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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모택동의 말이 아니더라도 정치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정치권력과 무력(武力)간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고자 하였던 통치자들은 먼저 병권(兵權)을 장악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중국 송(宋)의 태조 조광윤이 후주의 금군을 장악하여 진교병변(陳橋兵變)을 일으켜 송나라를 건국하고,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의 고사에서도 보이듯 건국공신들이 가지고 있던 병권을 빼앗듯이, 어느 국가이건 통치권을 굳건히 하려는 군왕에게는 병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는 문치(文治)의 나라, 선비의 나라라고 일컬어진 조선왕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왕권(왕권)과 신권이 항시 대립하던 조선에서는, 누가 병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권력의 향배가 정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상대적으로 군병의 수가 많던 초기를 포함해서 권력의 주축에 서고자 하는 이들은 사병을 거느리거나 군의 사유화(私有化), 또는 새로운 부대의 창설등으로 무력기반을 확보하려 하였다.
I. 초기 병권을 둘러싼 왕권과 신권의 충돌
군사화된 조선초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상 병권과 관련하여 정권의 문제가 드러나는 기사는 태조 3년에 보인다. 전중경 변중량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병권은 분명히 왕실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기록을 살펴보자.
예로부터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한 사람이 겸임을 못하는 법이라, 병권은 종친에게 있어야 하고 정권은 재상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준·정도전·남은 등이 병권을 장악하고 또 정권을 장악하니 실로 좋지 못하다
물론 이 말은 당시 건국공신들에게 권력이 몰리는 것을 경계한 정치적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건국공신들이 대규모의 사병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권력기반이 비대해져있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왕실이 병권을 다시 장악하여야 한다는 견제장치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었다. 따라서 왕실이 병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차원에서 나온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발언을 한 변중량은 정작 태조 7년 왕자의 난 시기에는 정도전등의 사주를 받아 왕자들의 병권을 빼앗으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등, 상기(上記)발언의 정치적 동기가 크게 의심이 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최소한 종친이 군사를 거느리는 일이 금기시되지는 않았다. 수많은 훈신과 공신들이 병사를 거느린 상황에서 왕실이 스스로 병사를 포기하는 것은 정치적인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대소 종친과 함께 이성(異姓)의 대신들이 병권을 분장(分掌)하고 있다”고 보아 훈신들도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친들 역시 간단치 않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실은 이런 상황을 오래가게 하지 않았고 이는 정종 시기 이방원(李芳遠)이 주도하는 사병혁파로 이어진다.
사병혁파
조선 왕실이 군대에 대한 통일된 명령권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고려말의 삼군도총제부(三軍都總制府)를 태조 2년에 의흥삼군부로 바꾸고 새로운 군령기관(軍令機關)으로 기능하게 하였다. 지휘관을 판사(判事), 각 군에는 절제사를 두었으며. 여기에 진무소(鎭撫所)를 두어 삼군부의 참모부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의흥삼군부는 10사(司)등의 중앙군은 물론 지방에서 번상숙위하던 시위패(侍衛牌)까지도 그 관할 밑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금군(禁軍)에 해당하는 시위패는 아직도 공신들의 사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이 시점에서 왕실이 완벽한 병권장악을 이루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중앙군뿐만 아니라 지방군도 공신과 연계된 도절제사들에 의하여 지휘되고 있어 왕명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볼 수가 없었다.
왕실과 중앙권력의 병권장악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정종 2년에 세제(世弟) 이방원에 의하여 단행된 사병혁파이다.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門下府) 김약채(金若采)가 상소하기를, 건국 초기에는 정국이 불안하여 종친과 훈신들이 병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용인하였으나, 이제는 종친과 훈신들이 사병들을 거느리고 난을 지으니 이를 거두어들임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같은 상소에서 권근과 김약채는 병권을 ‘국가의 큰 권세’라며 흩어서 주장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중앙정부가 군사(軍事)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야함을 분명히 한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하여 일부 공신 세력을 숙청한 이방원은 사병을 혁파함으로서 공신들의 무력기반을 붕괴시킨다.
비록 미사려구의 온갖 수사(修辭)가 동원되기는 하였지만, 이방원은 사병혁파 조치 2개월 후 좌보덕(左輔德) 서유(徐愈)와 함께 사병혁파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사병혁파의 진정한 이유를 내비친다. 다음은 그 대화의 일부기록이다.
