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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逍遙山) 산행 Photo 에세이
(2007. 11. 7 /소요산역-일주문- 원효폭포- 공주봉- 의상대- 나한대- 상백운대- 선녀탕- 자재암- 백운암- 원효폭포/ 산내음산악회 http://cafe.daum.net/sweetsannaeum)
소요산 단풍 산행을 가자는 전화가 왔다.
'수요산내음산악회' 청파님이었다. 그 다음 날 지리산 피아골 단풍 산행을 예약해 놓았다고 가볍게 거절하고는 곧 후회하였다.
정년 퇴직하면서 다짐한 것을 스스로 어긴 것이다.
'누구든 부르면 나가자. 나가지 않으면 다시 부르지 않는 법이니-'
오늘 소요산을 다녀와서 내일은 지리산 피아골을 간다는 것은 무리이니 가볍게 단풍만 보고 뒤풀이나 합세하자.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그분들보다 두어 시간 먼저 소요산에 가서 몸에 무리가 되지 않게 산행을 쉬엄쉬엄 하기 위해서 샛별을 바라보며 6시 경에 일산을 떠나 왔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산에 대한 욕심이 그 일부분만 보게 되던가.
*. 왜 소요산(逍遙山) 이라 했을까
'목적없이 슬슬 이리 저리 자유롭게 거니는 것을 ' 소요(逍遙)'라고 하니까, 소요산은 산책할 정도로 높지 않은 산이란 말인 것 같은데 소요산 어원으로는 또 다른 유래는 없는가?
-화담 서경덕(徐敬德)과 봉래 양사언(楊士彦)과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이 산을 좋아해서 늘 찾아와 소요했다 해서 소요산이라 했다는 문헌이 보인다.
이 분들은 조선 조 때 분들인데 '소요산'란 이름이 고려 광종 때 문헌에도 나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런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아와서 소요했다는 말로 고쳐야 될 것 같다.
그 화담, 봉래 선생처럼 ilman도 오늘 하루를 소요산에서 소요하려 남보다 일찍 넉넉한 시간을 보내려 왔다.
소요산역에서 큰길을 건너다 보니 눈을 놀라게 하는 아치가 동두천 시민의 고향 사랑 냄새를 퐁퐁 풍기게 한다.
산 모양의 아치의 오선지 위에 초록, 노랑, 빨강 단풍잎을 그려 놓고 그 가사가 이렇다. '꿈이 있는 동두천시 소요산!"
거기서 얼마 오르니 비각이 있다. '志士閣'(투사각)이었다.
-1919년 3월 장날 이 고장에서 만세를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그 형독(刑毒)으로 타계한 이 고장인 홍덕문(洪德文) 추모비였다.
그 분도 훌륭하지만 이를 기리는 동두천노인회나 이 비각을 세운 김석영 옹도 그분 못지 않게 훌륭한 분들이다.
일주문(一柱門)을 향하고 있는데 친절한 건강 안내판(동두천보건소)이 있다.
-여기는 출발지점입니다. 이곳에서 일주문(약수터)까지는 1,700m입니다. 거기까지 걸어가신다면, 산책(속도 50m/분)으론 71.4Kcal, 걷기론(속도 80m/분) 84.6Kcal, 손을 냅다 흔들어 가는 파워워킹(속도 100m/분)으론 115.9 Kcal입니다.
나는 산책 속도로 빨간 단풍 터널을 뚫고 가고 있다. 여기저기 소요산의 멋을 빠짐없이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다.
국립공원에서는 매표소를 시인의마을 또는 탐방지원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입장료를 전혀 받지 않고 있는데 도립공원은 2,000원씩 받고 있는데 동두천 시민은 무료였다. 그 명분은 다음과 같았다.
-자재암 일원은 문하재 보호법 제 39조에 의거하여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고 있으며, 사찰 문화재 관람료는 바로 자연환경과 문화재를 보호하고 유지 관리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요산 자재암
일주문(一柱門)을 통하여 본 단풍은 선혈처럼 붉은데 그 문에는 '逍遙山自在庵'과 '京幾小金剛'이라는 현판이 있다.
소요산을 한강 북쪽의 소금강이라고 한다.
- 산세도 그렇지만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깊은 계곡에는 소담스런 폭포와 함께 소요산은 사계절 따라 변화하는 모습이 각각 다르다.
