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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전쟁사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2
이 문 열
해마다 이밤 때가 되면 대처 소처 가릴 것 없이 구석구석 골짝골짝 온 놈이 온 입으로 온 말을 떠들어댄다. 삼일 운동이네 만세 사건이네 하는 게 바로 그건데, 입이야 말하라고 뚫린 구멍이라고는 하지만 또 입은 가로 찢어져도 말은 바로 하란, 소리도 있지 않은가. 나발을 붙어도 바로 알고 분다면 누가 뭐라 할까마는, 뭣도 무르는 놈이 뭣보고 탱자탱자 해대는 식이니 듣기도 민망스럽거니와 남 알까 겁난다. 마이크 좋다고 아무데서나 난 척하고. 주철주절댄 어른, 볼펜 잘 나온다고 이책 저책에 함부로 개말새발 써갈긴 양반, 그리고 그것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은 대로 읽은 대로 여기지기서 나블거린 친구, 모두가 다만 정수리에 호된 철구공이질이 제격일 따름이다.
먼저 이름부터 따져보자. 그 찬연한 역사의 날을 일컫는데 가장 흔한 것으로는 3·1 운동이라는 게 있다. 3·1 운동이라니? 아니 운동이라니? 우리가 뭐 그날 모여 뜀박질을 했나, 물구나무저기를 했나, 공을 찼나, 개구리헤엄을 쳤나? 잘 해야 양코배기들의 무브먼트란 말을 쉬운 데로 바꿔 쓴 것일 테지만, 세상엔 쉽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어느 싸가지 없는 놈이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간의 피가 튀고 살이 흩어지는 싸움에다 그런 낭창낭창한 이름을 붙인다디냐!
더 고.약한 것은 기미 만세 사건이니 독립 만세 사건이니 하는 이름들이다. 사건이라니 뭐 그날 겅도가 은행을 털었나, 광산 막장이 무너졌나, 비행기하고 비행기가 박치기했나, 아니면 개가 사람한테 물려기라도. 했나? 또한 양코배기들이 저희 행악을 얼버무리기 위해 만들어낸 크라이서스나 카타스트로피 같은 여사 용어를 여치로 번역해 쓴 것 일 테지만 꿔다쓰기치기는 정말로 되먹 잖은 꿔다쓰기다. 일본 순사 나부랭이들의 보고서에서라면 모를까, 어떻게 2천만의 성전(聖戰)에다 버르장머리 없다 못해 해참하기까지 한 사건이란 말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또 따로이는 의거(義擧)란 말도 쓰이는 모앙인데 그 역시 해괴하기는 운동이나 사건보다 덜하지 않다. 의롭게 일어났다(義擧)면 뮈 그 뒤에는 우리가 불의롭게 주저앉기라도 했단 말인가. 도대체 쥐대가리가 아닌 담에아, 어떻게 그 엄청난 역사의 분수령에다 그 따위 일회성(一回性)의 왜소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인가.
무릇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기미년 3윌의 그 일은 이우는 영광의 꽃그늘에서 잠시 졸다가 약삭빠른 섬나라 오랑캐에게 산과 들을 빼앗겼던 우리가 분연히 깨어나 벌었던 거룩한 광복전쟁(光復戰爭)이었다. 다만 뒤이은 25년의 대전역(大戰役)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까닭에 굳이 그것과 구분지어 이름한다면 평화전쟁 또는 제일차 광복 전쟁쯤이나 될까. 그런데도 그걸 무슨 운동 어쩌고 하는 작자가 있거든 다음달 나오기 전에 귀쌈부터 올려놓고 보아라. 무슨 사건 어쩌고 하는 녀석이 있거든 배때기를 힘가짓껏 걷어차주고., 의거 어쩌면 나서더라도 촛대뼈(정강이 뼈)부터 구둣발로 까놓고. 보아라. 듣기로 사람은 낱낱으로서건 무리지어서건 먼지 스스로를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한다 했으니, 먼저 스스로를 업신여긴 그들이 무슨 꼴을 당한들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더욱 해참하고 괴이쩍기로는 그 성전(聖戰)을 도맡아 치르어낸 사람들에 대한 엉터리 풀이들이다. 어느 시러배아들놈은 민족 지도자가 앞장서서 이끄니 민족이 따라간 것이라 하고 어느 개똥 통천(通賤)이는 인민(人民)의 지도자가 영도하여 인민이 궐기한 것이라 한다. 유식한 체 내뜨기 좋아하는 놈은
엘리트 계충이 어쩌고 저쩌고 씨월거리는가 하면, 마구잡이로 후려대기 좋아하는 놈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우리네 까막눈들의 한바탕 마당놀이쯤으로 뻑뻑 우겨댄다. 뭣이든 그쪽으로 찍어다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얼치기들은 여기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끌어들어 넓죽대고, 핫바지에 뭣 블가지듯 톡톡 볼가지기 잘하는 놈은 또 어기다 민중인가 뭔가를 끌어와 두루뭉수리로 쳐 바르려 한다.
야, 이 말똥 밟고 소똥에 엎어졌다가 닭똥이나 한입 물고 일어날 같잖은 것들아. 잃은 제땅 뺏긴 제밥 그릇 찾는 일에 민족 따로 있고 인민 따로 있더냐? 엘리트라니, 뭐 말라죽은 게 엘리트며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들어내는 것 봤냐? 가난한 게 무슨 큰 권리며 무식한 게 코에 쳐바르고 다닐 자랑이나? 다 합쳐야 2천만에 요리 가르고 조리 나누어 차(車)떼고 포(包)떼며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걸로는 ‘운동’ 이나 ‘사건’ 도 과분해 사고(事故)밖에 안 됐을 게다. 그리고 민중 말인데―이제니까 털어놓거니와 너무 민중, 민중 하지 마라 이 민중아. 시도때도 없이 자꾸 민중 내밀다 정작 민중 나갈 만한 단대목에는 헐값되어 못 팔라.
거기다가 기미년 그 일의 원인이며 경과에 결과까지 다 꿰차고 앉았다는 듯 떠벌이는 수작들 보면 어이없고 속상하다 못해 허파가 뒤집히고 콩팥이 떨릴 지경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했고, 또 이르기를 칼로 지은 죄는 온〔百〕 해 면 씻기지만 말〔言語〕로 지은 죄는 즈믄[千] 해를 간다 했다. 도적을 추켜세운 글을 지은 시내암(施耐庵)은 자손 3대(代)가 눈멀고 귀멀었다니, 도적이 한 말을 믿고 퍼뜨린 죄도 자손 3대(代)에는 미치리라. 무엇이든 우리의 것은 작고 못나게만 몰아간 섬나라 도적들의 말과 글을 그대로 믿고 퍼뜨리는 자, 참으로 두려위하고 또 두려워할 일이다.
이제 그 얼의 진실을 말하리라. 내 진작에 우리가 오늘처럼 지겹도록 행복해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해두기로 작심했고, 또 그 출발은 이미 얘기한 바 있었다. 우리 옛 영광의 장려한 낙일(落日)에 대해,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처절하여 오히려 아름답고, 의로워 거룩했던 그 죽음에 대해. 그런데 그게 우리들 행복한 오늘로의 크고 밝은 길을 연 것이라면, 이제 얘기하려는 것은 그 길로 출발한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 위해 첫 번째로 넘어야 했던 높고 험한 재〔嶺〕였다.
먼저 기미 평화 전쟁 (己未平和戰爭) 또는 제 1 차 광복 전쟁이 터지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자. 그 전쟁이 일본을 상태로 한 것인 만큼 그 첫번쩨 원인을 일본에서 찾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옳다. 그려나 구체적인 실례(實例)를 대는 데 이르면 지금껏 알려져 온 것들은 아무래도 일본의 간교한 장난이 끼어든 것 같은 의심을 버릴 수가 없다.
아는 척 그 일을 말하는 이들이 항용 앞머리에 내세우는 일본의 헌병 경찰 제도만 해도 그렇다. 그들이 헌병, 헌병 보조원에다 이런지련 앞잡이 끄나불들을 풀어 우리 애국 투사들을 죽이고 감옥에 처넣었다거니 일체의 결사(結死) 운동 및 언론 활동을 탄압했다는 따위, 막연하고 추상적인 얘기는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실례애 대해서는 언제나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이다. 다른 일이야 너무 끔찍해서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해도 그때 일본현병들 중에는 우리 애국 투사의 불알 말린 걸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자가 상당히 많았다든가, 헌병이나 경찰의 아이들은 학살한 우리 여인네에게 도려낸 아기집〔子宮〕을 풍선처럼 불며 놀았다는 얘기 정도도 왜 하지 않는가. 대정(大正) 말년 일본의 어떤 지방치(地方紙)에 보면 조선에서의 임기를 끝내고 들아온 나까무라 곤조라는 퇴역 헌병 대위가 귀향 선물로 자기 현(縣)의 주민 모두에게 말린 조선인 불알 두 개씩을 나누어주었다는 단신(短信)이 버젓이 나와 있고, 또 싱가포르가 일본에 함락된 해의 어떤 시사(時事) 잡지에는 고무가 귀했던 어린 시절에 조선 여인들의 애기집을 불며 놀던 일을 추억하는 쪼무라 세이끼란 은형원의 감동적인 회고담이 실려 있다.
그런 얘기조차 점잖은 입에 담기 어려워 내놓고 못 한다면 일본 헌병이나 경찰에게는 그때 몹시 재미있있던 ‘사무라이 흉내 놀이’는 또 어떤가. 새 군도(軍刀)를 지급받으면 그 칼날이 한꺼번에 몇 명이나 빌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마침 잡혀와 있던 우리 애국 투사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메어보던 일이며, 담배내기로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사람의 목을 떨어드리는 시합을 벌여 역시 마침 그 부근에 있던 동포를 끌어다 목베던 일 따위는 요즈음 눈알 푸른 군대가 영내(營內)에서 하는 야구나 테니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모든 구체척인 실례는 다 놔두고 그저 투옥·학살, 어쩌고 하는 식으로만 어물쩡 넘어가는 속내를 알 수 없다.
