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李範錫) (미상 ~ 미상)】 "1906년 군부대신 이근택 처단 계획 및 실행"
이근택(군부대신) 아들은 한규설(참정대신) 사위다. 한규설 딸이 출가할 때 한 계집종을 데리고 갔다.
을사늑약이 결정된 날,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와서 집안사람들에게 늑약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나는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 하니,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식칼을 가지고 나와 꾸짖기를,
“이근택아, 너는 대신이 되어 나라의 은혜를 얼마나 입었는데, 나라가 위태로워도 죽지 않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만도 못한 놈이다.
내가 비록 천한 사람이지만, 어찌 개의 종이 될 수 있겠느냐? 내 칼이 약하여 너를 만 동강이로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나는 다시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고 한 뒤, 한규설의 집으로 도주하였다. 그 계집종 이름은 알 수가 없다.
- <매천야록> 제4권 광무 9년 을사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와 성장배경, 집안내력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1905년 서울 유약소(儒約所)에 참여하였고, 1906년 군부대신 이근택을 처단하고자 자택에 침입하여 부상을 입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 유약소에 가담하였다. 전덕원(全德元)·강윤희(姜允熙) 등과 함께 그 부당성을 논의하면서, 조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대궐 밖에서 집회를 열고, 각국 공사(公使)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후 직접 을사오적과 이를 포함한 정부 대신들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기산도(奇山度)·이근철(李根哲) 등과 함께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처단하기로 계획하였다. 1906년 1월 기산도·이근철과 함께 가발을 써서 변장하고 이근택 자택의 담을 넘어가서 자상 등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경찰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탈출하였으나, 결국 기산도와 함께 경찰에 붙잡혔다.
1906년 2월 한성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