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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지금 장난치냐?
당신의 게시글은 대구할 가치 조차 없는 쓰레기글이며,
일제시대에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종교가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나라의 많은 종단 중에서도, 특히 개신교의 친일행각이 단연 독보적이고, 악랄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나 국민들의 인식이며,
하물며 개신교 내에서도 반성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을 모르는가?
해방이후 개신교단이 왜 급격한 성장을 했는지 몰라서
게시글처럼 싸구려 주장을 한다는 말이지?
아래 인용글들 자세히, 한 글자 빼지 말고 똑바로 읽어봐라!
개신교단의 친일행각에 대한 보답으로, 엄청난 특혜를 받아 얼마나 부흥했는지, 두 눈으로 똑바로 보거라!
은근히 개신교를 부각하며, 상대적으로 천주교를 까대는 당신!
왜 우리 집사람이 광분했는지 이제사 확실히 알았다.
당신은 천주교인이라고 하면서,
개신교의 교리를 그대로 차용하여, 천주교를 재단하고,
개신교가 천주교를 음해하기 위한 용어,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여,
은연 중 천주교를 부정하거나 음해하고 있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묻는다.
당신의 성명, 세례명, 본당명을 공개하여, 천주교인임을 밝혀라.
당신이 현재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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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장로가 중심이되어 물산장려 운동을 통하여 일제가생산한 물권은쓰지 않고 우리의 물품을 사용하자는 운동을 펼쳤고 삼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중 무려16명이 참여한 반면에 우리 천주교는 단1명도 없었다.
반박)
33인 중, 개신교인 16명 빼고 나머지는 모두 투옥되었음에도, 개신교인 16명 중 투옥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왜?
삼일운동 당시, 그 16명은 탑골공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
들이닥친 일본경찰에게 그 자리에서 모두 자수하고, 플려났기 때문이며,
일제 말기에 그 16명 모두가 친일행각을 했다는 사실은 왜 빼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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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우리 천주교의 노기남대주교는 신사참배를 허용하였을 뿐만라나라 징병 징용에에대하여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매국적인 행동을 하였다. 신사가 무었인가. 신사(神社:Shinto Shrine)는 일본의 고유 민간 종교인 신도(神道:Shintoism)의 사원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국민 통합을 위하여 각지에 신사를 건립하고 이 신도를 보호 육성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 한것이다 이는 국가적 문제도 있지만 종교적 문제가 더큰 것이다 십계명의 제1개명을 어기는 것이다
개신교의 일부교단은 신사참배에 허용하여 교단이 갈리는등 우여 곡절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개신교들은 신사참베 반대하여 주기철목사를 비릇하여 50여명의 순교자가 나왔고 200여개의 교회가페쇄되고 2000여명이투옥을 달하엿지만 우리 천주교선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순교나 투옥된이 단1병도 없는 부끄러움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
반박1) 출처: 크리스쳔 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5183
儒·佛 보호정책 등 당시 상황 간과한 점 문제로 지적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개신교계 인사 항목으로 51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개신교 인사 이외에도 불교 54명, 유림 41명, 천도교 29명, 천주교 7명 등 종교계 인사로 총 182명이 포함됐다.
그러나 본지에 박명수 교수가 연재중인 ‘종교편향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 칼럼에서도 나오듯 일제 시대 3·1운동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중앙 차원에서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용인했던 천주교 인사가 지나치게 적은 점, 일제가 시행했던 유·불교 보호정책을 고려하지 않은 점 등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에 대해 △일제의 종교 통제방침에 협력해 교회 변질을 주도하고 교리를 왜곡시킨 자 △변질된 혁신교단, 통폐합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교파 단위의 정동연맹과 총독연맹, 비행기헌납기성회 등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한 자 △기독교신문 등 친일 성향의 기독교 신문·잡지 발행인과 주필, 주간을 역임한 자 △기고와 광고, 강연 등으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반복적으로 미화 선동한 자 등을 명단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해 5월 발표에서도 논란이 됐던 ‘성결의 아버지’ 이명직 목사와 한신대(구 조선신학교) 설립에 기여한 송창근 목사 등이 그대로 명단에 포함돼 논란은 확산될 전망이다.
이밖에 지난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문을 채택하고 곧바로 참배했던 홍택기 당시 총회장과 김길창 부총회장, 결의문을 낭독하고 일제 지원 아래 44세에 총회장에 오르기도 했던 곽진근 당시 서기 등이 명단에 포함됐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에서 개신교계 인사들을 담당했던 김승태 목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는 지난해 5월 명단 발표와 관련해 “개신교계 인물 중에서는 잘못보다 공이 많은 분들이 많다”면서도 “그러나 잘못도 감추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올바른 종교인의 도리이며, 사전에는 공·과를 함께 정리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 목사는 지난해 개신교 지도자들이 친일행위를 한 원인에 대해 △일제의 정책과 강압 △자신의 기득권 유지 욕망 △개인적 위기의식과 나약성 △역사의식과 민족의식 결핍 등 네 가지를 제시했으며, “적어도 개신교 지도자들이 양심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그렇게 한 경우는 없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협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렇게 하다보니 점점 더 빠져 들어갔던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출처: CBS 크리스쳔 노컷뉴스 http://christian.nocutnews.co.kr/show.asp?idx=1310161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개신교계 인사 51명이 포함됐다.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장로교 홍택기 목사, 감리교 앙주삼 목사, 성결교 이명직 목사 등이 모두 이름을 올렸다.
