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아주 늦게까지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부지런하신 우리 할머니들과 엄마는 일찍 일어나셔서 분주하셨다.
잠귀가 밝은 나.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길.
아...걸을 수가 없었다. 온 다리를 괴롭히는 근육통과 할머니를 부축했던 오른팔과 오른 어깨 등등...기어서 나오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기어나오니 엄마는 다리에 온통 휴대용 부항을 붙이고 계셨고, 이모할머니는 여기저기 파스를 붙이고 계셨다.
신기한건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비교적 말짱하신 모습으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말똥거리고 앉아 있자니 엄마가 내 다리에도 부항을 붙여주셨다.
평소 같았으면 질겁을 했겠지만 다리 상태가 상태이니 만큼 입다물고 참았더니 잠시후 다리가 한결 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좀 걸어야 풀릴듯 하길래 뜨거운 물로 다시 한번 다리를 풀고 펜션 잔디마당을 걸어다녔다.

느지막히 일어난 여동생B는 상태가 가장 안 좋았다. 아예 걸을 수도 없는 상태.
이녀석은 어릴때부터 학교에서 소풍을 다녀오거나 하면 그날 밤새 다리가 아파 우는 녀석이었다.
부항도 해줘보고 이것 저것 해봤지만 아주 힘들어하는 B.
오늘 일정이 걱정되었다.
오늘은 용두암, 산방산, 폭포 한군데 쯤으로 잡았다. 그리고 저녁엔 파티를 하기로 했다.
용두암과 산방산의 산방굴사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나 역시 산방굴사는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이후로 왠지 그리운 장소가 되어있었다.
용두암에 도착해서 걸어들어가는 순간, 모두에게선 조금씩 비명이 흘러나왔다. ㅎㅎ
편하지 않은 바다 바위길을 걸어가려니 다들 힘들긴 했지만 형형의 바위들과 깨끗한 바닷물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한 신혼부부의 사진도 찍어주기도 하고. 점점 다리도 풀리는 느낌이었으며 기분도 좋아지고 있었다.
겨울에 왔을때 그곳 바위틈 어딘가에서 해녀 할머니들이 멍게랑 해삼이랑 팔고 계셨는데 그때는 두어분 본 듯한데 이번엔 아주 조금만 걸으면 또 계시고 또 계시고 하며 유혹하셨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모두 둘러 앉아 해삼과 멍게, 소라를 먹었다.


할머니들을 위해 한라산 소주도 한병 해드리고^^
북유럽에서 온 D에게는 처음 보는 멍게였다. 해삼과 소라는 너무 맛있다며 잘 먹는 모습이 예뻐보였다.
편견이 없는 그의 성격과 식성이 참 예쁘다.
(선녀탕이랍니다. 어떻게 저렇게 맑은 물이 저기 있을까요? 진짜 밤에는 선녀님들이 목욕하나 봅니다. 하하)
용두암을 둘러나오니 말들이 서 있었는데 저번 겨울에 왔을때가 생각났다.
그때 말 한마리가 인도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길래 옆의 먹이가 될만한 풀을 주었더니 이녀석 너무 잘 먹는게 아닌가.
그래서 계속 들이 밀었는데.....아...이 말녀석...내 손에 침을 잔뜩 묻혔었다.
그 축축함이 다시 떠올라 말 근처에도 가기 싫은 기분이 떠올랐다.
산방굴사는 용두암 티켓을 보여주면 그냥 갈 수 있다.
다들 다리가 아파 못 올라간다고 말은 했지만 큰 나무 그늘에서 쉬다보니 슬슬 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결국 산방굴사까진 못 갔지만 그 앞의 절들은 다 보고 내려왔다.
(절앞 옥거북인데 막 기어오르려는 모습이 역동적으로 예쁩니다.)
산방굴사 바로 아래 주차장은 주차료를 받았었는데 맞은편 주차장에서 점심식사를 하려고 내려가니 거긴 무료였다.
도로 하나 차이로 좀 심한 듯.
저멀리 보이는 바다위의 바위 용머리를 보며 준비해온 김밥과 과일들을 나눠먹는데 역시...최고였다.(내가 싼 김밥이라..ㅋㅋ)
(김밥이 안나왔네요, 각자 들고 있어서ㅠ.ㅠ)
폭포한군데를 가기로 했는데 우린 천지연 폭포와 천제연 폭포가 헷갈렸다.
한곳은 한참을 걸어야하고 물이 많지 않을때는 더 많이 걸어야한다.
또 다른 한 곳은 한적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언제나 물이 많이 내려오는 곳.
또 사진이 잘나오는 곳이란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의견이 분분해서 일단 가까운 천제연으로 가보기로 했다.
가보니 역시 여기가 꽝이다. ㅋㅋ
주차장 근처에 있는 한라봉과 귤 농장만 구경하고 천지연으로 움직였다.

천지연 폭포 주차장에 도착해서 들어가려는데 여동생 B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D와 엄마가 관리실에 가서 휠체어를 가져와 겨우 움직였는데 D가 여동생을 태우고 걷는 모습이 마치 정신적 장애우가 육체적 장애우를 밀고 가는 풍경이 그려졌다는...ㅋㅋ

다들 피곤해 모습이 그래 보인 듯 했다.
하지만 덕분에 한참을 웃었다.
폭포로 들어가는 길.
기억속의 길도 좋았지만 막상 와보니 더 좋은 느낌.
이국의 한 풍경 속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픈다리가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어서 다 도착했을때 길이 조금 더 남아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높은 절벽위에서 망설임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들, 부서진 물방울들이 만들어내는 안개들이 단단하지만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곳.
그 밑으로 흐르는 물은 언제 급한 요동을 했냐는 듯 고요한 모습은 정중동 그 자체였다.
자연 자체가 가진 정중동의 모습에서 그림으로 표현할때 인위적으로라도 정중동을 이루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언젠가 자연다큐에서 본 항공촬영장면이 떠오르며 저 폭포위의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도 해보았다.

