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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벌을 품에 안고
전승기념 요양 백탑
북경까지 걸어가는 동안 보고 느꼈던 오대 장관(五大壯觀), 십대 장관(十大壯觀)으로 예외없이 선택되었던 것은 바로 한량없이 넓기만 한 요동 벌판이었다. 강원도 대관령이나 경상도 조령만한 험한 재를 몇 개나 넘고 갑자기 접하는 풍광이기도 하려니와, 온통 산과 산틈에 태어난 그 틈에서 역사를 꾸려온 우리 한국인의 국토 인식에서 이 요동벌의 발견은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연암은 요동 벌판을 본 후의 감동을 《열하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떠돌아 다니는 존재에 불과함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뇌까렸다.'
연암은 얼마나 감격했던지 이 장관을 접하는 순간 눈물 흘려 울었다.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일행 중 정진사가 천지간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 울다니요, 하고 묻자 그 때 그 유명한 연암의 울음관(觀)이 도도하게 펼쳐진다.
"사람들은 희비애로(喜悲哀怒) 가운데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고 모든 감정이 사무칠 적에 다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노여움이 억울함이 사랑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법이오. 한데 슬플 때에만 우는 것으로 그릇 알고 있기에, 상을 당했을 때 애고애고 어이어이 하고 울고 싶지 않은 울음을 우는 모순이 생겨나는 것이오."
인간 실존을 위선으로 가리고 있는 당시 체제에 대한 가공할 도전이요, 반체제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체제에 고문받고 있는 휴머니즘을 옹호하느라 평생 이렇다 할 벼슬 하나도 못하고 만 연암인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것은 바보들의 세상에 강제로 떠밀려 나오는 것이 서러워 운다 했다. 하지만 연암은 막히고 답답하고 캄캄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갑자기 넓고 밝으며 후련한 곳으로 터져 나왔을 때 어찌 소리를 지르지 않고 견딜 수 있으며, 그 절규가 울음일 따름이겠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울음관을 펼친 연암은 이어 "여기서 1천2백 리 산해관(山海關)까지 사방 천지에 티끌만한 막힘도 없는 이 요동벌을 대하고 어찌 한바탕 울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이오." 라고 했으니, 답답하고 고식적인 기존 체제에 대한 자유분방한 자신의 사상을 대결시키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연암이 가던 길을 뒤따라가던 나도 요동벌을 시야에 담는 순간 안근(眼筋)이 눈물을 억누를 수 있을 만한 힘을 잃고 말았다. 물론 연암 같은 원대한 철학적 배경으로 울기에는 나의 정서는 너무 메말라 있었다.
연암이 이 길을 걸었을 때의 나이보다 내가 더 많고, 가는데 고생도 한결 덜하기에 느낌의 강도도 약할 수밖에 없는데, 울긴 왜 울었느냐고 혹 물을 것이다. 그것은 요동벌의 공기를 접하자마자 유황의 악취가 코를 막게 하고 자극성 가스가 눈 가장자리를 실룩거리게 하더니 눈물이 절로 솟아나온 때문이었다.
화학 공업단지가 들어서 있는 요동 평야는 바로 매연 평야가 돼 있었다. 요동 평야의 매연은 선인들이 느꼈던 장관이고 연암이 울면서까지 통감했던 감격마저도 오염시키고 만 맹렬한 것이었다.
중국 동북 지방의 5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요양(遼陽)하면 예나 지금이나 백탑(白塔)을 연상하게 마련이다. 그 넓은 요동벌의 3분의 1을 시야로 거느리고 추녀에 달린 물동이만한 풍경소리들이 그 시야에 미친다는 팔각(八角) 36길(丈) 13층 거탑(巨塔)이다.
《열하일기》에 보면 당태종을 따라 고구려를 쳤던 당나라 장수 울지경덕(蔚遲敬德)이 쌓은 것으로 적고 있다. 중국 문헌에는 고구려를 치고자 당태종이 요양에 와 있을 때 울지경덕으로 하여금 이 탑을 보수시켰다고도 하고 있다. 아무튼 이 요동벌을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를 몰아내고, 그 기념으로 창건했거나 보수를 한 전승 기념탑일 확률이 높은 것만은 부인할 길이 없다.
신라가 외세를 업고 백제를 정복했을 때 문화적 유산이라고는 깨진 기왓장 빼놓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파괴한 후 백제를 평정했다는 평제탑(平濟塔) 하나만을 후세에 남겼듯이, 지금 여기 고구려의 옛 땅에도 고구려의 흔적이란 티끌만한 것도 남김없이 오로지 평려탑(平麗塔)이라 할 백탑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서 주의를 끄는 것은 고구려를 쳤다는 울지경덕이란 장수다. 《구당서(舊唐書)》열전에 보면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 한족(漢族)이 아니라 변방 민족 출신의 귀화인인데다가,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친동생 같은 이름인지라 본이 고구려 사람이 아닌가 하는 심증이 가서 그렇다. 더욱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 했을 때 극구 말렸다는 정사 기록을 보니, 그 같은 심증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연행록에 보면 이 탑 아래서 천리경(千里鏡)을 보여주고 돈을 버는 사람이 있었다던데, 이 탑 4층에 새겨져 있는 푸른 은하수가 빛을 흘려낸다는 '벽한유광(碧漢流光)'이라는 글씨를 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심이 없을 때에만 보이고 앙심을 품으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마음을 가늠하고자 다투어 올려다보았다고 한다.
지금 2백여 년 전처럼 천리경 장사가 있어 들여다보았댔자 나의 눈에 그 글씨가 보일 까닭이 없을 것이다. 고구려를 둔 시공을 초월한 앙심이 비등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백탑 영내에 광우사(廣祐寺)라는 절과 사적비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이 절간에서 만든 두부가 조선 두부맛과 같아서 사행간에 소문이 나 있었다. 이미 명나라 때부터 조선 사람이 많이 귀화해 살았으므로, 광우사 두부도 지나온 설류참의 조선 김치처럼 조선의 어느 귀화 여인이 전수한 음식 문화일 것이 뻔하다.
명나라 때 제주도에서 중국땅에 표류하여 송환되었던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을 보면, 이 요양에서 계면(戒勉)이란 조선 스님을 만나고 있다. 할아버지가 죄를 짓고 도망와 3대째 살고 있다는 계면 스님은 이 지역에 적지 않은 조선인 2, 3세가 살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보다 용감하고 총을 잘 쏜다 하여 귀화인을 뽑아 군대의 최선봉으로 삼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하고 고구려 때의 유풍(遺風)이 많이 남아 있다고도 했다.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살았던 굴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죽는다던데, 우리 귀화인도 만나면 모두 고국에 돌아가고자 하나, 죄짓고 도망친 것이 두려워 엄두도 못내고 있습니다."
