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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가 조금 지나 잠에서 깨어났다. 미리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감에 소맥 한잔을 마셨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까짓거 가지고. 그렇다면...어젯밤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했다는 말이 맞다.
왜 나는 가끔 남들과 다른 삶의 길에서 방황하는 것일까? 뭔가 차별나게 보여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좋은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걸치고, 폼나는 자동차를 탄다는 호사는 처음부터 나에게선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의 삶은 그 나이들수록 무뎌지는 숙성함이 없다. 평범 그 자체의 일상을 소화해 내는 것도 그랬고, 어설픈 종교 활동에도 내 가슴속엔 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남들은 신의 영역이라며 외면하는 곳에다 시선을 보내며 가슴 아파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어렵고, 힘들게 만들어 내는 삶의 여정이다.
세상에 빚지지도 않았고, 마음의 담보도 없었다고 늘 다짐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진실보단 이벤트를 더 즐겨한다. 정직한 삶은 도덕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버렸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라고 표현되던 맛보기의 세상 인심도 찾아보기도 어렵다. 무질서와 위선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더 이상 영혼이 그곳에 머물 필요도 없고, 동정의 이유도 사라졌다. 그렇다고 실존주의자들 무리처럼 신은 죽었다고 설레발을 치는 일도 빛이 바랜다.
삶은 우리들에게 짐지어진 의무다. 세상이 원망스럽다고, 시간이 무심하다며 그곳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베이스 캠프를 떠난 산악인처럼 뒤돌아설 수 없는 약속이다.
당연히 짊어진 가방의 크기나 가격만 보고 삶의 가치를 판단할 것은 못된다. 내재한 내용들이 운명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가치다.
살다보면 어려움에 처하고 실패한 삶을 살게 된다. 종교에선 좋은 것은 신의 은총이고 잘못은 자신의 부담이나, 민간영역에선 잘못된 건 조상 탓으로 책임 매긴다. 그렇게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투사'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역사의 장에 실리지 못해도, 가문의 영광이 아니어도,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일지언정 보다 제발 '쉽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의 남겨짐은, 이밤 잠에서 깨어 다시 이어가지 못하는 이유이다.
알라의 궁전/송지은
분명히 인기척이었다. 문을 두드린다. 모네 레코! 아니, 여기는 한국이다. 도와주세요! 쾅쾅쾅. 한쪽 귀를 문에 붙이고 사람의 소리를 좇는다. 냉장실 모터 소리뿐이다. 환청이었을까. 기차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종이박스 같은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오금이 꺾이면서 바닥에 무릎을 찧는다. 또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감각이 없다. 두피를 움켜쥔다. 손톱을 세워 박박 긁어본다. 톱질 소리가 난다. 속이 메스껍다. 그대로 눕는다. 졸음이 쏟아진다. 눈을 떠야 한다. 잠이 들면, 끝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아니,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갑자기 내가 왜 냉장실에 갇히게 되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가둔 것일까? 기차 소리다. 눈꺼풀이 저절로 들린다. 기차 바퀴의 철거덕 소리는 순식간에 냉장실 모터 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다시 눈을 감는다. 타르 속 같은 어둠이 내 몸의 모든 구멍으로 흘러든다. 머리를 흔들어 어둠을 털어낸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저체온증에 빠지면 안 된다. 케노, 뚜미 아마께 잘라또? 케노, 케노! 뿌드드드.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냐고 부르짖는 소리를 전기드릴이 분쇄한다. 신축 건물 공사하는 소리가 분명하다. 이 건물 바로 맞은편이다.
제자리 걷기부터 다시 시작한다. 팔을 뻗어 수납장을 잡는다. 수납장이 흔들 하면서 삼각플라스크 병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에 머리가 팽 돈다. 고장 난 문고리를 잡고 간신히 일어선다. 큰소리로 숫자를 세며 걷는다. 에크, 두이, 띤. 무엇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자꾸 넘어진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셋, 소리를 높이지만 백 킬로그램을 넘나드는 몸은 액체를 담은 부대 자루같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머리로 강철 문을 들이받는다. 퍽퍽. 공사 현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내 머리가 터지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아침이 된 것일까? 그렇다면 어제였다. 한 외국인 노동자가 전기드릴로 아스팔트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있는 한국인 옆에서 파편을 쓸어 담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감색 점퍼 뒷면에 맥주 회사 이름과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구부렸던 허리를 펴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쌀나무 알라이꿈! 그도 내가 방글라데시인임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그의 인사를 무시하고 연구동 건물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콧물이 따뜻하다. 아직도 내 몸에 온기가 남아 있다니, 신기하다.