이렇게 소요산은 산이 갖추어야 할 그 모든 것을 다 갖추어 가진 산이기 때문에 소요산을 소금강이라고 하는 것이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유명하고, 오늘 같은 가을의 소요산 단풍은 경기도에서는 으뜸으로 친다.
여름에는 하늘을 가리는 무성한 숲과 계곡이 그렇고 계곡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유명한 폭포들이 곳곳에 있다.
게다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과 함께 전하여 오고 있고 그 결실이 신라십현(新羅十賢)의 한 분인 대유학자 설총(薛聰)이다.
설총은 한자의 음과 새김을 따다가 우리말을 적던 이두(吏讀)를 집대성한 학자다.
한글이 만들어 지기 전에 비록 한자를 이용하여서나마 우리의 말을 적었다는 것은 국어학에서는 위대한 일이었다. 설총은 왕의 자문으로 있으면서 화왕계(花王戒)로 신문왕을 충고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그래서 소요산은 국민관광지로, 도립공원의 하나로 지정하여 동두천시의 자랑이 되고 있다.
* 요석공주의 사랑
길 좌측에 있는 반공희생자 위령탑을 막 지나니 길 가에 '요석공원'이 있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되돌아보게 한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부인으로 설총을 낳은 무열왕의 둘째 딸이다. 아버지 무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춘추였다. 요석공주는 그 둘째 딸로 일찍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몸으로 서라벌 요석궁에서 살고 있었다.
이 무렵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나이 30대 초반의 원효라는 스님이 있었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수하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왕이 그 노래를 듣고 '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 것이로구나. 나라에 어진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이익이 없다.' 하고 원효를 찾았다.
원효는 이를 알고 일부러 문천교에서 강 가운데로 떨어져서 옷을 적시니 요석공주가 있는 요석궁으로 인도되어 공주에게 옷을 말리게 하여서 자연스럽게 짝을 이루었다. 이렇게 하여 낳은 이가 경주 설(薛)씨의 시조 설총(薛聰)이다. 아버지 원효의 속성이 설씨(薛氏)였던 것이다.
파계승이 된 원효는 세속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이름하고 '무애(無碍)'라 하는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무애춤(無碍舞)을 추며 무애가(無碍歌)를 부르고 다녔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귀족 중심이었던 불교를 가난하고 몽매한 서민은 물론 어린이들에게까지 널리 부처를 알게 하여 오늘날까지 민중불교(民衆佛敎)의 시조로 추앙 받게 되었다.
원효는 38세에 이 소요산에 들어와 원효대에서 참선을 하며 도를 깨우치고 있었다. 요석공주는 어린 설총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자그마한 요석궁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낭군이 계신 원효대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다 한다.
이 이야기는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를 서동요(薯童謠)라는 노래로 꼬여서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절묘하게도 과정이 비슷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옛날에 독일의 황태자의 첫사랑 이상으로 멋진 사랑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 왼쪽에 있는 수량이 유난히 풍부한 약수터를 막 지나면 왼쪽 휴게소 옆에 '원효폭포'가 있고 그 내 건너 오른쪽 굴 위에 지금은 전망대인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소요산을 찾은 사람들을 반겨 주고 있다.
거기서 속리교(俗離橋)로 다리를 넘어서면 우리는 속세를 버리고 선경에 들어서게 된다.
소요산의 정 코스는 자재암-하백운대- 상백운대-나한봉- 의상대 코스이지만 나는 우측 공주봉 코스를 택하였다. 산행 중에 산내음산악회 일행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공주봉 가는 길은 주 코스가 아닌데다가 아침이라서 한적하였다.
얼마를 오르니 구 절터가 보인다.
옛날에 절이 있던 자리는 지금은 쉼터로 바뀌어 긴 의자, 둥근 의자와 기둥으로 만든 멋진 쉼터의 싱그러운 모습으로 서있다.
유난히 초록 잎이 맑다. 평생 한 번 세수도 하지 않은 풀잎이나 나뭇잎들이 어떻게 저리 깨끗할 수가 있을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풀잎마다 작은 털이 소복이 있어서 먼지를 잎에 닿지 못하게 하고 아침마다 이슬로 깨끗이 씻어내는 거란다.
산길은 오름길로 팍팍하였지만 우측에 굳게 박힌 쇠말뚝의 손잡이는 하얀 동아줄로 바뀌면서 계속되어서 잡고 오르기도 좋지만 안내 길도 되어주었다.
능선인가 했더니 다시 오름길은 공주봉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정상 가까이 토치카가 보이더니 드디어 그 위가 공주봉(526m)이었다.
