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디>
무지개 넘어 그 어딘가에는 우리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 있을 거야. 그 희망을 가지고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1960년대지만 나이 50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다니 너무 이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인생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도무지 자기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끌려 다니기 바빴습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습니까,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기를 하였습니까? 도대체 왜 사는 거지? 하고 물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것도 자유의 나라 미국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지금도 연예인이 활동하는데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연습하기도 바쁜데 공연 일정까지 조절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기야 한 해 한두 번 정도의 공연이라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래 가지고 속된 말로 장사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조금 인기가 있으려면 여기저기 얼굴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다음 공연 초청도 들어올 것입니다.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오라 하지는 않겠지요. 모두 장사를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본인도 먹고 살아야 하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일정하게 수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인기가 하락하여 부르는 사람 없이 슬며시 사라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얼굴을 알리고 빠른 시간 내에 인기를 얻어내려면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여기저기 쫓아다녀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연습하기도 벅찹니다. 따라서 시간조절이나 출연료 나아가 무대장치나 장소 등등 협약해야 할 사항들이 많은데 누가 대신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전에는 매니저라고 하는 사람이 나서서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기획 자체부터 규모가 매우 커지고 있으니 한 사람으로는 역시 벅찹니다. 그러니 이것도 기획사로 조직화되어야 합니다. 각 분야별 전문인이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특별한 한 사람이나 어떤 그룹을 이끌기 위해서는 그 재능을 가진 연예인뿐만 아니라 그 옆에서 돕는 조직이 따라 붙어야 합니다.
‘주디’는 3살부터 무대에 섰답니다. 우리 같으면 어린이집 다닐 때입니다. 물론 요즘도 가끔 보면 유별나게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끼를 살려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아이가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돌봐주는 것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인생의 터를 다져주는 때가 필요합니다. 끼만 살려주려고 몰아붙이면 이용만 당하기 십상입니다. 주디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시간은 자야 할 성장기에 그 두 배를 일해야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날 같으면 아동학대로 고발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버는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합니다.
하루의 삶이 통제됩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이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하나 모두 통제됩니다. 당시에는 CCTV라는 것이 없었으니 옆에 사람이 붙어서 일일이 간섭합니다. 어린 것이 얼마나 먹고 싶고 얼마나 졸리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니 약으로 통제합니다. 그것이 평생을 따라다닙니다. 결국은 약물 중독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그 모든 인기가 무슨 소용이 있답니까? 그렇게 살려고 세상에 온 것일까요? 누구 배불려주려고 말입니까? 자기 거처할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맞이해주는데 어디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것 같습니다. 아주 잠시지만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도 결국은 자기 배 채우려는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영화 평론가의 글이 올라와 있어서 일부 인용합니다.
<용인시민신문, 정재근(음악평론가, 팝칼럼니스트) 2020.02.26일자>
‘주디는 탐욕에 눈이 먼 엄마로부터 두 살 때부터 무대에 올랐어요. 이후부터 사육(?) 당하다시피 철저하게 자기 인생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
게다가 영화 관계자들은 어린 나이의 주디가 촬영 중에 졸기라도 하면 각성제를 먹여가며 촬영을 마치도록 했고, 촬영이 끝나면 수면제를 먹여서 강제로 잠재우곤 했다고 합니다. 또 체중감량을 목적으로 하루에 한 끼 식사만 하게 했고, 담배를 네 갑이나 피우게 했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요. --- 오버 더 레인보우 가사 중에 ‘모든 괴로움이 레몬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곳. 새들은 무지개를 넘어 가는데, 나는 왜 그럴 수 없을까’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게 바로 주디의 인생이 돼버린 거예요.’
노래처럼 아픈 그리고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평생 무지개를 좇다가 하늘로 갔습니다. 주디를 연기한 배우 르네 젤위거는 2020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 것입니다. 참으로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해야 할 텐데 그만큼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겠지요. 정말 칭찬받을만한 연기입니다. 영화 ‘주디’를 보았습니다. 사전에 주디의 삶을 훑어보고 관람하면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300 스파르탄>
옛날에는 수적인 우위가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단 군사가 많아야 유리합니다. 물론 많다고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승리의 조건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병력과 전투력 그리고 갖추고 있는 장비나 군량 나아가 지리적 여건과 그 날의 기후도 영향을 미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다룰 수 있는 전략이고 지도자의 역량입니다. 요즘은 무기 하나로 끝장을 낼 수도 있지만 창과 칼을 사용하던 때는 사람의 수가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힘이 한계가 있으니 말이지요. 아무리 장사라 하더라도 싸우다보면 지칩니다. 손을 쳐들 수도 없는 지경이 되면 싸울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것을 알고 뛰어든 전쟁이기도 합니다.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벌자는 싸움이고 적은 수로 모범을 보여줌으로 고국 군대에는 용기를 심어주고 적군에게는 사기저하를 꾀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표어만 있습니다. ‘승리 아니면 죽음’ 죽기로 결심하고 나선 싸움입니다. 적군의 마음속에 상대하는 나라와 병사가 어떠함을 확실하게 새겨주려 하는 것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죽음을 불사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군대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마지막까지 적의 앞길을 막아섭니다.