"잠자는 근육을 깨우면 되잖아."
나디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없다. 나디는 어둠 속에 숨어 태평하게 장난을 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요가라도 하라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아랫배가 부풀어 오른다. 들이마신 공기로 횡격막이 늘어날 대로 늘어나고 뱃가죽이 펴질 만큼 펴졌다. 복식호흡이다. 내 몸이 요가를 기억하고 있다니. 5년 전 인도를 떠나 한국으로 오면서 버렸던 단어이다.
"갇혀있다는 생각을 버려, 티푸."
나디는 언제나 저렇게 태연하다.
"생각을 버리면 이 고장 난 냉장실 문이 열리기라도 한다는 거야? 우리는 지금···."
죽음 앞에, 라는 말은 잇고 싶지 않다. 난 죽음이란 단어 자체도 거부한다. 부릅뜬 눈알이 시큰하다.
연잎 향기다. 나디가 연꽃자세로 앉아 깊은숨을 내쉬면 이런 냄새가 난다. 나디는 지금 어둠 속에서 요가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두 발뒤꿈치를 회음부 앞에 나란히 모으고 앉는다. 무릎은커녕 정강이도 제대로 바닥에 닿지 않는다. 양손으로 두 무릎을 세게 누른다. 엉덩이 솔기가 뜯어졌다. 다카 거리에 나뒹구는 시신과 갠지스 강에 떠내려가는 타다 만 시체 곁을 숱하게 지나다니면서도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스물여덟 살, 네 평 남짓 되는 냉장실 안에서의 이런 죽음은 결코 아니다. 더구나 내 박사학위 논문이 심사 중에 있다. 가슴을 들어 올리며 호흡을 깊게 한다. 들이마신 냉기가 기도를 훑는다.
손과 발로 바닥을 움켜쥐고 엉덩이를 치켜든다. 파카와 남방 밑자락이 아래로 쏠려 얼굴을 덮는다. 맨살이 드러난 아랫배에 도깨비바늘처럼 냉기가 달라붙는다. 내가 요가를 버린 것은 인도에서의 모든 것을 잊고 싶어서였다. 인도로 가면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몸이 떨린다. 피가 아래로 쏠려 머리통이 빠질 것만 같다. 척추는 늘어진 뱃살을 감당하기 버거워 자꾸만 아래로 처진다. 숨구멍을 무엇인가로 틀어막은 것 같다. 콧물이 눈으로 들어가 안구가 쓰라리다. 눈물이 콧물을 씻어낸다. 두 가지 액체가 섞여 이마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이 한 방울의 따뜻함도 아깝다. 어릴 때 살던 집이 생각난다. 지붕도 없었지만 따뜻했다.
냉장실 문이 닫히던 순간이 생각난다. 고장이 난 문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경을 바짝 썼었다. 안에 있는 상태에서 문이 닫히면 열 수가 없다. 발디딤대를 문에 끼우고 냉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두 팔로 묵직한 시약 박스를 끌어안고 있어서 발로 문을 열고 닫아야했다. 한 발로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한 발로는 문틈에 끼워둔 접이식 발디딤대를 빼낼 생각이었다. 문제는 철제문의 무게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문을 발로 밀어내는 순간 발디딤대는 안으로 빠졌고 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운동홧발이 미끄러졌다. 그리고 문이 닫혀 버렸다.
헛웃음이 났다. 악마와의 싸움 일 라운드에서 이긴 기분이었다. 내겐 2G이지만 성능 좋은 휴대폰이 있었다. 들고 있던 시약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지 호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휴대폰에 딸려 잡동사니들이 쏟아졌다. 원룸 키, 반으로 접힌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천 원짜리 두 장, 꼬깃꼬깃한 캐쉬카드 영수증과 로또 한 장. 휴대폰을 놓고 들어왔다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박 대리 번호가 떴다. 유일하게 통화한 사람이 박 대리였다. 수화기 그림이 명암을 달리하며 들썩거리더니 바로 통화권 이탈 표시로 바뀌었다. 까치발을 하고 두 팔을 뻗어 눌러 보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주먹이 냉장실 문으로 날아갔다. 얼음가루 같은 찬바람이 머리카락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나는 바람구멍을 향해 발디딤대를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혔다가 튕겨 나온 발디딤대가 전등을 스치는 순간 유리파편 섞인 어둠이 흙더미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운도그 자세인데 두 다리가 펴지지 않는다. 하이힐을 신은 듯 까치발이 들리고 오금이 접혔다. 무게중심을 발뒤꿈치로 쏠리게 하자 정강이 근육이 찢어질 듯 아프다.
