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강화군에서 우리 해설사 교육을 3차례에 걸쳐서 진행하는데, 2차는 8월 25일 강화군 행복센터에서 이론교육과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강화 3.1운동, 유배된 왕족들, 강화도 발전을 위한 해설사 역할 향상 그리고 예성강 하구에 있는 벽란도 등 4강좌를 2시간씩 8시간 수강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역시 3.1운동과 유봉진에 대한 강의가 제일 인상이 깊었습니다.
나는 몇 년 전에 유봉진 열사와 부인 조인애 내외분을 방계해원(직계 조상이 아니지만, 특별해원하는 것) 했습니다. 강화에서 공을 세운 분을 위로하고 협조하길 원해서 그렇습니다. 해원은 하였지만, 인물에 대해 자세히 모르니 언젠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강화도는 근대에서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사건 및 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 체결 등 수난을 겪어서 항전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 합니다. 거기에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민족자립운동이 고양高揚해서 이동휘(동립운동가) 선생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강화를 56구역으로 나누어 1개씩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3.1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제가 만든 토지법이나 화사령으로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합력해서 강화도 3.1운동은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합니다. 당시 강화도는 경기도였지만, 경기도에서 일어난 3.1운동의 10%는 강화에서 진행되었다고 하고, 인구 7만 2천여 명이었던 군민 중 약 30%인 2만여 명이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강화 3.1운동 중심인물인 유봉진은 서울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강화도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고, “나는 그 운동을 위하여 결사대원이 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고 외치고 민중을 참여하게 설득하였습니다. 그 각오에 부인 조인애도 남편과 함께하길 결의하였습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열사들은 길상면 길직교회에 모여 거사일을 강화읍 장날인 3월 18일(음 2월 17일)로 결정했습니다.
유봉진은 3월 12일에 온수리를 출발하여 강화 각지를 순회하고 시위계획을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17일 밤 주문도를 출발하여 18일 오전에 온수리 집에 돌아와 백마를 타고 읍을 향했습니다. 당시 48도 국도는 강이었고 양쪽에 장터였다 합니다. 18일 오후 2시에 신문리와 관청리 사이에 있는 다리 위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강화군청(현 고려궁지)까지 행진을 하였다 합니다. 군중의 숫자는 장터에 있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약 1만명이었다 하고 강화군수 이봉종을 협박하여 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합니다. 시위는 밤 11시까지 이어지고 해산하였다 합니다.
당일 강화 경찰은 적은 인원에 많은 군중을 대하다 속수무책束手無策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유봉진은 마니산에 숨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유봉진은 군중에게 폭력을 행하지 않도록 평화적으로 행하도록 지시하였다 합니다. 그래서 경찰도 결국은 주도자들을 석방하였던 것 같습니다. 강화읍사무소 일부 파괴가 유일한 폭력사건이고 4월까지 이루어진 시위도 주로 밤 경찰이 퇴근 후에 행하였다 합니다.
교수님은 “강화에서 일어난 3.1운동이 전국으로 볼 때, 많은 인원이 참여해도 불구하고 유명해지지 않는 원인 하나가 사망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을 주목하셨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후세에 남기지 못했다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유봉진이 주도하였지만, 원래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님이 동참할 예정이었지만, 전날에 시위에 불참할 것을 표하셨다 합니다. 거사일 전날에 교회 책임자가 하차하니 기세가 빠졌던 것도 사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용흥궁공원에 새로 만든 기념비에 대해서도 언급하여 “뒷면 그림을 보면 유관순을 떠오른 소녀를 조각했는데, 원래는 백마를 타는 유봉진을 조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나는 한민족대서사시를 통하여 유관순 열사는 문선명 참아버님의 탄생에 크게 공을 세운 중심인물이기 때문에, 영영세세 영광을 누린다고 봅니다. 그리고 유봉진의 본관을 알 수가 없는데, 유관순 열사와 같은 고흥 유씨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1910년 한일합방에서 해방까지 35년, 1905년 을사늑약에서 40년의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원래는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시작하니 수난 역사를 70년이라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일제강점기는 강화도조약에서 출발하였다고 말 해도 과언이 아니니, 끝은 강화에서 풀어야 할 것이니 강화 3.1운동이 강화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일국 안착을 위해 참어머님께서 천원궁을 하늘에 봉헌하셨습니다. 그러나 국가 단위로 천원궁을 봉헌하여야 했는데, 우리 축복가정들이 책임을 못 했고, 덕분에 참어머님꼐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고난의 십자가 길을 걸어계십니다. 독립운동이 강화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만큼, 천일국 안착을 위한 시위가 강화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여 하늘 앞에 너무나 송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