숙종이 이보국(李輔國) 을 두려워한 것은, 다만 이보국이 병권을 잡았었기 때문이었다. 병권이 흩어져 있게 할 수 없는 것이 감계(鑑戒)가 이와 같다. 또 우리 집 일로 말하더라도 태상왕께서 병권을 잡았기 때문에, 고려(高麗)의 말년을 당하여 능히 화가위국(化家爲國)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인년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의 난에 이르러서도 우리 형제가 만일 군사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사기(事機)에 응하여 변을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박포(朴苞)가 회안군(懷安君)을 꾄 것도 또한 병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표면적인 이유는 중앙정부의 권한강화였지만, 결국의 목적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킴과 함께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정적(政敵)들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함이었다.
정종이 물러난후 태종은 즉위 5년째되는 해에 병조(兵曹)를 정 2품 기관으로 승격시켜 중요한 행정사안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도 무반(武班)에 대한 중앙정부의 인사권을 강화시켰고, 의흥삼군부의 후신인 승추부(承樞府)의 기능까지 통합하여 군령권과 군정권을 하나의 체계하에 통합시켰다. 태종은 18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잔여 공신세력과 민무구・무질 형제를 비롯한 외척세력을 모조리 숙청하였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태종이 병권을 철저히 장악한 덕분이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심지어 자기 아들인 세종 이도에게 선위(禪位)할 때에도 유독 병권만은 놓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내가 병권(兵權)을 내놓지 않는 것은 왕위(王位)를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주상을 위하여 무슨 사고가 있을 경우에 후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함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무력을 동원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태종이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체포하여 처형할 때에도 심온이 ‘군사가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좋다’라고 한 때문이라고 적혀있다. 물론 태종이 심온을 처형한 이유는 세종의 치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외척을 모두 없애려고 한 것이지만, 그 표면적인 죄목은 상왕(태종) 휘하의 병사들을 현재의 임금인 세종에게 몰아주자는 발언이었다. 사적(私的) 무력의 보유에 대한 경계는 세종 때도 이어졌고 세종 8년에는 김익종이 “지금부터 상·대호군과 첨총제 이상으로 무관직을 가진 자는 군대를 장악한 요직에 있는 사람의 집이나, 종친과 부마의 집에 사적으로 방문하는 것과, 군대를 장악한 요직에 있는 자와 종친이나 부마끼리도 서로 내왕하는 것을 금지하여, 신하들끼리 정실적인 행동을 하는 폐단”을 방지하라고 간언하였다. 병사가 중앙정부, 특히 왕의 휘하에서 떠나감을 경계하였다.
II. 반정(反正)과 왕권
계유정난
단종 원년의 계유정난은 왕권과 병권의 상관관계라는 측면에서 커다란 사건이다. 일의 발단은 세종때 단행된 북방개척에 있다. 세종대왕 시절에 문치(文治)와 무비(武備)가 함께 이루어졌던 것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세종이후 즉위한 문종에서부터 성종 즉위시까지도 조선시대 어느 시대보다도 병서(兵書)의 출간이 활발했던 때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기에는 심지어 국왕이 직접 병서를 쓰고 출간할 정도로 무비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해나갔던 것이다. 책을 좋아하기로 유난했던 문종(文宗)도 즉위년(1451)에 ‘진법(陣法)’을 손수 지은바 있으며, 특히 세조는 약 300년 후의 정조와 더불어 조선역사상 병서를 가장 많이 써내고 펴낸 제왕이었다. 이 시기의 군왕들은 손자병법에 나타난 데로 병(兵)을 국지대사(國之大事)로 여겼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진족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김종서를 비롯한 많은 권신(權臣)들과 무장들의 휘하에 병력이 몰리게 되었다. 문종이 2년만에 훙(薨)하고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권은 비할데 없이 약화되어, 의정부 당상들이 황표(黃標)를 들고 벼슬아치들을 낙점할 정도였다. 병권은 자연스럽게 어린 왕의 손을 떠나 군(軍)출신의 재상들에게 집중되었다. 이 시기의 재상들의 행적을 보면 임금의 금군(禁軍)을 함부로 차출하여 노역을 시키는 일이 종종 목격된다. 이때 병조판서였던 정인지(鄭麟趾)는 “거듭 생각해 보아도 임금이 한번 병권(兵權)을 잃으면 비록 강직하고 밝은 군주(君主)라도 그것을 다시 거두기는 어렵다”며 군주가 군사를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을 우려하였다.