장로교회는 1938년 27회 총회 때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는 내용의 신사참배 결의문을 채택하고 곧바로 평양 신사를 찾아 참배한다. 당시 총회장으로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홍택기 목사와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 그리고 당시 서기로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이듬해 일제의 지원 아래 44살의 나이로 총회장에 오른 곽진근 목사 등이 모두 친일 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역시 이름을 올린 감리교 초대 총리사 양주삼 목사는 "기독교인은 종교인이기에 앞서 국민"이라며 신사참배를 주도했고, 광복 후에는 "출옥 성도나 나머지 성도나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다"는 논리로 교권을 유지한 인물이다.
갈홍기, 이동욱, 심명섭 등과 함께 감리교단의 대표적인 친일 목회자로 꼽히는 정춘수 목사도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됐다. 정춘수 목사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변절해 일제 말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신사참배를 독려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감리교의 대표적 신학자였던 변홍규 목사는 처음에 정춘수를 중심한 혁신교단에 반감을 표시했으나, 결국 회유당해 1942년 혁신교단 통리로 취임했고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통합에도 참여했다.
성결교 초대 총회장으로 성결교단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한 이명직 목사도 조선합병을 정당화하고 신사참배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평양신학교가 폐교당한 뒤 조선신학교 설립에 앞장섰던 송창근 목사와 초대 교장으로 임명돼 친일행각에 나섰던 채필근 목사도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됐다.
친일교단인 일본기독교조선교단 통리를 맡았고 해방 후에는 현 NCCK 전신인 한국기독교연합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던 김관식 목사도 일제말 친일행각 때문에 친일인사로 분류됐다.
오문환, 장운경 등과 함께 '성지순례'란 이름으로 일본 신사를 순례한 김응순 목사는 1942년 장로교 총회장에 당선되고 나서 전국교회의 종을 모아 전쟁물자로 헌납하는 등 친일행각에 앞장서 명단에 올랐다.
이밖에 장로교 부일협력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던 정인과 목사, 어린이 전도에 힘썼으나 일제말 친일행각에 나섰던 장홍범 목사, 충북지역 대표 목회자였던 구연직 목사, 기독교청년운동가로 광복후 YMCA 총무를 역임했던 구자옥, 조선혁신교단 통리를 역임했던 전필순 등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의 종교 통제방침에 협력해 교회 변질을 주도하고 교리를 왜곡시킨 자, △변질된 혁신교단, 통폐합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교파 단위의 정동연맹과 총독연맹, 비행기헌납기성회 등 친일 단체 간부로 활동한 자, △기독교신문 등 친일 성향의 기독교 신문 잡지 발행인과 주필, 주간을 역임한 자, △기고와 광고, 강연 등으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반복적으로 미화 선동한 자를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종교계 인사는 모두 182명으로 개신교 51명, 천도교 29명, 불교 54명, 천주교 7명, 유림 41명이다.
개신교계 친일인사 51명의 명단(가나다순) |
갈홍기, 강도원, 곽진근, 구연직, 구자옥, 김관식, 김길창, 김수철, 김영섭, 김우현, 김응순, 김응태, 김인영, 김종대, 김진수, 김형숙, 남천우, 박연서, 변홍규, 송창근, 신후식, 신흥우, 심명섭, 양주삼, 오문환, 유각경, 유일선, 유재기, 윤치영, 윤하영, 이동욱, 이명직, 이문주, 이용설, 임학수, 장기형, 장운경, 장홍범, 전필순, 정상인, 정순모, 정인과, 정춘수, 조승제, 채필근, 최지화, 최활란, 한석원, 홍병선, 홍택기, 황종률 |
출처: 뉴스천지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184
오늘날 대형교회 문제, 초기 개신교 병폐가 근간
불투명한 재정과 권력 구조, 이젠 바꿔야 할 시대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비윤리적인 행태와 온갖 비리로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개신교가 회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금권선거, 폭력총회, 교회세습, 양성불평등, 이단논쟁, 성폭력 등 부정적인 이슈가 많다. 이러한 이슈들은 개신교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을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이다. 그를 지난달 말 서울시 마포구 망원역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책 저술이 한창이라는 그는 글을 쓰느라 밤잠을 설쳤다며 다소 지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진단하기 시작하면서 피곤한 기색은 이내 사라졌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한국교회가 입으로만 개혁을 외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 실질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직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지탄을 받는 개신교의 모습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울러 근대한국이 바로 설 수 없었던 데에도 이러한 개신교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역사를 묻어둔 채 이어져온 개신교는 먼저 역사적인 과오를 회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한국 근대사회의 많은 병폐, 초창기 개신교 영향이 커”
한국 근대사회와 초창기 개신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김진호 연구실장은 한국 근대사회의 많은 병폐와 관련해 개신교 도입 시기부터 차근차근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네 가지 역사적 사안이 개신교 역사와 맞물렸다.