"아픔은 없어. 고통이라고 느끼는 생각만이 존재해."
"나디. 제발 그 개똥철학 좀 집어치울래?"
나의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나디는 웃었을까. 세상엔 화낼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는 자신이 있을 뿐이라고 했던 나디이다. 환경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감정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잘난 체를 했다. 나디가 그런 태도를 보이면 나는 더 화가 났다. 나는 감정이 아니라 환경을 선택한다. 깨진 아스팔트 조각을 쓸어 담으며 추위에 떨어야 하는 환경 대신 스팀이 스물네 시간 가동되는 실험실에서 학위를 위해 공부하는 환경을 선택했다. 나디의 환경을 바꾼 것도 결국 나였다. 그날 밤 내가 나디의 손목을 잡고 그렇게 뛰지 않았다면 나디는 봄베이 빅토리아역 뒷골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몸으로 들어가는 기운과 내 몸에서 나가는 기운에 집중해야 한다. 배꼽을 척추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늑골 사이사이에 공기를 채운다. 여기에 들어온 처음 순간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기억의 연상 작용이 내 의식을 분명하게 해 줄 것이다. 시약 박스를 들고 나는 어디로 가려 했던 것일까. X 모양 뼈마디 위 빨간색 해골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문 바깥쪽 '화기 위험물' 글씨 옆에 붙어 있다. 학번이 가장 늦어 이 냉장실 청소와 시약 박스를 옮기는 일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눈 감고도 들락거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공간이다. 가슴께가 뻐근하다. 전기드릴 소리가 내 머리뼈를 뚫는 소리처럼 가깝다. 저 전기드릴만 있다면 이 냉장실에서 나갈 수 있을 텐데. 나는 기어서 문 쪽으로 간다.
"모네레코! 모네레코! 문 좀 열어주세요!"
죽을힘을 다해 문을 때리지만 공사장 소리가 묻어버린다.
냉장실 안은 문이 있는 쪽을 제외한 세 면이 철제 수납장으로 둘려 있다. 그 가운데에 두 사람이 간신히 드나들며 박스를 옮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종이박스는 모두 여덟 개였다. 그 안의 모든 것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연구용 시약들이었다. 박스에서 내용물을 꺼내 한쪽으로 모았다. 빈 종이박스 접착 부분을 펼쳐서 4장을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누웠다. 나머지 4장으로는 겹겹이 몸을 덮었다. 5분도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냉동인간이 될 것 같았다. 방 열쇠 끝으로 종이박스에 촘촘히 골을 냈다. 그리고는 몸에 둘둘 감았다. 가장 작은 박스 하나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용수 같긴 했지만 코끝을 베는 듯한 찬바람을 막기에는 도움이 됐다. 그 상태로 걸었다. 4평도 안 되는 냉장실 안을 그것도 게걸음으로.
냉장실 안에서는 시간이 제멋대로 흐른다. 참고 참다가 한 시간 이상 흐른 것 같아 확인하면 고작 이 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의식의 시간대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으로 자꾸 나를 끌어다 놓는다. 시계는 네 안에 있어. 그 시계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해. 세상의 시계만 바라보면 너의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거야. 시계를 사 달라는 나에게 아버지 아미르가 한 말이다. 시계를 사 줄 수 없는 아버지의 가난한 변명으로 들렸다. 내 손에 돈을 쥔 첫날 나는 시계를 샀다.
휴대폰 배터리가 빠르게 닳았다. 들어올 때가 밤 열한 시 반이었다. 배터리 표시가 작은 막대 두 개뿐이었다. 플래시라이트를 사용해서인지 15분도 지나지 않아 그나마 한 개가 사라졌다. 피식피식 비어져 나오던 웃음이 거기서 멈췄다. 나머지 막대 한 개가 사라지는 순간 나라는 존재도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만 같았다. 나는 휴대폰 전원을 꺼 놓았다.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눕는다. 양 손바닥으로 겨드랑이 아래 바닥을 짚는다. 발등으로 바닥을 누르면서 상체를 일으킨다. 천적 앞의 뱀처럼 정면을 쏘아본다. 다카 저잣거리에서 피리 소리에 맞춰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코브라를 본 적이 있다. 속이 느글거릴 만큼 정신이 아뜩했지만 눈을 떼지 않았다. 엄마가 손바닥으로 내 두 눈을 가렸다.