물론 김종서와 황보인등의 전횡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하더라도 군부에 대한 김종서의 막강한 영향력과 왕권의 취약함을 감안하면 왕실로서는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일단 계유정난의 자세한 경과는 생략하더라도, 그 성격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중병(重兵)을 쥐고 있는 중신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왕권을 위협하는 데에 대한 왕실의 정치적/물리적인 반격이다. 세조는 스스로 왕족으로서 영의정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친위세력의 힘을 동원하여 왕위에 올랐다.
2년후 양위의 형식을 통하여 왕권을 이어받은 세조는 병제(兵制)의 정비에 나섰다. 즉 3년째 되는 해에 삼군(三軍) 체제를 오위(五衛)제도로 바꾸고 군령권을 오위진무소로 집중시켰다. 아울러 재위 5년에는 5위 편입에 제외되었던 지방의 시위패를 정병(正兵)으로 공식화하여 지방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충순위(忠順衛)·충찬위(忠贊衛)에 속한 젊은이들 중 소속(所屬)된 곳이 없어서 놀고 있던 병사들에게는 시위(侍衛)의 임무를 맡겼다. 이들 중에는 일반 문관 자제들이 상당수였지만, 왕실이 궁궐을 숙위하는 인원을 크게 늘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양천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천역자(賤役者)들을 면천(免賤)하고 양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한 보충대까지 포함시켰다. 세조 자신이 어제(御製) 병장설에 “형수(形數)를 밝힘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군적(軍籍)을 빠짐없이 정리하고 대오(隊)를 미리 정해두며(預作), 군심(軍心)을 안정시키고 이목(耳目)을 한결같게 일치시키는 것이다” 라고 쓴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중앙군을 오위(五衛)로 편제하면서 진관(鎭管)에 소속된 지방군도 각 부(部)와 위(衛)별로 오위체계에 소속 되었다. 세조 12년에는 최고 군령기관으로서 오위도총부가 설립이 되고 이는 병조의 속아문이 되었다. 군정권과 군령권이 한 기관에 집중된 것이다.
사실 세조는 조선 역사상 수차례 일어났던 반정(反正)을 행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세조의 정난(靖難)이 다른 반정(反正)과 달랐던 점은 세조 스스로가 주도를 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친위세력을 구축하고 그 힘으로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정을 통하여 왕위에 오른 이후의 왕들은 세조만큼 강력한 힘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병(兵)을 장악한 공신(功臣)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유순정・박원종등의 공신들에 의하여 왕위에 오른 중종의 왕권은 공고하지 못하였다. 속된 말로 ‘누구 덕에 왕이 되었는데’라고 하여 권리를 내세우는 공신들을 어쩔 수 없었고, 더군다나 자신만의 정치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병권이 모두 공신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유순정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가, 공신들이 반정을 위하여 따로 ‘용사(勇士)’들이라 불리는 일단의 무력집단을 모집하였기 때문이다. 반정이 성공한 후에도 이러한 군사들은 해체되지 않고 공신들의 호위병력으로 잔존하였다. 중종이 즉위한 다음해에 대사헌이 병권이 ‘한 집안’에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였듯이 권신들이 무력을 가지게 되면 언제나 왕권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인조로 세운 인조반정 직후에도 반복이 되었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공신들은 그들의 사모(私募) 군사들을 해체시키지 않는다. 인조 즉위년에 공신들의 사병들중 대장 100명, 당상관 50명을 뽑아 만들고 국가에서 급료를 주는 군관으로 만든다. 이로서 탄생이 된 것이 새로운 군사조직인 호위청(扈衛廳)이다. 이는 반정공신들의 사병들이 정규병력화 되었음을 의미하며 서인계 훈신들의 사적 무력기반이 공인된 것이었다.
