 요점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남자의 경우는 왼쪽 손목의 맥을 짚고, 여자의 경우는 오른쪽 손목의 맥을 짚는다. 손목에 검지·중지 ·약지를 가지런히 댄다. 약지에서는 촌맥(寸脈)을, 중지에서는 관맥(關脈)을, 검지에서는 척맥(尺脈)을 볼 수 있 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로 다시 검지·중지·약지를 나란히 대면 12경맥을 볼 수 있다. 인체는 이 촌맥·관맥 ·척맥·12경맥의 신경선으로 그물마냥 짜여져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맥을 짚어 맥이 뛰는 상태에 따라 탈이 난 신경선을 찾아내는데, 머릿속으로 꿰뚫어 보아야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진맥법이나 침법, 또는 약 쓰는 법에 대해 책을 쓴 게 있습니까.? "다른 건 없고, 단지 약 쓰는 것만 책으로 묶었지." 그러면서 최 옹은 자신이 묶었다는 <약성가총집(藥性歌叢集)>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각 장부와 병별로 약 쓰는 방법과 처방이 설명되어 있었다. 한편 최 옹은 의술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등 남다른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화제를 돌려 최 옹이 걸어온 행적을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 -장안사 들어가 의술을 배우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아홉 살 먹어 고향 영덕 장유사란 절에 들어가 한문 공부하다 일본 학교로 잡혀 내려갔어. 열세 살에 보통 학교 마치고 다시 장유사 주지를 따라서 청송 주안사, 양산 통도사, 동래 범어사, 합천 해인사로 3년 간 돌아다 니면서 한문 공부했지. 열여섯 살 먹어선 어머니가 허리 펴지 못하고 구부리고 다녀, 좋은 약을 구해 모친 병을 고쳐드릴까 싶어 안동 박 의원 댁에 들어가 석 달 간 약 썰어 주고 있었어. 거기에서 석 달을 지나고 집에 오려 는데, 박 의원이 하는 말이 가다가 왼손으로 뭔 나무든지 한 웅큼 될 만한 게 눈에 띄거들랑 끊어 가지고 가서 약을 하게 되면 낫는다는 거여. 그것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실제로 나무 끊어다 달여서 드리니 모친 허리가 나 아 괜찮은 거여. 그래서 의술을 배워 크게 한 번 해보겠다고 뜻을 품고 있었는데, 집안 종손 어른이 장안 송필수 스님 찾아가 의술을 배우라고 소개시켜 줬지." -독립운동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하셨습니까?- "장안사에서 스물일곱 살에 나와 그때부터 독립운동을 했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장안사에서 무술이나 의술을 배우던 학도가 3백83명 있었는데, 절에서 나올 적엔 모두 독립운동에 기울어 졌지. 그리고 내가 최초에 독립운동을 한 건 선친이 독립운동을 하셨거든. 선친이 기미년 독립만세 때 앞장을 서 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가 고문을 많이 받았어. 사람들이 집에 업고 온 걸 똑똑히 보았는데 뒷 등이 기왓장 엎어 놓은 것마냥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어. 이 어른이 고생하다 나중에 돌아가실 땐 방바닥에 피가 흥건했어. 그게 원한이 없을 수 없지." -주로 어디에서 활동하셨나요?- "나는 주로 부산과 길림성으로 비밀 서류를 가지고 다니면서 지하운동을 했어. 안희제 선생이 부산에 백산 서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속으론 독립운동을 열심히 한 분이라. 다 떨어진 시커먼 자루에 비밀서류룰 넣어 놓곤 했는데, 지게 하나 짊어지고 거기에 일하러 다니는 사람 모양으로 들어가 다른 것 만지는 척하면서 그걸 가지고 나왔어. 그리곤 대나무 지팡이를 반으로 쪼개 속은 훑어 버리고 서류를 똘똘 말아 넣은 다음, 아교풀로 다시 붙 여 지팡이처럼 짚고 만주 길림성 본부로 갖다 주곤 했지." 최 옹은 독립운동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삼추기 위해 이름도 바꿨다고 한다. 최 옹의 초명(初名)은 순창(順昌) 이다. -당시 길림성 본부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길림성 본부에서 나하고 연락하는 사람으로 윤세복 씨가 계셨어. 다른 사람들도 많았지만, 내가 워낙 지하 운동을 하고 다니니 전부 모르고 지냈지.