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9장 14~19절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16 (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과 너희가 여러 나라를 통과한 것을 너희가 알며 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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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반지를 낍니다. 은목걸이를 합니다. 이걸 지적하는 성도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코에 피어싱을 하고 몸에 용 문신을 했다면 지적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통념입니다. 어디까지는 해도 되고 안 된다는 법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한 이유는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 하다가 생겼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틈에 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했음을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문화에는 금송아지가 없습니다. 이게 어디서 나왔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본 우상을 기억해서 만들었거나, 출애굽 때 따라 나온 잡족의 신일 겁니다. 둘 다 이방의 풍습을 따라 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게 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5절입니다.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애굽에서 나온 사람, 노예, 농사짓던 사람들이 장신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여러 나라를 거쳐오는 동안 우상 문화를 흡수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빼앗기는 순서도 딱 이렇습니다. 처음엔 쳐다보고 다음은 받아들입니다. 정채봉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귀들이 절대 잡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늙은 마귀가 그를 잡습니다. 어떻게 잡았냐고 물었습니다. 늙은 마귀가 말합니다. “딱 한 번만 이라고 졸랐지.” “딱 한 번으로 어떻게 잡을 수 있나요?” 늙은 마귀는 말합니다. “순진하기는... 한 번 맛보았는데 그것으로 그치는 인간들 보았어? 그렇게 망하는 거야.” 딱 한 번을 조심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고 하십니다. 단조로운 광야 생활에서 이방 분화는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이 꼭 신앙적이진 않습니다. 성경은 이방 문화를 독초와 쑥의 뿌리라 하십니다. 그럼 독초는 뭐고 쑥의 특징은 세 가지입니다. 쓰다, 죽는다, 확장된다 입니다. 이것이 쓴 뿌리입니다.
단 뿌리와 쓴 뿌리는 이래서 다릅니다. ‘쓰다 달다, 죽는다 살린다, 확장된다 집중된다’ 처럼 비교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왜 백성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그 독초와 쑥을 먹었을까요? 특별한 행동을 하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 중에서 색다른 행동을 하면 주목을 받습니다. 그 내면에는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는 거짓 위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여기서 젖은 것과 마른 것의 정확한 의미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전통적인 해석은 물에 있든지 사막에 있든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거 나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요즘 화성인이라 부릅니다. 지나친 자기 세계에 갇힌 걸 말합니다. 자기 세계에 갇힌 이유가 있습니다. 19절 첫 부분을 보면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라고 했습니다. 나만 좋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세의 징조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뭘 말할까요? 자기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르시시즘입니다. 저는 예쁜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남자가 화장하는 건 싫습니다. 목걸이를 하는 건 예쁩니다. 하지만 쇠사슬을 걸고 다니는 건 싫습니다. 남자의 화장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위로입니다. 지나친 피어싱과 장신구는 별로인데 본인은 좋아합니다. 극단적으로 자기만 사랑하면 사람이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우리 중 화장하는 남자는 없습니다. 쇠사슬을 매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전하면서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쓴 뿌리가 영적인 문제라면 분명 내게 나타나는 현상들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건 귀신들려서 그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이지 않고 그런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가져야 합니다. 나의 영혼의 건강검진을 받아보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기쁜지를 보십시오. 우리는 내면이 차지 않으면 밖에서 기쁨을 구합니다. 인터넷 쇼핑, 통장의 잔고, 먹고 마시고 취함, 취미, 또는 중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여자는 우울할 땐 쇼핑을 한답니다. 그런데 이게 주는 기쁨은 딱 돈을 쓰는 그 순간만이랍니다. 집에 와서는 그걸 끌러보지도 않습니다. 내 속에 쓴 뿌리가 있으면 거짓 위로에 중독됩니다. 복음송 <행복>은 노래합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임을 우리는 모두 공감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내 마음이 자꾸만 고집스러워지는 건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음을 만드신 하나님께 치유를 부탁하십시오.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의 가치를 알게 해달라고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거짓 위로의 쓴 뿌리가 뽑히면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십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