이때는 군왕의 군사장악력이 약화됨과 동시에 군령권도 통일성을 상실한다. 전기의 5위 중앙군은 도총부에서 직접 통할하고 병조에 속하여 있었으나, 후기에의 군영(軍營)체제에서는 각 군영에 따로 대장이 두어지고,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아울러 조선 후기로 가서는 핵심 기관인 비변사 당상아래 있게 되어 병조와는 다른 명령체계하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결국 병권이 분산된 것이다. 중앙의 병력은 분산되어있으면서 권신들이 사적인 무력기반이 있을 경우, 왕권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III. 병권통한 정조의 왕권강화
정조 등극의 배경
영조에 의하여 역도(逆徒)로 사사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로 즉위한 정조는 정치적인 기반이 취약하였다. 권력은 그의 외가인 풍산 홍씨, 그리고 서인 노론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약세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삼불필지론’이다. 영조가 전교를 내려 세손(정조)에게 청정(聽政)케 하는 일을 거론하자 홍인한은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 없습니다”라는 말로 극도의 반감을 드러내었다. 자신들이 ‘광인’으로 몰아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한 후 미칠 후환이 두려워서였다.
즉위한 정조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노론 세력들을 고스란히 신하로 맞아들여야 했다. 그중에는 자기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있을 때 그 앞에 있었던 구선복도 있었다. 정조는 <존현각 일기>에서 ‘그로 말하자면 살점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증오한 인물이었으니 구선복이 ‘중병(重兵)’을 쥐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구선복은 궁궐의 방어를 책임지는 어영대장이었다. 정조는 그 사실이 꺼림칙했던지 구선복을 여러 차례 파직시켰으나 여론에 밀려 다시 복직시켰고, 이후 구선복의 파직-복직은 계속 반복되었다.
장용영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정조는 자신 스스로 무력기반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취한 군사적 조치는 숙위소(宿衛所)체제를 일으키면서, 호위청을 축소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즉위 원년에 숙위소를 설치한 정조는, 그 다음해 호위청을 단 1청으로 축소하고 그 수도 정졸(正卒) 350명으로 제한하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그를 보필해왔던 홍국영을 중용하고 그에게 숙위대장의 중책을 맡긴다. 아울러 정조는 대신이 호위대장을 겸임하던 관행을 깨고 훈척(勳戚)이 아니면 대장이 되는 것을 금지함으로서 호위대장이 될 권리를 실질적으로 빼앗았다. 인조반정 이후부터 권신들의 무력기반으로 존재해왔던 호위청을 사실상 무력화(無力化)시킨 것이다.
정조는 그의 호위를 담당하였던 숙위소를 폐지되고 새로운 근위군 체제를 만들고, 이에 따라 별도의 호위군대를 창설한다. 이로서 창설된 기관이 장용영(壯勇營)이었다. 즉위한지 8년째 정조는 뒤주 속에서 숨진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바꾸는데, 이는 사도세자의 정통을 세우려는 행위였고, 이 조치는 노론세력의 암묵적인 반발로 이어졌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버지의 이름을 바로 세운 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경과(慶科)를 실시, 무과에서 무려 2,000여 명을 합격시켰다. 정조는 이들을 출신 도(道) 별로 훈련대장, 금위대장, 병조판서가 각각 훈련을 담당하게 한 뒤, 자신에게 직접 인사를 하게하고 새로 합격한 사람들이 사은(謝恩)한 뒤에 각각 대궐 밖에서 편리한 곳에 근무하게 하였다.
장용영의 공식적인 탄생은 홍복영(洪福榮)의 역모사건을 기화로 이루어졌다.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을 불러들여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고 약 500명의 인원을 5대(隊)로 나누어 편제하였다. 군사들을 직접 시험하여 모으고 훈국(訓局)의 별기군(別技軍)·난후초(攔後哨)와 군기시(軍器寺)의 별파진(別破陣)등의 수를 줄여 이를 장용영으로 이속(移屬)하였다. 이와 더불어 서유구와 유득공등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서얼(庶孼) 출신의 지식인들, 그리고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계열의 정약용을 기용한다. 병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정치에서도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세력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인조반정이후로 권력을 쌓아올린 서인들의 세력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최소한 정책의 원활한 집행을 위한 견제의 의미로는 충분하였다.