일본의 경제적 착취도 그렇다. 맨날 한다는 소리가 “토지·광산·철도·금융 등 모든 분하의 이권을 독점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경제 발전을 극도로. 제한하여……,” 하는 따위 추상적이고. 애매한 설명이거나 기껏해야 “국내의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小作農)·화전민(火田民)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그나마도 살
기 어려워 만주로 흘러가기까지 했다가 든다고. 드는 실례다. 지금이 아무리 행복하고, 또 괴로웠던 시절의 추억은 빨리 잊는 편이 낫다고 하지만, 그래도 기어에서까지 지워버리는 건 자식 기르는 도리가 아니다. 우리네야 그럭저럭 몇십 년만 뻗대면 지금의 행복을 누리면서 죽어칼 수 있으나 뒤에 남아 몇 천 몇 만 년 지들 일본인들과 상종하며 살아갈 자손들이 있지 않는가. 그들을 위해서는 저 간교하고 악독한 섬나라 족속의 옛 행패를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칠 게 없다. 굶어죽는 자식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피눈물을, 삼베 홋적삼으로 매서운 만주 대륙의 찬뱌람을 견디며 중국인의 종살이를 자청해야 했던 우리 어머니들을.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베풀었던 그. 철저한 우민정책(愚民政策)도 제1차 광복 전쟁의 원인으로 내세울 때는 느슨해지는 감이 있다. “민족 의식의 성장을 억 누르고 수준 높은 학문이나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했으며…….” 따위의 말로 어떻게 그때 우리가 당한 정신적인 능욕을 다 드러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참고로 1910년 얼본 문부성(文部省)이 반도의 각급 학교장에게 보낸 비밀훈령 하나만 들어보자.
“반도(半島)에서 봉직하는 각급 학교장은 조선인의 열등감·무력감 및 자기 비하(白己卑下) 심리를 고취 격려하되 특히 다음 사항을 조선의 청서년에게 주지시키도록 힘쓰라.
1. 조선어는 역사가 엾다. 또는 예속의 역사다.
1. 조선에는 문화가 없다. 또는 예속의 문화다.
1. 조신에는 사상이 없다. 또는 예속의 사상이다.“
그 훈령은 다시 1918년이 되면 더욱 끔찍해진다.
“각급의 학교장은 기왕에 해온 정신 교육을 가일층 강화하여 아래 사항을 조선의 청소년으로 하여금 신념케 하라.
1. 조선이 대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역사의 영광이다.
1. 조선인 이 천손민족(天孫民族)인 내지인(內地人)의 마소가 되어 일하는 것은 살아서의 보람이며, 살과 뼈로 천손을 봉양함은 죽어서의 거룩한 성취다.
1. 조선의 남자는 단종(斷種)으로 진리(天理)에 순응하고, 여자는 우수한 내 지인(內地人)의 씨를 받는 것을 자랑 삼으라.
그리하여 되도록이면 조선인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인간임을 잊게 할 것.”
그밖에도 지들 교육 정책의 혹톡하고 악랄함을 보여주는 문
저들은 따로 책을 묶어도 열 권은 될 만큼 많다. 그런데도 역사책은 언제나 알아듣지도 못할 염불 같은 소리만 되뇐다. 젊잖은 것이 틀림없이 미덕이긴 하되 모든 곳에 다 미덕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착 한심한 것은 그 다음부터다. 제1차 광복 전쟁의 두번째 원인으로 흔히 씨부령대는 것은 윌슨인가 뭔가 하는 멀대가 소리소리 외쳤다는, 싱 겁고도 응큼해빠진 민족 자결주의(民族自決圭義)인가 민족 자살 권유인가 하는 것에 우리가 자극받고 고무됐다는 엉터리 수작이다.
우리가 뭐 등신인가 아니면 그대 우리 2천만이 한꺼번에 해까닥해 무슨 골빈당이라도 꾸렸단 말인가. 그쪽 터럭 노랗고 눈알 푸른 것들의 장단질에 놀아나다, 헤이그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열린 ‘힘세고 못된 놈들 저희끼리 안 싸우고 힘없는 놈 잡아 사이좋게 나눠먹기 회의’ 에서 옥을 봐도 쌍욕을 본 게 언젠데 또 그것들의 장단질에 놀아난단 말인가. 이준(李儁) 열사를 이역의 외롭고 분한 넋으로 받들고, 우리 마지막 임금님을 그나마 옥좌(玉座)에서 끌어내린 것으로 끝나버린 그 밀사(密便) 사건이 있었는 지 아직 13년도. 채 차지 않았는데 또 그 비슷한 짓을 할 만큼 우리가 밸 빠지고 속없었단 말인가.
먼저 그 윌슨이란 멀대가 대통령으로 있던 아메리카합중국이란 나라부터 한번 깊고 넘어가자. 저희들이야 저희 나라 열린 얘기를 할 때 잔칫상 웃기처럼 청교도(淸敎徒)와 메이플라워호(號)부터 앞세우지만 거기부터 사(詐)자가 들어간다. 그 나라가 낡고. 부패한 구라파의 찌꺼키들―一날치기·들치기·소매치기·퍽 치기에 강도·사기꾼·노름꾼이며, 이런저런 불한당과 변태성욕자, 생피붙은 놈, 색광(色狂)에다 절뚝발이·외팔이·애꾸눈 섞고, 빈틸터리·한탕주의자며 종교적 광신자를 양반으로 얹어 처음 시작했다는 건 아는 사란은 다 안다. 메이플라위호(號)에 탄 패가 기중 낫다고 보아 저희 역사책 앞머리에 내세우지만 그들에게서도 청교도 허명의 피비린내와 크름웰 의 독재를 가능케 했던 광신(狂信)의 냄새는 어쩌지 못한다.
하기야 길가의 잡초가 더 질기고, 시궁창의 미꾸라지가 더 잘 살찐다고, 그들의 원초적 생명력 하나는 감탄해도 좋다. 어쨌든 이판사판 앙정불정 덤비니 인디언은 박살나고. 산과 물은 거덜나도 한 이백 년 지나면서부터는 살 민큼 되었다. 그러자 잘 참던 것도 못 참아 일어난 게 독립 전쟁이고. 우여곡절 겪은 끝에 세운다과 세운 나라가 호왈 아메리카합증극이다. 이제야 거드름 피워가며 옛말하듯 이리 꾸미고 저리 싸발라 그 시절 얘기를 서부극(西部劇)이란 그럴 듯한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 보여주고 있지만, 바로 말하자면 그게 어디 사람 살 곳이던가.
그래도 철이라고 든 것은 검둥이 뜯어먹는 문제로 저희끼리 수틀려 치고받다가 피탈이 나도 크게 난 남북 전쟁 뒤부터가 되겠다. 이제는 검둥이들을 안 뜯어먹어도 살 만하게 된 동북부와 아직은 검둥이를 더 뜯어먹어야 할 남서부가 싸운 그 피투성이 내란에서 운좋게 동북부자 이기면서 그나마 인도(人道)라는 이상에 반눈이라도 뜬 듯하다. 한때 수백만에 이르던 아메리카 인디언이 겨우 멸종의 위기를 면한 것도 그 덕분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타고난 핏줄이 있어서인지 건국 2백 년에 대외(對外) 출병이 없었던 해가 단 20년도 안 되는 게 바로 그 나라라는 얘기는 이미 했다. 한편 몬로주의(圭義)라는 걸 내세워 불간섭을 우긴 적도 있으나, 기실 그 몬로주의란 게 “엉덩이를 자유자재로 흔들 수 있는 권리”라는 마릴린몬로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쯤은 세상이 널리 아는 바다. 이 핑계 지 핑게로 미서전쟁(美西戰爭)을 일으켜 필리핀을 널름한 게 언제던가. 태프트가 가쓰라에게 한반도에서의 우월권을 인정해준 것도, 실은 태프트 개인이 물렁해서라기보다는 씹지도 않고 삼킨 필리핀을 일본이 토해놓으라고 덤빌까봐 지레 속이 켕긴 본국의 훈령 탓이었다.
그 아메리카합중국의 대통령이 그해 들어 그런 소리를 떠들썩하게 해댄 것은 아마도 1차 세계 대전에서 얻은 그 나라의 자신감 때문이었으리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또는 이웃집 불난 김에 오줌지린 속옷이나 말리고 보자는 식으로, 구라파 것들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다가 눈깔 뒤집힌 독일 잠수함에 콧등이 쏘이고야 불끈해서 그 싸움판에 뛰어들었지만, 끝내 놓고 보니 뒷맛이 그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큰집인 셈이라 마음 한구석으로는 은근히 겁먹고 있던 구라파의 올방졸망한 것들 알고 보니 별것 아니었고, 그때껏 앓고 있던 지희들의 구라파 콤플렉스가 오히려 터무니없었다. 그런 별볼일없는 늙다리들의 허세에 주눅들어 보낸 세월이 원통했고, 더구나 그들이 세상 구석을 모조리 나누어 차고 앉도록 구경만 하고 지내온 게 새삼 분통터졌다. 생각 같아서야 이것저것 볼 것 없이 귀쌈 한 대씩 올려붙이고, 아프리카건 아시아건 그 늙다리들이 차지하고 있던 것은 모두 뺏아버리고 싶었지만, 중구난방(衆口難防)이라고 그렇게까지는 차마 못해, 옛비슷이 해본 소리가 그 민족자결주의(民族自 決主義)였던 듯싶다. 약소민족(弱小民族)이 들으면 눈물겹게 고마운 소리지만, 구라파의 늙다리들에게는 차고앉은 것 다 내놓고 새로 시작해보자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그 속다른 소리에 들떠 차결(自決)을 하려고 들었겠는가.
또 모르되, 민족 광복의 성전
자결(自決)을 자살로 보았다면 또 모르되, 민족 광복의 성전(聖戰)을 어떻게 수십만 리 바다 건너 노랑머리 대통령이 한번 해본 소리만 믿고 시작했겠는가. 우리 스스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경박하고 속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행복해지기는커녕 그들에게 한 덩어리 뜯기어도 큼직하게 뜯기었을 것이다.
이 비슷한 걸로 더욱 눈튀어 나올 소리는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떠들고 있을 무렵 레닌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했다는 그보다 더 엉큼한 수작이 우리 ‘인민’을 궐기시켰다는 주장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도 유분수고, 아니 밴 아기 내놓으라고 때를 써도 유분수지,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써대는 어거지들인가. 반만 년을 모여 살다 보니 우리 중에 더러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도 있고, 때로는 무리지어 턱 없이 촐랑대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너무했다. 해도 너무했다.
저 윌슨을 얘기할 때처럼, 이번에도 먼저 그 레닌인가 엠병인가 하는 작가가 수상인지 주석(主席)인지 서기장(書記長) 인지 하는 자리에 앉아 빨래 쥐어짜듯 제 백성을 쥐어짜고 있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인가 뭔가 하는 그놈의 나라부터 살펴보자.. 얼마 전 우리 큰 광대 하나가 그 나라를 놓고 한판 잘 논 적이 있는데, 그때 시작은 대강 이랬다.