먼저는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자주권 확립에 관한 문제다. 그는 조선에 온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자국에 보낸 선교보고서가 미국과 서방이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인정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서 한국인은 줄곧 피동적인 사람들로 비쳐지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의 보고서에는 한국인을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하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보고서들은 미국이 한국을 스스로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고 판단하도록 했습니다.”
김 연구실장은 이러한 보고서가 미국이 신탁통치를 하는 명분을 갖게 했다고 해석했다.
그 다음으로는 당시 개신교 국가인 미국과 불가불 관계였던 국내 개신교가 특혜를 받아 부를 축적했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국민에게 돌아가야 할 공공시설물이 개신교로 흘러들어갔다는 지적이다.
당시 일본군이 철수하며 남기고 간 천리교 시설물은 공공시설물로 사용이 가능했지만 전부 개신교가 넘겨받았다. 국민 구성원의 3% 미만이었던 소수종파에 불과했던 개신교가 대다수 국민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물을 넘겨받는 특혜를 누렸다는 것이다.
다음 지적한 문제는 친일청산과 관련된 사항이다. 김진호 연구실장의 주장에 따르면 고의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친일청산을 어렵게 한 장본인이 바로 개신교인이다.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통역사가 필요했고, 이 통역사들은 미국 선교사들과 생활하며 영어를 배웠기에 통역이 가능했던 개신교인들이 도맡았다.
미국은 함께 일할 인재들이 필요했고, 인재를 찾기 위해 남한 국민의 비율을 조사했다. 그 결과 국민의 70%가 사회주의, 10%는 공산주의, 개신교는 겨우 1~3% 정도에 그쳤다. 나머지 20% 정도는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미군정은 사회‧공산주의가 아닌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지식층 주류를 이루고 있던 친일인사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 친일인사들이 등용될 수 있도록 촉매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개신교 통역관이었다는 것이다.
“개신교인 통역사들은 친일인사들이 등용될 수 있도록 중간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친일청산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기를 놓쳤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개신교가 나서서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공산‧사회주의와 대립 후 핍박당하며 월남한 청년 개신교인들이 증오정치를 펼치며 민간인 학살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당시 6.25 등 전쟁과 맞물려 반공을 부르짖는 개신교인이 백색 테러리즘에 빠졌습니다. 반공을 명분으로 사회‧공산주의로 보이는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그는 미국 북장로회 근본주의 신학사상과 북한에서 억압당한 것에 대한 증오가 한데 얽혀 증오정치가 펼쳐졌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이웃을 정복대상으로 보는 폐쇄적인 근본주의 신학사상도 이들이 민간인 학살에 앞장서게 된 원인 중 하나로 분석했다.
김 연구실장은 특히 인천‧강화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심했다고 전했다. “특히 한 목회자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인천 강화지역이 가장 심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민간인들 사이에 개신교는 당시 국민에게 인기 없는 종교가 됐고, 개신교인 숫자도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개신교회는 우리나라 국민 20% 가량을 차지하며 한국종교계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떤 부흥 과정이 있었던것일까.
◆ 개신교 주류, 민심 잃어… 비주류, 민심 얻으며 부각
김진호 연구실장은 그 부흥 원인을 비주류 개신교계에서 찾았다. 그는 개신교 주류가 인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 백성들의 아픔을 달래주며 개신교의 한 축을 형성한 소수 목회자에 주목했다.
소위 ‘이단’이라고 지목받았지만 수많은 신도들을 이끌었던 박태선‧나운몽 등 비주류 목회자다. 이 개신교 운동이 6.25전쟁 등 계속된 분쟁과 증오로 몸과 마음을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영적 부흥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에 대해서는 전쟁 이후 대중이 자활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다는 점에서, 나운몽 장로에 대해서는 한국식 기도원의 효시라는 점에 의의를 뒀다.
김 연구실장은 “앞서나간 시도였지만 당시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산업화시기를 겪으며 이들과 비슷한 성격의 목회자가 등장했는데 바로 조용기 목사다.
조용기 목사 역시 산업화로 몸이 다치고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상대로 병 치료, 부자가 되는 것, 영혼의 구원 등 3박자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 급성장한 사례로 분석했다. 하지만 후에 이를 악용해 사회적인 지탄을 받게 됐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중간 과정을 거쳐 한국교회는 국민 20%에 이르는 등 성장했다.
◆ “한국교회, 역사 속 잘못 회개한 후 미래 내다봐야”
그는 “개신교가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종교임에도 주요 요직 등에 개신교인들이 포진해 있는 등 한국사회에서 많은 혜택을 누린 종교”라며 “한국교회는 역사적인 과오를 속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역사적인 잘못에 대한 회개가 먼저라는 것이다.
이후 김진호 연구실장은 현재 한국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도 변화시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앞서서는 “대부분 대형교회의 문제를 여론화한 것이기에 이를 모든 교회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며 적용범위를 제한했다.
그는 대형교회가 멀티플렉스화 되어가는 데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대형교회 내에서 자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지역사회와 굳이 커다한 소통이 필요없기 때문에 재정운용과 권력유지가 가능하다는 차원에서다.