이때 창설된 장용영은 정조의 핵심 군사기반이 되었는데. 1795년 현륭원 행차때 호위를 위하여 동원된 6천여명의 군사중 4500명은 정조가 장악한 오군영의 군사였고, 그 중의 3천여명은 장용영의 병사들이었다. 오군영의 군관이 되려는 자들은 일정기간 장용영을 거쳐 가게 하였는데, 이는 장용영을 통하여 오군영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장용영을 지휘하는 대장은 조정에서의 지리한 인가절차없이 국왕으로서의 특지(特旨)로 선발하였다. 장용영은 정조의 명에 의하여 움직이는 직속부대가 된 것이고, 오군영도 국왕인 정조의 감독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화성: 정조 병권장악의 상징
정조는 그 재위 22년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가장 가시적이고 극적인 것은 수원 화성(華城)의 건축이었다. 화성의 건축은 정조의 개혁의 성과를 과시(거중기의 사용等)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군사적인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수성에 중점을 둔 방어체계를 유지했다. 조선의 건국공신인 정도전의 오수론(五守論)에 의하면 ‘적병이 정예(精銳)하면 수비하고, 적병을 해이하게 하려면 수비한다’라는 말에서 조선의 군사사상이 공격보다는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때 무신출신으로 좌의정까지 지낸 최윤덕은 방어전략의 핵심을 축성에 두고, 세종에게 건의하여 요충지대신 국경지대에 성을 쌓아 요새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태종때부터 내려온 국방론의 요지(要旨)도 성을 기축으로 한 방어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론도 주로 산의 정상이나 능선을 따라지은 산성(山城)이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1808년(순조 8년)에 편찬된 통치참고서인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도 오랑캐(북방민족)의 장기(長技)는 기병이고, 왜(일본)의장기는 단병(短兵)이며, 우리(조선)의 장기는 성에서 궁시(弓矢)로 적을 제압‘한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성, 특히 산성에 웅거하여 장거리무기로 적을 사격하여 방어한다는 기본전략은 조선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에 있어 평지성은 드물었고 더군다나 대형성곽은 한양, 평양등 일부 주요도시에만 한정된 시설이었다.
본격적인 수비요새로서의 화성의 성격을 거론하기 전에, 화성이 군정(軍政)과 병권장악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화성이 지어지기 이전의 수원은 도성의 외곽방어를 책임지는 총융청(摠戎廳)의 본부였다. 그러니 화성을 독립시키고 이를 장용영의 외영(外營)은 국왕이 온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총융청을 축소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또 화성의 건축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금위영과 어영청의 번상군을 매번마다 1초(哨)씩 줄이고, 대신 병졸들에게 군포(軍布)를 받음으로서 화성건설의 비용을 조달하였다. 화성의 축조는 인력・재정적 차원에서 기존의 군영들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장용외영의 존재는 경기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총융청과 수어청의 병력이 반대세력에 의하여 장악될 시, 이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런 조선의 실정에서 수원같은 평지에 계획도시를 만들고 거대한 성곽으로 둘러친다는 자체가 왕권을 과시하려는 행위였다. 왕권의 과시뿐만이 아니다. 만약 정조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혹시라도 군사변란을 획책하면 화성을 토대로 방어를 수행한 다음 반격할 수도 있었다. 화성은 당시 조선이 보유한 군사기술, 또는 무장(武裝) 수준으로 무너뜨리기가 거의 불가능한 요새로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군사적 도전이건 간에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다는 계산을 하였을 것이다.