시장이 팥죽이요 목마른 놈 샘파느니,
가보자 등서남북 위아래로.
어디 한번 가보자. 섣달 그믐날 흰떡 맞듯 오지게 얻어터지더라도 가보자.
동서남북 위아래르 곰같이 어쿠척 어그적어그적거리는 러시아로 우리 한번 가보자.
러시아로 들어간다.
러시아로 한번 들어가는데
절차도 복잡하고 수속도 복잡하고 검열 심문 눈초리도 아조 복잡하구나.
정식 나라 이름을 물어보니
한 놈은
이반, 표토르, 에카쩨리나의 짜르 러시아라 불러라 이르겄다.
한 년은
도스도엡스키, 레온체프, 솔로비요프의 메시아라 불러라 이르겄다.
또 한 놈은 거만스럽게 가라사대
데까브리스트 나로드니끼 볼세비끼의 소비에트 러시아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겄다.
또 한 년은 고집스레 가라사대
스뎅카라친, 푸카쵸프와 크루포트낀과 마프노의 왼갖 중생들의 민중 러시아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겄다.
택시를 잡아타고 거리거리 골목골목 이린 비틀 지리 비틀 털렁털렁 돌고 돌아다니며 운짱에게 이 나라 역사를 한번 물어보니 운짱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털렁털렁거리는 택시 장단에 앙이걸이로 노래부르듯 아조 우렁차게 엮어댄다.
“흑해 북쪽 숲속에 칼파치라 산맥 동쪽 벌판에
드네프르류 강가에 살던 슬라브족, 이란족, 고트족과 뒤섞여 노르만족과 엇섞여
노르만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가에 강물가에 숲속에 모여
키에프공국에 모여 모여
비잔틴의 그리스 정교 폴란드의 카톨릭 다 받아먹고
알렉산드르 베브스키 독일 기사단 무찔러 무찔러
돈스코이카 타타르족을 마침내 무찔러
몽고의 멍에, 폴란드의 멍에, 리투아니아의 멍에, 모조리 다 깨뜨리고
블라디미르 칼리치볼리니, 트베리, 노브고르드공국 싸그리 한데 다 합쳐
드디어 쌍두독수리 모스코바 대공국 러시아가 지구 위이 나타났겄다.”
삭당에서 밥 먹다가 스탈린 같은 수염을 연속 빗질하고 자빠졌는 주인더러 계속 역사를 물어보니 손발 들입다 휘젓고 얼굴 표정 막 써가며 성호까지 그어대면서 신나게 떠드렁댄다.
“법전이 굥표되고 농노제도가 시작되었겄다.
교회는 제 재산과 권리를 감싸려고
오오 알렐루야
모든 권력은 하늘로부터 나온 것이니
오오 할렐루야
이반 대공을 이제부터 짜르라 불러야 바땅하도다 오오 알렐루야 알렐루야.
전국회의를 소집하어 법전을 개정하고, 철태군주제 중앙집권제, 국민개병제, 신분계급제, 인두세제와 공로의 일체 권리 박탈을 선도한 뒤에
오프리치나, 오프리치나, 오오 무서운 무서운 오프리치나!
특수 영지는 꽉꽉 죄어 힘센 귀족들은 산 채로 불알을 까버리고
시베리아는 꿀꺽, 볼가강은 후루후루,
아조프는 홀랑,
발트해로 쳐들어가 콱 거머줘고, 북극해로 쳐들어가 확 잡아먹고
흑해를 왕창 크리미아를 와창창 폴랸드를 와창창창 프랑스까지 쳐들어가 동방무역 서방무역 어서 읍셔 유렵문명은 언제나 문호개방
폴란드. 독립운동 무자비하게 짓밟고
말뚝을 꽝
그리스 독립 운동 뒷전애서 살살살 부채질하며 남쪽으로 살살살살살 에집 트 독립 운동에 감겨든 투르크 잽싸게 원군보내며 잼싸게 소아시아 꿀꺼덕 항가리 독립운동 가차없이 짓뭉개고 혈을 질러 콱……(後略. 김치하, 『南』 중에서)
이 광대가 자칭과는 달리 먹물이 들어도 한참 든 데다 본시 뼈대 있는 집 안 출신이라 그 소리가 부드럽고 말이 점잖으니, 자칫 그 나라와 그 족속이 그릴 듯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게 그렇지 못함은 또한 천하가 다 안다. 세계치도를 퍼놓고 보면 그 땅이야 넓지만, 그걸 천(千)이라 쳐도 똑똑한 놈 셋보다 못한 얼음판이요, 거기 사는 인종도 따져보면 잡되고 치지분하기가 아메리카합중극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 땅이 오죽했으면 저 걸신들린 게르만족이며 무작스런 훈족에 바이킹까지 쳐다보지 않았을까. 그 인종이 오죽했으면 유럽에서 제일 늦게까지 칭기스칸의 망령에 질려 있었으며 또, 유럽에서 제일 늦게가지 동족을 노에로 부리며 버텼을까. 땅이 넓고 길 멀고 날 차웠기 망정이지, 그 중 하나만 아니었더라면 그. 뒤로도 그 나라 그 인종은 쑥밭이 나도 어려 번 날 뻔했다.
스웨덴 헛기침에 찔끔, 덴마크 눈부라림에 움찔, 프러시아 이 악무는 데 흠칫, 폴랜드 주먹 부르쥐는 데 오싹 ― 그렇게 빌빌대던 그 나라가 그나마도 제대로 숨 내쉬고 살게 된 것은 피턴지 표트른지 하는 대찬 임금을 만난 뒤였다. 피터대제(大帝) 으젓하던 긴 수염을 싹둑 자르고 개화다 근대화다 소리치며 설칠 때는 정말로 동(東)로마제국이 되살아나는 듯도 했다. 그 뒤 동궁(冬宮) 비까번쩍 닦아놓고 기병대다 근위대다 알락달락 색옷 입혀 지회끼리 내달을 때는 제법 볼 만하더니, 또 날씨 덕을 보았건 몸으로 때웠건 나폴레옹 둘려 엎을 때만 해도 구석에서 어사 났는가 싶디니,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궁전은 오스트리아 왈츠로 빙글빙글 돌고, 귀족은 불어(佛語)로 코맹녕이가 되고, 군데는 기합까지 프리시아식으로 넣었으나 백성은 여전히 슬라브요 농노요, 코삭이라. 짜르 따로 귀족 따로 평민 따로 농노 따로가 그 나라가 놀아나는 실상이었다. 터졌다 하면 반란이요 벌어졌다 하면 전쟁에 시끌시끌하더니 데까브리스트 선 보이면서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짜르 딴에는 남 다 자는 꼭두새벽에 잘난 척 깨어나 설친 것들 모조리 두드려 잡아 네바강(江) 얼음구멍 에도 밀어넣고 ‘성(聖)베드르와 바울’ 요새의 감옥에도 처박아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으나, 실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농민 공통체니 또 뭐니 하는 슬라브식 전통에다 이린스키 저련I 코프 아무개비치의 사상으로 범벅이 되어 수군수군 웅성웅성 삐그덕삐그덕 시끌벅적 하더니, 마르크슨지 마른고사린지와 엥겔슨지의 합자회사 제품인 박래품(舶來品) 사상까지 곁들이자 결국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얘기 다 하자면 끝도 없거니와, 아까 말한 우리 큰광대 그 단대목을 휘몰이로 소리한 게 있는데 가사 좋고. 목청 좋으니, 우리 어디 다시 한번 더 불러 한마당 들어보자.
……뾰촘킨 반랸이다! 동궁 폭격. 오데싸 학살이다. 총체 포령.
총파업이다! 층궐기다! 육군반랸이다! 10월 혁명이다! 노농병 소비에트다! 사회민주당 정권이다! 하늘과 땅의 혁명이! 반동숙청. 세계혁명이다! 브레스 트리토프스크 조약. 마르크스주의의 전략전술이다! 바쿠닌의 전략전술. 전세계의 노동자는 단결하라! 스파르타쿠스(단) 학살 묵인. 스페인을 잊지 말자! 독소불가침조약, 사회주의혁명이다! 인민민주주의. 공산주의 건설이다! 과도기. 내전이다! 빨티산이다! 白軍이다! 赤軍이다! 사회주의 공업화다! 신경제정책. 노농동맹이다! 농촌 착취. 프롤레탈리아 독재다! 정치국 독재. 프르레트칼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마르크스 레닌주의다' 일국사회주의 코민테른이다! 러시아 보의. 볼셰비키 독재다! 인민전선 지본주의 타도하자! 포츠담 얄타. 反파쇼동맹 이다! 즈다노프선. 자유의 왕국이다! 집단수용소. 민주집중제다! 개인숭배. 인민통치다! 비밀경찰. 노동자경영제다! 국가콴리. 노동착취 근절이다! 초과노동. 여덟시간 노동제다! 속도전. 생산수단의 노동자 소유다! 정치국 소유. 해빙기다! 검얼강화.
공산주의 낙원이다! 시장사회주의로 프롤레탈리아 국제주의다! 체코, 항가리, 폴란드를 가차없이 유린하라. 사회주적척 형제주의다! 주권제한은.
〔………〕
꿈은 도솔친에 말기고
심장은 수령에게 맡기고.
배는 인민식당에 맡기고
대가리와 자지 보지는 당에 맡기고 손발은 공장 농장 지배인에게 맡기고 아이는 탁아소에 맡기고 노친네는 앙로원에 맡기고
고독만이 내것
무력감반이 내것
거룩한 도솔천의 예언자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레닌은 바르도프 플레하노프와 멘셰비끼를 때려잡아
거룩한 도솔천의 성자 레닌의 이름으로
스탈린은 트로츠키 부하인 라데크 카메네프 지노비 애프를 때려잡아…… (下略. 앞의 책)
대개 그 나라 그 족속이 그러한 데다, 기미년 그때는 아직 맨세비키며 백 군(白軍)의 저항도 끝나지 않은 때었다. 제 일만 해도 오줌누고 뭣 들여다볼 틈도 없는 관국에 무슨 수르 멀리 우리까지 돌아볼 시간이 있었겠는가.
