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9:00 구리 병동 복귀. 데스크 여직원이 ‘무단 외박이라며 미간을 찌쁘렸어요.
5호실에 들어가 보니 아침 식사가 다 식어 빠져 있었고 가습기 물이 엔꼬입니다.
긴급조치만 하고 관복으로 갈아입었어요. 160/90 계단 좀 올라왔다고 혈압이
올랐나 봐요. 오전 진료를 받자마자 잠을 청했습니다. 1시50분 식기를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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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웠는데 반갑잖은 밥상이 차려져 있었어요. “room에 없어서 진료를 패스했어요.”
“헐. 내가 밖에 나간 적이 없는데” 퇴근하려던 의사를 붙잡고 막차 진료를 받았어요.
데스크 직원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제 침상 눈높이에 앉아 주저리주저리
속삭입니다.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요. 두 가지 wording을 수정해 주시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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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어제 무단 외박을 한 게 아니고 원장 허락받고 '외출'했고,
2. 나는 오늘 '외출'하지 않고 잠을 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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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하는 데스크가 나를 단속하는’사감‘처럼 취급해서 화가 나려고 하네요.
잘 좀 합시다. 여기까지. 어필하자마자 바로 녹차를 가지고 병실에 찾아온
데스크 직원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보니 금방 아차 싶었습니다.
내 진심이 전달된 걸까요? 엿 먹으란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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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몰라서 3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1시간을 돌아
다녔더니 발가락이 까져 피나기 일보 직전입니다. 호박나이트에서 2k 정도가
구리 수택동 시장인 것 같아요. 산낙지가 없어 못 먹었고 명태찜을 먹었어요.
맛이 16.000원에 못 미친단 생각 했고 ’다이소‘에 들려 생활용품을 사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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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로 들어왔어요. 다들 퇴근하고 미저리 간호사가 당직이랍니다.
웬-열, 사과 표시로 사 들고 온 병 음료인데 내가 다 마셔야겠습니다.
'명태'라는 가곡을 도올 선생님 땜에 알게 되었는데 코다리를 먹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오현명이란 성악가가 만들고 부른 노래인데 저는 무반주로 부르는
노익장 도올의 목소리를 더 은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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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얽힌 사연을 살펴보자면 6.25 동란 중 대구에서 공군 정훈 음악대
대원으로 활동할 무렵의 오현명에게 UN군 제7군단의 연락장교로 복무하고
있던 변훈이 찾아와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담은 종이 뭉치를 오현명에게
수줍게 던져주고 갔고, 그중에 바로 '명태'가 들어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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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를 보니, 그게 아무래도 노래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야, 이거 무슨 노래가 이래?'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노래의 멜로디 같지도
않은 멜로디가 그 가사와 함께 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정겹게 느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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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해군 정훈음악대로 옮긴 오현명은 1952년 늦가을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부산의 한 극장에서 열린 '한국 가곡의 밤'에서 '명태'를 처음
불렀다고 해요. 당시 홍난파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 익숙해 있던
음악가와 청중들은 이 노래를 듣고 '노래 같지도 않은 엉터리'라는 비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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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이 노래는 1964년 10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있었던
대학생을 위한 대음악회를 계기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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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르는 노래가 실제로는 그 내용도 모르는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거다.
막말로 하자면 상대 여자의 성격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내 심장을 찔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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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 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면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때 (크하!)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있으리라
명태(허허허) 명태라고 (음하하하)
이 세상에 남아있으리라.
2023.11.19.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