"뱀은 지금 아이를 고르고 있어, 티푸. 가장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이의 꿈속으로 오늘 밤 찾아가려는 거야."
어린 나는 몸을 돌려 엄마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 냄새를 맡고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귓불을 세게 잡아당기면서 눈을 부릅뜬다. 보이는 것이 어둠뿐이고 귓불 감각이 사라졌어도 꿈은 아니다.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모터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아도무카스바사나를 하다가 수리야나마스카를 하고 있다. 상관없다. 시간은 많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요가밖에 없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던 방글라데시 사람으로 되돌아온 기분이다.
"아빠. 우리 집에는 왜 지붕이 없어요?"
"그래야 저 위에 계신 분에게 우리의 기도가 더 잘 들리지 않겠니?"
아버지는 웃었다. 앞니가 빠져서 생긴 시커먼 구멍이 가난귀신이 사는 동굴처럼 보였다.
"아빠는 왜 더러운 신발들을 꿰매요?"
"알라께서는 헌신짝을 더 좋아하시거든."
옆에 있던 엄마도 웃었다. 엄마가 웃으면 잇몸과 이가 반반씩 드러났다. 엄마의 이는 어린 나의 것보다 작았다. 그 조그만 이도 가난귀신이 갉아먹어 시컴시컴했다.
가난한 부모의 엉터리 철학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나이는 아홉 살까지였다. 썩고 빠지고 구멍 뚫린 이를 가지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는 부모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일등 한 성적표를 내보여도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일등을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 거니? 이웃과 어울리지 않고 공부만 해서 얻은 지식은 저 헌신짝들보다 쓸모가 없는 거야."
학교도 다녀보지 못했으면서 뭘 안다고 그래?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세상이 학교야. 알라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치지."
아버지가 두 손바닥으로 하늘을 받들며 웃었다. 그날 밤 나는 아버지가 꿰매 놓은 헌 신발들을 모두 공중화장실에 처넣어버렸다. 배움의 끝까지 가는 것이 부모처럼 살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어지럽다. 누군가 나를 뺑뺑이 돌린 듯 핑글핑글 돈다. 목 뒤 근육을 무리하게 수축 이완했나 보다. 공사장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세상에서 공해가 될 만한 소리는 다 모아다 놓은 것 같다. 사람 소리만 없다. 내가 미친다면 추위나 배고픔 때문이 아닐 것이다. 쓰레기 더미 같은 소음 때문일 것 같다. 그래도 냉장실 모터 소리만 들리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팔베개를 하고 엎드린다. 피로감이 대형 프레스처럼 등을 짓누른다. 또다시 졸음이 쏟아진다. 요가를 하면서도 자꾸 잠에 빠져드는 것은 요가자세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 년 만에 하는 요가이기도 하지만 몸무게가 삼십 킬로그램 이상 늘었다.
숟가락을 사용하면서부터 식욕이 조절되지 않았다. 처음엔 한국 식당에서도 손으로 먹었다. 옆 테이블에 있던 손님이 주인을 찾았다. 주인이 나에게 포크를 가져다줬다. 포크를 사용하는 서양인은 되는데 손으로 먹는 중동인은 왜 안 되는 거냐고 따졌다. 나의 영어를 못 알아들은 것인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식당 주인은 경찰을 불렀다. 그 후로도 나는 손으로 먹었다. 그러다가 수저를 사용하기로 한 것은 한국 음식이 손으로 먹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국물 음식이 많은 데다가 뜨겁고 매웠다. 젓가락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나는 숟가락만 사용했다. 입을 그릇 가까이 대고 음식을 입안으로 쓸어 넣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급하게 먹고 많이 먹는 버릇이 저절로 몸에 뱄다. 손끝으로 음식의 질감을 즐기며 먹으면 엄마의 젖꼭지를 주무르며 젖을 빨 때처럼 풍만감과 충족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과식은 죄야. 배고픈 사람의 몫을 훔치는 짓이고 너의 몸이 쉴 수 있는 시간을 빼앗는 거야, 티푸."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어낸 아버지의 군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프다. 배고픔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를 괴롭힌다. 허기증 차원의 괴로움이 아니다. 공포에 가까운 불안과 초조로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나에게 배고픔은 죽음의 암시였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이 하나같이 허기진 배처럼 움푹 패어 있었다. 허기질 때마다 뼈만 앙상한 채 죽어간 부모의 모습이 떠오르고 냄새나는 웅덩이 물을 손 바가지로 퍼마시던 때가 생각났다. 내가 요기가 될 수 없었던 것도 결국 단식 때문이었다. 나는 죽는 연습 같아서 단식 그 자체가 싫었다.