나중 동유렵에서 실패한 그것들이 뒤늦게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는 것은 인정되지뱐 그 또한 우리의 제1차 광복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거기다가 마르크시즘과 민족주의 의 결합이라니 이 무슨 창마도깨비 개울물 건너는 소리냐? 생떼라도 분수가 있고 어거지라도 등급은 맞추는 법이다.
그밖에 되먹잖은 역사책이며 시원찮은 기억들이 씨월거리는 것으로 비슷하면서도 아닌 것은 고종 독살설 (高宗毒殺說)이다.
그 무렵 우리 마지막 임금님이 돌아가셨는데 그게 일본의 독살이었다는 소문이 퍼져 온 백성이 들고 일어난 것이라는 그럴 듯한 수작이다.
하마 잊었는가.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 2천만 민족의 대표를 인왕산 기슭에 모아놓고 나라와 주권을 물려주며 강렬하게 자진(自盡)하신 일을. 그때 그분의 가슴에 깃들었던 한 마리 거대한 용이 수만 길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2천만 마리의 작은 용이 되어 우리 모두의 가슴으로 스며들었음을.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되고 다스림을 맡아 이 땅 이 겨레를 오늘처럼 행복하게 가꾸어 오계 되었음을.
그런데 독살이라니? 우리 마지막 임금님은 뭐 목숨을 둘씩이나 가지셨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2천만의 대표 2천 명이 4천의 눈으로 보고 4천의 귀로 들은 것이 모두 헛것이었다는 말인가. 침략자에 의해 불알 깐 돼지처럼 사육되다가, 농약 덮어 쓴 버러지처럼 독살당하고 만 한심한 위인이 우리 마지막 임금님이었다면, 대대로 그 핏줄의 다스림을 받아온 더욱 한심한 우리가 무슨 수로 그 침략자를 내쫓고 오늘 같은 번성을 누리겠는가.
하기야 이 부분에는 딴 소리가 있을 법도 하다. 서너 해 전 내가 어렵사리 작심하고 이야기를 시작해 먼저 그리 장려했던 역사의 낙일(落日)을 얘기했을 때, 한 안경 삐뚜름히 쓴 식자(識者)가 이렇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장려했느니, 우리 그 落日」이 이처럼 비판적이고 역동적인 문학 공간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에 따르는 역기능을 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3·1 운동이 이 작품의 내적 논리 속에서는 ‘창려한 옛 왕조의 낙일’의 덕분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체에 있어서 치욕스런 왕조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혁 명으로부터 면면히 계승되어 성장·발전해간 민중의 주체적 역량과 민중 의식 이 무시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작품을 낳은 빛나는 설화적 상상력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운운.
요새 일본은 술을 먹고 엎어져도 민중적으로 엎어져야 하고, 오입질을 해도 민중적으로 해야 그럴 듯해 뵌다는 말이 있더니, 아무래도 그 식자의 취향이 왜색조(倭色謫)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야 민충 안 민중, 있는 사람 없는 사란, 배운 이 못 배운 이, 다스리는 쪽 다스림 받는 쪽 구별 않고 오직 겨레로 두루 하나가 되어 행복과 번영을 추구해온 지 벌써 70년이 가까워오는 터에, 그리하여 이제는 겨레뿐만 아니라 사란 꼴만 갖췄으면 모두 ‘우리’로 보듬게 되어 한때 그토록 모질고 독했던 일본에게까지 한 해 50억이 넘는 달러를 수입 초과란 구실로 나눠주는 터에, 또 앞으로는 온갖 목숨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속에 받아들여 지 유태인이나 인도인의 상상보다 더한 낙원을 이 땅에 이룩하려는 터에 이제서야 민중 외치고 나서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또 약간 지각한 듯싶은 대로, 역사와 현실과 미래가 오로지 민중과 필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쳐도, 우리 그 장려했던 낙일(落日)이 짐될 것은 그리 없는 성싶다. 제 어미 가랑이 사이로가 아니라 혀끝으로나 머리통을 쪼개고 나온 별종(別種)이 없는 바에야, 그리고 진잔드로프스나 피테칸드로프스 때부터 무슨 무슨 의식(意識) 갖춰 따로 진화해온 영장류(靈長類)가 없을 바에야, 민중도 결국은 시대 환경이나 교육의 소산이라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이다. 그런데 신민(臣民)들의 존숭(尊崇)과 애도(哀悼) 속에 비창하게 침몰한 왕조의 기어이 반드시 민중의식의 발아에 해로운 시대 환경이란 결론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들의 시대가 갔음을 깨닫자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단죄함과 아울러 우리 모두가 이 땅과 스스로의 주인됨을 깨우쳐준 우리 마지막 임금님의 거룩한 즉음이,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의 뿌리와 지난날의 그리움과 사랑을 간직 하고서도 새날을 향해 뻗어갈 수 있게 해준 그분의 가르침이, 어째서 꼭 민중의 태어남을 가로막는 것이라고만 하는가. 피투성이 싸움만이 가장 좋은 시대 환경이며, 스스로의 고통을 지불하고 산 것만이 진정한 의식이란 것은 눈알 파란 인종들의 역사책에서 뽑아낸 공식일 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의 원리일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가 마지막 임금님의 바람도 의식의 자극 또는 계기의 마련이었지 임무의 부여나 독단의 주입이 아니었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강요하고, 제대로 가르치기도 전에 부리거나 써먹을 생각부터 먼저 하는 바다 건너 못된 인종의 사이비 민중론자야 어째 그윽하고 환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런데 그 얘기 했다고 “……그가 미래를 항해 스스로 닫혀 있고, 그리하여 전방을 결여하고 있음으로…….” 어쩌고 하며 사람을 구박하는 것으로 보아 그 식차(識者)의 전망도 그리 넉넉한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곁가지는 이쯤서 치기로 하고 다시 우리의 광복 전쟁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그날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싸운 이유는 천 가지도 넘지만, 또한 따지고 보변 유별나게 내세워 조목조목 따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제 땅 제 나라 빼앗기고 시달림을 받던 민족이 빼앗긴 것 찾겠다고 나저는데, 달리 조목조목 이유달 게 무엇 있겠는가. 더구나 기미년 그해는 우리가 그 지경이 된 게 어느새 10년에 가까워진 해가 아니던가. 오히려 이유를 댈 필요가 있는 것은 제 땅 제 나라 뺏긴 지 10년이 다 돼가도 두 손 처매놓고 자빠져 있는 족속들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싸움의 전개 과정만은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좋겠다. 고종 임금님께서 미처 말려볼 틈도 주시지 않고 자진하셨을 때만 해도 인왕산 기슭에 모였던 2천의 민족 대표는 그저 놀라움만으로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비통한 울음이 터지고, 다시 그. 울음 속에 당신의 말씀을 되새기다 이 땅에서 목숨을 받은 이래 처음 맛보는 벅찬 감격이 그들을 휩쌌다.
우리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그 감격을 정리했다. 원래는 선비 출신이나 중인(中人) 쯤으로 전락한 듯한 이였는데 콧날이 우뚝하고 눈매가 번뜩이는 게 범상해뵈지는 않았다.
“겨레 여려분, 나는 여러분 모두가 왕조(王朝)의 다스림 속에 안주하고. 있을 때부터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를, 새로운 사희를 꿈꾸어온 사람이요. 다스림의 힘이 군주(君主) 한 사람의 자의(慈意)에 맡겨지지 않는 세상, 그 타고난 신분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일이 없고, 범이 사람을 구별하는 일이 없는 나라, 가멸음이 부당한 소수에게 몰리치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못 가짐으로 모두가 평등해지지도 않는 어떤 사회를 이룩하려 했오. 이제 막 종언한 왕조로 보면 모반자일 것이나, 저 홍경래의 무리나 그밖의 여러 민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학(東學)에 이루고자 했던 것과도 사뭇 다른 꿈이었오이다. 태서(泰西) 근대사의 꽃이었던 이른바 혁명가로서의 꿈을 길러왔던 것이오. 하지만 그러한 내게조차 오늘은 하나의 큰 감격이오.
이 감격은 단순히 스스로 그들의 시대가 갔음을 깨닫을 줄 아는 우리 왕가의 현명함이나 일찌기 힘들여 거머쥐었고 또한 5맥 년을 누려은 통치권을 스스로 되돌려주는 그 용단을 기리는 것과는 다르오. 강성한 왜적의 총칼 앞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은 그 굳건한 의지를 향한 것도 아니며 ― 죽음이 주는 비장감(悲壯感)에 휘몰린 것은 더욱 아니요.
방금 우리들의 마지막 임금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선물을 내려주시고 가셨오. 그 첫째는 우리가 혁명이라 불리우는 내전(內戰)으로 우리의 힘을 낭비하는 걸 막아주신 일이오. 나 같은 사람을 감히 ‘저지 깨어난 자’라 일컬을 수 있다면 앞으로 깨어나는 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깨어나는 자가 늘어날수록 더 깊이 잠들려는 자도 있을 것인바, 설령 그들이 소수로 몰리게 된다 해도 힘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어질 것이오. 따라서 그 어느 쪽이 먼저 시작하든 싸움은 반드시 일게 되어 있고, 비극적인 자기 소모도 필연적이오. 그런데 그분은 그걸 막아주셨오. 아직 우리 중에는 잠들어 있는 쪽이 훨씬 이로운 이들도 많지만 이제 더는 깨기를 먀다할 수 없게 되었오.
두번째로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새로이 재르 시작해야 하는 허전함과 불안함을 없애주셨오. 우리가 먼저 피투성이 내부 투쟁을 통해 이 나라의 주인됨을 회복해야 한다면 그 이전의 모든 것은 부정되어아 할 어떤 것, 아니 그 이상 혐오하고 멸절시켜야 할 악(惡)이 되고. 마오. 그리하여 용케 그 싸움에 이겼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서 쟤로 시작해아 될 것이오. 그런데 그분은 스스로를 내던져 우리가 애틋한 정애(情愛)로 보듬을 수 있는 과거를 남겨주셨오.
또 우리의 출발이 과거의 부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면 미래 역시 막연하여 혼란될 수밖에 없을 것이오.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내세워 어느 길로 가느냐를 정하는 게 또 새로운 싸움의 불씨기 될 것이오. 종종 그 싸움은 그 전의 싸움보다 더 큰 비극과 소모를 강요함은 태서(泰西) 여러 나라의 혁명사(革命史)가 갈 일러주고 있오. 그런데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는 그것도 막아주셨오.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란 흠은 있으나, 우리 스스로의 깨우침을 갈음할 수 있는 그 분의 가르침은 우리를 한길로 몰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애틋한 정애로 보듬게 된 과거는 미래조차 하나가 되어 추구할 수 있게 해줄 것이오.