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그저 드나드는 사람으로 생 각했지. 윤세복 씨는 해방 후 계룡산 백암면에 계시다 돌아가셨지. 내가 장사까지 지내 줬지." -비밀 서류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요?- "일본 사람들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지. 당시 부산엔 일본군 군수 창고가 있었는데, 그곳에 우리 공작원 두 명이 들어가 있었지. 그래 그곳의 상황이라든지 그런 거였지." -독립운동하며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건가요?- "병자·정축년(1936~1937)에 만주 목단강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했는데 그게 기억에 남지. 또 신의주에서 경 찰에 붙잡혀 가 죽도록 고문당하기도 했어 삼오장을 들이대 가지고 쥐어 트는데 어깨·손톱 다 빠지고, 뼈가 삐 적삐적 내 비칠 정도였어. 근데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항복 안 하거든. 나중에 신의주 경찰서에서 나올 때 일본 경찰서장이 '저거 풀어 줘도 나가면 죽는다'고 그랬지. 리어카에 마대 하나 깔고 거기에 누워 나왔어. 그때 욕 많이 봤지. 나와 있으니 윤세복 씨가 함경남도 심포 앞에 있는 마령도란 섬으로 휴양가라고 그래. 그 섬에서 일 년 반만에 완전히 몸을 회복해 가지고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지. 그때는 목숨을 떼어 놓은거나 다름없어 무서운 게 없었어." 한편 최 옹은 김구 선생이 불러 북경에 갔었는데, 윤봉길 의사 거사에 같이 갈 수 있겠느냐고 의향을 물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에 지하운동을 통해 해결할 일이 너무 많아 결국 가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그후 최 옹 은 임오·계미년(1942~1943)에 청진·나진·단천 등지에서 다시 일본군과의 격전에 참여했다가, 조여오는 일본의 포위망을 피해 울진 통고산에 숨어있다가 그곳에서 조국 광복을 맞았다고 한다. "그때 윤세복 씨가 뭐라 했냐면, '이제 목숨이 사는 게 목적이라' 그랬거든. 당시 일본 사람들은 사상가라 하 면 막 죽였어. 서울이나 평양, 대구에다 주재소를 차려놓고 마구 잡아 들였어. 일본군을 피하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잘 안되고 겨우 몸만 빠져 나왔지." 지금도 최 옹은 나라가 통일이 안되고 외국과 경쟁하는 마당에 전국민이 새로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 조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인재가 날 것이고,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엔 이인과 기인이 많이 났어. 우리나라에 이인이 많이 나는 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백두산 천지에서 나온 물이 땅속으로 가는 수로가 있는데, 하나는 금강산을 거쳐 죽령으로 나와 지리산으로 통 했고, 또 하나는 황해도 구월산으로 거쳐 계룡산으로 연결되었어. 이 두 줄기가 충청도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라 는 데에서 합쳐져 군산·목포 앞바다를 건너서 한라산으로 갔어. 물이 통해서 나가는 곳은 영(靈)이 통하는 곳이 라. 그런데 백두산에서 용솟음친 물이 한라산에 가서 다시 용솟음쳐 나온단 말여. 그래서 우리 나라에 이인이 많이 났어. 그게 막혔으면 그렇지 않을텐데 양쪽에서 용솟음쳤어. 헌데 우리 나라에 이인이 하도 많이 나니, 임 진왜란 때 중국 이여송이 하고 이여백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산맥의 혈(穴)을 전부 끊어 놓았어. 그후론 그렇게 많이 나던 이인이 끊어져 버렸지. 산맥 요혈(要穴)마다 3백75개 쇠말뚝을 박아 놓았으니, 사람으로 치면 무릎이나 팔뚝에 못을 박아 못 쓰게 만드는 꼴이라. 그러나 요새는 다 녹아 없어지고 수로가 연결이 되고 있어. 일제 때 일본 사람들도 그 짓을 했으나 중요한 혈은 못 찾았고, 말뚝도 사기 말뚝이라 박다가 깨져 그건 큰 해 가 없어. 그러니 내가 앞으로 인재가 난다고 이야기하는 거지. 정치고 사람이고 간에 철학을 가미해 가지고 정신 수양을 하면 잡티 거리가 없어져." 최 옹은 국민들이 항상 올바른 길을 생각하고, 생활하면서 정신수도하면 태양보다 밝은 길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튼 최 옹과 대화하면서 내내 그의 우국정신이 얼마나 가슴 깊은지 느낄 수 있었다. 