“대형교회는 지역사회와 소통을 굳이하지 않아도 자생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감시가 덜합니다. 이웃과의 불통, 재정불투명, 권력화 등 문제가 불거지기 쉬운 구조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이러한 것들이 묵인될 수 없는 시대가 됐단다. 그는 권위주의 시대를 넘어서 민주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지식 분량이 많아지고 사회적 가치판단 수준이 높아진 사람들에게 더 이상 권력과 불통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충고다.
출처: 네이버 지식iN 오픈백과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1&docId=655128&qb=6rCc7Iug6rWQIOy5nOydvO2WieyggQ==&enc=utf8§ion=kin&rank=5&search_sort=0&spq=0
일제시대 기독교...이걸보고 친일인지 항일인지를 판단하시오.
왠지 여기 글중 몇몇이 기독교는 항일운동에 압장섰다며 우겨대는듯하여 기독교 특히나 '개신교'의 친일 행적 근거를 제시할까 합니다. 특히나 개신교가 3.1운동을 주도했다는 헛소리는 더더욱 어이가 없습니다. 아래 예시중에도 나오지만 33인의 한명인 박희도는 이후 친일문집 '동양지광'을통해 '목숨바쳐 천황폐하께 충성하자.'라는 헛소리까지 해댄인물이거늘..... 오히려 33인중 유일하게 문화통치에도 변절하지 않는 인물이 만해 한용운 선생님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변절했죠. 그런데 어디 감히 3.1운동에 개신교를 끼워넣으시려 합니까? 그것도 지휘층으로.....
일본인들이 광대한 토지를 점령하고 있다. 정당하게 취득한 것도 있게지마는 한인들의 무식함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취득하였다. 나 개인의 생각으론 현재의 상태보다는 합병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부산 북장로교 선교부 스미드(Walter Smith) 1908년 1월 미국 본부의 브라운박사에게 보내는 서훈에서.
어짜피 뺏길거 뺏기고 있으니 차라리 식민통치당하는게 낳다는 코쟁이가 당시 선교사란 코쟁이요. 스미드는 예시일뿐이며 당시 감리교 감독인 해리스, 쿤스 목사등도 이에 해당하오.
우리는 일본인들을 반대도 아니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순사부장으로부터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에 이르기까지 상하 모든 일본인 관리들은 이런 어려운 여건에 처하여 우리를 자기네의 좋은 친구로 믿는다고 재삼 강조하여 왔다. 어제 미국 총영사는 나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우리가 지혜롭고 신중하게 행동했다고 느낀다고 했다.
우리는 한인들에게 일본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라고 밝히고 또한 이렇게 하기를 달가운 마음으로 할 것과 독립을 위한 일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우리는 저 일본인들이 한인을 상대한 개혁을 결코 부당하게 여기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나는 여러 시간을 허비하면서 일본인의 통치가 유익하리라는 사실을 교회제자들과 학교 교사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태도를 기피하여온 선교사는 한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 쿤스의 1908년 2월 4일자 편지
1. 우리 목사들은 대한나라 일과 정부일과 관원 일에 대하여 도무지 그 일에 간섭하지 아니하기를 작정한 것이오.
2. 대한국과 우리들과 서로 약조가 있는데 그 약조대로 정사를 받되 교회일과 나라일은 같은일이 아니다. 또 우리 교우가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라일 보는 회가 아니오. 또한 나라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오.
3. 대한 백성들이 예수교회에 들어와서 교인이 될지라도 그 전과 같이 백성인데 우리 가르치기를 하나님 말씀 거스름없이 황제를 충성으로 섬기며 관원을 복종하며 나라법을 다 순종할 것이오.
4. 교회가 교인이 사사로이 나라일에 편량에 팜여하는 것을 시킬것이 아니오 금할것도 아니오. 만일 교인이 나라일에 실수하거나 범죄하거나 그가운데 당한일은 교회가 담당할 것이 아니오. 가리울것도 아니오.
5. 교회는 성신에 붙인교회요. 나라일 보는 교회가 아닌데 예배당이나 교회학당이나 교회일을 위하여 쓸 집이요. 나라일 의존하는 집은 아니오. 그 집에서 나라일 공론하러 모일것도 아니오. 또한 누구든지 교인이 되어서 다른데 공론하지 못할 나라일을 목사의 사랑에서 더구 못할 것이오.
- 그리스도 신문 1901년 10월 3일자에 보도된 1901년 9월 장로교 공의회가 채택한 결의문.
-1907년 대부흥회에서 선교사들은 로마서 13장 1-7절까지의 내용을 인용하여 한국교인들을 설득하였다. 여기에 배껴쓰지 상당히 내용이 기므로 직접 성경책에서 해당구절을 찾아보시길 바란다. 대략적인 내용은 '권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통치자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니, 당신들이 선하다면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이다. 이를 인용 선교사들은 교인들에게 '일제 정부는 하나님이 세우신것이니 당신들이 선하다면 일본을 거부할 필요도 없다.'라는 괴팍한 논리를 내세웠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열렸다. 주최자는 3.1운동의 33인중 한명인 박희도 감리교 목사이며 그의 사회하에 윤치영(중앙 기독교부 총무), 백낙준(조선 야소교서회 편집총무), 최태용(복음교회 가독), 정춘수(조선감리교 총감독), 양주삼(조선성서회 행정총무 감리교 목사)등 15명이 참석. 7시간의 좌담회를 가졌다. 다음은 그 내용중 일부다.