그러므로 겨레 여리분. 우리는 분별 없는 슬픔으로 이 귀한 선물을 헛되게 하여서는 야니 되겠소. 선왕(先王)의 유해를 정성껏 수습해 모시되, 한편으로는 우리가 해야 할 더 큰 일도 이 자리에서 당장 시작하도록 합시다.“
비록 그가 말했으나 기실 그것은 2천 명 대표 모두의 말이었고, 그 뒤에 있는 2천만 민족 모두의 말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뱌쁘게 나머지 1,999명의 대표가 입을 모아 소리쳤다.
“그렇소. 싸움시다. 먼저 빼앗긴 것부터 되찾은 뒤 다시 겨레의 복됨과 번영을 도모합시다.”
2천만이 흔연히 하나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광복 전쟁의 결의였다.
그런데 이 같은 결의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시원찮은 역사책이나 옹졸하고 치사한 회고담은 엉뚱한 얘기들을 하고 있다. 천도교(天道敎) 쪽에서 제일 먼지 발의했다느니, 무슨무슨 당〔新韓靑年黨〕이 파리로 아무개〔金圭植〕를 보낸 게 그 시발이라느니, 무슨 단〔重光團〕의 아무개〔呂準〕 아무개〔李東寧〕가 발표한 무오독립 선언문(戊午獨立宣言文)이 그 효시라느니, 기독교 무슨 파〔長老敎〕 무슨 파〔監理敎〕가 먼저고 학생들이 그 다음이라느니, 재미(在美) 동포가 뭐 어쩌고 재일(在日) 유학생이 뭐 어쨌다느니, 하는 좁살 세는 소리들이 바로 그것이다. 게중에는 제법 이런 저런 근거와 구체적인 사람 이름까지 대가면서 제 옳다고우기고들 있는데, 이왕 말이 났으니 어디 한번 차근차근 따져보자.
먼저 천도교 쪽. 천도교도들 사이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대중 봉기를 갑오(甲午)년 동학 운동의 재현과 계승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 경술국치(庚戌國恥) 때부터 그. 준비를 해왔으며, 그들 가운데는 자결로 먼저 싸움을 시작한 이만도 쉰 명 넘는다는 것 뚜한 사실이다. 갑진년(1904)에 있었던 개화 운동(開化運動)을 한 징검 다리로 삼아 천도교 쪽이 앞장서서 광복 투쟁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일으켰던 1912년의 거사 계획도 그 한 고리였다.
1911년 1월 16일 한떼의 교도들이 교주인 손병희(孫秉熙)를 찾아 기독교와 손잡고 거사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대한제국 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와 보성사(普成社) 및 오세창(吳世昌)·권동전(權東鎭)·최린(崔麟) 등과도 거사할 걸 의논했다고 한다. 그해 10윌 신민회(新民會) 사건이 터져 주춤한 척이 있긴 하지만, 곧 사람을 시켜 농어민의 배일 감정을 조사하고 범국민신생활 운동을 추진하는 등 활동에 들어가 마침내는 그 이듬해 7월 15일을 거사 일차로 잡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됨으로써 결국 일은 계획 단계에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그뒤 그들은 다시 불교 쪽과 힘을 합치는 길을 찾기도 하고,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만들어 민족의 애국심을 기르는가 하면 무력 항쟁에 펄요한 무기 구입을 도모하기도 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을 맞게 되었다. 그해가 마침 갑인(甲寅)년이라 감오·갑진에 이은 길년(吉年)으로 보고,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이란 결사를 중심으로 이른바 삼갑 운동(三甲避動)에 들어갔다.
그들은 얼본이 반드시 패망할 것이란 판단 아래 국제 정세를 분석하고 대전 막바지갸 되는 1918년에는 무오독립 선언문(戊午獨立宜言文)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말 독일이 패망하자 다시 주춤한 채 이듬해 1월의 파리 강화 회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 대개 그런 식인데 여기까지도 틀림없이 사실이다. 문제는 그 뒷부분,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에 격분해 있는 국민들을 보고 대중 봉기를 앞당겼다는 주장이다. 1월말부터 기독교 쪽과 접촉을 시작해 3월 15일까지는 유교 불교 학생단 등과의 연락을 완료하고. 3윌 1일 거사일로 잡았다는 것인데, 어느 모로 봐도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구석이 많다.
만악 그 주장대로라면 그 광복 전쟁에서 보여준 2천만의 예의 없는 참여가 아무래도 설명되지 않는다. 천도교가 우리 2천만 모두에게 공통된 종교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무렵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해 그저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종교의 하나였을 뿐이다.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둔에 격분한 국민들을 보고…….”란 보충 설명이 있다 쳐도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민족의 존망이 걸린 성전을 일시적인 대중 심리(격분)에 편승해 시작했다면 그 얼마나 책임없고 경박한 짓이 되겠는가. 또 만약 그 전쟁이 그렇게 시작되었다면 어떻게 뒤이은 25년의 길고도 참담한 싸움을 우리가 감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동학 운동의 재현 및 계승이라는 그들의 동기도 마뜩치 못한 느낌 이 든다. 요즈음 뻑하면 그 운동을 끌어내다가 여기 저기 두드려 맞추는 게 일부 식자들간에 유행인 모양인데, 아무리 감초라도 넣을 약봉지 있고 안 넣을 약봉지가 있다. 갑오년 그해의 활동이 볼 만했다손치더라도 전체와 부분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동학 운동은 아무리 크게 잡아도 거기 가담한 이들이 그때 우리의 절반이 안 되고, 따라서 그걸로는 우리 전체와 갈음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2천만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목숨을 걸고 나선 광복 전쟁을 그런 농민 운동의 재현이나 계승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잘해야 실속 없는 공로 다툼으로 오해되고 잘못하면 30년 전의 기여에 얽매인 광신자들의 자기 도취로 단정될 그린 주장이 어째서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천도교 자체를 위해서도 이롭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제1차 광복 전쟁은 우리 모두가 누구의 부추김이나 앞장섬 에 끌려감 없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수행한 민족의 성전(聖戰)이었다.
어거지스럽기로는 기독교 쪽도 천도교 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즈음 잘 팔리는 어떤 백과사전에는 기독교의 활동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측의 독립 운동(3·1)은 관서(關西) 지방의 장로교와 서울·경기지역 의 감리교 계통이 복합화되어 다른 종교단체와 대동합류(大同合流)되었다. 즉 1919년 1윌 말 천도교 단체와 대동합류(大同合流)되었다. 즉 1919년 1월 말 천도교도들이 복합화된 그리스도교측의 치도자인 이승훈(李昇薰)을 만나면서부터 본격화된 것이었다. 거기다가 다시 그해 2월 초순 상해(上海)로부터 신한청 년당(新韓靑年黨)의 선우혁(鮮于爀)이 국내와의 연락 임무를 띠고 관서 지방에 와서 이승훈과 협의하게 되면서부터 독립 운동은 더욱 활기를 더하게 되었다, 그 같은 항일 의식의 고조는 숭실·숭덕·숭의·숭현 등의 각급 학교 및 선천(宣川) 등의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 시위 운동의 준비를 진행케 하였다.
그러다가 2월 5일 천도교의 민중연합운동의 취지를 이해하고 적극 참여키로 결심하고, 2횔 15일 이승훈이 상경하여 그 참가를 쾌락하였다. 여기서 이승훈은 그리스도교 대표로서 동지 규합을 의논하고 거사일을 3윌 1일로 결정하였다. 서을·경기 지방에서는 대한감리파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남녀 학생을 포섭,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박희도(朴熙道)와 윤치호(尹致昊)가 그해 1월 하순경에 이미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김원벽을 중간에 두고 강기덕·주익·한위건: 김형기·이공후·주종선 등의 학생들과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협의한 바 있고, 서울예수교장로파의 이갑성 (李甲成)두 2월 중순경 셰브
랸스의학전문학교 구내 그의 자택에서 전기 남학생 10여 명을 소집해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나서줄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진도교 쪽처럼 가강 먼저 시작했다거나 광복 전쟁을 그들의 종교 전쟁과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 쪽 역시도 자기들이 거기서 유별난 역할 또는 매우 중요한 활동을 했다는 걸 주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당한 몫만 가져가거라. 2천만분의 당시 기독교도 머릿수만큼을. 거듭거듭 말하거니와 2천만이 다 같이 한 일을 유독 자기들만이 또는 어면 몇몇 단체가 어울려 해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功)올 도둑질하려 함에 다름 아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넘보는 서양 오랑캐의 정신적인 첨병(尖兵)이랸 혐의를 받는 데 괴로워져도 그들의 그 광복 전쟁에서 힘을 다한 건 사실이지만, 또한 우리 2천만 중에 어느 누구도 그만 힘을 쓰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 파연 그날 학생들의 투쟁은 눈부신 바 있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북으로 용정(龍井)에서 남으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교는 두 겹의 동원 조직으로 그 싸움 뛰어들어 물불 안 가리는 전위(前衛)로서의 몫을 다했다. 어린 소학생에서 아직은 전시대의 수줍음을 다 지우지
못한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들도 또한 알아야 한다. 그날 우리 2천만 누구도 그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랍은 없다는 것을. 겨레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심성과 불의한 힘 앞에 비굴해지지 않는 용기는 물려받아 이어가되, 헛된 자부로 오만에 빠지거나 독선으로 흘려서는 안 되리라.
상해의 어디 있었다는 뜬구름 같은 패거리들의 무슨 당(黨)이며, 시베리아와 만주 어디에 있었다는 무슨 군정부(革政府) 무슨 단(團), 그리고. 이승만인가 뭔가 하는 허깨비들이 미주(美洲)에서 결성했다는 무슨 협회(協會)가 우리의 제1차 광복 전쟁에 불을 질렀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역사의 잠꼬대들이다. 대저 제 나라 두고 남의 나라가서 제 나라 어려운 것 외고다니는 이들 치고 처음과 같이 가지런한 이 드물거니와,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지는 싸움이 벌어진 것은 이 나라 이 땅 안인데 그들이 해봤자 무슨 대단한 걸 했겠는가. 잘해야 말만 거창한 무슨 선언문 따위나 뿌리며 다녔거나 저 되놈 이 양코배기 찾아다니며 독립 구걸이나 했을 테고, 개중에 못된 것은 그 핑계로 어려운 동포들 돈이나 거둬 제 실속이나 차렸다.
독립 자금 거두어
광목장사나 할까.