이곳 역시 신혼부부가 많았는데 한 커플은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주면 온가족의 사진을 찍어주겠노라했다.
폭포가 잘 나오는 바위위의 촬영은 차례를 기다려야 간신히 찍을 수 있을만큼 인기 있는 곳이라 제대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나보다.
예쁘게 서너장 찍어주고는 휠체어 신세인 여동생B와 D, 다리가 너무 아프셔서 절뚝거리시는 이모 할머니를 제외하고 엄마랑 우리할머니 나 이렇게 셋 사진을 찍었다.
우리집 여기둥 3인방이랄까...하하..
돌아나오는 길에 물을 가만히 보니 뭔가 움직이는게 보였다. 마치 뱀처럼 생긴.

왠지 무서운 생각도 들고 해서 자세히 보니 한 두마리가 아니었다.
설명을 해 놓은 판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민물장어가 자생하는 것이란 내용이었다. 보호구역이라 그렇게 많은 개체가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혹시라도 저 물에 떨어지면 큰일나겠단 생각을 잠깐 떠 올려보았다.
주차장으로 나온 우리는 이제 숙소로 가서 장을 봐 만찬을 즐기면 되었다.
그때 D가 휠체어를 반납하러 갔는데 아까부터 너무 앉아보고 싶어하더니 결국엔 앉아 손으로 바퀴를 굴려 관리소까지 가는게 아닌가.
그 개구짐에 우습기도 했지만 관리소 안까지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관리인들이 얼마나 황당할까.
금발의 파란눈 청년이 휠체어를 타고 와서 반납하곤 벌떡 서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니 너무 재밌었다.
숙소 근처의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고기를 사고 이것 저것 야채를 고르고 있는데 엄마가 불렀다.
울 엄마...회 뜨는 코너에서 회를 떠 달라고 하고 계셨다.
고기도 있는데 회까지...하는데 우리 도시락 먹고 아낀걸로 마음껏 먹고 즐기라는 뜻이라 하셨다.
히라스라는 물고기인데 아주 컸다.
고기 맛을 물어보니 방어보다 조금 더 맛있다는 이야기.
일본 오사카 여행때 먹은 방어스시가 너무 맛있었던 참이라 잔뜩 기대를 하고 가져왔다.
히라스 회, 제주 흑돼지, 맥주, 막걸리, 귤 술로 차려진 저녁 만찬은 아주 푸짐했다.

할머니들도 엄마도 여동생B와 D도 나도 모두 행복한 마음으로 이번 여행의 마무리를 자축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펜션의 주인 아저씨도 잠깐 함께 했는데 그 분이 배를 타는 동안 D의 나라에 다녀온적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D의 서투른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여동생B가 통역을 하기도 해서 정말 다 같이 한참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로 세계 각국의 술과 여행기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여행지에서도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우리들이었다.
내일은 갈치를 사들고 집에 가는 일정이 다였기에 젊은 우리 셋은 아주 늦은 밤까지 그곳 펜션마당에 웃음소리를 흘렸다.
첫댓글 드디어 키노님이 등장 하셨네요 제주도여행글 너무 감사 합니다 새로운 활력소가 되는것 같아요 행복 하세요
언제나 지켜봐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여름향기님도 행복하세요^^
기행문에 먹거리가 빠질순 없지요. 회사에 나와 있는데 웬지 해산물 생각이 나네요. 해삼의 꾸득하게 씹히는 맛과 멍게의 상큼함. 혼자 즐겨봅니다. 다른이들은 일한다고 열심인데....
^^ 가끔씩 먹는 해산물...참 향기롭고 좋은것 같습니다. 히힛~ 거기에 좋은 술도 한잔..^^;
먼저 제주도 아름다움을 회원님들에게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고향이 제주도이고,현재 제주에 살고 있습니다.
혹시 다음에 제주도 관광 오실때 관광정보가 필요하시면 쪽지 남겨주세요.....
제법 많은 관광정보를 알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라오스카페식구들 누구나 연락주시면 미약한 힘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아...제주도 계시는군요....제가 가장 부러운 사람이 제주도 사시는 분과 경주 사시분인데...하핫....다음에 갈때 꼭 쪽지 드리고 가겠습니다~ ^^
저도 83~85년 기간 제주에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산방산은 철모산이라고 애칭을 붙이기도 했고
용두암 옆에 민물이 나오고, 해삼멍게 썰어서 한일소주하고
한 따까리 하던 기억이 생생 하네요...^^
철모산...왠지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하하...네 용두암에서 해삼멍게 썰어서 먹는 맛은 여느 횟집에서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더라구요^^
사진들이 정겹고 예쁘네요.
고맙습니다... 사진기술은 부족한데 가족이 등장해서 그런가봅니다^^
제주도 안가본지 어언~ 3년 됬네~
어여 다녀오세요~ ㅎㅎ 3년에 한번...정도 좋잖아요^^;
우리나라도 정말좋은곳은 제주도입니다 3~5번갔다왔는데도 또가고싶네요 책임져요 ㅎㅎㅎ
^^ 가도가도 질리지 않는 섬이잖아요. 이번 여름 휴가 잡으세요^^ 되도록 생소한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