채필근 : 국민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않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이를 근거로 교인들의 자발적 징용을 촉구했으며, 징용 거부자를 가롯유다 같은 사람이라 매도했다.)
최태용 :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한다.
백낙준 : 1943뇬 12월 5일자 매일신보에 미국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글을 기고했음. 해방이후 문교부장관과 연세대 총장을 지냈으며, '한국개신교사'라는 저서로 개신교와 함게 자신역시 일약 최고의 독립투사로 변신시켰음.
박희도 : 33인중 1인으로 친일문집 '동양지광' 창간호의 창간사를 썼음.
'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속에 일본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중략)..... 생각건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열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자 누가 있겠습니까?'
정춘수 : 역시 한때는 독립을 지지했으나(그나마도 정말 독립운동인지가 의심스럽다.) 이후 변절. 1938년 9월 4일자 매일신보에 사죄글을 기고, 2,400원(지금으로는 약 100만원가량)을 서대문경찰서에 국방비로 헌납했음. 감리교 혁신안을 제창. 그중에는 "교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케 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음.
1941년 10월 10일 신도대표 50여명과 함께 부여신궁조영 근로봉사,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 교회종을 국방비로 헌납, 이마에 일장기를 두르고 교인들을 인솔 조선신궁 단체참배.... 이정도면 '어쩔수 없이 친일했다.'는 말이 오히려 억지로 들릴듯....
정인과 : 상해 임정 외무차장이었으나 귀국후 변절.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경맹 총간사. "동아질서의 건설",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선서 제창"을 선도.
일제가 복격적으로 한일합방을 하기전, 사전 준비중에 일본내 기독교세력을 적극 지원하면서 조선 기독교 세력의 지원을 은연중에 내비쳤습니다. 사실 조선말까지만 해도 한국의 유교와 불교는 상당한 세력권을 가지고 있어, 기독교는 그다지 힘을 얻지 못하던 시기였죠. 뭐 신도수가 수십만에 이른다고는 하지만 아직 민간사상의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이후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불교 유교탄압에 맞물려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한국 제일수준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죠. 2차대전에 일본이 참전한 이후 기독교는 '영미타도'에 압장서며 조선의 남아들에게 강제징용을 처녀들에게 정신대 자원을 외쳐댔습니다. 게다가 독립투사들을 색출하여 일본 정부에 넘기는데 압장 섰으며(이는 위에 예시한 장료교 결의문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쇼인들을 이끌고 신사참배에 압장섬은 물로, 일본이 철이 부족하다니까 교회종까지 기꺼이 기부했습니다. 이러니 누군들 정이 들겠습니까? 많은 신도가 사실 해방이전에 기독교를 버리게 되었죠.
해방이후 일정에 충성을 바치던 그들(친일 목사들)은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조용히 덮어버리고, 개신교인인 이승만에게 빌붙었습니다. 사실 이승만은 친일이니 반일이니엔 별관 심이 없었죠. 정권에만 관심이 있을뿐.(이승만은 과거 친일미국인을 저격한죄로 법정에 기소된 두 한국인 유학생의 무료변호를 위해 통역을 요청한 미국인 인권 변호사들에게 '나는 테러행위를 지원할수없다.'는 이유로 통역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잘 붙어서 현재 독립투사라는 허울좋은 명예를 뒤집어 쓴것들이 백낙준같은 친일먹사들이죠.
뉴스앤조이 김근태 연구실장
1. 머리말
지난 2월 28일날 현역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회장 김희선)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해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동안 광복회와 함께 전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사 심의해 확정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 행위자" 692명의 명단과 함께 광복회측이 합의가 안돼 명단 공개를 꺼린 16명까지 포함시켜 발표했던 것이다. 나중에 추가된 이 16명은 사회 문화 예술계 지도적 인물들로 이들 인물에 대한 평가가 자문위원들 사이에서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철저히 그들의 가려진 친일 행적들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일반 시정잡배였더라면 그들이 아무리 친일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의 지도적인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행동과 말에 주의를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뚜렷한 친일 행적이 있음에도 아직도 그러한 행적을 모르거나 알고도 감추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발표된 708명의 명단 가운데 쟁쟁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활란, 고황경, 박인덕 등 여성 지도자들이 그렇고, 김길창, 박희도, 신흥우, 양주삼, 윤치호, 전필순, 정인과, 정춘수, 차재명 등 10손가락으로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이것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부일협력자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일선, 홍병선, 백락준, 이동욱, 오문환, 채필근, 갈홍기, 김응순, 장운경 등이 그들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친일파들도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과 그들의 허물을 덮어두는 것과는 엄격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끄러운 허물을 들추어 내는 것도 그들을 비판하자는 의도보다는, 우리의 선배들이 잘못한 것을 우리 대에라도 반성하여 바로잡자고 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계의 친일 내지 부일 행적은 기독교인에 의해서 조사 정리되고 사회에 공개적으로 그리고 거교회적으로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사참배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부일 협력 내지 전쟁 협력 문제에 대해서 반드시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부끄러움과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용기요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인 일본기독교단은 2차대전이 끝난지 20여년이 넘은 1967년에야 소위 [전책고백]이라는 것을 했다. 1967년 3월 26일 부활주일에 일본기독교단 총회 의장 스즈키(鈴木正久) 목사의 명의로 발표한 "제2차대전 하에서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관한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세상의 빛]이요 [이 땅의 소금]인 교회는 그 전쟁에 동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이 기독교인의 양심적 비판에 의하여 조국의 앞날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교단의 이름으로 그 전쟁을 시인하고, 지지하고, 그 승리를 위하여 빌고 노력할 것을 안팎으로 성명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우리 조국이 죄를 범하였을 때, 우리 교회도 또한 그 죄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파수]의 사명을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마음 속 깊이 아픔을 갖고 이 죄를 참회하여 주님에게 용서를 빔과 동시에, 세계의,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그리고 거기에 있는 형제 자매, 또 우리 나라 동포에게 충심으로 용서를 청하는 바입니다."