널찍한 공터는 바닥에 나무를 깔았고 울을 만들었는데 헬기장도 있었다.
동두천시가 뿌연 안개 속에 한 눈에 보였다. 이럴 때 나는 걸리버여행기의 걸리버가 되어 소인국에 온 대인 같이진다.
정상(頂上)에서 굽어 보니
소인국(小人國)에 온 것 같다.
작난감 같은
저 건물 자동차들
그 속에
소꿉장난하는
동화 속의 이야기 같다.
일주문에서 공주봉까지 1.0km 거리였는데 공주봉에서 보이는 의상대까지도 1.0km 이였다.
산에 와서 목표하던 하나의 봉에 선다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났구나 하고 생각하던 시절 같이, 고생에서 벗어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리 선선한 가을이라도 여기까지 이르게 되기에는 땀 흘려 전력을 다한 나름대로의 역사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조금씩만 땀을 더하면서 등산의 즐거운 열매를 따 먹으며 가면 되는 거다.
*. 왜 의상대(義湘臺)인가
공주봉에서 의상대 가는 길은 동두천을 내려다보며 가는 가파른 절벽 돌 길로 한참이나 내려 가야 했다.
그리고는 또 한참 올라가야 하였지만 공주봉 오르는 길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드디어 소요산에서 최고봉인 의상대(義湘臺, 587m)의 정상에 올랐다. 표지석과 함께 Ham 안테나가 서 있고 화강암 정상 표지석이 있는 암반이었다.
이 정상에서 자재암을 향하여 서서 두 손을 활짝 펴면 왼손 끝이 공주봉이요, 오른손이 상백운대로 이어지다가 그 아래로 중백운대, 하백운대로 내려간다.
이곳 바위들은 석영암반으로 암벽은 능선을 이루며 병풍처럼 저 아래 자재암을 성벽 같이 둘러싸고 있는데 앞은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져 가지만 뒤로는 가파른 절벽 길로 천혜의 요새와 같았다.
이 산의 모습은 커다란 복주머니 같아서 일주문이 그 주머니의 입이라면, 이 산을 둘러싼 봉들은 주머니의 불룩한 부분의 일부 일부인 것 같은 모양이었다.
의상대에서 공주봉을 뒤돌아 보았다.
내가 밟고 지나온 의상봉서 여기 나한대 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나의 남어지 인생도 저렇게 아름다운 삶이 되었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 봉의 이름이 의상대(義湘臺)라는데에 의문이 간다.
소요산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전설이 어린 곳이다. 그 공주봉의 공주는 물론 원효의 아내 요석공주다. 그 공주봉을 이렇게 빤히 바라다 보고 있는 이 봉은 의상대라고 하는 것보다는 원효대란 이름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 왜 의상대란 말인가.
원효가 살아있다면 통곡할 일이다. 자재암도 원효가 세웠다는 절인데-.
의상대사란 어떤 분인가.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원효보다 9살 아래의 후배였다.
두 대사는 함께 두 번씩이나 당나라 유학을 꿈 꿨으나 첫 번째는 육로로 둘이서 요동까지 갔다가 고구려에서 잡혀 첩자로 오인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두 번째로 다시 해로로 가다가 의상대사는 10년 동안 중국에 가서 화엄을 배워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고 원효는 해골의 물을 먹고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는 깨달음을 얻고 의상과 헤어져서 그냥 돌아온 스님이다.
그는 70세에 입적한 원효보다 19년이나 더 살면서 88세 입적할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한국불교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진오, 지통, 표훈, 등 10대덕 고승을 길러낸 사람이다.
원효가 살았던 시대의 모든 스님들이 부러워하는 경지에 후배인 의상(義湘)이 있었던 것이다.
의상대사가 불교의 정도를 걸어온 사람이라면 이에 비하여 원효는 파계승에 지나지 않는 기승(奇僧)이었다. 그래서 당시 불교계는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그래서 이 봉을 원효대라 하지 않고 의상대라 이름 하였을 것이라고 유추해 본다.
이 사방이 훤히 보이는 상봉 정상에서는 맑은 날이면 북으로 한탄강이 보인다지만 안개 속에 묻혀 있고, 서쪽에 있다는 감악산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산이란 그냥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봉우리가 능선에서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소요산에서는 최고봉인 의상대의 높이는 모든 서적은 물론 의상대 바로 아래 이정표에도 568.7m인데 정상석만은 535.6m로 새겨져 있다. 이 무슨 망발인가 하고 누가 세웠나 하고 비석 뒤를 보니 '동두천시청산악회'였다. 동두천시가 욕먹을 일이니 조속한 시일내에 수정해야 할 일이다.
