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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감옥서 석방 뒤 2년… '강철서신' 김영환] ②
나를 '배신자' '극우꼴통'으로 보기도 하지만… 난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김영환(51)씨가 114일 만에 중국 단둥(丹東)의 감옥에서 풀려난 날이 2년 전 바로 어제(7월 20일)였다.
서울 광화문의 지하다방에서 그를 두 번째 만났을 때 중국 감옥 얘기를 했다. ―중국 감옥은 어떠했나? "8평 남짓한 감방에서 25명이 함께 지냈다. 매끼 밀가루 빵 한 개와 국물이 나왔다. 감옥 안에 음식 가게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수감자들이 자기 돈으로 사먹을 수 있게 했다." ―당시 고문을 받았다고 했는데? "6일간 잠 안 재우는 고문을 받았다. 내가 버티자 이틀 뒤에 전기고문을 했다. 고문을 하기 전 내 얼굴에 복면을 씌웠고 혈압과 심전도검사를 했다. 전기고문에 의한 쇼크사가 생길까 봐 몸 상태를 체크한 것 같았다. 내가 조직의 핵심이란 걸 알고는 함께 수감된 후배 3명에게는 전기고문을 하진 않았다."
―명색이 'G2(세계 2대 강국)'라는 중국이 아직 고문을 하고 있구나. "정치범이 아닌 중국인 일반수들 중에도 전기고문을 받은 이들이 꽤 있었다. 나는 1986년 국내에서 수감된 적이 있었다. 그때와 비교해봐도 중국 구치소는 인권과 처우 면에서 더 떨어졌다. 미결수는 가족ㆍ친지 면회는 물론이고 변호사 접견도 안 됐다." ―중국 당국이 '고문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고 종용했다는데. "구치소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불필요하게 말하지 말라고 수차례 회유와 협박을 했다. 그러나 나는 접견한 영사에게 고문받은 사실을 폭로했다. 그때는 석방 교섭 중이어서 영사가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한동안 당신이 수감된 사실조차 몰랐다. "고립감이 컸다. 영사 접견을 계속 요구했지만 구금 29일 만에 이뤄졌다." ―얼마나 오래 갇혀 있을 것으로 봤나? "5~10년을 각오했다. 감옥에서 혼자 재판받을 준비를 했다. 법리 공방을 위해 다른 재소자가 몰래 들여온 중국 형법과 형사소송법 책도 봤다." 그가 중국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국내에서는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부정경선'이 터졌다. 그때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 이석기의 원내 진출이 이뤄진 선거였다. 통진당 내분은 종북 세력의 논란과 함께 폭력 사태를 불러왔다. 결국 통진당에서 온건파들이 떨어져 나갔다.
"중국 감방에서 강제 추방 형식으로 풀려나 귀국해보니 많은 기자가 나를 찾고 있었던 걸 알았다. 통진당 사태로 난리가 나있었던 것이다." ―이석기는 '민혁당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쭉 주장해왔는데? "법정에서도 '모두 조작됐다'고 했지만 그는 민혁당의 핵심이었다. 매스컴에 떠들썩했던 이석기의 'RO(혁명조직ㆍRevolution Organization)'도 민혁당 경기남부연합 위원장 시절부터 관리해오던 조직이었다. 뿌리가 오래된 것이다." ―민혁당 시절 이석기를 직접 만난 적 있었나? "직접 본 적이 없다. 민혁당은 점(點)조직으로 돼 있다. 직접 지휘하는 상급자가 아니면 보안상 못 만나게 했다." ―당신이 당수인데 경기남부연합 위원장을 본 적이 없다? "지하당이라 서로 누가 당원인지조차 모른다. 대부분 당원도 내가 당수인지 전혀 몰랐다. 나는 당 전체에 관한 보고를 받기에 이석기의 활동 사실을 아는 것이다." ―민혁당은 1992~1997년까지 존속했는데 한 번도 이석기를 만날 일이 없었나? "이석기에 대한 지시는 당 중앙위원인 하영옥을 통해서만 이뤄졌다. 하영옥은 나의 서울대 법대 동기였다." ―민혁당 규모는? "정당원은 100명쯤이고 산하에 RO가 17개 있었다. 보안을 위해 나눴을 뿐 RO 조직원들도 거의 정당원과 같았다." ―이들을 어떻게 뽑았나? "내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주사파들에 의해 '반제(反帝)청년동맹'이 조직됐다. 앞서 말한 하영옥이 이석기와 함께 만든 것이다. 내가 출소한 뒤 이를 '민혁당'으로 발전시켰다. '반제청년동맹' 간부들은 자동으로 민혁당원이 됐다. 이들이 각각 신입 당원들을 포섭했다. 나는 올라온 가입 서류를 보고서 적격 여부를 최종 결정했다." ―1991년 민혁당을 준비할 때는 이미 당신의 '이상향'이었던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졌다. "많이 혼란스러웠다. 마르크시즘 대신 주체사상에 답이 있지 않을까, 그런 미련을 가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김일성을 만나러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했을 때(91년 5월) 기대가 컸다." ―김일성을 직접 만나니 어떠했나? "내가 운동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사상이 있어야 했다. 그 결정적인 영감(靈感)을 북한 방문에서 받으려고 했다. 막상 가보니 북한은 주체사상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의 기본 개념도 몰랐다. 그와 대화를 하는 동안 너무 실망스러웠다." ―김일성을 만나고 온 사람들은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말하던데. "풍채와 언변이 좋고 친절하게 대해주니 그럴 것이다. 항일 빨치산 얘기를 할 때는 소탈해 보였다. 하지만 답을 찾아야 하는 사상가로서 내 심정은 절박했다." ―북한에 답이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 민혁당을 결성했는데? "새로운 운동 이념을 1년이면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젊고 패기만만했다. 