필자가 화성을 직접 답사하였을 때 눈여겨 본 것은 성곽이 지면(地面)에서 90도 직각으로 서있지 않다는 것이다. 뒤로 수 도(度)정도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고 있다. 현대의 야포에는 가운데가 비어 화약이 충진되어있고 목표물에 닿자마자 폭발시키는 접촉신관이 달린 중공탄(中空彈)의 사용이 보편화되었지만 18세기 조선의 화포는 아직도 철구(鐵球), 석구(石球), 또는 둥근 납 덩어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무거운 발사물로 성벽을 타격하여 파괴하는 방식이었다. 만약 성벽이 90도 직각으로 서있다면 그 충격력이 그대로 전달이 되지만 약간이라도 각도가 있으면 무거운 탄도물이 부딪히는 힘이 다소 분산이 된다. 밑의 사진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아울러 화성은 완전한 석축(石築)이 아니라 먼저 토축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돌을 덮어씌운 형식이라는 것이다. 기반을 다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를 병기학(兵器學)적 측면에서 생각하여 보자면, 앞에서 뒤까지 전부 돌인 것보다 가운데 흙을 채워넣은 것이 당시의 석탄(石彈)이나 철탄(鐵彈) 공격에 의한 충격을 흡수하는데 유리하다. 현대의 전차(戰車)에서 적 포탄에 의한 관통을 막기 위하여 강판사이에 세라믹외 기타 충격흡수물질을 넣은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리고 화성의 성벽이 높지 않은 이유도 화포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만약 성벽이 높으면 원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적의 포격에 더 큰 표적을 제공하여 주는 것밖에는 안 된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 성벽의 축조에 쓰이는 화강암은 일반 콘크리트보다 약 5배에서 6배까지 충격에 대한 내구력(耐久力)이 강하다. 이런 화강암을 반듯이 올려쌓은 것이 아니라 엇물려 쌓고 또 성벽을 앞뒤로 관통하는 직사각형의 심석을 사용함으로 성벽의 견고함을 극대화시켰다.
또 주목할 점은 높은 여장(女墻)과 여장 각 부분사이의 좁은 틈, 그리고 중간에 난 총구안이다. 높은 여장으로 인하여 수비병들은 상체를 노출할 필요가 없고 적의 사격으로부터 안전한 상태에서 조총으로 적을 사격할 수 있다. 또 다산 정약용은 화성에 7개의 포루(砲樓)를 세워 수비병들이 화포로 적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화성의 위치도 절묘하다. 근방에서 유일한 고지(高地)인 팔달산을 감싸고 있어 감제(監制) 효과도 좋다. 주변이 평지여서 공격군은 화성을 공격하기 전에 상당한 거리를 노출이 된 체 뛰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평지가 아닌 부분도 경사가 심한 산지에 위치하여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만약에 접근을 하더라도 타구아래에 뚫린 근총안을 통하여 성벽바로아래의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후에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관군이 화약을 성벽아래에 묻어서 폭파한다던가 하는 변칙작전도 이 때문에 불가능에 가깝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의 공성(攻城)능력으로는 난공불락이었던 화성같은 견고한 요새도시의 존재는 병권장악과 더불어 정조의 권력을 더욱 단단한 기반위에 올려놓았다.
IV. 종친을 통한 병권의 장악과 친위세력 구축: 귀성군 이준의 사례
권신들이 정권을 농단한다고 생각한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한명회・양정・홍윤성등의 친위세력을 구축하여, 김종서・황보인등의 구신(舊臣)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획득한다. 그러나 세조가 친위세력을 두기는 하였지만 세조가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은 권력이 왕실의 손에 확실히 쥐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최대한 힘있는 종친들을 가까이 두려고 하였으며, 종친들간의 친목을 도모하여 단결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세조실록에는 세조가 사흘이 멀다하고 종친들과 총신(寵臣)들을 불러 술자리를 같이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는 효령대군이나 임영대군같은 나이든 종친은 물론이고 영순군이나 귀성군같은 신진 종친들도 보인다.
특히 성품이 호방하고 무략(武略)과 용력이 있는 귀성군은 세조가 가장 가까이 두고 총애한 종친이었고, 세조는 귀성군을 통하여 왕실/종친 위주의 정치를 행하였다. 귀성군은 임영대군의 아들로 세조가 아종(兒宗)이라 하여 자신을 매일 숙위하게 하였던 네 명의 젊은 중 한명이었다. 병서 15권을 편찬하고 평소에도 병사들의 훈련을 직접 참관하고, 심지어는 지휘하기까지 했던 세조에게 있어 종친임과 동시에 “심지(心志)가 명철(明徹)하고 본성(本性)이 영오(穎悟)하고 또 여력(膂力)이 있어서 재주가 세 사람보다 나은” 귀성군은 왕실중심의 정치를 하고자했던 세조가 좋아할만한 인물이었다. 아종으로 삼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함은 물론 자주 술자리에 부르고, 심지어 귀성군으로 하여금 세조자신으로부터 왕명을 받아 승지에게 전달하게 한다. 세조가 주관하는 군사훈련에도 지휘관으로 자주 참여하였고, 후궁 덕중(德中)과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도 정직하게 아뢰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를 받았다.