말을 잠시 돌려 언제부터 환자들을 고쳐 주기 시작했고, 용하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물어 보았다. "내가 고생한 건 말로 아 할 수 없지. 집을 버리고 돌아다녔으니 나라는 찾았으나, 집이 있나 절이 있나. 애 들을 공부시키지도 못하고, 돈이 없어 솔껍질 벗겨서 요식을 삼고 그랬지. 그래서 할 게 뭐 있나. 배운 게 의술 이니까, 상주에다 한약방 차렸지. 거기서 있으면서 중한 병 많이 고쳐주고, 서울이고 어디고 간에 온 병자가 밤 에 잠을 못 잘 정도로 끓었어. 그러나 그때 약 지어 주고 돈 달라 한 적 없었어. 돈 욕심 낸 적도 없고. 그러니 내가 해 나온 것은 허위 장난이라. 돈 벌어 놓은 것도 없고 항상 빈 주먹이거든. 이렇게 앉아서 주먹 쥐고 있다 가 밖에 나가 손 펴 버리면 그만인 거라. 그리고 약방도 오래 안 했어. 침만 가지고도 병을 고칠 수 있으니 번잡 하게 약방 차릴 것 없다 싶어 집에 들어 앉았지." 이상과 같은 최 옹의 행적에 대해 삼남 지방 독립운동가 5백여 명을 수록한 <삼남경행인사록(三南景行人士 錄)> (삼화문화사 1973년 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최 옹은 신라 6부 공신으로 유명한 경주 최씨이다. 시조 고운 선생의 39세손이다. 종조부 수주는 의술이 지고하여 국의를 지냈고 부(父) 순하(舜河)는 한학이 지고한 군자로, 기미년 독립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하다 전사 하였다. 만오(晩悟) 선생은 한학을 18년 간 전수하여 사서오경을 무불통달한 학자로, 약관 27세에 부친의 행의 를 본받아 항일투쟁으로 영해를 기점으로 기병전투하며 목단강변에서 일군(日軍) 수천을 멸망시켰다. 그때 독립 군도 사오백 명 전사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신의주에서 일 관헌에게 피첩되어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에 국토통일이 늦은 감을 무한히 통탄하시고 은거, 국력을 배양하려면 건강 제일국이 돼야 한다며 무보수로 구 제창생에 힘쓰고 계시다." 그런데 최 옹은 아직 독립 유공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최 옹의 셋째 아들 병규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님을 독립 유공자 명단에 올리려 하나, 지하 운동을 한 나머지 증거가 없어요. 몸에 고문 당한 흔적이나 생생한 증언은 분명하지만…… 그리고 아버님이 자신의 행적을 내세우고 인정 받으려 하질 않아요." 반면 최 옹에게 돌아온 대가는 무면허 의료행위라는 이유로 침통을 빼앗기는 등의 수난들이었다고 병규씨는 말한다. 상주에 살다 울진에 정착한 건 언제일까. 몇 가지 궁금한 사항을 최 옹에게 더 들어 보았다. "그건 삼십 년도 넘는데 순전히 내 제자 때문이지. 그 사람이 중풍에 걸려 다 죽게 되었는데, 상주 환자 다 뿌리치고 울진에 와서 3개월만에 살려 냈어. 그걸 보고 '용한 의사' 나섰다고 울진 사람들이 붙잡고 놔주지 않 아 그대로 주저앉았지." -제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 사람 나보다 두 살 위였는데 지금은 죽고 없어. 내가 불영사에 잠시 있을 때였는데, 혈적이 가슴에 붙 어 고생하다가 소문 듣고 찾아왔길래 고쳐 주었어. 그랬더니 내 의술에 감복했던지 제자로 삼아 달라고 그래. 그 사람 체구도 장대하고 힘도 셌는데, 옛날 내 하던 대로 이보법을 알려 주었어. 그래서 산중에 암자 지어 놓고 공 을 들였는데, 접신이 된 것에 놀랐든지 뛰쳐 나왔어. 그대로 두면 큰 해를 받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그만두게 했 어. 결국 의술을 통하지 못했지만 심지는 곧은 사람이었어." -이보법은 귀신 세계와도 통하는 겁니까?- "귀신에 대한 건 비밀이지. 비밀이란 건 완전히 지켜져야 해. 잘못 폭로하면 큰일 나지." 그러면서 최 옹은 은자무언(隱者無言) 은자불행(隱者不行) 은자무명(隱者無名)이라며 입을 다문다. 독특한 의술을 깨치고 독특한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최창웅 옹. 그의 세계에 세속에 찌든 머리로 뛰어든 다는 것은 한 자밖에 안 되는 가슴으로 거대한 산을 품으려는 것과도 같았다. 최 옹과 헤어져 나오는데, 최 옹은 필자에게 글을 한 수 적어 주었다. '천정태산(天定泰山) 심정지신(心定志身).' (큰 산은 하늘이 정해주고 뜻과 몸은 마음이 정해준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창 밖으로 푸른 동해 물결이 굽이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