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간장이 타는 예수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5,13)
38년이나 앓던 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자기를 고쳐준 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예수님께 그를 낫게 하신 다음 곧바로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급히 자리를 뜨신 이유는 군중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더라면, 수많은 사람이 자기 병도 고쳐 달라고 몰려들며 아우성을 쳤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위대한 치유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만일 그랬다면 38년 된 병자 한 사람뿐 아니라 그곳에 있는 병자 모두를 고쳐주셨을 것이다. 또 숨지 않고 “내가 위 병자들을 고쳐주는 엄청난 기적들을 행했다. 나는 이렇게 위대한 존재다.” 하며 자기 광고를 하셨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는 가능한 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셨다. 그리고 치유된 사람에게 그 사실을 드러내놓고 떠들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먹은 반벙어리를 데려왔을 때, 예수님은 그를 따로 불러내어 고쳐주시고 치유된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마르 7,32-36) 또 사람들이 소경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청했을 때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고쳐준 다음 집으로 돌아가되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6)
예수님의 치유기적 행위는 상당히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예수님이 공생활 3년 동안 많은 사람을 고쳐주셨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치유기적은, 중복된 것을 하나로 계산 하면 네 복음서를 통틀어 30건밖에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3년이었으니, 한 달에 한 번 꼴로 치유기적을 행하셨다면 36건이 될 것이지만 그나마 한 달에 평균 한 번도 안 되었던 것이다. 상당히 적은 건수다. 그 까닭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 이유가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치유기적을 일으키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에 병자에 대한 연민이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기적 이야기에 보면 예수님이 병자를 ‘가엾이 여기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여기서 ‘가엾이 여기다.’는 말은 ‘오장육부가 끊어지다, 애간장이 탄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주님의 애간장이 탄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당신 존재 밑바닥에서 흔들리고, 뱃속까지 아파하면서 고통 중에 있는 이와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나병환자, 간질병자,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와 함께 고통을 느끼셨다. 측은지심은 행동으로 옮겨질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 자녀가 아프면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나 자신이 아픈 것보다 더 아프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러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정 사랑하기에 우리가 아파하면 똑같이 아파하신다. 당신 자신을 우리의 처지와 완전히 동일시하신다. 우리의 상처는 곧 그분의 상처이고, 우리의 고통은 곧 그분의 고통이며, 우리의 슬픔은 곧 그분의 슬픔이다. 그래서 당신 몸소 우리의 병고를 떠맡으시고 질병을 짊어지신 것이다.(마태 8,17 참조)
여기서 ‘우리’란 어느 특별한 그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지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세리와 창녀까지 받아들여 주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주시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끌어안으시는 예수님의 애끓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일어설 수 있다.
지리산 자락의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