이 귀화 스님의 말 가운데 당시만 해도 조선 귀화인들이 요양성 안에 고구려사(高句麗祠)를 모셔 결속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만하다.
당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적(李勣)이 바로 이 고구려의 요양성을 포위, 침공했을 때 그 성 안에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을 모시는 고구려사가 있었다 한다. 그 사당 안에 미녀 하나가 시조신을 받들고 있었는데, 이 미녀가 시침(侍寢)을 하면 신이 매우 기뻐하여 포위된 성이 풀리도록 신조(神助)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요양성에 고구려 백성들을 구심시키는 시조 신앙이 있었으며, 고구려가 당나라에 패망한 후에도 고구려 유민들간에 신앙이 되어 최부가 표류했던 15세기 조선조 성종(成宗) 때까지도 잔존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사행길 안전을 빈 관제묘
요양에서 조선 사신의 행차를 노리는 좀도둑이 극심했던 것 같다. 심지어 가마를 단속하지 않고 두면, 좀도둑이 가마에 붙은 쇠붙이나 수실까지도 떼어가며 말안장까지 들고 가버린다.
그리하여 말을 타지 않고 걸을 때에는 연암의 종놈인 장복(張福)이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워진다. 말안장일랑 들어서 머리에 쓰고 발받이인 등자는 쌍쌍으로 어깨에 메고 앞서 가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 없이 길을 비키라고 호령하며 걸어갔던 것이다. 이를 보고 연암은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왜 네 눈깔만은 가리지 않고 가느냐, 한눈 팔면 눈깔도 빼간다는 요양땅인데."
정이 들 대로 든 장복이는 후에 상전인 연암과 이별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이별 장면에 연암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먼저 돌아가는 일행은 고갯길을 다 넘어가는데도, 장복이만은 이별 장소인 강가에서 연암의 말 등자를 붙들고 흐느끼고 있었다.
장복이가 등자를 붙들고 우는 모습을 보고 차마 말을 몰 수 없었던 연암은 마상(馬上)에서 이별에 대한 철학적 상념에 빠져들었다.
'괴롭기로 말하면 하나는 떠나고, 다른 하나는 남게 될 때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다. 이별을 하되 어디서 이별했느냐는 그 장소가 괴로움을 더하고 덜하게 하는 요인이 될지 나 미처 몰랐던 것이다. 괴로움이 가중되는 장소란 정자도 아니요, 누각도 아니며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니, 물을 만나 건너가고 머물고 하는 강가가 이별의 적지(適地)인 것을.'
한낱 종놈과의 이별을 이토록 절실하게 우회해서 표현한 어떤 글도 나는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연암은 우리 민요 가운데 강가에서 배 띄워 보낼 때 부르는 이별가 '배따라기'를 연상, 그 노래를 들을 때가 제일 눈물나는 순간이었음을 대뇌이고서 병자호란으로 인질 잡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자주 당했을 이별의 아픔으로까지 감정을 발전시키고 있다.
'슬프다! 소현세자께옵서 심양(瀋陽)의 인질관에 갇혀 계실 때 모시는 신하나 지나가는 사신들이 머물고 떠나기를 수없이 했으니, 떠날 때마다 떠나가고 남는 자를 둔 이 고통을 감당하셨을 걸 생각하면 지금 마상의 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만다.'
종놈과의 이별을 두고 지엄한 왕세자까지 연결시키는 사상적. 정서적 발전은 당대에 있어 가공할 체제 반동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들 때문에 연암이 장하고 또 《열하일기》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 것이리라.
이 요양땅에 들른 사행들이 예외없이 들르는 곳으로 백탑 이외에 관운장을 모시는 관제묘(關帝廟)가 있다.
관우(關羽)는 무운(武運)과 재운(財運)을 관장하는 중국의 도교신으로 우리나라에도 임진왜란 후 도입되어 동관묘(東關廟), 남관묘(南關廟), 북관묘(北關廟) 등에서 군신(軍神)으로서 모셔져 왔다. 그 요양 관제묘의 당시 광경을 보자.
'사당 속에서 노는 수천 명의 건달패들이 더러는 총과 곤봉을 연습하고, 더러는 주먹놀음과 씨름을 겨루기도 하며 또한 눈먼 말을 타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더러는 앉아서 《수호지(水滸誌)》를 읽는 이를 빙 둘러싸고 있기도 한데,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종로 종각 앞에서 《임경업전(林慶業傳)》을 읽는 입담꾼과 흡사하였다.'
사행이 이 관제묘에 들르는 이유는 반드시 구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국경선인 책문(柵門)을 지나서 겨우 요양까지 오는 데만도 도중에서 병들어 죽은 자가 세 명이나 되었다.
더욱이 하인들은 언제 어디서 병들어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죽어 개처럼 묻힐지 모른다는 위구심으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 불안을 달래주는 수단으로 관제묘에 무사 무병과 안전을 비는 고사(告祀)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이곳에 들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행 중 당상의 역관으로 하여금 통돼지 한 마리를 잡게 하고, 약과. 대추. 곶감을 제물로 차리고 지전(紙錢)을 태워 안전을 빌었다.
사행 중에는 불교를 믿는 사람도 적지않아 관제(關帝)의 보우보다 부처님의 보우를 주장, 인근 관음사(觀音寺)에도 공양을 하는 이원기도(二元祈禱)를 올리기도 했다.
요양성의 서문밖에 있던 이 관제묘를 물어 물어 한나절을 찾아갔더니, 묘는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흔적도 없고 그 자리에 들어선 서관(西關) 소학교라는 이름에만 잔존돼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관음사만은 문화혁명의 파괴로부터 복원되어 현장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고구려의 옛 아성인 요양성에서 이루지 못했던 미련은 고려 때 이 만주지방을 지배했던 심왕(瀋王)의 유적이나 고적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원나라의 후견으로 고려로 하여금 이 지방을 다스리게 한 시기가 있었는데, 그 고려의 식민 총독을 심왕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이 요동 벌판에서 한민족의 통치 흔적은 지우개로 지우듯 모조리 지워졌거나 변조돼 있는데 반해, 고구려 세력을 물리친 당태종의 주필산, 곧 친정군(親征軍) 사령부가 자리했던 수산(首山)만은 사적으로 보존돼 있었다.