북한에 기대지 않고 내 나름대로 주체사상을 연구했다. 그때 내가 연구한 내용이 나중에 황장엽 선생이 망명해 발표한 논문들과 거의 흡사해서 놀랐다." ―주체사상 연구의 결과는? "북한의 주체사상은 '수령론'과 '민족자주'를 내세운다. 황장엽 선생과 내가 말하는 주체사상은 '인간중심론'이었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데올로기가 돼야 강력한 실천적인 힘을 갖게 되는데, 단지 철학에 머물렀다." ―그 뒤 민혁당의 사회주의 혁명 정강 정책은 바뀌었나? "다른 당원들은 관성대로 종북주의나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이미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만날 수 있는 당원들을 설득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하다가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교육시켰다." ―내부 반발이 없었나? "이론적으로 나와 다툴 사람이 전혀 없었다. 나에 대한 신뢰도 강했다. 다만 하영옥이 문제였다. 김일성ㆍ김정일에 관해서는 아예 토론도 거부했다. 그때 하영옥을 당에서 제명시켰다면, 그 잔존 세력이 통진당으로 옮겨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있다." ―민혁당을 스스로 해산시켰는데? "당내 갈등이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하영옥ㆍ이석기 그룹 등이 반발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민혁당 안에서 북한과 접촉할 수 있는 통로는 나밖에 없었다. 내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민혁당 해체를 몰랐다." 민혁당이 해체되고 일 년 뒤, 남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이 우리 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그 안에서 증거물이 발견되면서 뒤늦게 민혁당의 정체가 드러났다. 1999년 공안당국에 체포된 그는 '사상전향서'를 쓴 뒤 공소보류로 풀려났다. 전향을 거부한 하영옥은 4년을 복역했다. ―전향(轉向)은 어떤 의미에서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한 자기 부정이다. "실상을 알았는데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게 두려워 진실을 외면할 순 없는 것이다." ―한때 동지였던 하영옥의 혐의 입증을 위해 법정에서 진술했다.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은 없나? "그는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았다. 통합진보당의 '종북주의' 계파는 그가 관리하던 조직에서 나왔다. 그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이다. 다만 그의 모친과 부인, 딸을 생각하면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마음이 든다." ―하영옥도 통진당의 배후와 관계 있나? "내가 알기로 하영옥은 조직에서 완전히 떠난 것 같다. 민혁당 시절 그는 이석기의 상급자였다. 하지만 그 뒤 둘 사이에서 권력관계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운동권 출신 야당 의원들이나 좌파 성향 단체에서는 당신을 어떻게 보나? "날 '배신자'라고 부를 것이다. 심지어 내 전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극우 꼴통'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일부 우파 쪽에서도 당신의 사상적 전향을 100%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의심할 수 있다." ―1985년 당신이 유포한 '강철서신'은 대학가에 친북(親北) 분위기를 불러왔다. "북한 단파방송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학생운동권이 '주사파' 일색으로 된 것은 상당 부분 내 책임이다." ―그 뒤로 후배들 중에는 잘못된 방향의 운동에 몸담는 바람에 정상적인 사회 진출이 좌절됐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상처를 안고 살았던 후배들이 적지 않았다. "여전히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 뒤의 내 활동은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철서신'→수감→밀입북해 김일성 접견→민혁당 결성→전향→북한민주화운동→중국에서의 수감 등 삶의 역정을 보면 '시대적 풍운아'라는 생각도 든다. 대학 들어갈 때 이런 삶이 될 줄 본인인들 알았겠나. "상상도 못했다. 학생운동권에 투신했을 때 고난의 삶을 살겠다고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내 삶이 다이내믹해질 줄은 몰랐다." ―앞으로 계획은? "통일을 준비하는 운동에 집중해 볼까 한다."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가? "자금과 조직이다. 대학 운동권의 기반이 완전히 붕괴됐다. 지금 운동은 1980년대 후반의 학번까지만 같이 하고 있다. 그 이후로는 좌ㆍ우파 할 것 없이 다 붕괴됐다. 40대가 주력이고 젊은 친구들은 없다." ―생활은? "원고료와 강연 수입. 아내가 체형교정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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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나라
첫댓글 김영환(58) 주사파 대부 강철 20210609 von 外 https://cafe.daum.net/bondong1920/8dIJ/6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