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시작되는 첫날 평상시처럼 5시에 잠이 깨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안양천으로 산책을 갈 시간이었지만 미리 챙겨두었던 여행용 가방을 점검했다. 가볍게 아침식사를 한 후 난생 처음 가보는 일본으로 출발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공항청사 약속장소에 이르니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이재철, 신헌재 교수 내외, 문삼석, 최지훈, 이춘희, 황정현, 정선혜, 이영미 선생이 보이고 잠시후, 부산에서 온 정진채, 김금자, 윤옥자, 오귀진 선생과 마산의 임신행, 박종순 선생, 전주에서 온 최경희, 김자연 선생, 대구의 심후섭, 전명희, 진선희 선생, 천안의 소중애 작가 서울의 이상교, 이규희, 이시구, 장성유 작가에 이어 김현애, 김현미 선생, 그리고 일본인 교수 오타케 기요미와 한나라당 고흥길의원까지 속속 도착하여 9시 50분 오사카행 KE723편으로 출발했다..
옆 좌석의 정선혜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내식을 한 후 잠시 눈을 붙였더니 구름터널을 비몽사몽인 듯 날았다. 1시간 50분 가량 현해탄 위 창공을 날아 도착한 오사카공항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 아름다웠다. 청사 3층에 있는 일식집에서 초밥과 우동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음식맛은 깔끔했고, 입맛에도 맞는 편이었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전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사카에서 처음 찾은 곳은 왕인박사의 묘소였다. 왕인박사는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와 쇼투쿠 태자의 스승이 되고 군신들에게 경사를 가르쳤다. 이렇게 백제문화를 일본에 전파하여 일본인들의 숭배를 받는 인물이다. 히라가다시 변두리 마을 안에 있는 묘소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묘소 둘레에는 무궁화 나무가 줄지어 서있어 인상적이었고, 동백나무 비슷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에서는 우리 일행을 환영하기라도 하듯 매미들의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우리 참가단의 좌장인 이재철 교수가 20년 전에 왔을 때는 묘소가 동네 한 가운데에 있어 찾는 데에도 힘들만큼 초라했다는데 지금은 정화 사업으로 넓게 확장되어 있었다. 우리는 준비해온 소주와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고 묵념을 올린후 기념 사진을 찍었다.
임신행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오사카 하늘의 석양을 보며 유도화 피어있는 거리를 버스로 달렸다. 센리방송국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맥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한 후 온천욕을 하기로 했다. 고흥길 의원이 1인당 1500엔인 비용을 지불한다고 했지만, 나를 포함한 8명 정도는 온천욕을 하지않았다. 무더운 여름날 한 시간이란 온천욕은 달갑지 않았기에 나는 정진채, 임신행 작가와 담소를 나누다가 소중애, 이규희, 이상교 등 여성 작가들과 방송국 근처를 산책했다. 땅거미가 밀려들 무렵 다시 버스를 타고 오사카성의 야경을 보러 40분을 달렸다.
오사카성은 일본의 3대 성중의 하나로 오사카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소실된 것을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여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오사카성의 야경은 화사했는데 벚꽃이 피면 더욱 멋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의 하단은 집채만한 돌로 쌓아져 웅장하고 장엄하게 느껴졌다. 성 안 광장에서는 지역방송국에서 음악회 공개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흩어진 우리 일행은 포장마차에 들린 모둠도 있고, 공개방송을 구경한 모둠도 있었지만 우리는 물길로 둘러쌓인 성벽 둘레를 산책하였다. .
열한시 가까이에 Senrry Hankyu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문삼석 시인이었다.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니 과연 이야기로 듣던대로 욘사마 열풍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새벽 한시가 넘었는데도 코미디언들이 배용준을 흉내내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료수 광고에 출연한 배용준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인기를 실감했다.
이튿날 새벽 다섯시에 기상하여 문신인과 함께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조깅도 했다. 이러한 아침운동은 일본 체류 기간동안 이틀만 빼고 날마다 계속되었다. 오전에는 반바쿠 공원 내에 있는 국제아동문학관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사카 국제아동문학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경관도 아름다웠다. 입구에 도착하니 일본아동문학학회 하타나카 게이치 회장이 우리를 영접했다. 국제아동문학관은 국제아동미술관 건물과 연해 있었고, 전방에 조성된 인공호수에는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오리모형의 배들이 떠있었다.