귀성군은 세조 13년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기화로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세조는 이준을 함길도(咸吉道)·강원도(江原道)·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 4도(道)의 병마 도총사(兵馬都摠使)로 삼고, 조석문(曹錫文)을 부사(副使)로 삼아 이시애를 토벌하게 하였다. 강순・허종・어유소등 중신들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는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마흘현(麻訖峴)에서 이시애군을 격파한다. 이 공으로 귀성군은 조선의 전군(全軍)을 총괄하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총관이 된다. 조선군의 최고 군령권자가 된 것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세조의 총애를 받는데다 자신의 지휘능력을 검증받은 종친이 조선의 군전체를 지휘하게 됨으로서 병권은 확실하게 왕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시애의 난이 평정된 이듬해 궁중에서 가진 연회에서 세조는 무희들에게, “누가 대장군(大將軍)인가? 귀성군(龜城君)이로다. 누가 천하를 평정(平定)하였는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천하(天下)의 인물인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소자(少子)인가? 귀성군이로다. 누가 대훈(大勳)인가? 귀성군이로다”라고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서 자신에게 귀성군이 어떤 존재임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그의 능력을 칭송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단순히 이준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왕실이 권력을 장악하기를 바랐던 세조의 희망에 기인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4년 6월 4일의 기사는 이러한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는 내외(內外)가 서로 도운 연후에야 바로 치평(治平)을 이루는 것이니, 안은 비고 밖에만 충실하여도 불가하며, 밖은 비고 안에만 충실하여도 또한 불가하다. 저번에 이시애(李施愛)가 난(亂)을 꾀할 때에 나의 안부(安否)를 알지 못하였다면 어떠하였겠느냐? 드디어 한 도(道)로 하여금 미연(靡然)히 따르게 하여, 이에 적구(籍口)가 모두 종친(宗親)이었으니, 만약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느냐? 이러므로 종실(宗室)의 친척이 내외에 분포(分布)하여 조정(朝廷)에 벌려있음은, 국가를 유지하는 방법인 것이다.”
세조는 결국 같은 해 7월 14일에 불과 28세의 귀성군을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조선역사상 드물게 국왕 바로 밑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의 자리에 종친이 오른 것이다. 아울러 태종의 외손인 남이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군령권을 가지게 된다. 정권과 병권 모두가 왕실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조가 죽은 후 정치적 상황은 강력한 종친이 존재하게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예종의 경우는 귀성군같은 힘있는 종친이 불편하면서도 신숙주나 구치관같은 권신들이 원신(元臣)들이 서정(庶政)을 처리하는 것에 불만이 있어 “난(難)을 평정하는 때에 반드시 의친(懿親)의 공(功)에 힘입었으니”라고 하며 귀성군을 가까이 하였다. 성종때 이르러서는 결국 세조가 정난(靖難)을 위하여 구축한 친위세력이 도리어 권력의 보지(保持)를 위하여 귀성군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하였던 정창손(鄭昌孫)은 성종 1년 2월에 귀성군이 역모사건에 연루되자 “세조의 한이 없는 은혜는 돌아보지도 않고서 궁인(宮人)을 몰래 간통하여 천륜(天倫)을 더럽혔다”고 하며 이준을 죄줄 것을 청한다.
사실 이미 세조 생존시에 한명회등을 ‘구훈(舊勳)’이라 하고 귀성군을 ‘신훈(新勳)’이라 하여 이미 귀성군을 새 권력의 중심에 세울 것임을 암시한바 있다. 이제 세조가 사망하자 ‘새로운 권력’이 되려는 귀성군에 대한 공격에 나선 것이다. 역모에 관한 언급은 없이 불문에 붙였던 후궁 덕중과의 스캔들을 다시 부각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정창손의 공세가 귀성군의 권세를 시기한 정치적 공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종은 일단은 거부했으나 다음날 세조의 측근중 한명이었던 신숙주까지 가세하여 재요청을 한다. 거듭되는 요청을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인수대비가 받아들임으로서 귀성군은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된다. 이로서 귀성군은 실각하고 종친들은 약 400년뒤 대원군의 등장때까지 권력의 중심에 복귀하지 못한다.