나에게 한국은 먹을 것의 천국이다. 실험실에서 나와 밤 열한 시경 대형마트로 가면 포장 음식들을 반값으로 살 수 있다. 양념치킨, 잡채, 모둠 튀김 같은 것들을 세 개씩 묶어 한 개 값으로 팔 때도 있다. 거의 매일 밤 그런 것들을 사다가 라면과 곁들여 먹었다. 먹다가 남은 것들이 냉장고 안에 쌓였는데도 그 다음 날 다시 사왔다. 냉장고 안은 폭식한 내 뱃속처럼 언제나 꽉 찼다. 상한 음식을 버릴 때마다 움푹 들어간 눈들이 떠올랐지만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뒷목 근육이 찢어질 듯 당긴다. 찐득한 콧물이 코와 바닥을 연결하고 있다. 썩은 음식들을 떠올렸는데도 침이 줄줄 샌다. 냉장고 속 세균이 된 것처럼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던 음식들이 미치도록 먹고 싶다. 뿌드드드. 전기드릴 소리에 내 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이 갑갑하다. 나는 또 팔베개를 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다. 이 자세로 꽤 오래 있었나 보다. 이마가 팔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정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섭씨 4도 냉장실에서는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려 든다. 시간이 더 지나면 정신은 육체에게 사정할 것이다. 제발, 나를 좀 쉬게 해 달라고. 육체는 죽고 의식은 산 상태에서 관속에 갇히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누군가가 내 몸을 뒤집는다.
"나디?"
나디는 시치미를 떼고 다시 어둠 속으로 숨는다. 모든 소음도 사라졌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가래 끓는 소리 같던 냉장실 모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는 모터 소리를 찾는다.
목이 마르다. 혀가 갈라질 듯 타들어 간다. 참아야 한다. 아직 마지막 남은 것을 마셔야 하는 순간이 아니다. 술을 한잔 하고 들어와서인지 갇히면서부터 목이 심하게 말랐다. 삼각플라스크에 담겨있던 세포배양액을 마셔 댔다. 세포배양액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김빠진 맥주에 물을 탄 맛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술 때문인지 배양액 때문인지 크고 작은 볼일을 두 차례나 보아야 했다. 비커나 플라스크에 담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하는 수없이 종이상자를 하나 접어 그 안에다 해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박스가 퍼져버렸다. 그 바람에 다른 상자들마저 못 쓰게 되었다.
"티푸, 모네 레코!"
나디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친다. 나디! 어디 있는 거야? 팔을 휘두르며 나디를 찾는다. 팔을 뻗을 때마다 물건 쏟아지는 소리가 모터 소리를 끊는다. 맨 위 칸에 놓여있던 시약병들이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3차 증류수'라고 적힌 플라스크도 떨어졌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마실 것이었다. 잘 보관해 두겠다고 맨 위 칸에 올려놓았다. 뚜껑이 알루미늄 포일이었으니 바닥에 쏟아진 것이 분명하다. 마실 것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목이 타들어간다. Buffer C 병뚜껑은 플라스틱이었다. 플라스크가 깨지지 않았다면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찾아내야 한다. pH 6.5니까 마실 수 있다. 나는 낮게 엎드려 바닥을 더듬는다. 깨진 유리 조각에 손이 베인 것도 같지만 통증은 없다. 한 줌 걸쭉한 것이 손에 잡혔다. 코 가까이 가져간다. 독사에 물리기라도 한 듯 나는 오른손을 턴다.
문에, 수납장에, 닿는 대로 오른손을 문지른다. 청바지 호주머니 속에 든 것들을 꺼내 닦아낸다. 지폐도 로또 종이도 다 소용없다. 나는 오른손을 더럽혔다.
"티푸! 뭐 하는 거야? 그런다고 너의 오른손이 깨끗해지니?"
나디의 카랑한 목소리에 내 몸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뚜드드드. 전기드릴 소리에 내 심장이 둥둥거린다.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맥주 회사의 감색 파카를 입고 아스팔트 깨진 조각을 줍던 노동자의 웃음이 떠오른다. 나를 비웃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딸꾹질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딸꾹질하듯 숨을 할딱거렸다. 뺑소니차에 치이고 사 일 만이었다. 응급처치만 제대로 할 수 있었어도 살았을 것이다.