1984년 5월5일에 개관해서 20주년을 맞이한 아동문학관은 처음엔 12만권의 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소장 자료 65만점(도서 28만 5600권, 잡지 20만 700권, 기타 13만 3700점)을 자랑하고 있다. 아동문학의 국제적인 정보자료의 수집과연구가 주목적이며 외국인 객원 연구원제도가 있어 한국에서는 이재철, 이상금, 박숙경 교수도 초청된 적이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어린이 열람실과 서고 및 세미나실, 강당 등으로 나눠져 있는데 열람실은 마치 놀이방처럼 꾸며져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즐겁게 독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장애아를 위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시대별, 종류별로 잘 보관된 서고에는 작은 잡지 한 권도 훼손되지 않도록 비닐에 잘 싸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한국의 단행본이나 잡지들도 많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미처 소중한 줄 모르고 폐지로 버리다시피 한 우리의 자료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았다. 나까가와 미사부미(中川正文) 관장은 환영사에서 일본의 거의 모든 문화는 한국에서 받아 온 것이란 생각에 한국을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며 20세기의 불행한 과거를 사죄하고 한국을 직접 방문하여 고국의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진심어린 인사말이 위로가 되었다. 국제아동문학관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마친 우리 일행의 마음 속에는 우리나라에도 하루빨리 국제아동문학관을 지어야겠다는 강한 염원이 바람처럼 일었다.
점심 식사는 숲 속에 방목한 사슴이 천연스럽게 뛰어노는 나라 공원의 음식점에서 먹었다. 밥과 반찬그릇을 포개 놓은 항아리 모양의 그릇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을 때, 오타케 기요미의 신랑이 우리 일행을 찾아왔다. 오타케 교수는 연세대에서 한일아동문학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성신여대에서 일본어과 전임으로 있다가 지금은 일본 순신여대 아동문화과 전임교수로 있다. 불과 두달 전에 결혼 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인 데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 내내 우리의 안내를 맡아 헌신적으로 수고했다. 오타케의 남편은 인물이 수려하여 여자회원들로부터 욘사마 못지 않은 관심과 시선을 끌었다.
점심 후에는 담징의 벽화로 유명한 호우류사를 찾았다. 천엔이라는 입장료가 비싸다는 느낌이 앞섰지만 거대한 사찰의 웅대함에 본전 생각이 사라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금당을 포함한 호우류사 역시 국보인 백제관음을 비롯하여 약사여래좌상, 석가삼존상 등 한반도 문화의 일본 전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 스님인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는 정한숙의 소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벽화는 1960년경 보수공사 도중 소실되어 지금은 탁본만 남아있어 안타까움의 골을 깊게 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벽화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어둠침침한 사찰 내부를 뚫어지게 겨냥했다. 이윽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유물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대충 둘러 보았다. 어릴 때부터 성인까지의 다양한 모습의 쇼투쿠 태자의 임물화가 인상적이었고 ‘천인’이란 제목이 붙은 연꽃위에 앉아 꽃구름을 등지고 비파를 켜는 동자의 얼굴 표정이 압권이었다. 8월의 태양이 작열하는 경내로 나오자 자지러지는 한낮의 매미 울음이 조수처럼 밀려드는 졸음을 쫓아주었다.
쿄토에서의 첫날밤은 쿄토역 앞에 위치한 New Hankyu kyoto 호텔이었다. 불고기와 술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었다. 문시인과 나는 숙소에 남아있었지만 대부분의 일행은 시내버스를 타고 교토의 게이샤가 있는 전통가옥 보존거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다녀온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시간이 맞지 않아 게이샤를 직접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셋째날 아침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장보고 유적지를 찾아가기 위해 오쯔(大津)로 향했다. 먼저 간 삼정사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왓장이 발견 된 곳이기도 한데 고색창연한 일주문은 세월의 잔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람시간에 비해 입장료가 비싼 관계로 들어가지 말자는 의견이 팽배해 입구에서의 기념촬영으로 만족해야 했다.
시라기로 읽혀지는 신라신사는 오쯔 말고도 여러 곳에 있다한다. 이곳은 신자라도 전날 고기나 술을 먹지 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사람만이 참배할 수 있는 곳이라 일반 관광객은 절대로 들어 갈 수 없는 곳이라 했다. 그러나 이재철 단장의 간곡한 설득 끝에 우리는 해신을 쓴 작가 최인호에 이어 두 번째로 신당에 입장할 수 있었다. 신당 관리인에게 2천엔을 헌금하고 이재철 단장과 고흥길 의원, 간사인 장성유씨가 들어가 엄숙하게 제를 올린 후 사진 촬영을 했다.
다음으로 간 오우미 신궁은 천지천황을 기리는 신사이다. 천지천황은 누구인가? 백제 의자왕의 여동생인 제명천황의 아들로 제명천황은 바로 의자왕의 조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황족은 바로 백제의 후예가 아닌가! 그곳 경내를 말없이 거닐며 백제의 아픈 망한을 배마강 탄식으로 달랬다.