누구 얘긴지는 모르나 한때 그런 노래가 있었다는데 아무래도 그게 바란 안 부는데 흔들린 나뭇가지 같지는 않다. 거기다가 얘기 난 김에 하나 덧붙여두고 싶은 것은 고종 옛금님의 가슴에서 우리들의 가슴으로 자리를 옮겨 깃든 작은 용(龍)에 대해서다. 당신께서 보검을 들어 스스로의 가슴을 열던 그날 그 작은 용이 비처럼 쏟아져 우리의 가슴마다 스며든 것은 오직 이 땅 3천 리 강산 안에서였다. 그 시각 남의 땅에 가 있던 이들에게는 그 용이 찾아들지 못했으니 그때부터 그들은 이땅에 남아 있던 이들과 같지 않았다. 속없이 외국바람에 휩쓸려서이건, 거기서 더 좋은 길을 찾아보겠다는 갸륵한 뜻에서이건, 앞으로도 이 땅 이 나라가 괴롭고. 어려울 때 떠나려거던 꼭 그때 일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밖에 아는 성스레 나서기 잘하는 짓들이 어김없이 제1차 광복 전쟁의 앞단계로 내미는 것으로는 ‘2·8 독립 선언’ 이란 게 있는데, 그것도 따져보면 앞서의 경우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제1차 광복 전쟁이 터지기 한 스무날 전쯤 동경(東京)에 있던 우리 유학생 4백여 명이 세 나라 말로 된 독립선언서와 민족대표소집 청원서(民族代表召集請願書)를 뿌리고. 돌립 만세를 외친 사건이 있기는 했다. 그 때문에 현장인 YMCA 회관에서 붙들린 40명 중 아홉 명이 일본으로부터 실형을 받았고, 다시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도 크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나 ― 그야말로 때없이 날아든 제비 한 마리 오지도. 않은 봄소동만 일으킨 격이었다. 겨울방학에 집에 갔다가 흘려들은 몇 마디만 가지고 날짜도 모르고 유학생 몇이 먼저 설친 모양인데 하마터면 일을 망쳐도 크게 망칠 뻔했다. 자신에 넘쳐 있던 일본이 최고 금고(禁錮) 9개월로 가볍게 다루었기 망정이지, 만약 눈에 쌍불 켜고 덤벼 이땅까지 단속했더라면 어찌될 뻔했는가.
죽어도 무랍(물밥)초차 뭇 얻어 먹을 자발없는 소리들은 그 광복 전쟁의 조직 과정에서도 계속된다. 우선 눈에 설고 귀에 거슬리는 것만 들어도 투쟁 수단과 민족 대표 33인, 그리고 이른바 ‘기미독립 선언문’ 이란 해괴한 문건(文件) 해서 세 가지나 된다.
투쟁 수단에서 우리가 평화적 시위를 고른 것은 어김없는 사색이다. 무력 투쟁의 전단계로서, 아니 그 이상 통렬한 타격을 가하기 전의 엄중한 경고로 우리는 만세 시위를 결의했는데, 그것은 또한 이웃한 민족끼리 피흘려 싸운 기억을 하나 더 보태게 되는 걸 피해보려는 우리의 성실하고 진지한 노력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게 우리의 유리한 수단이었던 것처럼 말해 우리의 무력(無力)함을 은근히 암시하거나, 우리가 피투성이 싸움을 겁내 그 길을 택한 것처럼 말해 스스로를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짓들을 함부로 하고 있다. 아니면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 우리의 선택에 더욱 고약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 모두가 하나같이 피가 의심스런 무리들이다. 임진왜란 때 떨어진 왜군의 씨가 아닌 담에야, 누구 좋으라고 그 따위 수작들인가.
그 다음에는 민족 대표 33인. 역사책들이 흔히 주장하기로는 그들이 모여 우리의 제1차 광복 전쟁을 온통 다 주물러댔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서른셋 이란 숫자부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미 말했듯 우리 마지막 임금님께서 소집한 우리의 대표는 지역별 직능별 2천 명이었다. 그들 모두에 의해 발의되고 수행되었건만 어째서 우리 광복 전쟁의 민족 대표로는 그 서른셋만 남겨지게 되었는지 실루 어처구니가 없다. 아마도 민족 대표란 말이 거장하니 거기서 뭐 얻어먹을 거라도 있는 줄 알고 되먹잖은 몇몇이 판쓸이를 한 모양이지만, 일없다. 그 대표란 게 실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 뽑아보낸 게 아니라 어쩌다 일 없는 사람을 여럿이 추렴으로 노자 주어 보낸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게 잘 이해 안 듸면 요즈음 부실 아파트에서 가끔 뽑아야 하는 입주자(入住者) 대표 생각해보면 된다. 그런데 그것도 뭐 큰 벼슬이라고 나머지 1,967명은 한 구석으로 몰아쳐버리고. 저희 이름만 내세운 못난 서른셋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한술 더 뜨는 것은 그 서른셋의 성분이다. 가장 흔히 눈에 띄는 것은 천도교 대표 열다섯, 기독교 대표 열여섯, 불교 대표 둘, 그렇게 합쳐 서른셋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가 뭐 종교 연합국가인가. 어째서 종교 지도자 몇 명이 막바로 민족 대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유교(儒敎)·도교(道敎)를 믿거
나 종교 없는 사란은 우리 민족도 아니란 말인가.
듣기로는 거사 준비 과정에서부터 거사 당일 일본 경찰에 자수할 것을 동의(動意)하다가 그게 채택 되지 않았는데도 거사 당일 일본 경찰에 무더기로 자수해버린 겁 많은 대표들이 있었는데, 짐작에는 그들이 바로 민욱 대표 전부인 양 잘못 알려진 듯하다. 일본이 다른 대표들의 자수를 권유하기 위해 고의로 흘렸거나, 그들밖에 잡지 못해 당황한 나머지 그들이 민족 대표 전부라고 우긴 경찰 보고서에서 흘러나온 명단이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둔감해서.
하지만 정말로 눈뒤집힐 일은 이른바 그 「기미독립 선언서」란 글이다.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 을 선언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여……
이렇게 시작하는 그 글은 한동안은 자못 씩씩하게 우리의 뜻을 펴보이는가도 싶었다. 그러나, “丙子修好條規 以來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日本이 食하였다 하야…….”가 되면서부터 점점 수상쩍어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아직도 웅장하고 말은 점잖우나 그 뜻을 가만히 살피면 겁먹은 개 샅추리에 꼬리 말아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싸움을 시작하면서 상대가 성내는 걸 걱정하는 격이요, 뺨 때린 놈은 가만히 두고 그놈 손 후리는 곳에 있는 제 뺨만 탓하는 격이요, 빼앗긴 물건을 외상준 걸로 치부잡은 속없는 장사꾼 그 돈 받아 가게 놀릴 궁리하는 격으로 나가다가 겨우 한다는 게 남 등에 업고 하는 엄포다. 4억에 힘주어 지나인(支那人)을 앞세우나 그 덩지만 큰 지나인은 아직 일본에게 진 눈두덩이 멍도 삭지 않았고, 바다 건너 세계만방 끌어대봐도 그들이 바로 일본의 선생들이니, 노는 입에 하는 염불과 무엇이 다르랴.
제 힘우로 뭐 어쩌겠다고 겁줄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눈물섞어 애원하는 게 정직하기라도 하련만, 그건 안 되겠는지 그 다음에 느닷없이 어어지는 제 떡 쥔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기다.
아아, 新平地가 眼前에 진개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눈 지그시 감고 읊어대듯 이렇게 나가는데, 속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벌써 일본이 보따리 싸 저희집으로 돌아간 줄 알만했다. 그러다가 겨우 끝이리고 맺는 게 공약(公約) 삼창인데, 이건 또 멀쩡한 놈 싸우는데 곰배팔이 흉내내게 해 넙치가 되도록 얻어터지지 만드려는 수작이나 다름없었다.
잘들 모르는 듯하니 감히 단언하거니와, 우리 광복 전쟁에서는 결코 그런 해괴한 선언문은 발표한 적이 없다. 우선 ‘독립(獨立)’ 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공식 용어가 아니며,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 대한 대응 조처나 후속 행동에 대한 아무런 다짐이 없는 일회성(一回性) 시위의 선동도 우리 뜻과는 사뭇 다르다. 누가 겨우 10년도 안 되는 군사적 점령에서 벗어나는 걸 독립이라고 표현하는가? 중국은 몽고족에게 거의 백 년이나 다스림을 받았지만 중국이 몽고족으로부터 독립 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고, 2차 대전 때 불란서도 독일에게 완전 점령 당했지만 전후 불란서가 독일에게서 독립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또 그때 우리가 일본에게 밝히고 싶던 것도 너무 모진 일을 얼결에 당해 제대로 모아지지 않았던 응천(應戰)의 결의였다. 그런데 그처럼 약해 빠지고 속없는 소리들만 늘어놓은 글을 우리의 선언문으로 어떻게 채택할 수 있겠는가.
믿지 않아도 도리 없지만 진상을 밝히면 이렇다. 그때 우리에게는 ‘기미대일권고문(己未對日勸告文)’ 이란 게 있었다. 우리 중 일부는 권고 대신 경고(警告)란 말을 쓰자고 나섰으나 바로 무력 행동(武力行動)으로 나가지 않고 평화 시위를 앞세우게 된 것과 같은 이치로 권고란 말이 재택된 것이었다. 대일권고문(對日勸告文)만도 7천여 자(字)에 대내제현(對內提言) 10항(項)으로 된 그 글을 여기에 모두 옮기는 것은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그 수고로움에 값하는 보람도 없을 듯하여 알맹이만 추려보면 대강 이러하다.
본문인 대일권고문은 네 단락으로 되어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일본에게 권유하고자 하는 내용의 의전적(儀典的) 수사(修辭)를 갖춘 요약, 두번째 단락은 그들의 불의에 대한 준엄한 비판, 세번째는 반도 철수(半島撤收)에 따른 그들의 득실에 대한 냉철한 논의, 네번째는 권고에 불응할 때 그들이 직면하게 될 우리의 후속 행동과 결의이다. 부드러우면서 비굴하지 않고 굳세면서도 억누름이 없고 소박하면서도 거칠지 않은 게 가히 겨레의 뜻을 드러낼 만한 명문이었다. 그리고 대내제언 10항은 일종의 행동 강령으로 겨레의 힘을 효과적으로 집약할 수 있으면서도 상황이 바뀌면 즉각 대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같은 명문(名文)은 까마득히 잊혀지고, 한자(韓字=日本이 上古史에서 주장하는 朝鮮母系의 혼혈아)의 후예가 썼거나 일본의 위작(僞作)인 듯한 그 따위 너절한 선언문(宣言文)만 남아 돌아다니니 실로 뒷날이 걱정된다.