"엄마,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사랑하는 자에게 시련을 많이 허락하신단다."
나는 눈을 부릅떴고 엄마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새나왔다.
엄마는 비소 중독이었다. 비소 중독엔 수술이 필요 없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엄마의 수술비를 모으기 위해 돈을 훔쳤다. 학교 교장 선생님의 지갑을 훔쳤고 부자동네 정육점에서 금고를 들고 나왔다. 금고를 열기 위해 철공소에서 전기드릴을 훔쳤다. 훔친 돈을 건네는 나를 보던 엄마의 눈빛을 기억한다. 핏발선 엄마의 눈에 고인 눈물이 핏물처럼 보였다.
"티푸,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내 아들의 선량한 손이야. 알라가 바라시는 것도 바로 그것이고."
알라 앞에서는 떳떳했다. 훔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알라가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나에게 윤리나 신앙심은 화장실 뒷물보다 소용없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떠나고 이 년이 채 되지 않아 엄마도 알라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날부터 나는 라마단도 지키지 않고 하루 다섯 번 기도도 하지 않았다. 알라의 사랑을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련 따위는 필요 없었다. 부모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들이 신의 축복을 받거나 저주가 무서워 그의 규율에 맞춰 산다는 것이 뻔뻔스럽고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밤새 엄마의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새벽 국경을 넘어 인도로 갔다.
선명한 기차 소리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우다이푸르로 가는 기차 소리 같기도 하고 학교 근처 철로에서 나는 지하철 소리 같기도 하다.
무릎을 꿇는다. 두 팔을 등 뒤로 뻗쳐 손깍지를 낀다. 무릎이 꿇리기는커녕 엉덩이가 발뒤꿈치에서 이십 센티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몸의 배신이다. 아니, 내 몸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가슴을 열어젖히는 것 자체로 고통스럽다. 초의식상태가 될 때까지 파드마사나로 앉아 있던 오 년 전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 숨을 헐떡인다.
"너는 너의 몸을 훔친 거야."
"뭐? 내가 무엇을 훔쳤다고?"
나디는 나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티푸. 잘 생각해 봐."
남자 목소리다. 누구··· 박 대리? 잘, 생, 각, 해, 봐. 낮고 굵은 박 대리의 음성이 공중에 던져진 긴 테이프처럼 굴절된다.
"이건 죄가 아니야. 오히려 한국에 유익을 주는 거지."
박 대리 얼굴이 면도한 달마 같다. 심각해질 때 짓는 표정이다. 박 대리를 처음 봤을 때 동남아시아 사람인 줄 알았다. 작은 키에 피부가 검고 눈이 부리부리하다. 유 냉장실 키 오케이? 네. 제가 냉장실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와, 유 코리아 랭기지 퍼팩트. 아닙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박 대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시약 배달을 올 때마다 위 숏 타임 커피? 같은 변칙 영어로 한국어능력시험 최고급 소지자인 나에게 말을 걸었다.
"티푸, 돈 필요하잖아. 나디 구하러 안 갈 거야? " 박 대리가 귓속말을 한다.
"나디를···?"
딸꾹질이 난다. 박 대리가 나디를 알 리가 없다. 나는 아무에게도 나디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나, 읔. 내 딸꾹질 소리에 나디의 이름이 뭉개진다.
어릴 적 나는 굼벵이를 가지고 놀았다. 소똥에서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여섯 개의 다리는 가만히 있고 희고 살진 몸통만 바동댔다. 나도 지금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가는 굼벵이를 다시 소똥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알라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야, 티푸. 그럼 장난감을 사 주든가? 나는 아버지의 다리를 마구 차 댔다.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발길질을 하다니, 알라의 궁전에 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알라의 궁전이라는 말에 움찔했지만 겨드랑이가 간지러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죽지 마! 아버지의 얼굴이 돌처럼 차가워지고 단단해진 후에도 나는 아버지의 귀에 대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느라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죽음은 시작이야."
"엄마, 난 속지 않아."
"혹시 엄마 뱃속에서의 삶을 기억하니? 이 세상으로 나와야 했던 순간에도 너는 나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잖아. 죽기 싫다면서."
엄마가 웃었다.
"나오고 나서도 한참을 울었지. 죽은 줄 알고 말이야." 웃고 있었지만 엄마의 두 눈 속에는 넘칠 듯 눈물이 그득했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일 뿐이야."