효종의 채소밭
연암과 한 집안의 후학으로 박남수(朴南壽)라는 이가 있었다. 언젠가 연암이 그 집에 들렀을 때 자신이 지은 《열하일기》에 대해 말이 미쳤는데, 박남수가 불쑥 연암에게 대들며 그 저술의 문장을 비난하였다.
"선생의 글이 비록 훌륭하긴 하지만 경학(經學)의 본도(本道)에 맞는 고문체(古文體)가 아니라 이야기책에 나오는 문체로, 눈물이나 짜고 계집 이야기나 하며, 천한 종놈 행색이나 씀으로써 우리 고문체를 망가뜨렸으니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연암은 충격을 받고 드러눕더니 벌떡 일어나 가지고 있던 《열하일기》초고에 불을 질러 태워버리려 하였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후학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이 달려들어 말렸으니 망정이지, 자칫 했으면 우리나라 불후의 명작 하나가 사라질 뻔했다.
흥분을 가라앉힌 연암은 남수를 가까이 불러 앉혀 말했다.
"마음속에 북받쳐오르는 크고 작은 생각과 감정을 문장에 의탁하려다 보니, 고문체 가지고는 만의 하나도 나타낼 수 없어 멋대로 쓴 것뿐이다. 너는 아직도 젊고 재질이 많으니 나를 닮지 말고 정학(正學)에 매진하여라. 자 이제 문체를 버린 죄과로 벌주를 들겠다."
그러고서 연암은 큰 잔에 술을 벌컥벌컥 기울이더니 크게 취하였다 한다.
이 《열하일기》가 나오자 기존 학자들간에는 도학을 오염시키는 이야기책 식의 천한 문장이라 하여 대단한 반발이 일었었다. 바로 이 반동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하여 한국 문학사에 중요한 과도기적 사건이 되고 있다.
연행길에 멀리 부녀자가 시야에 들면 일행끼리 네 첩이다 내 첩이다 하며 첩을 정하여, 뉘 첩이 더 예쁜가 겨루는 구첩(口妾)놀이 따위나 쓰고, 유숙할 때 부엌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천하 일색의 가인이라며 음심(淫心)을 품은 따위를 씀으로써 지엄한 문체의 위엄을 훼손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요동벌의 광활함을 보고 대장부가 눈물이나 흘리더니 요양성 안에서는 누추한 종놈 행색이나 쓰고, 그 종놈과 이별할 제 임금과 이별한 것보다 더 처절하게 쓰다니 이런 망신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선각자는 언제나 비난받게 마련이다. 사실 연암의 문체 혁명이 없었던들, 우리에겐 역사상 일어난 사실들의 껍데기만 전수되었을 뿐 알맹이는 조금도 전수되지 않았을 것이 자명하다.
이를테면 우리 한민족이 고려가 사대(事大)했던 몽고족이나 조선조 전반에 사대했던 한족(漢族), 조선조 후반에 사대했던 청족(靑族)에게 굽신거렸던 것은 정치적인 의례에 국한되었을 따름이지, 오히려 일반 백성들은 이들 동북아 이민족들에게 열등감은커녕 우월감을 가지고 대했음이 상식이었음을 오로지 연암의 《열하일기》에서만 엿볼 수 있다. 곧 연암은 종전의 사대사상에 뿌리를 둔 문체로부터 주체사상에 뿌리를 둔 문체로의 대담한 혁명을 수행하였으며, 《열하일기》는 바로 그 혁명의 찬란한 금자탑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양땅을 지나 심양에 접근하면서 연암은 일단의 몽고의 수레꾼과 마주친다. 우리 사행의 말몰이꾼이나 하인들은 이들을 자주 보아 알아 온 터인지라 희롱하고 조롱하는데, 연암은 좀 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말몰이꾼이나 하인들은 채찍 끝으로 몽고인의 벙거지를 퉁겨서 길 옆 수렁으로 빠뜨리거나 혹은 공처럼 차고 나가기도 했다. 또는 뒤로 돌아서 벙거지를 벗겨 밭으로 도망가면 몽고인들이 따라오는데, 쫓기는 척하다가 돌아서서 쫓는 자를 넘어뜨리고는 배 위에 올라타 검불을 입에 물려 놓고 깔깔대기도 했다.
이렇게 조선 하인의 노리개가 되면서도 몽고인은 성내지 않았으며, 장난이 심하다는 표정만 짓고 벙거지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애원하곤 했던 것이다.
조선 하인이 한족이나 만주족에게 대하는 것을 나쁘게 이야기하면 버릇이 없고 좋게 이야기하면 당당하다 할 수 있겠으나, 연암은 이 같은 무엄한 행동이 알게 모르게 우리가 그들보다 문화나 지식, 생활 측면에서 우위라는 막연한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보고 있다. 이 같은 연암의 관측은 2백 년 후 그 길을 뒤쫓고 있는 나에게도 어느만큼은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남쪽에서 심양을 감싸흐르는 혼하(渾河)벼에 이른다. 심양의 남대문으로 통하는 혼하의 옛 나루터를 물어 물어 찾아가니 요양. 심양간 고속대교가 놓인 곳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지점이었다.
굳이 사라지고 없는 옛 나루터를 찾는 뜻은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볼모가 되어 잡혀가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세자빈 강씨, 후에 효종(孝宗)으로 등극하는 봉림대군 일행이 바로 이 나루에서 인계 인수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기록인 《심양장계(瀋陽狀啓)》4월 13일자를 보면 이렇다.
'세자 일행이 혼하변 야판(野坂)에 이르자 청나라 조정을 대표한 용골대(龍滑大) 등 1백20여 명이 강변 백사장에 차일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도착하자 그들은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강만 건너면 심양땅이니 황제가 아닌 인근 왕후(王侯)의 부인은 가마를 타고 다닐 수 없게끔 법도가 돼 있으므로 말을 타고 성 안에 들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우리측에서 세자나 대군 부인들이 평생 말을 타본 일이 없으니 예외로 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 혼하변 야판은 연행하는 사행들의 눈물과 회포를 자아냈던 단장(斷腸)의 나루터이기도 했다.
심양 성 안에 갇혀 살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답답하기 그지없었고, 그 점을 안 청나라 태종은 바로 심양 남대문 밖 야판에 너른 밭을 하사하고 그 곁에 정자를 지어 채소를 가꾸며 소일하도록 한 것이다.
