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낙타의 눈물 / 박영득
오싹하리만큼 차가운 늦가을 이른 아침, 햇살이 비치는 언덕바지에 한 마리 늙은 쌍봉낙타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냉기를 가르며 쏟아지는 한 줌의 아침 햇살도 아쉬워 낙타는 햇볕을 쬐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졸린 듯 감고 있는 낙타의 눈언저리에 눈물 자국이 선명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는 콧구멍에서는 담배 연기처럼 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내가 낙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교회 주일학교시절 크리스마스 때였다. 새로 새워진 우리 교회는 크리스마스 행사준비도 할 수 없어서 임자도 진리교회 학생들이 찾아와 크리스마스 행사를 해주었다. 무대 세트장 정면에 동방박사 세 사람이 낙타를 타고 별을 따라 아기 예수를 찾아가는 그림이 붙어있었다. 성탄 극의 배경장면이 된 그림 속에서 낙타라는 동물을 처음 본 것이다.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 한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발견하고 황금, 유황, 몰약을 선물로 드리고 경배를 드렸다. 그 곁에 경건하게 서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지켜 보고있던 그림 속의 낙타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 후로 낙타를 생각하면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아마 동물 가운데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나심을 곁에서 지켜본 최초의 동물이 낙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여기 네이멍에서 쌍봉낙타 한 마리가 울고 있다. 지쳐 울고 앉아있는 낙타 모습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던 그 옛날 민둥산이었던 목포 유달산 같아 보인다. 유달산은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두 개의 봉우리가 있어 멀리서 보면 쌍봉낙타의 모습이다. 가난해 힘들고 어려웠던 중학교 시절 교실에서 바라다보이는 유달산이 어찌나 지쳐 보였던지 긴 사막 여행 중 힘든 다리를 쉬고자 사막 어느 한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쌍봉낙타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런 유달산을 바라보면 왠지 더 서글퍼졌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고나 있는 듯 ‘하늘엔 하현달 유달산 밑에 나 하나’라고 즉흥시를 읊어주시던 국어 선생님의 멜랑꼴리해 보였던 그 모습이 오늘 아침 쌍봉낙타 등 뒤에서 보이는 것이다.
낙타가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 화려했던 옛날이 그리워 흘리는 눈물일까 아니면 지금 삐걱거리는 관절 마디마디의 아픔 때문일까. 잃어버린 미래를 향한 꿈 때문에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면 마두금馬頭琴 소리에 속으로 앓고 있던 응어리가 녹아 눈 밖으로 흘러내리는 슬픔일 수도 있으리라. 낙타의 눈물에 마음이 쓰인다.
적자생존의 피비린내 나는 정글을 피해 초원과 사막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낙타는 한때 이 넓은 사막에서 주인 행세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와 달과 별과 그리고 모래만을 보고 살아온 순하디 순한 낙타가 다른 동물에게 어찌 텃세나 행세를 부리며 살았을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간교한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이리 순한 낙타가 강제로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자유를 빼앗긴 신세가 되었다. 맹수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찾아온 이 낙타에게 또 다시 입에 재갈이 물리는 억압받는 신세가 되었으니 아무리 선한 낙타라 할지라도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 쌍봉낙타는 해를 등지고 끝없이 모래사막을 걸었던 조상들의 장엄한 카라반 행렬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다가 지치면 어느 오아시스에서 물을 마시고, 밤이면 사막 낯선 구릉 아래 주저앉아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시름을 달랬을 모습도 그려보았으리라. 낮에는 황금, 유황, 몰약 같은 값진 물건을 등에 지고 비단길을 따라 저 먼 서역을 향해 걸어갔을 조상들의 영화롭던 시절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 고달팠지만 꿈과 이상이 있던 조상들의 삶이 낭만적으로 보였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구경꾼들을 위한 노리개로 전락한 자신들의 모습 때문에 더 슬퍼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오늘날의 낙타는 먼 대상의 길을 떠날 꿈은 꿀 수도 없는 일이니. 이미 그런 특권은 거대한 기계문명의 소산인 차나 비행기에 빼앗겨버리고 이젠 낯선 이방인을 등에 태우고 조상들의 옛 영화를 재현하는 광대놀이를 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아닌가. 한술 더 떠 요즘엔 네이멍에서는 매년 쌍봉낙타 경주대회가 열리고 있다. ‘1만 마리 낙타 축제’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낙타가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것이다. 타는 목마름과 차오른 거친 숨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 넓은 초원과 평원을 버리고 이곳 모래사막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낙타가 이젠 턱까지 차오르는 거친 숨과 갈증도 제대로 달랠 수 없는 사막의 경주자가 되었으니 더는 이곳도 낙타에게는 살 곳이 되지 못하지 싶다. 그렇다고 이제 낙타가 이곳 사막을 버리고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설 곳이 이 지구상에 어디 있기나 하겠는가.
오늘 아침 모래사막 언덕 아래에서 햇볕을 쬐며 앉아있는 낙타에게 관광객을 태우는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이 늙은 낙타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늙은 낙타에게도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저 쌍봉낙타도 더 늙어지면 이런 쇼에도 함께하지 못하리라. 그땐 모든 것 다 부려놓고 사막 어는 모퉁이에서 비바람에 풍장風葬 되고 무화無化되어 본래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리라. 한 줌의 흙이 되어 모래사막 어느 곳에서 또 다른 세상을 꿈꾸며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자유로운 영혼으로 모래바람 부는 사막 어느 골짜기를 떠돌 수도 있겠지.
낙타 쇼를 하는 몰이꾼이 다가왔다. 눈을 감고 앉아있는 낙타 등을 뚝뚝 두드려 일으켜 세운다. 흠칫 놀란 낙타가 무릎을 펴고 삐걱거리며 힘겹게 일어선다. 오늘도 낙타는 쉬지 않고 생각이란 눈곱만치도 없는 호모 사피엔스들을 등에 태우고 종일 뜨겁고 팍팍한 사막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눈가에 맺혀있는 낙타의 눈물을 생각하니 나는 낙타 등에 결코 올라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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