엄마의 목소리가 모터 소리를 걷어낸다. 엄마! 나는 엄마를 찾아 두 팔로 어둠을 휘젓는다.
죽음이 아무리 더 좋은 세상으로 이어지는 통로라 해도 난 살고 싶다. 살기를 포기한 근육을 깨우고 열을 발산시켜야 한다. 웬만한 사람의 몸통만 한 허벅지이다. 이 지방을 태우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닥에 앉는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두 다리를 박쥐 날개처럼 벌린다. 발끝을 몸 쪽으로 당긴다. 허벅지에 두 손을 올려놓고 상체를 숙인다. 턱이 바닥에 닿기는커녕 허벅지 뒤쪽 근육이 찢어질 것만 같다. 찢어져도 좋다.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기차 소리다. 사람 목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 전기드릴 소리도 나고 망치 소리도 들린다. 낮이 분명하다. 낮이라 해도 학교 지하 일 층에 있는 이 냉장실 문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금요일 밤 열한 시 삼십 분에 나는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틀이 지났다 해도 아직 일요일이다. 내 몸이 끈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으로 허물어진다.
딸꾹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드린다. 다시 호흡에만 집중한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 상체를 구부린다. 턱으로 바닥을 찍는다. 클린 히어. 그것이 전부였다. 세포 배양과 실험동물사육실 청소를 맡기면서 그 누구도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 반 눈치 반으로 청소를 했다. 매일매일 마우스 케이지 먼지를 닦아주고 깔집을 갈아줬다. 인도에서는 릭샤를 끄는 일에 하수관 청소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냉난방이 적절히 유지되는 한국 대학의 실험실에서 못할 일이 없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청소를 하고 있는 나를 향해 박진 교수는 무어라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다. 한국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때였다. 지도교수의 성난 표정에 대고 영어로 영문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달 월급을 지불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노트북을 훔쳤다. 보증금 없는 사글세를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제 휴대폰을 켜야 하는 순간이 온 것 같다. 인간을 위한 식품과 약품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최적온도, 섭씨 4도에서 인간이 죽어 나갈 수는 없다.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 바지 호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기가 힘들다. 간신히 꺼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나는 얼른 집어 두 손으로 감싼다. 가슴에 댄다. 숨을 몰아쉰다. 나도 모르게 기도가 나온다. 한 통화만 할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란 기도는 끝내 발설되지 못한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른다. 빛이다. 한 점으로 시작되는 붉은빛에 동공을 찔린다. 그래도 눈을 감지 않는다. 붉은색 영어로 된 상품 이름이 뜬다. 멈춘 것 같던 심장박동 소리가 모터 소리를 삼킨다.
통화버튼을 누른다. 전화기를 감싼 두 손이 부들거린다. 통신 상태를 알리는 막대들이 화면을 채운다. 탱큐, 탱큐! 탄성이 터진다. 녹색 막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도야 꼬레, 도야 꼬레, 제발! 막대들이 점점 작아진다. 큰 막대들이 차례로 지워진다. 작은 막대들도 뜨지 않는다. 통화 버튼을 연이어 두드린다. 전원이 나갔다.
"아악! 도야 꼬레, 아마께 바짠! 제발, 살 려 주 세 요!"
잘 생각해 봐, 티푸. 박 대리의 목소리가 늘어진다. 냉장실에서 썩힐 거 다른 실험실로 넘긴다는데 그게 무슨 죄가 되냐구? 박 대리 말대로 내가 훔치려는 시약은 이곳에서 방치된 채 유통기한을 넘길 것이고 언젠가는 폐기처분 될 것이다. 티푸. 저 시약이 얼마짜린 줄 알아? 자그마치 삼천만 원어치가 넘어. 나디 구하러 안 갈 거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이다. 불길 속에서 먹구름이 솟구친다.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모터소리에 찢긴다. 다카 방직공장에 불이 났다. 유튜브 동영상이 눈앞에서 돌아간다.
"나디가 행방불명됐어. 티푸, 돌아와."
티푸! 나디가 나를 부른다. 촛불을 들고 있다. 뉴델리에는 전기가 자주 나갔다. 우리는 촛불을 켜놓고 춤을 추고 요가를 했다. 우다이푸르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 내가 뛰어내린 것은 나디로부터의 도망이 아니었다. 가난 속에서 안주해야 하는 환경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누군가 전류가 흐르는 못으로 내 이마에 줄을 그어대고 있다. 손을 뻗어 쳐내버리고 싶은데 꼼짝할 수 없다. 나디는 살아 있을 것이다. 무너진 건물 속에서도 요가를 하며 숨을 고르고 체온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한국으로 도망친 것을 몰랐던 나디는 만삭이 된 몸으로 나를 찾아 다카로 갔다. 나디를 거둔 사촌이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지만 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일주일 전 인터넷으로 다카 화재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사촌에게 전화를 했다. 한국에 도착하고 처음 한 전화였다. 사촌은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 울음부터 터뜨렸다. 나디가 행방불명됐어. 화재현장에 있었거든. 티푸, 돌아와.