연행하는 사신이면 누구나 이 야판전(野坂田)을 지나면서 푸성귀를 손수 가꾸던 효종을 예외없이 되뇌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 연행록 중의 하나인 《계산기정》의 야판시를 옮겨본다.
야판의 모진 세월 되뇌이니 눈물이 가이없이 흐르는구나.
동쪽으로 머리 돌리고 남은 눈물 마저 닦으니
효종이 묻힌 능 위에서 저녁 구름이 걷힌다.
야판의 밭이랑은 어디 가고
밭가의 전자는 모래언덕이 되었구려.
한마디 풀피리 울려오니
갈매기 안개 낀 물섬에 내려앉는다.
옛날 서울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던 동숭동 낙산(駱山) 밑 일대의 지명은 홍덕이밭(弘德田)이었다. 효종이 심양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홍덕이라는 나인(內人)이 이 야판전을 오가며 채마를 가꾸어 효종에게 김치를 댔던 것이다.
효종은 볼모에서 풀려나 본국에 돌아와서도 이 홍덕이의 김치맛을 잊을 수 없어 그로 하여금 김치를 담가 올리라 하여 먹었고, 그 대가로 홍덕이에게 이 낙산 밑 밭을 주어 채마를 가꾸도록 해서 얻은 지명인 것이다.
지금 심양 혼하 강변, 효종의 정자가 섰던 야판전 둔덕에는 버드나무 방풍림이 울창하고 그 강변 쪽으로는 오리와 닭을 기르는 장(場)이, 내륙 쪽으로는 배추와 무밭이 펼쳐져 있어 무상감을 더해주고 있다.
폐허가 된 조선관
심양(瀋陽)은 중국 통일 이전의 청나라 서울이다. 우리 사신들이 심양성의 대남문(大南門)을 통해 들면 맨 먼저 찾게 마련인 현장이 바로 병자호란 때 삼전도(三田渡) 굴욕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와 8년 간이나 갇혀 살았던 조선관(朝鮮館)이다.
나도 대남문을 통해 심양에 들자마자 맨 먼저 찾아 나선 곳이 바로 고려관(高麗館)이라고도 불리는 이 조선관이었다. 물론 2백여 년 전의 사신들 기록 이외에는 찾아볼 아무런 흔적이며 실마리도 없는 거리의 방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기행에서 꼭 찾아보지 않으면 영원히 망각될 것만 같아, 반드시 찾고 말겠다고 마음먹은 몇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조선관이기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찾아내고야 말았다.
먼저 이 조선관의 위치를 적은 각종 사행 기록을 모조리 모두었다. 한데 대체로 사실적이지 못했다.
영조(英祖) 연간에 이곳에 온 유언술(兪彦述)은 '효종께서 유하신 관사는 남문 안에 있는데, 지금은 폐가가 되어 황량하기 짝이 없다.' 했고, 김창업(金昌業)은 '심양 남문을 들어서 백여 보를 걸어가 동쪽으로 꺾어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조선의 볼모들이 갇혀 살았다던 집터가 나왔다.' 했으며, 필자 미상의 사행 기록 《계산기정》에는 이 조선관의 폐허를 보고 시 한수를 남기고 있다.
쓸쓸한 가을 옛거리에 안개비가 자욱한데
이곳에 우리 임금 몇 해나 머물렀던가.
지는 해 서글픈 바람 부질없는데
관문에 조선관이란 글씨 정녕 바람이 지웠을까.
이 우리 사행들의 기록 이외에 1917년 중국에서 간행된 《심양현지(瀋陽縣志)》의 지도를 참고하니 바로 대남문 안 동쪽에 '고려관호동(高麗館胡同)' 이라는 골목 지명이 명기돼 있고, 일제 초의 한 기록에 그 조선관 자리에 대동학원(大同學院)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더 알게 됐다.
그렇다면 맨 먼저 확인해야 할 위치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남문 자리다. 그런데 그 남문 자리가 지금은 가장 번화한 중심지의 네거리로 변해 있었다. 다시 그 네거리의 동쪽 인도를 따라 북쪽을 향해 발걸음 수를 헤아리며 백여 보를 걸어갔다. 김창업이 백여 보 정도 걸으면 골목이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데 골목은 없고 왜색 짙은 커다란 2층 기와집이 그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히 조선관의 위치는 그 건물이 자리한 곳일 수밖에 없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전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심양 시립 아동도서관이 들어서 있었다. 사무실 주임이라는 직함의 도서관장을 찾았더니 공교롭게도 장국철(張國哲)이라는 조선족 2세였다. 그는 이 도서관이 조선의 왕자와 대신의 자제들이 인질로 잡혀와 살았다는 곳이라는 막연한 구전을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 문헌적 근거를 찾고자 했던 참이라면서 '심양에 관광 유적이 하나 탄생되었다.'며 반가워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 초에 지은 화양식 건물로 건평 1천1백 평에 입 구(口)자 형으로 지어져 있었다. 구조가 학원으로 쓰기에 알맞게 지어진 것으로 미루어 바로 조선관 자리에 지었다던 대동학원 건물인 것이 분명했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 보면 조선관 시대의 건물 배치가 기록돼 있다.
대문은 남쪽으로 나 있으며 문간채가 3칸이고, 대문을 들어서면 남향으로 5칸의 정방(正房) 이 있어 세자와 대군이 기거했다고 한다. 또 그 양편으로 5칸씩 나란히 상방(廂房)이 있어 수행한 조신들이 살림을 맡은 호방(戶房), 외무를 맡은 예방(禮房), 마필(馬匹)을 관장하는 병방(兵房), 조선관의 수선을 도맡은 공방(工房) 등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문밖에 하인들이 가가를 짓고 기거했는데, 집이 좁아 노숙하는 자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심양에서의 연암은 함부로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밤에 몰래 빠져나와 현지 상인들과 취하도록 마시며 필담을 나누거나, 출입이 금지된 청나라 임금의 행궁에 들어가 구경을 하는 등 왕성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있다.
연암이 조선관의 폐허에서 느낀 감상 지수를 살펴보자. 그는 그 잦은 사신들이 심양에 들렀다 떠나갈 때마다 남아 있어야 하는 세자나 대군의 애끓는 사심을 헤아리고 있다.
'떠나가는 사행들을 멀리까지 바라볼 때 요동 벌판 한없이 아득하고 심양의 수목들 아스라한데, 사람 가는 것은 콩알만 하고 말이 가는 것은 겨자씨 같다가 마침내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에 사라져 버릴 제 갇혀 있는 세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조선관에서 연암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연암이 느꼈던 애상(哀想)의 십분의 일도 못 느끼는 메마른 나의 감상이 얄미워진다.