그밖의 우리 왕조의 장려한 낙일(落日)로부터 제1차 광복 전쟁의 개전일(開戰日) 기미년 3월 1일까지 있었던 일로 지금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 중에서 따지고 바로잡아야 할 것은 아직도 많다. 누구누구가 어디서 모임을 몇 번 가졌느니, 날짜는 언제 잡혔느니, 태극기와 선언문은 어떻게 인쇄되어 어떻게 나눠졌느니, 학생 동원은 누가 맡아했느니, 따위에 관한 것들인데 증요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자. 아직 바로잠아야 할 더 중요한 일도 많이 남았거니와 체법 날짜 대고 시간 대고 장소 대고 사람 이름 대가며 이책 저책에 거짓말 써 갈겨 논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는 일도 이젠 지쳤다.
다만 개전의 결의가 대표들을 통해 2천만 겨레 모두에게 알려진 것은 2월 중순이며 태극기와 대일 권고문(勸告文)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나뉘어진 것도 2월 2일은 넘지 않았다는 것만은 기억해두기 바란다. 수만의 헌병과 경찰에다 그 몇 배나 되는 보조원과 앞잡이를 거느리고 우리를 감시해온 일본이 우리가 모든 채비를 다 하고도 열흘이나 되도록 그 일을 냄새조차 맡지 못했다는 그 기적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모두가 주모자가 되어 한순간도 방심하거나 흔들림 없이 스스로의 걸을 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온 놈이 온 말을 한다 한들 그 엄연한 사실이야 터럭만큼인들 다칠 수 있으랴.
震天動地의 萬世聲, 太和館 萬世聲이 나자 同時에 塔洞公園에 會在하얏던 數萬의 學生이 朝鮮獨立萬世를 제창하면서 手舞足踏하면서 風湯湖湧의 勢로 長安을 貫中하니 枯木灰死가 아닌 우리 民族으로 誰가 感泣치 아니하리오. ㅡ刻一刻 增加하난 萬世聲이 鍾路四街에 至하야는 天池가 震動하얏더라.
제1차 광복 전쟁의 개전 첫날인 3월 1일 서울의 모습을 당시의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관계로 흔히 그. 정확성이 의심받지 않고 있지만 일본의 혹독한 언론 탄압을 상기하면 꼭 그럴 것 같지도 않다. 태화콴(太和館)을 앞세운 것이나 학생을 위주로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군중의 숫자를 겨우 몇 만으로 줄어 보도한 게 바로 그런 의심을 이르키는 부분이다. 닷새나 지난 뒤에아 그것도 짧게 보도하긴 했지만, 당시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도 수십만 군중이 참여했음을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분위기만은 앞서의 보도가 비교적 정확히 전해주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일본의 공식적인 요약과도 일치한다.
1919년 3윌 1일 오후 두시 조선의 차칭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은 태화관이란 요정에 모여 독립선언문 낭독식과 만세 삼창에 들어갔다. 원래 그들이 거사 장소로 잡은 것은 파고다 공원이었지만 거기 모인 다수 군중이 일시적 충동으로 폭동을 이르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곳으로 장소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때 그 사실을 모르고 파고다 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과 시민들은 당황한 나머지 강기덕 등을 태화관에 보내어 민족 대표들에게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으나 식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徐永煥)을 시켜 총독부에 독립 통고서를 전달하게 하는 한편, 손병희의 제의로 한용운이 독립 운동의 결의를 다짐하는 간략한 인사에 이어 만세 3창에 들어간 것이다. 이른바 독립선언문의 낭독까지 합쳐 불과 15분 만에 식이 끝나자 민족 대표 33인은 경찰에 자기들의 의지를 통고하고, 곧 달려온 경찰에 모두 스스로 체포되었다.
이때 파교다 공원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학생들은 30분이나 기다려도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거기서 별도 선언문 낭독식을 하고 거리르 뛰쳐나왔다. 그날의 시위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상경 했던 수많은 일반인들과 서울 시민들이 그 뒤를 따라 군중은 삽시간에 수만으로 불어났다.
시위 군중의 행진 경보는 대강 두 갈래였다. 한패는 파고다 공원 정문을 나서 종로를 지난 뒤, 서울역전·의주로·정동·˙미국영사관·이화학당으로 해서 다시 광화문·서대문·프랑스영사관·서소문·소공동으로 나아가다가 충무로 일대에서 급히 출동한 경찰의 저지를 받곤 일단 해산하였으나, 다시 다른 군중과 연합하여 전보다 더 큰 집단을 이루고 광화문을 거쳐 대한문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그들과 달리 파고다 공원 뒷문으로 밀고나간 시위 군중은 창덕궁·안국동·광화문을 거쳐 서대문으로 향했다가 프랑스영사관 앞에서 크게 만세를 외친 다음 이화학당·정동·미국영사관·대한문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도 다시 충무로 방향우로 나아갔으나 경찰의 제지를 받음이 없이 동대문까지 가서 그 문 위에서 한번 더 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이것이 어떤 총독부 문관(文官)의 요약인바, 서울 한 곳에 한정되어 있으나 일본인이면서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쓴 점은 금세 눈에 뛴다. 아니, 그 이상은 우리 스스로의 기록이나 전언(傳言)에 비하면 그만큼이라도 써 남긴 게 가상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한 일본인이어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도 있으니 그걸 중심으로 그날의 참모습을 알아보자.
우리의 민족 대표가 33인으로 된 것이며, 그 역할이 실제 이상으로 크게 보이게 된 경위는 앞서 이미 얘기했다. 그런데 이제 이 일본인의 기록으로 보아 하나 더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주로 서울 지역 대표였던 듯싶다. 을사조약 당시 서울 인구가 25만이었다니 기미년 그. 무렵은 33만쯤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만 명에 하나씩 대표를 세우면 꼭 33인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지역에 비해 아는 게 많은 것이 탈이 되어, 무저항운동이니 비폭력주의니 하는 물건너 것들 설익은 생각을 흉내내다 그리된 것이리라.
그 다음은 참가자의 성분인데, 집단 활동이 유달리 눈에 띄는 학생을 위주로 파악한 것은 좋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일부만의 활동인 듯한 인상을 주는 것 이 눈에 거슬린다. 일본인으로서 자기 나라의 펀을 들기 위해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그의 숫자 개념이 축소 지향적이어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틀려도 너무 틀린다. 열 번을 말해도 수다스럽단 말은 안 들을 소리가 바로 그 전쟁에 환웅과 웅녀의 피를 받은 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나섰다는 게 아닌가.
왜 하필이면 개진(開戰) 시간을 그날 오후 2시로 정했는지는 이렇다하게 알려진 게 없지만, 그 시각이 되자 서울 거리뿐만 아니라 이 땅 전체는 참으로 볼 만했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걷지 못하는 환자나 앉은뱅이는 집앞에 나와 소리로나마 그 싸움을 거들었고, 방안에 뉘어둔 갓난아기도 그 시각만은 울음 소리가 만세로 바뀌었다. 마당을 뛰노는 강아지도 일본을 향해 짖었고 외양간에 매어둔 마소도 만세 수리처럼 울었으며 ― 이 땅에 깃들인 새들도 일본을 나무라듯 지저귀었다. 배운 이 못 배운 이, 가진 이 못가진 이, 잘난 이 못난 이, 힘센 이 약한 이, 병든 이 성한 이 ― 그날만은 이 겨레면 모두 하나가 되어 뛰 어 나갔다…….
그 일본인의 요약에서 눈에 거슬리는 또다른 것은 시위 행진의 경로이다. 미국영사관과 프랑스영사관을 거듭 찾아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외세(外勢)에 의지하려 했음을 넌지시 비꼬고 있는 듯하다. 일본인으로서의 한계이거나 우연히 그가 뒤쫓게 된 군중의 시위 경로가 그러했딘 탓일 것이다. 그날 서울만 해도 20만이 넘는 군중이 거리를 누볐으니 어딘들 가지 않았겠는가.
구호가 대한독립 만세라는 단조로운 것이었다는 것과 다른 지방과의 연계에 대해서 아무 말 않는 것도 의심스럽다. 그때 우리의 구호는 대한독립만세 외에도 일본의 철수를 요구하는 것과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 더 있었다. 우리의 요구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한구석으로 몰아붙이려는 고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른 지방과의 연 ――그날 같은 시각 이 땅 구석구석에서는 서울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고 읍내나 장터가 먼 산골짜기의 화전민은 저의 가족끼리만이라도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었다. 그런데도 깨끗이 그 일을 입 다물고 있는 것 또한 어디까지나 그날의 싸움을 부분적으로 몰아 하나의 운동이나 사건으로 몰려는 의도가 깔린 짓이나 아니었던지.
하기야 거기 대해서는 우리 쪽의 기록도 오십 보 백 보다. 구호는 그 일본인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대한독립 만세 하나로 되었고, 지방과의 연계도 이상할이만치 악화시켜놓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서울과 같은 날 봉기한 것은 평양·의주·신천·안주·원산·진남포 여섯 곳뿐이었고, 그 다음날도 함흥·수안(遂安)·황주(黃州)·중화(中和)·강서(江西)·대동(大同)·해주·개성 등 주로 북쪽 지방에서만 했으며, 남쪽까지 호응하게 되는 것은 3월 중순 이후라는 것이다. 일본인의 기록보다야 낫지만 우리 봉기의 동시성(同時性)과 일제성(一齊性)을 흐려놓자는 수작이 어떻게 우리 손으로 기록되어 남게 되었는지 참으로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그러나 이쪽 저쪽 할것없이 한 목구멍으로 나온 듯한 소리 중에 가장 용서 못 할 것은 아무래도 기미년 3월에 시작된 그 얼을 일회적인 사건들의 집적으로만 몰아가는 수작들이다. 이제 와서는 거기 대한 반성도 없지 않지만 우리는 엄연히 일년이란 기한을 정해 싸웠고, 그 수단이 비록 평화척인 구호와 시위로
만 제한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김없이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우리가 그저 일시적인 격정에 들떠 여기저기서 한번 해본 일들의 모임으로만 처리해, 종당에는 3·1 운동이니 만세 사건이니 하는 망칙하고 분한 이름표를 달게하고 말았다. 자랑스런 역사를 그 꼴로 싸말아 놓고도 오늘과 같은 행복을 누리게 된 게 오히려 못미더울 지경이다.