잠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 만일 잠이 들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죽은 것일까. 냉장실 모터 소리가 너는 아직 살아 있다고 대답한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엎드린다. 앞팔로 바닥을 누르며 엉덩이를 들어 올린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듯 한 발씩 차올린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내 발목을 끌어올려 주는 것 같다. 다리가 전갈의 두 집게처럼 균형감 있게 공중에 떠있다. 들숨과 날숨이 물의 흐름처럼 자유롭다. 복근이 거북이 등처럼 단단해진다. 설마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 순간 내 두 다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뱃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린다. 스멀스멀 기어올라 내 숨통을 막았다.
"쾍, 쾍."
까맣고 반들반들한 전갈 한 마리가 내 목구멍에서 튕겨져 나왔다. 성대를 찢어놨는지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다. 전갈이 다시 내 몸속으로 들어올지 모른다. 입을 다물고 싶다. 몸을 웅크리고 싶다. 몸이 꼼짝하지 않는다. 후후후. 가쁘게 내뱉는 날숨에 두 입술이 타들어간다. 다행히 전갈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전갈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암흑보다 더 캄캄한 어둠 속에 숨어 무엇인가를 갉아먹고 있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를 없앨 수가 없다. 냉장실을 통째로 갉아먹을 모양이다. 빛이 쏟아진다. 전갈이다. 눈에서 불을 뿜으며 나를 향해 기어오고 있다. 아악.
티푸! 눈 좀 떠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깨운다. 이번 실험 결과가 가설과 맞지 않아 비관이 컸나 봅니다. 박 대리 목소리다. 졸업도 막막하게 된 거죠. 무슨 소리야? 내 논문은 거의 통과되었다구. 벌떡 일어나 고함치고 싶지만 힘만 주어도 철수세미로 목을 긁어내리는 것 같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포스트닥터 과정을 밟을 것이다. 제 폰에 티푸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남겨져 있어서···. 환청이 분명하다. 눈을 떠야 한다. 잠이 들면 안 된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직 알라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을 배우지 못했다. 빛의 잔상이 꼬물댄다. 전등이 켜져 있던 자리가 분명하다.
"저 불빛이 끝나는 곳에 알라의 얼음궁전이 있어, 티푸."
아버지는 도심의 휘황찬란한 야경을 가리키며 알라의 궁전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알라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을 궁전으로 초대한단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게 한 다음 지하에 있는 얼음방으로 가게 하지. 그 방은 진귀한 보석으로 가득하지만 안에서는 문을 열 수가 없거든. 보석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알라는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아버리셔. 회개할 때까지 말이야."
매미 우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아니, 모터 소리다. 나는 아직도 냉장실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그만 돌아와. 사촌이 했던 말을 아버지가 다시 하고 있다.
"이제 그만 돌아와, 티푸. 스위티가 자꾸 엄마를 찾아."
죽으면 아버지와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 죽을 수가 없다. 사바사나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누운 상태로 손바닥을 위로 한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편다. 뜨거운 액체가 목젖을 적시며 몸속으로 흘러든다. 나는 훔치기만 했다. 부모에게서 선한 아들을 훔쳤고 나디로부터 사랑하는 남자를 훔쳤다. 스위티에게서 자상한 아빠를 훔쳤고 친구들에게서 유쾌한 친구를 훔쳤다. 나에게서 웃음을 훔쳤고 알라로부터 신실한 한 자녀를 훔쳤다. 그 모든 것을 훔쳐 나는 섭씨 4도 냉장실 안으로 도망친 것이다.
눈을 감는다. 수 없이 깜박이는 빛의 편린에 눈이 찔려 감을 수가 없었다. 암흑보다 더 캄캄한 어둠 속에 이제 나를 맡긴다. 몸이 한 개 점이 될 때까지 나에게서 멀어진다. 그 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숨을 쉬고 있다. 멀리, 아득히 먼 곳에서 기차 소리가 들려온다. 전기드릴의 두둘거리는 소리에 내 몸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