*. 나한대에서
의상대에서 상백운대로 가는 길에 해발 571m의 '나한대(羅漢臺)'가 있었다.
이정표가 그 아래에 있어서 정상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정도의 평범한 곳이었다. 그곳을 자세히 살펴야 볼 수 있는 삼각점이 정상 표시일 뿐이었다.
내 또래의 노인이 있어 물어 보았다.
'나한대(羅漢臺)'에서 '나한'이란 무슨 뜻이지요?
'봉우리 이름이라구요? 나한(羅漢)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보통은 부처의 제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한에는 16 나한, 5 백나한이 있구요.
나한(羅漢)은 불제자들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경지에 이른 분들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無學)의 경지의 스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알면서 물어서 죄송합니다."
나한대에서 상백운대로 가는 1.2km 도중에 칼바위 능선이 있다.
칼처럼 날카로운 크고 작은 편마암들이 200여m나 바위틈을 비집고 몇 백 년을 자란 아름드리 낙락장송 이 바위와 어울려 한바탕 솔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소요산 칼바위는 둘로 나뉘는데 그 중간 안부에다가 '칼바위 능선 최고봉'이라고 써 놓은 것이 또한 가관이다. 그 위치도 올바로 바로잡아 동두천시의 명예를 되찾아 놓아야 할 것이다.
상백운대를 300m 앞둔 갈림길에서는 한참이나 산내음 산악회 회원들을 기다렸다. 지금쯤은 상백운대에서 식사하고 올 시간이어서 혹시나 길이 어긋날까 해서였다.
드디어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서로 그리워 하면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산길에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청파, 조대흠대장, 산이 좋아 연산(連山)이라 했다는 연산, 연산동, 거시기, 뭐야 님 등등 낯익은 얼굴들이다.
이 산악회 분들을 따라 다니면 더 많은 산들의 곳곳을 볼 수 있으련만, 이분들은 바위를 타는 준족(駿足)의 사람들이라서 두려운 마음에 함께 하지 못하지만 반갑고 그리운 사람들이다. 상장봉 산행 후에 처음 만나는 것 같다.
함께 반가와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그리고는 각각 헤어져서 산하 뒤풀이 하는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상백운대(上白雲臺, 568.7m) 정상도 칼바위능선의 일부처럼 바위와 그 사이에 노송이 함께 한 곳으로 평평한 곳은 아니었다.
상백운대에서 중백운대로 향하다가 530m의 봉에서 선녀탕으로 하산한다.
여기서 10분 거리에 중백운대가 있고, 거기서 다시 10분 거리에 하백운대가 있지만 그곳은 여러번 가 본 길에다가 소요산 능선 내내 '선녀탕' 이정표가 나를 유혹하여서였다.
'비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은 미끄러우니 이 길로 하산을 금한다'는 경고판을 뒤로한 하산길은 몹시 길고 지루한 계곡도 없는 가파른 돌길이었다.
그러다 나타나는 선녀폭포와 탕은 나뭇가지 사이로 차례로 잠깐 그 일부분의 모습만 보일뿐 계곡 속에 숨어 있었다. 오히려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선녀탕입구가 요란한 절경이었다.
그곳에서부터 비로소 소요산 산중에서 거의 못보던 단풍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서 얼마 안 내려가니 염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문득 자재암 지붕과 연등이 보인다.
*. 자재암(自在菴)의 전설
자재암(自在菴)은 신라 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개산한 암자다. 개산(開山)이라 함은 절을 처음으로 새우는 것을 말한다.
-원효 어머니는 별똥 하나가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였다. 만삭이 되어서 불지촌(佛地村)의 북쪽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산기(産氣)가 있어 할 수 없이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서 가리고 거기서 원효를 나았다. 그때 오색 구림이 땅을 덮었다. 원효는 나고탄 총명으로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을 깨우쳤다. 소년 시절에는 화랑이었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아 파계승이 된 설총은 속인들의 옷을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란 하면서 전국을 떠돌다가 소요산에 들어와서 초막을 짓고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비가 몹시 온 후의 저녁이었다. 원효가 초막 주위를 소요하다가 약초를 캐는 한 여인을 만났다. 비에 젖은 옷은 몸에 착 달라 붙어서 젊고 풍만한 몸을 드러내고 있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날이 저물어서 하루 밤 유하기를 청하더니 밤 늦도록 원효를 끈질기게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때 원효는 설법으로 유혹을 그 여인을 물리쳤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自在無碍"라. 마음이 생(生)한 즉 갖가지 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멸(滅)한 즉 온갖 법이 멸(滅)하는 것이니, 나는 마음에 막힘이나 거침이 없도다."