청태종의 고궁
병자호란으로 인해 인질로 잡혀 있던 세자 일행의 숙소이던 조선관을 나와, 북쪽으로 백여 보 가서 서쪽으로 굽어들면 우리 나라 광화문 앞 같은 육조(六曹) 거리가 나온다. 다시 그 육조 거리에서 백여 보 더 가면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청태조 누루하치와 청태종 혼타이지의 왕궁이던 심양 고궁(故宮)에 이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해, 혼타이지가 태종으로서 즉위식을 올렸을 때의 일이다.
인근 각국에서 축하 사절이 몰려와서 새로 탄생한 황제에게 배례를 하는데, 유독 조선에서 온 사신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만은 꿇어 엎드리는 배례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당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만약 청나라 임금에게 배례한다면 이군불사(二君不仕)의 유교 윤리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청태종이 이 용감한 조선 사신을 두고 한 말이 《청사고(淸史稿)》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는 조선 국왕이 우리 청나라를 원수로 삼고자 나로 하여금 이 사신들을 죽이게 하여 그 구실을 만들려는 수작이다.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청태종은 이 사신들을 석방시켜 돌려보내면서 조선 국왕을 질책하는 서한과 왕세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를 묵살하자 청태종에 의한 병자년의 조선 친정(親正)이 감행되었고, 삼전도의 굴욕과 왕세자의 인질이 실현되고 만 것이다.
심양 고궁에 들면 가장 안쪽에 청녕궁(淸寧宮)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청태조와 태종의 침전(寢殿)으로 기거하는 생활 공간과 제사 지내는 신성 공간으로 양분돼 있었다.
청녕궁 앞뜰에는 하늘의 뜻을 중개하는 솟대가 서 있는데, 이것은 하늘의 뜻으로 정사를 베풀었던 샤머니즘 신앙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궁전 앞뜰 복판에 까마귀 모양의 나무새를 새겨놓은 이 솟대는 우리 한국의 여염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대와 다를 것이 없어 샤머니즘의 북래설(北來說)을 실감케 해주었다.
바로 이 솟대 아래에서 청태종이 즉위식을 올렸었고, 우리 기개 있는 두 사신이 굴욕적인 배례를 거부, 갇힌 몸이 된 바로 그 현장인 것이다.
그 침전 동서 양편에 두 채식의 궁궐이 들어서 있는데 왼편 궁궐이 관수궁으로,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고궁을 안내하는 관광 안내원들은 한결같이, 바로 관수궁 앞뜰에서 인질로 잡혀온 소현세자 일행이 보름 동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끝에야 청태종의 용서를 받았다고 했으나, 당시 각종 문헌을 추적하면 그러할 시간도 없었고 그러할 상황도 아니었다. 다만 입궁하면 관수궁에 머물러 대접받았던 데서 비롯된 속전일 것이다.
세자 일행이 궁에 처음 들어간 것은 심양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의 일이다. 그 후에도 매월 5일, 15일, 25일 왕궁의 제삿날과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치거나 하면, 입궁하여 다정하게 대접받고 진과연(眞瓜宴)이라는 잔치에 상객으로 초대되기도 했다. 또한 진기한 새나 짐승, 꽃이 들어오면 심심풀이로 즐기라고 보내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보를 차단시키고자, 우리 사신들이 인질 기간중 60여 회나 심양에 들렀음에도 접촉하지 못하게끔 격리시켰으며 청나라 왕자나 고관들도 금족령을 내려 접촉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태종의 배다른 동생인 아지게(阿濟格) 왕자만이 몰래 문안을 드리고 과일 등을 숨겨 보내곤 하며 친밀을 기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청나라로서는 사치품이던 조선산의 초피(貂皮)나 수달피, 꿀. 잣. 무명 등 물화를 얻고 싶은 저의 있는 친밀이었던 것이다.
이 심양 고궁에서 기억해둘 조선 여인 하나가 있다.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으로 조선에서 잡혀온 피로인(被虜人) 출신이다. 그녀는 얼굴이 고왔던지 궁중에 발탁되어 들어갔다가 청태종의 후궁이 되어 한동안 이 고궁에서 치맛바람을 날리며 군림하기도 했다.
여진족의 결혼 풍속이 이합(離合)이 무상했기로, 이 조선 여인은 당시 귀족에게 다시 시집가 잘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왕궁에 발탁된 그 많은 조선 여인들은 조선 침략에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하가(下嫁)시킨 것으로 문헌에 나온다.
이 지역에서는 소쩍새의 별칭을 곡고려(哭高麗)라고 한다. 수많은 조선 여인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 땅에 잡혀와, 못 돌아가는 고향을 그리다가 원혼이 되어 '곡고려 곡고려' 하고 울어댄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소쩍새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한많은 새가 되어 있었다.
삼학사 형장
소현세자 일행이 인질로 잡혀 있던 심양 조선관을 나와 북쪽으로 조금 가면 네거리가 나오고, 서쪽으로 돌아서면 청나라 초기에 육조(六曹)가 들어서 있던 아문(衙門) 거리가 나온다.
이 아문 거리의 끝이 바로 척화 삼학사(斥和 三學士)가 처형되기 전까지 갇혀 있었던 예부(禮部) 건물이다.
척화 행위에 대해 문초받는 자리에서 홍익한(洪翼漢)은 "나의 피를 너의 전고(戰鼓)에 바르고, 혼은 고국에 돌아가 노닌다면 가슴 시원하겠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전고를 새로 만들면 적병을 잡아 죽여 그 피를 틈새에 칠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한 말일 것이다.
도 청장(淸將) 용골대(龍滑大)가 남한산성에서 척화한 중신들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치자, 홍익한의 대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작년 봄에 네 놈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疏)를 올려 네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오로지 나 한 사람뿐이었다."
청태종이 심양에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살도록 은혜를 베푼다고 하자, 윤집(尹集)은 "난리통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처자식인데 허튼 수작 말라 일러라." 하였고, 오달제(吳達濟)는 "내 임금 계시는 고국에 못 돌려줄 양이면 빨리 죽여주는 것이 바람이다."라고 했다.
그 길로 그들은 심양 외성(外城)의 서문밖에 끌려가 처형됐는데, 그곳은 오랑캐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라고 《충렬공유사(忠烈公遺事)》에 적혀 있다.