일본기독교단이란 일본이 1939년 종교단체를 통제하기 위해서 제정한 종교단체법에 의해 1941년에 일본의 개신교 교파들을 통폐합하여 조직한 일본의 대표적인 개신교 교파이다. 이 교파의 대표자들은 이들이 자신들의 조국의 전쟁에 협력한 것을 뒤늦게나마 반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가? 일제 말기에 한국교회는 비록 강압에 못 이겨 하였다고는 하지만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종을 떼다 바치고, 심지어는 교회를 팔아 그 비용으로 기관총과 비행기를 사 바치기까지 하여, 일본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그런데도 해방 50여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거교회적으로 이에 대하여 반성하는 성명 한 장 나오지 않았다.
일본기독교단이 자기들의 조국의 전쟁에 협력한 것을 반성하였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민족을 배신하고 억압자인 이민족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였으니 더 큰 반성을 했어야 옳을 것이다. 일제의 강요와 핍박을 받았다고 해서 이런 한국교회가 일본교회보다 의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올바로 처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예를 소개하겠다. 1971년에 명예 박사학위를 두개나 가지고 해방후 KNCC 회장까지 지낸 교계의 어떤 거물급 목사님이 《말씀 따라 한 평생》이라는 430여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자서전을 펴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자서전에 자신의 명예 박사학위 축하예배 순서지까지 전재하여 10여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에 이르는 10년간의 시기는 단 두페이지 반으로 줄여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10여년을 지내는 동안 시대는 더욱 각박해졌고 종교탄압은 날로 극심해만 갔다. 이윽고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점점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의 발악은 더욱 심해졌다. 전쟁마당에 강제로 이 나라의 청장년들을 징병 혹은 징용이란 이름 아래 사지(死地)로 끌려 들어 갔고 심지어는 교회당의 종까지도 무기 제조를 위해 헌납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인들은 이들의 건국신(建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참배와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천조대신의 위패를 모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일이면 보국대에 동원을 지시하고 찬송가도 압수하여 황국신민의 사상고취에 영향을 끼칠만한 가사는 모조리 검은 잉크로 지워서 되돌려주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판국에서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교회발전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노력해왔다."
이런 기록을 대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여기에 기록한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일제의 탄압 실상에 대한 것뿐이고, 자서전인데도 여기서 자신에 관한 언급은 맨 마지막 단 한 구절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가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목사님은 일제의 가혹한 핍박 중에도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신앙의 용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가? 그는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부총회장으로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평양신사에 참배한 사람이다. 그리고 1943년 5월 일제 총독부의 강요로 장로교단이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어 일본에 예속될 때 경남교구장으로서 각종 친일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그 때문에 해방 후인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6월에 기소유예로 풀려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의 자서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러한 부일협력에 대한 참회의 문구는 한 마디도 없다. 이것은 해방 후 기독교계가 일제의 잔재청산에 실패하였으며, 해방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의 극복은커녕 반성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부일협력을 한 어떤 목사는 해방 직후에도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여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둔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그대로 교계의 지도적 지위에 남아 있었던 상황에서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이 시간에 '전시체제'라고 불리던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에 대응했는지 반성적 입장에서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일제 '전시체제'하 기독교계의 부일 협력
한말·일제하의 기독교를 운동사적 측면에서 시대를 구분하여 성격짓는다면, 한말의 기독교는 (애국)계몽운동을 펴던 시기요, 1910년 일제 강점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시기까지는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운동 내지 민족독립운동과 깊은 관련을 갖는 시기이며, 1920년대 이후 일제 말기까지는 일부에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펴기도 하지만, 대체로 문화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저항운동을 펴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을 고비로 후기로 갈수록 기독교인들의 운동에서 민족성 내지 정치성이 희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일제의 기만적 회유·분열정책에 유도된 측면도 지나쳐볼 수 없지만, 민족독립운동 내지 3·1운동에서 큰 피해를 입은 교계가 이러한 운동에서 희망을 상실하고 다른 방면으로 활로를 찾았으며, 그런 가운데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들어 교계 지도자들이 친일화되어간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국내 민족주의자들을 전향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1937. 6)과 흥업구락부사건(1938. 5) 이후 이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전향하여 변절하였고, 기독교계의 친일행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각은 개인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로서는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신사참배 문제에 굴복한 이후에는 교단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일제 경찰력의 강압 하에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는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는데, 이때 발표한 성명서는 그 내용상 소극적인 순응을 천명한 것만이 아니라,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한 전향성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그 성명서 후반부는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으로 끝맺고 있다. 