결론
조선은 지금까지 숭문천무(崇文賤武)의 나라로 인식이 되었다. 초기를 제외하고는 그 정치는 성리학의 해석차이로 인한 당쟁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인식이다. 특히 그 권력의 향배는 유교적 명분론을 얼마나 잘 내세우느냐에 걸려있었다는 것이다. 문인의 나라인 조선에서 권력과 병권은 일반적인 인식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특히 조선정치사의 기본축인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갈등, 그 균형추는 병권을 장악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왕이 친위세력을 가지고 병권을 장악하는 경우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지만, 군사 지휘권이 사대부들에게 있을 경우는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비록 로마의 경우처럼 근위대에게 왕이 살해당한다던가 하는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신하들이 근위대까지 장악하여 왕을 실질적으로 감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서양의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권력과 병권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모든 국가의 근본은, 그 나라가 구(舊)체제이건 신(新)체제이건, 아니면 둘이 혼합된 유형이건, 우수한 법(정치권력)과 군대이다. 그런데 우수한 무장(武裝)이 없는 국가는 우수한 법을 갖출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무장이 우수한 국가는 우수한 법을 가질 수 있다는 말로 연결이 된다.
국가에 있어 군주가 전쟁의 술(術)을 알지 못하고, 병사들에게 의지할 수 없다면 결국 권력을 강제할 물리적인 수단이 없는 셈이다. 특히나 그 권력을 나누어가지려는 세력이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만약 권력이 왕에게 가지 못하려는 세력에게 물리적인 힘이 있으면 정치권력의 행사는 고사하고, 군주는 그 일신(一身)의 운신마저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의 군왕들은 병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놓지 않으려 했다. 태종처럼 스스로 군사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하거나, 또는 세조처럼 병권을 적어도 왕실의 영향력 아래 붙잡아두려 했다. 그러나 유교정치가 안정기에 접어들은 성종이후, 정조가 재위하기까지 조선의 왕들은 병권을 온전히 손에 넣은 적이 없었다. 특히 ‘반정’이라는 파행적인 상황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군왕들에 있어서는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반정으로 전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보위에 올린 세력들은 권력을 결코 양보하지 않았고, 기존의 군사체계를 장악하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거사를 위하여 모병한 무사들을 정규군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병권을 손에 넣었다. 거사를 위하여 유교적인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정권을 운용하는데 있어 물리적인 힘을 사용했던 것이다. 물론 세조도 반정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거사를 자신이 주도하였고 친위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종친들을 통하여 병권을 장악하였기에 단종복위세력을 위시하여 반대세력을 일소하고 강력한 왕권을 실행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군사의 수도 늘어나고 군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지만, 병권은 군주와는 멀리 있었다. 특히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반정공신들이 사병을 공식적인 친위대로 만드는等, 병권에 대한 장악력은 늘어만 갔다. 이 때문에 정조가 즉위하면서 권신들의 사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존의 친위대를 약화시키고 자신만의 친위대를 만들어 이를 통하여 군권(軍權)을 행사였다. 그리고 정권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 당시의 최신 기술이 집약된 요새를 만들어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반란에 대비하였다.
이로서 병권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필자가 한 가지 얻은 결론은, 정치권력의 속성은 같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말’과 ‘붓’의 힘뿐만 아니라 ‘칼’에 의하여 유지가 된다. ‘붓’에 의하여 살고 죽은 것처럼 알려진 조선의 선비들이라고 이런 ‘권력’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왕권에 끊임없이 맞섰고, 이를 위하여 병권을 손에 넣으려 하였고, 이 때문에 신권을 견제하고자 하는 군왕들과 끊임없는 병권 쟁탈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색인
(조선왕조실록)
<太祖實錄>
<定宗實錄>
<世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中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논문)
강문식 <정조대 화성의 방어체제> (한국학보 22. 일지사. 1996)
박현모 <정조의 정치와 수원성: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미>
(한국과 국제정치 17.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2001)
(단행본)
<兵將說•陣法>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3)
강성문 <한민족의 군사적 전통> (도서출판 봉명. 2000)
김홍 編著 <韓國의 軍制史> (학연문화사. 2001)
(방송)
KBS <한국사傳> ‘무인(武人) 정조대왕’ 10/27/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