《열하일기》에 보면 삼학사 성인(成仁)의 날을 정축(1637) 4월 19일로 잡고 그날에 제사를 지내는데, 청태종 사적에는 3월 6일로 돼 있다고 고증하고 있다.
삼학사가 처형당한 형장은 천주교 박해 때 순교자를 양산시킨 바로 그곳으로, 1900년 전후에 만들어진 심양 지도에는 법국(法國, 프랑스) 천주당이 그 순교 현장에 지어져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시립 중산공원(中山公園)과 공원 안의 어린이용 체육장으로 변해 있었다.
고국에 못 돌아가고 중공(中空)을 헤매고 있을 세 원혼이 350여 년 만에 조국의 한 핏줄이 찾아와 그 뜻을 기리며 배회하는 몰골을 보는지 못보는지……. 국교가 무르익으면 반드시 이 공원 아담한 한구석에 초혼비(招魂碑)나 순의비(殉義碑)를 세워야 할 역사적 부채를 절감한 것이다.
심양의 박지원은 이곳에서 갖은 악행을 다 저지른 반역자 고아마홍(古兒馬紅)을 상기하며 치를 떨고 있다.
평안도 은산 관노(官奴)였던 정명수(鄭命壽)는 청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역관이 되어, 병자호란 후의 양국 관계를 떡 주무르듯 주물렀다. 그는 이름마저 고아마홍이라는 청국 이름으로 개명하고, 청나라 관복을 입고서 임금을 업신여겼을 뿐만 아니라, 삼공육경(三公六卿)에까지 이놈저놈 모욕 주길 일삼았다.
심양의 세자 일행에 대한 횡포며 수탈을 보다 못한 세자의 수행재신(隨行宰臣) 정뇌경(鄭雷卿)이 정명수의 죄목을 청나라 조정에 고발하여 처치케 하려 했으나, 오히려 정명수에게 되말려 형장에 끌려가 처형을 당하고 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정뇌경이 조선관에 들러 세자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자, 세자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남한산성을 나오던 날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이 날 따라가길 꺼려 했는데, 그대만이 홀로 자청해 따라와 3년을 더불어 고생하고 이렇게 되다니!' 하며 서로 붙들고 울면서 떨어지질 않았다.
형장에 이르러 정뇌경을 참형(斬刑)하려 들자, 따라간 동료가 우리나라에서 학사는 참형을 않고 교형(絞刑)을 한다고 청원, 교형을 받게 하였다.
후에 고국에 돌아온 효종은 한 공주를 정뇌경의 아들과 혼인시켜 그 절의에 보상하려 했으나, 공주가 일찍 죽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삼전도에 세워진 굴욕적인 투항 비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선비 오준(吳埈)은 그 글을 쓰고 나서 치욕스런 손목을 잘랐다고 한다. 그렇듯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비굴한 인물에 대해서는 글쓰기를 기피하는 성향이 있었다. 못된 인간의 이름만 들어도 오염된다 하여 물을 떠오라 시켜 귀를 씻었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많은 사신들이 이 심양에 들러 정명수의 행적에 치를 떨었을텐데도 써 남긴 것이 별로 없음이며, 그런 것에 초연했던 연암도 고아마홍이라는 정명수의 청국 이름으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음이 알 만해지는 것이다.
조선인 노예 시장
병자호란의 전리품으로 청나라 병사들은 많은 조선인 남녀를 납치해 갔다. 그때 이 피로인들은 노동력 또는 처첩으로 전공(戰功)의 대가로 분배하고, 그러하고도 남은 수만 피로인들은 심양 외성(外城) 남변문(南邊門) 밖 시장에서 일반인에게 매매를 했다.
피로인을 매매하는 인신 시장이 심양에 섰다는 소문을 들은 고국의 가족들은 돈을 마련, 속환을 하려고 심양에 몰려들었다.
가장 피로인이 많았던 곳은 피난지인 강화였다.
강화 선비 강해수(姜海壽)는 병자 난리에 어머니와 아우 그리고 아들 도합 셋을 납치당했다. 그런데 이 세 피붙이를 속환해 오기에는 너무도 가난한 살림살이였다. 다행히도 심양에서 조선 담뱃값이 좋아, 크게 한 짐만 지고 가면 세 사람 모두 속환해 올 값이 된다는 사실을 안 강해수는 담배 한 짐을 지고 3천리 길을 떠났다.
그러나 너도나도 담배 짐을 지고 심양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담뱃값이 폭락하였고, 강해수의 속환 계획은 차질이 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한 짐 팔아 세 몫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 두 몫밖에 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강해수는 세 식구 가운데 두 식구만을 선택해야 하는 고된 시련 앞에 서게 된다. 그가 남변문 밖 시장을 찾아갔더니 아우와 아들만 있고 어머니는 보이질 않는지라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납치 도중에 지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속환할 돈이 두 몫밖에 없는지라 잘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활한 오랑캐들은, 조선 사람들이 죽고 없는 부모의 신주(神主)를 산 사람 이상으로 위한다는 사실을 알고 신주도 여느 산 사람과 똑같은 값을 받고 속환시켜 주었던 것이다.
강해수의 선택은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밖에 없었다. 아들과 아우를 속환하고 어머니 신주를 이역땅에 버리고 가는 경우와 어머니 신주와 아들을 선택하고 아우를 두고 가는 경우, 어머니 신주와 아우를 선택하고 아들을 버리고 가는 경우가 그것이었다.