일단 개인의 생존이나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 일제에 굴복한 이후에는 그들의 전쟁협력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민족과 신앙 양심을 등지고서라도 일제에게 그들의 충성을 입증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이 마련된 1938년 이후의 공식적인 기독교 단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부일적 성격을 띠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단체는 일제가 그 존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YMCA, YWCA 등 국제기구에 가입되어 있던 기독교기관은 국제기구에서 탈퇴하여 일본 산하기구에 가입하게 하고, 교단도 이미 어용화되어 있는 일본 교단 산하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장로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개편하게 하고, 이것도 부족하여 1945년 7월에는 전 기독교 교단을 통폐합시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직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단의 강제 통폐합 이외에도 각 교단 내에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나 국민총력연맹의 교단 차원의 하부기구들과 각개 교회에까지 애국반을 조직하도록 하여 부일협력을 강요하였다. 당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고 가장 반일적이었다고 하는 장로교도 1939년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장로회연맹'을 조직하고, 이듬해 총회에서는 이 연맹 이사장 윤하영, 총간사 정인과 목사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사업 실적 보고를 하고 있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 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 ……이만하면'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회록》, 1940, 87-94쪽)
이는 타교파나 타종교와 경쟁적으로 부일협력을 하면서 그 성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어 1940년대에 들어서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는 교회종까지 떼어 바쳤으며, 말기에는 교회도 통폐합하여 폐지된 교회 건물과 부지도 처분하여 바쳤던 것이다. 즉 교회의 존립을 위한 '순응'이란 한갖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사참배 문제에서 장로교보다 먼저 일제에 '순응'하였던 감리교의 경우도 이에 못지않는 부일협력을 하였다. 1940년 10월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에서 소위 '혁신안'을 마련하고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우리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우리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을 솔선결의 실행을 기함"(〈매일신보〉1940년 10월 4일자, "사상선도에 주력 군사원호에 진충, 감리교혁신안 발표")
여기에 이어서 서구적 민주주의·자유주의 배격, 일본정신의 함양, 일본감리교와의 합동, 일본적 복음의 천명 등을 열거하고, 심지어는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4일에는 국민총력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 주최로 시국대응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1942년 2월 13일에는 통리자 정춘수 목사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 위문 및 철물 헌납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교회의 철문·철책은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밖에도 정춘수 통리는 1944년 3월 3일 교단 상임위원회에서 '애국기 헌납 및 교회 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켜, 교회를 통폐합하여 전쟁물자를 낼 것을 결의하였으며, 그 해 9월에는 교단본부에서 지금 새로나백화점에 있는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갈홍기 목사를 관장으로 교역자들을 일본정신으로 재교육시키기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부일적 행각은 군소교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0년 일제의 탄압을 받은 후 소위 '순일본적인 지도이념'으로 새출발을 다짐한 구세단(구세군), 성공회를 비롯한 안식교, 성결교, 천주교 등도 위에서 언급한 장로교, 감리교와 비슷한 부일행동을 하여 일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한편 이러한 교단적 차원의 부일행각 이외에도 일제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시국강연회 연사와 각종 어용단체 조직원으로 동원하여 이용하는가 하면, 그들의 이름으로 친일논설을 언론에 게재하게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937년 9월에 실시한 시국순회강연에는 신흥우, 유형기, 윤치호, 박희도, 차재명 등 쟁쟁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동원되었고, 이듬해 10월에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전쟁협력 강도(講道)에도 정춘수, 차재명, 박연서, 이동욱, 홍병선 목사 등이 연사로 참여하고 있다.
친일논설은 친일잡지인 〈동양지광〉과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나 어용지 등에 많이 게재되고 있는데, 그 중 〈동양지광〉1939년 2월호에 실린 신흥우의 "조선기독교의 국가적 사명"이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망언을 하고 있다.
"……조선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 가능한 일이다. 금일의 우리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그리고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국의 국책에 충실히 순응, 협력, 돌진하라. 이것이 우리들 조선 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확신하는 바이다." 이런 사람이 해방 후에는 애국자인 척하고 대통령 후보로까지 출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활란, 유각경, 박마리아, 박인덕 등 여성 기독교인들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지지 논설 및 강연에 동원되었고, 전쟁협력과 황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임전보국단의 간부로는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구자옥, 오긍선, 양주삼, 정인과, 정춘수, 박인덕, 황신덕, 채필근, 박희도 등 적잖은 기독교인들이 동원되고 있다.