수십만 페르시아 군은 그 군세만 보아도 기가 죽을 판입니다. 페르시아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것입니다.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는 서로 연합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모두 합쳐도 그 수에 대항하기 쉽지 않습니다. 단지 막강한 아테네의 해군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수를 헤아린다면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전쟁은 숫자로만 대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자기 군력을 과신하였습니다. 그 덕에 많은 병사를 잃었습니다. 그곳의 전투에는 결국 이기기는 했어도 전쟁에는 결과적으로 패한 셈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첫째 과신이고 둘째 휘하 장수의 조언을 무시한 것입니다. 저 잘났다고 고집 피우다 곤욕을 치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줄거리는 홍보물에서 대체합니다.
<BC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황제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온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서둘러 연합군을 조직했고, 용맹한 스파르타의 병사들이 그 선봉에 서게 된다. 당시는 스파르타의 종교의식 기간이었기 때문에,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고작 300명의 친위대만을 이끌고 출전해야 했다. 천혜의 방어지인 테르모필레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이틀 동안 기적적인 연승을 거듭했으나, 배반자 에피알테스가 비밀 통로를 페르시아 진영에 알려주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패배를 직감한 레오니다스 왕은 다른 그리스 연합군에는 퇴각명령을 내리지만, 자신과 300명의 병사들은 테스피아이 병사 700명과 함께 끝까지 전장을 사수하기로 한다. 구름 같은 대군을 맞아 맹렬히 저항하던 300명의 스파르타인은 결국 전원 죽음을 맞이한다.>
한 가지 부가한다면 육지에서의 이 전투를 해상에서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결국 테르모필레를 지나 아테네까지 쳐들어갔지만 해상에서 똑같은 실수를 합니다. 수많은 전함을 자랑하는 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 함대와 대결합니다. 아테네의 거의 4배나 되는 수많은 전함과 맞대결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으로 들어가는 짓입니다. 아테네 해군의 지휘관은 그들을 해구가 좁은 곳으로 유인하여 역시 죽기를 무릅쓰고 대결합니다. 좁은 길목에 어마어마한 수의 함대가 들이닥치니 저희들끼리 서로 뒤죽박죽이 됩니다. 테르모필레에서와 마찬가지로 살라미스에서도 지리적 조건을 무시한 전투를 전개한 것입니다.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를 장식한 이 해전으로 페르시아는 패하여 물러가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승리의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수적으로 적은 것보다야 많은 것이 당연히 낫습니다. 그러나 수만 가지고 유리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자세와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한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전쟁사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체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불어 머리를 잘 쓰도록 훈련하는 것도 매우 필요한 일이지요. 인생을 만들어가는 일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지혜가 중요하지만 몸이 허약하다면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몸만 강하다고 멋진 인생을 만드는 것도 아니지요. 함께 가야합니다.
약 반세기 후에 새로 만든 영화가 있습니다. ‘300’(2007년 작)으로 개봉되었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볼거리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과장된 표현이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옛날 영화가 보다 현실감이 있다 싶습니다. 영화 ‘300 스파르탄’(The 300 Spartans 1962년 작)을 보았습니다.