요즈음 시대에 생명이 없는 나무 조각인 신주를 버리고 아들과 아우를 선택하는 데는 예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강오륜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긴 우리 옛 선비들에게 있어, 어머니의 신주는 한낱 나무 조각일 수가 없었다. 조선조 후기 그토록 혹독했던 천주교 박해가 어머니 신주를 태운 데서 비롯되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비 강해수는 영순위로 어머니의 신주를 선택했다. 다음 순위로서 아들이냐 아우냐도 고달픈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경우 아들을 더 데려가고 싶은 것은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심정이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것일수록 멀리하고 도리를 우선시하는 것이 선비 정신인지라, 강해수는 가장 데리고 가고 싶었던 나어린 아들을 얼어붙은 이역땅에 버려두고 아우만을 데리고 돌아왔던 것이다. 선비행실을 하기가 이토록 고달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기록들인 《심양장계(瀋陽狀啓)》와 《심양일기(瀋陽日記)》를 보면, 정축년 정월에 인조대왕의 삼전도 굴욕이 있었고, 심양 남변문 밖 시장에서 피로인들의 인신 시장이 선 것은 그해 5월 17일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 때 이 시장에서 매매된 인신 수는 수만명에 이르렀고, 신주까지 팔아먹는 횡포뿐 아니라 신분에 따라 값을 크게 달리하여 사족(士族)에게는 두당 최고 천 냥까지 호가하는 바람에 속환하지 못하고, 밤낮 세자 일행이 인질 잡혀 있는 조선관 앞에 와서 부둥켜안고 통곡으로 지새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극의 현장인 심양의 남변문 밖 노예시장은 이제 찾아볼 길이 없다. 다만 외성 바로 문 밖마다 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남변문 밖 시장터를 물어 물어 찾았더니 남탑(南塔)이 서 있는 빈터 일대로 추정되었다. 심양 최대 최고(最古)의 도매시장인 도매시장이 이곳에 있다가 지금은 도심으로 옮겼다기에 더욱 심증을 굳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 공지를, 자전거 데이트를 하던 두 남녀가 키스를 하며 스쳐간다. 3백60여 년 전 고된 선택의 고민을 했던 한 조선 선비에 대한 환상이 그래서 깨지고 만다.
유조구의 담배 농사
해질 무렵 말을 타고 심양 교외를 가고 있는 연암 앞에, 참외파는 중국 노인 하나가 다가와 엎드려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이 늙은이 혼자 길가에서 오이를 팔아 근근히 지내는데 아까 당신네 조선 사람 네댓 명이 이곳을 지나다가 쉬면서 값을 치르고 오이를 사먹더니, 떠날 즈음에는 각기 하나씩 들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에 연암이 그럼 바로 윗사람에게 찾아가 하소연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그렇지 않아도 그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른, 말이 통하질 않아서 그러했는지 벙어리인 척하길래 죽기로 뒤쫓아 갔습니다. 그랬더니 가는 길을 막으며 오이로 냅다 저의 면상을 갈려 눈에서 별이 나고, 아직도 그 오이물이 채 마르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다.
연암은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 오이 파는 노인의 저의와 수작을 눈치챘다.
예상했던 대로 노인은 연암에게 손을 벌리며 청심환(淸心丸) 가진 것이 있으면 한 알 달라고 하였다. 연암이 고개를 흔들자 그럼 담배라도 한 움큼 달라는 것이었다. 그도 고개를 흔들자 이제 마부인 창대의 허리를 껴안고 오이를 강매하려 드는 것이었다.
사행길 하인들의 현지 주민에 대한 횡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 사신들에게 얻고 싶은 청심환과 당시 중국에서는 나지 않는 담대 그리고 담뱃대를 얻고자 횡포를 조작하는 경우가 그들에게는 많았던 것이다.
김창업의 《연행일기》에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통원보(通遠堡)에서 방값을 약정하고 잠을 잤는데, 아침에 출발하려 들자 그 집 마님이 서장관(書狀官)이 잔 방문을 잠그고 열어주질 않았다. 이유는 방값을 더 내라는 것이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만 막무가내여서 하는 수 없이 담뱃대 하나를 주고 서장관을 해방시켰다고 한다.
젊은 부인들이 많이 모인 관제묘(關帝廟) 앞을 지나가는데, 하인 하나가 중국 부인이 신고 있는 수놓은 신발을 엎드려 만져 보았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이 부인, 비명을 지르면서 냅다 하인의 뺨을 갈기고는 멱살을 쥐고 담배를 내놓지 않으면 남편을 부르겠다고 얼렀다. 겁에 질린 하인이 담배를 주자, 그것을 본 부인들이 내 발도 만졌다 하며 담배를 내라고 우겨대는 담배 소동 또한 겪고 있다.
심양을 떠나 요서(遼西)의 허허 벌판으로 접어드는 사행길의 첫 참(站)이 유조구(柳條溝)다. 병자호란 때 납치당해 온 우리 조선 백성 가운데 속환되지 못한 사람들끼리 이곳에 어울려 주로 담배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던 지역이다.
담배 농사를 지을 줄 아는 것은 이 조선 사람들뿐이요, 또 만주족이나 한족에 비해 부지런하기도 하고 담뱃값도 좋아, 이곳에 귀화한 조선 사람들은 일찍이 한 밑천 잡고 잘 살았다 한다.
유조구의 호수에는 이런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이곳에 노예로 팔려와 일하고 있던 한 조선 부인이 어릴 때 생이별한 아들 딸이 보고싶어 조선의 고향땅으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밤에 고향집에 도착했는데, 부모들은 아들 딸을 만나게 해주지도 않고 쉬쉬 주변 몰래 이 여인을 다시 내쫓았던 것이다. 오랑캐에 오염된 계집이 돌아온다는 것은 가문의 씻을 수 없는 오욕(汚辱)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부인은 발붙일 곳이 없자 다시 유조구로 돌아왔지만, 도망친 죄가를 치른다고 유조구 깊은 물에 투신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삼엄했던 윤리 풍토에서 이 같은 비극은 비일비재했을 것으로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지 수백 년 후인 1931년,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 시발인 9.18 만주전쟁이 바로 이 유조구에서 발발하였다.
군사를 일으킬 명분에 굶주려 있던 일본은 저희 관동군 장교 세명으로 하여금 유조구의 만주 철도를 폭파시켜 놓고서, 중국군이 폭파시킨 양 조작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삽시간에 산해관 동쪽을 점령,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끌어다 괴뢰 만주제국을 세웠다.
일본 제국주의는 또한 그 폭파 현장에 폭탄 모양의 콘크리트비(碑)를 세웠다. 그런데 그 폭탄비가 지금도 그 현장에 쓰러진 채로 보존돼 있었다. 그 곁에는 '물망국치(勿忘國恥)'라 크게 새긴 전쟁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비단 이곳뿐 아니라 중국 전역에는 아프고 쓰라렸던 일제 침략을 상기시키는 국치(國恥) 문화재가 비일비재하다.
한편 일제시대에 죽지 못해 먹었던 콩깻묵죽을 나누어 먹으며 그 당시의 고통과 적개심을 되뇌이는 억고회(憶苦會)라는 게 이어져 와, 그 고통과 치욕을 체험 못한 2세, 3세에까지 이 억고를 세습시키고 있다 한다.
우리 한국 사람만큼 과거를 잘 잊어버리고 또 용서도 잘하는 민족도 드물다는 것을 이 현장에서 새삼 절감하고 돌아선다.