쿄토로 이동하여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었는데 곁들여 나온 기무치는 김치가 그리웠던 일행들의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저렴한 물건을 파는 백엔 백화점에 잠깐 들린 후 기모노쇼를 구경하러 갔다. 기모노쇼장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쿄토는 1000년동안 일본 정치의 중심지였던 만큼 문화유적지도 많다. 금각사, 은각사, 천수사, 천룡사, 이조성 등은 일본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거치는 코스로 인식되어 있다.
미사마 유키오의 소설로도 유명한 금각사를 찾았다. 호수에 세워진 사찰 건물의 외벽에 금박을 입혔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문시인과 함께 금각사 경내를 산책하다 이규희 작가가 사주는 녹차를 마셨다. 금각사 구경을 마치고 교토역에 있는 백화점을 쇼핑했는데 길을 잃고 헤매는 회원들이 생겨 오다께선생과 가이드의 수고로 무사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만찬을 마친 후 몇몇의 일행을 초대하여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와 통조림 안주로 회포를 풀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은 낮게 드리운 구름 덕분에 그리 덥지 않았다. 우리는 윤동주시비가 있다는 동지사대학을 방문하기로 했다. 교문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교정 한 복판에 있는 시비를 찾았다.시비에는 윤동주 시인의 친필 ‘서시’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적혀 있었는데 우리는 소주를 종이컵에 몇 잔 부어 놓고 묵념을 올렸다.
청수사(기요미즈데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최고 최고의 사찰이다. 산자락 아래에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주변 산 기슭의 풍광과 잘 어우러져 언뜻 보기에도 명찰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우리 일행은 마시면 장수, 사랑, 학문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전설을 간직한 폭포샘에서 세줄기의 물을 받아 마셨다. 대부분 세 줄기를 다 받아 마셨는데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욕심에 ‘장수’의 소망에 효험이 있다는 한 물줄기만을 받아 마셨다.
청수사를 나온 우리는 아픈 역사가 원죄처럼 각인된 귀무덤으로 옮겼다. 귀무덤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왜군이 살육한 조선인들의 수를 헤아리기 위해 귀를 베어오라는 명령에 따라 빚어진 천인공로할 만행의 유산이었다. 처음에 귀를 베어가자 두 개인 귀 때문에 숫자 파악이 어려우므로 코를 베어 오라고 했다는 짓밟아버리고 싶은 역사의 산물이다. 이렇게 베어간 조선인의 귀와 코를 전리품으로 생각한 토요토미는 임진왜란 후 이를 소금에 절여 전국을 돌며 시위한 후 현 위치에 묻었다고 한다. 팔순이 넘어보이는 무덤지기 노인은 부끄러운 선조들의 대죄를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했지만 구천을 떠돌고 있을 무덤속의 원혼들은 까마귀의 울음으로 살아나 우리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우리는 돌계단 위에 소주 열 잔을 부어 놓고 묵념을 올린 후 팔월의 성한 풀이 무성한 무덤가에 아픔의 술을 뿌렸다.
우울함에서 탈피하려는 듯 서둘러 찾은 곧은 쿄토박물관이었다. 그곳은 귀무덤에서 도보로 이동할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박물관 뜰에 들어서자마자 분수의 물줄기가 음악처럼 시원스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곳 전시장에는 우리 나라에서 약탈해간 문화재와 중국의 문화재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곳 진열장의 문을 열고 다시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우리는 그 유물들 속에 어린 조선 도공들의 얼을 엿보았고, 그들의 망향가를 들을 수 있었다. 일본 도기들은 무척 색상이 화려했으며 당나라시대의 유물들과 동남아시아에서 노략질해온 불상들도 많이 있었다. 일본의 거대한 불상들은 목상이 많은 것이 이채로웠고, 경전에 나오는 지옥을 세밀히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쿄토 여자대학 부근 시원한 그릴에서 양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 아시아 아동문학대회가 열리는 나고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달려 항구 도시인 나고야로 가는 데에는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나고야의 사카에 도큐인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후 6시에는 이 호텔 2층 리셉션 장에서 공동회장 · 부회장 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 이재철 공동회장 대표는 한국에서 6명의 부회장을 선정한 배경 설명을 했다. 다른 나라 대표단의 추인을 받았다. 그리고 각국의 사정에 따라 6일 이내에서 공동 부회장 선정을 할 수 있도록 의결하였고, 다음 날부터 있을 대회 일정과 다음 서울 대회에 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이어서 7시부터 각국의 참가들과 함께 만찬을 하며 친목을 나누는 전야제 행사가 펼쳐졌다.