아파트 바로 앞에 성주산이 있습니다. 근처 주민들뿐만 아니라 부천 시민들이 곧잘 찾는 산입니다. 이 산을 둘러 좀 멀리 ‘소래산’까지도 이어진다고 합니다. 거기까지 가볼 능력이 생길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리 상태가 좋지 않아 이곳 정상까지도 올라보지 못했습니다. 중간쯤 하여 돌아옵니다. 이제는 곳곳에 진달래 개나리가 활짝 피어있고 근처 주택 안에는 목련도 만개한 곳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봄꽃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줄지어 있습니다. 조용한 오후 천천히 산행을 다녀옵니다.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바깥에서 야단이네요. 미국과 유럽은 무섭게 확산되고 있음을 매일 확인합니다. 이제는 정말 세상이 멀리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반짝해도 어느새 저기서 반응이 나타납니다. 쉽고 빠르고 편리해지는 만큼 무엇인가 위험인자도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서둘러 발전해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지금 편하기 위해서 미래를 유념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무튼 때마다 위험은 있어왔고 또 극복해 왔습니다. 어서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자유롭게 오가고 서로 만나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일상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아침은 좀 쌀쌀하네요. 특히 감기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괜한 오해까지 사면 더 힘들어집니다. 4월입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하루하루 잘 이겨내며 복된 한 달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
성경 시 49 : 20 2020년 03월 29일
설교 : 사람과 짐승 김종우 목사
똑같은 사건이나 사고를 보도하는데 각 신문이 보도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 그런가? 신문의 기사도 사람이 작성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어느 시각에서 그 사건을 해석하는가 하는 것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정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국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입장 차를 최대한 좁히도록 하는 것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겠지요. 흔히 너무 여당 편에서 본다든가 아니면 너무 야당 편에서 본다든가 하면 어느 한 쪽으로 편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편협하게 보고 생각하며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알 것은 우리 각자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서로 그것을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틀리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부족한 인간들이 그래도 좀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하며 세상을 이끌어가는 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과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치 못한 존재들이란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생각해본다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입니다. 모든 편협과 편견을 물리치고 보다 진실에 가깝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속에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신앙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첫째의 목적은 영생과 구원입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해지기 위해서 성경을 가까이하고 읽습니다. 딤후 3 : 15 - 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렇지요? 첫째는 구원이요 둘째는 온전한 삶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 신앙생활을 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고 또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삶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제멋대로 살다가 그냥 죽는 것입니다. 사실 그냥 죽는 게 아니지요. 모를 뿐입니다. 시 49 : 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나’라는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 모르고 살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멸망하는 짐승이란 말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어떤가요? 그래도 재물과 권세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라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 사람에게는 내세가 없습니다. 오로지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갑부가 된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눅 12 : 16 - 18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오늘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한 해 장사가 잘 돼서 은행에 수십억을 예금해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평생 먹을 양식에 대해 걱정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중얼거립니까? 19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이제 여행도 다니면 즐기면서 살자, 그런 말이지요. 나쁠 거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빠졌습니다.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결론입니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부자는 영생에 대한 준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라는 말이지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우선 사람이 구분하는 사람과 짐승을 생각해봅니다. 짐승은 본능과 감정은 있으나 이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유 1 : 10절에서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그 중요한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 사람은 이 이성이 있기에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냅니다. 짐승의 세계와는 딴판이지요.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칭호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다릅니다. 당연히 차원이 다르지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세상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이 곧 사람이고 세상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신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에게는 이성은 있어도 신성은 없습니다. 신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짐승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신성이 있고 없고를 알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이 영입니다. 신성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받은 말씀을 전하셨기에 즉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살아있는 자이고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이 없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곧 멸망하는 짐승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사 55 : 8 - 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렇습니다. 수준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사람은 이성이 있기에 철학을 하고 과학을 하고 윤리 도덕을 따집니다. 온갖 문명을 발전시키고 더불어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갑니다.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내고 나날이 사는 것이 편리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성이 있기에 똑똑하고 총명합니다. 세상을 보다 낫게 만들고 편리하게 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똑똑해서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잘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똑똑하면 세상에서는 잘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은 별개입니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신성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잠 30 : 2 - 3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그게 바로 짐승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 지혜도 총명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우리나라에 단군신화가 있지요. 곰과 호랑이가 서로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백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야 했습니다. 호랑이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곰이 인내하여 드디어 사람이 되었지요. 환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4 가지 밭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길가가 나옵니다. 말씀을 주었으나 어떻게 됩니까? 새가 와서 먹어버립니다. 말씀을 줘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주나 마나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돌밭이 나옵니다. 마 13 : 20 - 21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세상에서 그것으로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무너집니다. 셋째 가시떨기가 나옵니다. 온갖 세상 근심 걱정 염려 그리고 재물의 유혹으로 인하여 중도 탈락합니다. 역시 열매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좋은 밭이 나옵니다. 23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같은 말씀을 좀 다르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눅 8 :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여기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다음에는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인내로 결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깨달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인내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결과 또는 삶의 결과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깨달아도 깨닫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단은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셨지요?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행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달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즉 성경을 배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칩니다. 문제는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배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도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고 배웠습니까? 달달 외울 정도였잖아요? 신 6 : 6 - 9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성경이 누구를 증거하고 있다고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40절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오지 않는답니다. 왜 그랬지요? 깨닫지를 못했으니까. 그러니 성경을 읽고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고 배워도 깨닫지 못하면 유익이 없는 것이지요.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짐승과 같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행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고 즉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혹 구원을 받았을지 모르나 아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언약을 배반한 것이고 하나님의 도를 어겼으니 배도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아버지 뜻대로 행하게 됩니다. 특히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집 현관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모르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 가족이고 자식이라면 당연히 그 비밀번호를 알겠지요.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렇지요? 예수님의 제자들 우리에게는 허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혹 잘못 알고 있다면 고쳐야 하겠지요. 이제라도 바로 잡으면 됩니다.