물망국치로 또 한 번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현장으로 중국의 동북군벌(東北軍閥)로 항일(抗日)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폭살당한 장작림(張作霖)의 저택 장수부(張帥府)를 들 수 있다.
보면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폭살 현장이 아직도 그 집안에는 재현되어 있었다.
중국의 전통 건축 양식인 사함원(四合院) 구조로 된 장수부는 지금 대만에 망명해 살고 있는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의 소유로 돼 있어, 장학량으로 하여금 돌아와 살도록 권유하고 있다 한다.
심양 고궁에 버금가는 넓이의 이 대저택은 그 동안 도서관, 예술가. 문화가협회의 사무실로 쓰여왔으며, 지금은 장작림. 장학량의 기념관으로 쓰고 있었다.
아버지 장작림으로부터 동북군을 물려받은 장학량은 장개석과의 견원지간으로, 모택동의 공산군과 싸우다가 2차대전 후 대만으로 건너가 신죽(新竹)에서 연금 상태로 살아왔다.
지금 그의 나이 96세.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총을 쏘았던 반공주의자를 위해, 돌아와 살집을 비워두고 또 돌아오면 돌려주기로 하고 집세를 꼬박 꼬박 적립해가며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다니, 우리나라 같으면 적산(敵産)이라 하여 부숴버리거나 몰수해 버렸을 집인데 말이다. 그래서 대륙적인 넉넉한 품이 부럽기만 했다.
김응하 장군 전사지
청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무순성(撫順城)이 함락되자, 명나라는 최후의 일전을 무순 동남쪽에 있는 사얼후에서 벌일 양으로 47만에 이르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명나라의 원병 요청으로 출병중이던 강홍립(姜弘立) 도원수 휘하의 2만 조선군도 이 사얼후의 일익을 담당, 결전에 임하고 있었다.
청나라측 문헌에 보면 이 결전이 붙었을 때 모래바람이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어둠에서 밝은 쪽을 향해 공략하게 되어 백발백중인데,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밝은 데서 어둠을 향해 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포탄 모두가 버드나무에만 맞을 따름이었다.
사서(史書)는 이 사얼후 대패를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고 피는 흘러 개울을 이루었으며, 기치(旗幟)와 사졸(死卒)들이 혼하(渾河)의 물길을 막았다.'
이 사얼후 전투중에 도원수 강홍립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적진에 투항했으나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끝까지 사투, 우리 군사(軍史)뿐 아니라 중국의 군사에도 길이 빛을 남기고 있다.
당시 우영(右營) 사령관이던 김응하 장군은 십 리를 두고 적군 6만 명과 대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을 가려 포와 화살을 쏠 수 없었다. 이를 틈타 적군이 총공격을 펴 아진을 도륙하는데, 장군은 버드나무 한 그루를 방패 삼아 활을 쏘아댐으로써 접근하는 적을 모조리 적중시켜 시체밭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휘두르며 싸웠고, 칼이 부러지자 제 목숨을 아끼려고 나라를 저버린 도원수 강홍립을 꾸짖으며 닥치는 대로 적군을 박살냈다고 장군의 묘비명은 적고 있다.
그는 열심히 싸우다 등 뒤에서 던진 적군의 창에 맞아 쓰러졌는데, 시체를 거두어 묻을 때까지도 부러진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기 띤 눈을 감지 못하였다 한다.
그의 영웅적인 죽음을 우러러 우리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증직하였고, 명나라에서는 중국 동북 지방의 가장 높은 벼슬인 요동백(遼東伯)에 봉했다. 그리고 적국인 청나라에서도 김응하 장군이 방패 삼아 싸웠던 그 버드나무에 장군버들(將軍柳)이라는 벼슬을 내렸고, 그 벼슬 이름이 연유가 되어 지명이 돼내렸다던데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김응하 장군이 전사한 사얼후 산은 산이라기보다 표고 70미터에 불과한 둔덕이었다. 사망자 5만 명을 냈다는 결전의 고전장(古戰場)인 심하(深河)는 이제 대적방(大狄房)댐에 수몰되고 없었다.
다만 사신길을 따라가던 박정길(朴鼎吉)이 짬을 내어 그 근처를 서성이다 남겨놓은 시 한수를 되뇌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백 길의 심하와 만 길의 산에는
지금도 모래땅에 피흔적이 완연한데
강 위에서 장군의 혼을 부르지 말라
오랑캐를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려니.
이제는 강물이 아닌 댐에서 장군의 넋을 초혼해야 할 판이니 무상하지 짝이 없다.
굳이 이 사얼후에서 다른 하나의 사적을 또 찾는다면 바로 인질 잡혀 있던 소현세자의 양식을 위하여 농사를 지어 먹게 한 150일 갈이(耕)의 농토다. 《심양일기(瀋陽日記)》에 '사을고(士乙古)'로 표기된 땅이 바로 이 사얼후이며, 병자호란 때 납치당해 온 조선 피로인과 평안도 변경 지역의 죄인 가운데 농사꾼을 차출, 이곳에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여 조선관에 양식을 대도록 했던 것이다.
그 농사 이민들은 대대로 이 땅에 눌러 살았는데 만주족이나 한족과 혼혈, 피가 희석되어 찾아볼 방법이 없었다. 다만 '어머니'를 이 일대에서는 '어머이'라 하고, 울음을 울 적엔 '애고!'라 하며, 창살에 창호지를 바를 때 만주족들은 창살 밖으로 바르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한국처럼 창살 안쪽에서 바르는 등 언어적. 문화적 잔재만을 애오라지 간직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곳 동포학자가 말해 주었다.
그 후 청나라를 오갔던 많은 사신들은 이 충신의 넋을 기리고자 전적지인 심하를 찾고자 했으나, 무순의 심하와는 전혀 다른 산해관(山海關)의 심하로 잘못 알고 엉뚱한 곳에서 회포를 푼 사신이 한둘이 아니었다.
연행 기록 《계산기정》을 보자.
'산해관의 성첩에서 1리쯤 나오면 강을 건너게 된다. 이곳은 요동백 김응하 장군이 크게 싸우다 죽은 땅이라, 무공을 기리고자 적의 시체로 쌓은 큰 무덤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고 물어보아도 모른다.'
그러고서 다음과 같은 회포의 시 한 수를 읊었다.
부러진 창은 멀리 뻗은 모랫벌에 가라앉고
밤새의 구름은 옛 무덤 묻어 버렸다.
장군은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데
천년토록 부질없이 물만 흘러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