그들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더욱이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옳지 못한 처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대표적인 여성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이화여전의 교장으로 있던 김활란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1944년 여름, 나는 그들에게 끌려서 징병유세를 다녀야 했다. 내가 일본 정부에 의해서 고통을 받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이때만큼 나의 심신을 그르쳐 놓은 사건은 없었다. 숨을 턱턱 막는 폭양과 그보다 더 기세 등등한 감시와 강요하에 나는 살이 떨리고 양심이 질식할 징병유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영혼을 새까맣게 물들이 듯 나를 어둡게 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그 때까지 그렇게나 이화를 지켜보겠다고 바둥거리며 남아있다가 이러한 일마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의 처사를 거의 후회하기까지 했다. 그 해 겨울, 나는 심한 안질을 얻고야 말았다.……광명을 가리우는 나의 병은 당연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내가 남의 귀한 아들들을 죽는 길에 나가라고 권고했으니 나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남의 밝던 마음 어둡혀주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선고나 하듯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당연한 형벌이니 장님 되어두 할 말 없지……' 나는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고(告)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각오하면서 더듬거리는 손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어루만졌다."(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生命》,여원사, 1965, 225-227쪽).
이와 같이 일제는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기독교 지도자들을 억압, 회유하여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지도적 위치에 있던 기독교인들까지도 민족적 양심과 신앙적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자의건 타의건 간에 이러한 부일적 행위에 내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그들 자신에게도 역사에 지우지 못할 오점을 남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민족에게도 심각한 충격과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이러한 기독교계의 부일적 행위 때문에 많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잃고 교인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일반인 들의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물론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적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투쟁한 기독교인들도 상당수에 달했으며, 순교자만 하여도 5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저항은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종교적 저항운동 내지 신앙운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극적인 것이었다.
3.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이른바 '전시체제'하 한국 기독교계의 부일 협력 행각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일제하 기독교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불의한 세력과 투쟁한 긍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일제에 굴복하거나 야합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동포들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토록 독려하였던 부일 협력적인 부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1945년 해방을 맞은 교회는 이제 일제 하에서 자의든 타의든 간에 저지른 부정적 행위를 회개·정화하고, 분열된 교회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여 민족의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과제 해결의 첫 단계가 되어야 할 통절한 회개 운동이나 정화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민족분단과 좌우 사상적 갈등으로 어수선한 당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분명한 참회의 태도표명이 없이 지난 날의 잘못을 얼버무리고 지나가려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독재권력에 유착하여 비판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자신의 친일행각을 반공 이데올로기로 은폐하려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일제 하에서 깊이 오염되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계도 일제의 잔재 청산과 정화운동에 실패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가시적 참회를 요구하는 주장과 대립하여 교권다툼과 교파분열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 기독교계에 대해서 몽양 여운형과 함께 중도 좌파의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이만규는 《조선교육사》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도록 시대의 죄악과 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대의 죄악을 지적할 만한 정의로운 양심조차 잃어버렸고, 권세와 황금 앞에 그들의 회개를 충고할 용기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는 짓을 예찬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져가면서 최후까지 사랑하고 보호하던 노동자, 농민 부녀, 빈민, 천민의 해방을 위한 혁명적 정당과 그 노선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조선의 기독교도들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불순한 역사적 잔재가 오늘날 예수교 속에 섞여있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기독교도는 이 기성사회의 부패성을 용감히 비판하고 다시 회개해야 하며, 교회란 탈을 벗어버리고 외국의 그림자 속에서 뛰어나와 십자가의 예수만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냈고 해방공간의 논객이었던 오기영도 1947년에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어떤 변절한 목사의 예를 들어 당시의 기독교계를 비판하면서, 조선교회가 섬기는 3위는 일제 강점기에는 "하느님, 돈, 일본"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일본 대신에 미국을 넣어서 "하느님, 돈, 미국"을 3위로 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오기영, "예수와 조선" 〈신천지〉1947.3-4월호, 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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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태 연구실장 ⓒ뉴스앤조이 이승균 |
첫댓글 서로간의 교리와 교회역사 지식에 대한 생각차이가 마음의 갈등으로 비화되었음에 심히 가슴이 아픕니다. 두 형제님들, 왜 우리가 이런논쟁으로 서로 적대적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의 목적은 딴곳에 있는데 교리지식으로 인하여 소중한 인연을 악연으로 만들어야 됩니까. 제발 두분모두 진정하시고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빨갱이 종구사 적들이 이 분쟁을 보면 얼마나 고소하겠습니까. 우리끼리 자중지란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한분이라도 먼저 화해를 청하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교리나 역사에 관한 인식 차이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를 은근히 폄훼하는 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본 카페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로, 이런 일이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고, 한 번쯤은 뭔가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 계기로 본 카페의 정체성이 확립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널리 이해와 양해 바랍니다.
@물금댁남편 내가 판단하기에는 소나타님이 우리교회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 우리교회의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자는 뜻에서 올린 글을 형제님은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나같은 사람은 전혀 그런 역사의식이 없는데 우리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형제님의 상당한 지식과 섬세함이 오늘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두 분모두 우리교회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발생된 결과임으로 이제 두분 모두 화해로서 끝맺기를 바랍니다.
물금댁남편되시는 분 너무 당황하셔서요!
내가 보기에 종북사제들한테 사용해야 할 단어가 올라와 있네요...
좀 보기가 그렇네요. 그런 글은 종북사제 쪽을 대놓고 쓰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