광복 전쟁을 만세 ‘사건’으로 만든 생각의 얕고 가벼움의 한 연장이겠지만, 그뒤 일년에 걸쳐 간단없이 계속된 그 전쟁의 경과가 터무니없이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분하다 못해 한스럽다. 숨김 없이 말한다면 그 악종들을―장차 동양 3국을 피르 물들이고 마침내는 태평양을 저희 썩은 시체로 뒤덮으며 망한 뒤에서야 겨우겨우 정신을 차릴 그 독한 섬 나라 족속을, 사람으로 믿고 그런 물렁한 일을 벌인 데는 우리의 실수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인두겁을 썼으니 말은 알아들을 줄 알고 피흘리는 싸움은 피해보자는 뜻에서 비폭력 시위와 경고를 되풀이 한 것이지만, 일년이나 겨레를 그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맡긴 것은 아무래도 좀 미련했던 듯싶다.
처음에는 무슨 좋은 일이 났나 싶어 안 어울리게도 일장기(日章旗)까지 들고 따라다닌 멍청한 것 들도 있었으나, 일의 내막을 알자 이 악종들은 전에 없는 표독을 부리기 시작했다. 칼은커녕 막대기 하나 들지 않은 우리 군중을 향해 지들 군대는 무슨 큰 싸움판 만났다는 듯 온갖 명기를 다 썼고, 우리의 구호 속에 담긴 경고는 다만 악에 받친 군가(軍歌)와 욕설로 맞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 없이 전쟁이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으되 피와 살이 튀었고, 어느 쪽이 공격하고 어느 쪽이 방어하는지 구분은 안 되었으나 공방은 일년이나 거듭되었다. 전쟁터는 이 땅 삼친리가 모두였다. 만(萬)이 넘는 시(市)·읍(邑)과 장터는 말할 것도 없고, 때에 따라서는 논두렁도 외진 산골짜기도 싸움터로 변했다.
그들은 연제나 공격하고 승리했으나 몰아서면 또한 연제나 패배하고 쫓기었다. 우리는 골 깊은 산어귀의 샘이었고 여름 산등성이에 피어오르는 구름이었고 쉼 없이 밀려드는 파도였다. 죽이고 가두고 후려서 흩었지만 다음날이면 또 어디선가 모여 항의하고. 경고했다.
어찌 보면 그때의 우리가 미련한 듯도 싶으나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 있었던 그들과의 25년 전쟁과 거기서 흘린 피를 생각해보라. 거기서 잃은 양국의 물자와 노동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번영과 복지에 써야 할 시간의 허비를 생각해 보라. 만약 일본이 제1차 광복 전쟁의 삼백 예순다섯째 날에라도 정신을 차려 저의 땅으로 물러갔다면, 비록 피흘리고 고통당한 것은 우리뿐이었더라도 이익은 우리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그 거룩하고 고귀한 싸움을 역사와 기억은 몇 줄의 수치로만 갈음하고 있다. 그것 도 집회 횟수 1,542회, 참가 인원 수 2,023,089명, 사망자 수 7,509명, 부상자 수 15,961명, 피체(被逮) 인원 수 46,948명, 불탄 교회 47개소, 불탄 학교 2개교, 볼탄 민가 715채 ― 하는 식의 일본 경찰 집계 그대로. 그러다가 정히 안됐으면 ‘제암리 학살’ 이나 유관순 열사(烈士)쯤 꺼내 손수건으로 눈시울이나 찍어대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물론 치금 행복하지만, 지겹고 미칠 듯이 행복하지만, 그래도 이래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토록 행복해지기까지 지나온 고비 고비를 기억하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되며, 그때 살아남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 간 이들을 기리는데 소홀해서는 안 된다. 재1차 광복 전쟁 삼백예순다섯 날 동안 매일 매일 수천 번씩 벌어졌던 거룩한 싸움들은 역사 속에 찬연히 복원되어야 하고, 수백의 제암리는 겨레의 성역(聖域)으로 보존되어야 하며, 장터마다 마을마다 음증신(陰中身)으로 떠도는 수만의 유관순은 겨레의 기억 속에 길이 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그 처절했던 제1차 광복 전쟁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흔히 ‘3·1 운동의 결과’ 또는 영향이라는 식으로 성의 없이 얄팍하게 말해지는 부분이다. 민중 의식·민족주의의 성장, 일본의 각성과 문화 정책 실지, 임시정부의 성립, 지속적인 항쟁의 전통 수립 따위나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사타그라하〔無抵抗排英運動〕, 터키의 민족 운동, 이집트의 반영 자주 운동(反英 自 主運動)에 영향을 주었다는 따위가 그것이나 ―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려는 것은 그 따위 속알머리 없는 수작이나 바람먹고 구름똥싸는 흰소리가 아니다. 우리가 오늘의 이 행복으로 한발 더 나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또 하나의 높고 험한 재〔嶺〕, 25년 ’전쟁과 연결되는 역사적 고리로서의 그 결과이다.
제1차 광복 전쟁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우리 중에 일부는 그 전쟁이 이미 가방 없는 낭비임을 알았다. 일본의 표독스런 총칼 앞에 흘리는 겨레의 피를 아까워하는 소리가 높아졌고, 이튿날 아침이면 무위로 끝나긴 해도 거듭되는 매일매일의 승리로 일본의 근거 없는 자신이 자라는 걸 걱정하는 기색들이 여기저기저 완연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인내로 그 일년을 채웠다. 이미 말했듯 언뜻 어리석고 속없이 보이지만 그럼으로써 얻을 더 큰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뒤 25년을 흔들림 없이 이어갈 결의, 어떤 유혹에도 약해지지 않고 어떤 타협도 결연히 거부하며 한치한치 이 땅을 피로 물들이게
되더라도 오직 우리 힘으로 그 성전(聖戰)을 수행하겠다는 결의였다. 어쩌면 침략자가 점잖은 항변과 권유만으로도 물려갈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때 우리의 안일한 계획을 뼈저리게 반성하며, 또 팔만 벌리던 금세 다가와 구해줄 것도 같았던 다른 나라의 그 비정한 침묵을 가슴속에 새기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 일년이 차차 우리는 드디어 25년 전쟁으로 디 많이 알려진 제2차 광복 전쟁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의 25년 전쟁사(史)는 겨레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중 산을 알고 용맹과 덕을 기리는. 이는 이 땅을 떠나 북쪽 장백 산맥(長白山脈)으로 들어갔고, 물을 알고 지혜와 어짊을 기리는 이들은 남쪽 이어도로 갔다. 원수들과 같은 하늘을 이지 않겠다는 감정척인 이유보다는 거기서 각기 힘을 길러 빼앗긴 산과 들을 찾으려 함이었는데,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의 머릿수는 신통하게도 똑 같았다.
북으로 간 이들이 하펄 장백산맥을 찾은 것은, 그 주봉(主峰) 백두산이 바로 우리 시조 환웅이 처음 발디디신 곳이요, 단군 왕검께서 신시(神市)를 여신 곳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즐기줄기 대륙을 웅시하던 고구려 남아들의 씩씩한 기상이 맺혀 있기 때문이며, 골짝골짝 고토 회복의 꿈을 키우던 발해 용사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기 때문이었다. 광개토대왕의 산이요 대조영의 산이요, 최영의 산이요, 묘청의 산˚ㅣ요, 이징옥의 산이며, 강대한 대륙의 힘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던 모든 조상들의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도도 심약한 문사(文士)들의 시나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런 말랑말랑한 감상의 점이 아니다. 왕권 다툼에 실망한 장보고가 그리로 옮겨앉아 긴칼 짚고 대양(大洋)을 내려보던 곳이요, 당군(唐軍)에게 나라를 짓밟힌 백제인들이 물러나 백제 부흥의 칼을 갈던 곳이요,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용이 되어 터를 잡고 이 바다를 치키는 곳이요, 섬과 섬을 전전하던 삼별초가 마지막 닻을 내리고 대몽 항쟁 (對蒙抗爭)의 의지를 불태우던 곳이요, 왜적과의 큰 싸움이 있을 때마다 홀연히 나타나 이순신의 승리를 돕고 사라진 바다사나이들이 숨어사는 곳이며, 뭍이 이 민족에게 짓밟힐 때의 마지막 보루이자 대양으로 뻗어나가고자 할 때의 첫 발판인 섬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장백 산맥과 이어도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키우고 단련했는가는 아무래도 다음번으로 미루어져야겠다. 그것은 이미 앞으로 다시 얘기하게 될 25년 전쟁사(史)의 한 부분이므로. 이번 이야기는 처음부터 평화 전쟁 또는 제1차 광복 전쟁에만 한정되어 있었고, 이제 그 이야기는 끝났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게 있다면 그것은 그날의 싸움과 관련된 가정(假定)이다.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만약 그 싸움이 지금까지 애기한 것과 달랐더라면 그 뒤 우리가 겪었어야 할 불행은 상상만으로 몸서리쳐진다.
만약 그날 우리 2천만 모두가 한꺼번에 일어나 싸우지 않았더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 또한 함께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우며 다져가지 않았더라면, 그 뒤 25년에 걸친 길고 괴로운 싸움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가 장백산맥과 이어도로 나누어 떠날 때도 따라나서지 않고 이 땅에 남은 무리가 생겼을 것이며, 그 무리는 틀림 없이 친일파(親日派)로 자라갔을 것이나. 밖으로 싸움에서 철저하지 못하고 안으로 침략자에게 빌붙은 무리가 생긴다면 우리의 제2 차 광복 전쟁은 25년 아니라 50년으로 모자랐을 것이며, 가까스로 이겨 산과 들을 되찾았다 해도 어려움은 여전히 남게 됐을 것이다. 친일파의 식민지 근성은 일본을 대신해 자기들을 지켜주고 살찌워줄 새로운 외세(外勢)를 찾아나셨을 것이고, 그들이 팔벌리고 나서면 밖에서 기다리던 또다른 일본들은 옳다구나 이 땅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몰려들면…… 아아, 그만하자. 비록 가정이라도 쓸데없이 몸서리치며 터럭 곤두세울 까닭이야 없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는 그 어려운 역사의 첫 재〔嶺〕를 훌륭히 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렇게 행복해지고 말았다. 미치고 지겹도록, 끔찍하게.
-끝-
2017년 3월 20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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