세상에는 참과 거짓이 있습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편이고 비진리는 사단 마귀의 편입니다. 세상이 마귀의 손아귀에 있기에 그 비진리의 세계에서 인생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당신의 목자로 세워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함이지요. 그렇게 세운 목자가 하나님의 도를 배반합니다. 그러나 인류 구원의 역사, 하나님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세대를 거듭하며 시도하십니다. 당신의 사람을 택하여 12 지파를 만들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만드십니다. 그럼에도 역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등지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만드신 육적 이스라엘을 끝장내십니다. 그렇게 하여 4천 년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 이스라엘을 창조하십니다. 사실 아담 이후 아무리 사람을 바꾸어 당신의 종으로 택하여 목자를 세워도 아담의 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씨를 가지고 있더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먹고 시작을 해도 결국은 반역하고 끝납니다. 그러니 죄의 씨를 갖지 아니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성령을 통해서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 12제자를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당신 백성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 후 2천 년 영적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까지 이어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진리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진정 그러기를 소원합니다.
우려되는 것은 첫째 하나님 말씀을 자기 생각대로 선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상의 과학자들은 우리 지구 나이를 최소한 수십억 년 인류의 역사를 수백만 또는 수십만 년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만 유독 6천 년을 우깁니다. 성경 어디에 지구 역사가 6천년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아니면 인류 역사가 6천년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자기 생각이지요. 성경을 자기가 잘못 보고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종말과 심판을 이야기하여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어디 무시무시한 지진이라도 나면 세상 종말이 가깝다고 법석을 떱니다. 그러나 지구 역사 속에 지진이 없었던 때가 얼마나 됩니까? 마 24장의 마지막 때의 현상이 전쟁, 기근 그리고 지진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없었던 때가 얼마나 됩니까? 그 용어의 하나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자기 생각대로 말하는 것이지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 백성 곧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왜 그것을 세계사, 세상 역사로 확대 해석하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몰라서 그렇지요. 그러나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알았으면 빨리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 속의 예언에 눈이 어둡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그래서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우리 또한 신약의 예언에 눈이 어두우면 주님 다시 오실 때 똑같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을 알고자 하면 이단에 빠진다고 지레 겁이나 먹고 말립니다. 예수님 때도 그랬지요. 그래서 당시 목자들을 질타하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고 선민으로 자기네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나깨나 하나님 말씀. 율법을 가지고 신앙하며 생활하였습니다. 그렇게 수 천 년을 이어왔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처럼 누구나 성경을 가지고 있던 때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듣고 또 듣고 해서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암송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도 율법에 명시하셨습니다. 신 6 : 6 - 9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그런데 약속하신 메시야가 왔는데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요? 성경에 이미 다 기록해서 주셨는데, 그래서 듣고 기다리며 신앙했는데 정작 오시니 발로 차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행 13 : 26- 27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외웠는데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신앙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똑바로 알고 신앙해야지요. 백번을 읽든, 암송을 하든, 필사를 하든,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고귀한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알아서 지켜야 비로소 산 영(생령)이 되는 것입니다(창 2 : 7).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짐승일 뿐이지요. 성경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역사 곧 지나간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되는 것이지요. 고전 10 :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행하면 그것이 곧 악을 즐겨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깨닫지 못하면 그들의 운명과 같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잘 배우고 바르게 깨닫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음으로 깨달은 것을 인내하며 행함으로 결실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약속하신 나라 천국에 입성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