이에 유혹하던 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물러갔다. 그 여인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일부러 젖은 몸매로 원효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
원효가 감격하여 더욱 수행에 정진하여 관세음보살을 친견(親見)하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수행을 쌓았다. 그래서 암자 이름을 자재암(自在庵)이라 한 것이다. 자재란 자재무애(自在無碍)를 말함이요, 막힘이나 거침새가 없음을 뜻한다. 근래 우성스님은 자재무애(自在無碍)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 무애자재한 이의 일상생활이란 '송곳 끝에 올라가 있어도 그 넓이가 온 세계와 같고, 비록 끓어 오르는 지옥에 있다하더라도 극락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
원효의 출생 과정과 생활은 이와 같이 ‘영웅의 일생’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영웅 전설의 주인공들은 고귀한 혈통에서 태나고, 잉태나 출생이 비정상적이며,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기아(棄兒)가 되는 등의 과정을 겪어 성공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도 석가도, 이야기 속의 홍길동도 다 그런 분들이었다.
소요산에는 이 태조(李太祖)의 전설도 전하여 오고 있다.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주인공인 이태조가 어가(御駕)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다가 소요산에 이르러 산으로 들고 말았다. 그래서 이곳에 왕궁 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이 소요산 남쪽에 있는 423m 천보산 기슭에 회암사가 있는데 이 절은 이태조의 왕사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절로 여기에도 그와 유사한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이 자재암을 유명하게 한 것 중에 또 하나는 1994년 암자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반야심경(세조 10년 간행)' 언해본으로 낙장 하나도 없는 완전한 것이었다.
언해(諺解)란 한문을 한글[언문]로 번역해 놓은 글을 말하는 것으로 국문학 고어 연구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소요산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재암을 먼저 찾지만 자재암 대웅전보다는 나한굴(羅漢窟)과 그 계곡 건너에 흰 물줄기를 떨어뜨리고 있는 높이 20여m의 청량폭포를 잊지 못해한다.
특히 나한전 입구에 있는 원효가 도를 닦을 때 저절로 솟아났다는 샘물은 최고의 물맛으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여기 모여 이 물로 끓인 차를 마시며 담논을 하며 차문화(茶文化)의 산실을 열었다는 이갸기까지 전하여 오는 곳이니 이 물을 마시지 않고 지나치지 않을 일이다.
자재암에서 전망대를 겸한 최신식 나무 화장실을 지나 원효대 가는 길 우측에 있는 층계 위에 높이 있는 백운암(白雲庵)은 언제나 굳게 닫친 것이 아마도 외부와 단절하고 참선을 하는 곳인가 보다.
전망대가 되어버린 원효대에서 바라보니 사방에 단풍이 절정인데 끝물 같다.
산위에서 하산해 버린 이 단풍은 다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면서 금년들어 유난히 아름답게 불타는 모양이다.
지금부터 산내음산악회 회원과의 즐거운 만남의 뒤풀이를 향한 곳으로 붉은 단풍의 터널을 빠져 나가고 있다.
첫댓글 아 어제는 전철시간 때문에 늦게오신분들이 몇분계셔서 그런줄 알았는데 일만선생님께서는 2시간이나 먼저 오셔서 의상대까지 들리시고 칼바위정상에서 저희와 만나신후 반대방향으로 내려가셔서 자재암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먼저 주차장까지 오는 바람에 청파님,연산동님부부와 함께 자재암에서 만나 함께 내려오셔서 제가 인사도 못드리고 귀가하여 죄송했습니다.. 오늘 피아골 산행 잘 출발하셔서 좋은산행하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만나뵈서 반가웠습니다 ** 산내음
주제넘는 말씀이지만 소요에 대한 어원을 더 올라가면 장자사상의 핵심인 "소요유"에 닿는것 같습니다...장자엔 불교적 특성과 유교적 특성이 함께 있다 합니다..무엇이든 알고 보아야 더 아름다운것 같습니다..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