8월 5일부터 본격적인 제7차 아시아 아동문학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장은 호텔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나디야 플라자 건물 11층에 있는 아토피아 홀이었다. 9시부터 참가자 등록을 시작하여 10시부터 본격적인 대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개회식에서 일본의 실행위원회 위원장인 하타나카 케이치 회장은 개회 인사말과 함께 제7차 아시아 아동문학대회의 개최 취지와 주제를 발표하였다.
30분간의 개회 행사가 끝나자 ‘아시아의 바람’이란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은 부모와 아이들이 출연하여 바람이란 매체를 통해 하나의 아시아를 꿈꾸는 내용으로 특히 우리나라의 사물놀이를 통해 보여주는 ‘혹부리 영감’ 민담이 흥미로웠다. 점심 식사 후 오후 1시부터 ‘아시아에 그려진 판타지’란 제목으로 일본의 우에하시 나호코씨와 중국의 팡이씨의 강연회가 있었다. 나는 그 뒤에 진행된 세미나에서 ‘한국 판타지동화의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로 중국, 대만 대표들과 함께 논문 발표를 하였다. 이렇게 이틀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몽고에서 온 26명의 발표자들이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우리 측에서는 나를 선두로 정선혜, 김자연, 전명희, 신헌재, 임신행, 이춘희 교수가 차례로 발표하였다.
7일은 토요일이었다. 각국 참가단은 석대의 노란색 버스에 나누어 타고 나고야에서 네시간 가량 떨어진 도야마 현 오오시마 군으로 향했다. 중간에 풍치 좋은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라가와촌’의 민속촌을 견학했다. 오후 3시에 오오시마 그림책관에 도착하여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인구 2만 정도의 조그만 마을에 상당한 규모의 그림책관이 있는 것을 보고 일본의 어린이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을 실감하였다. 6시부터 8시까지 도야마 도지사가 주최한 만찬에서 우리는 200여명의 각국 대표들과 함께 술과 음식을 즐겼다.
이튿날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는 3개 분과별로 모임이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그림 작가인 다이하치 오타씨의 ‘미래의 그림책’이란 주제로 대담 프로그램이 있었고, ‘손수 만든 그림책’이란 주제로 워커숍이 있었으며, ‘귀로 느끼는 아시아의 그림책’ 이란 주제로 낭독회가 있었다. 각국 참가자들은 취향에 따라 강연과 워크숍, 낭독회에 참가하였다. 이어 인근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식당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후 한 시 30분부터 세 시간 동안 계속된 ‘그림책의 민족성을 생각한다’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에 참석하였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드디어 오후 4시 30분에서 약 1시간에 걸쳐 폐회식을 하였다. 폐회사를 하며 울먹이는 하타나카 이치로 회장의 모습에서 아동문학으로 하나된 아시아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폐회식에서는 오사카국제아동문학관에서 주관한 우수논문에 대한 시상을 하였다. 나는 다른 나라 대표 네 명과 함께 우수논문 수상자로 선정되어 5만엔의 상금을 받았다. 2006년 차기 대회지가 서울임을 공식발표하고 우리 일행은 단상에 올라가 각국 대표들에게 인사를 하는 순서를 마지막으로 2004년 제 7차 아시아 아동문학대회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 한국 참가단은 이튿날 나고야 공항에서 9시 30분발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6시 이전에 서둘러 오시마군을 떠나야 했다. 나는 상금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음료수를 사 나누어 주고 일행이 지루하지 않도록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았다. 저녁 식사는 차 안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10시가 넘어 나고야 공항에 인접한 에어라인호텔에 투숙하여 일본에서의 마지막 짐을 풀었다.
이튿날 6시 반에 공항으로 걸어서 이동하였다. 나는 공항 2층에 있는 편의점 식당가에서 우리 일행 32명 모두에게 한 그릇에 500엔 하는 일본 우동을 대접하였다. 우수논문 수상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기분좋게 한 턱 쏜 것이다. 간단한 식사 후에 출국수속을 마치고 8박 9일동안 우리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오타케와 헤어져 우리는 KE752 편에 몸을 실었다. 우리 일행과 헤어지며 눈물을 감추지 못하던 오타케의 얼굴과 나를 기다릴 가족들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교차되는 순간 어느덧 비행기는 나고야의 잿빛 하늘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
첫댓글 전주에서 발행하는 소년문학 10월호에 실릴 원고이네.
역시 작가의 글은 다르군 좋은 여행이었군 담에 우리끼리 한 번 가자구
정말 나도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럼 자네들은 간데 또가서 좀 그렇겠네.
창남인 중국 기행 올리게. 당신의 그 수려하고 넉넉한 문장이 기다려지네.
시간내서 차분히 봐야겠구만.
나는 장인장모에 처가쪽 어른들하고 낮엔 돌고 밤엔 자고 하면서 돌아서 벌써 다 잊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