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형 부르주아 였던 사무라이들은, 평화 시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日本刀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영주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국민들을 위한 하급 무사 즉 하급 공무원이었다.
군인이자 공무원이자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통일을 하고 사무라이들은 할 일이 없었다.
그들 하급 사무라이들이 행정조직이 되어 일본을 이끌어 왔고, 그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이후, 일본의 변방 사쯔마 지역의 하급 무사들은, 이미 그곳에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을 모방하여 상업과 수공업을 장악한 터였다.
그들이 일으킨 혁명이 메이지 유신이었다.
하급 무사들 중에 중앙정치에 차별을 받고 불만이 많았던 사쯔마 지역의 무사들이 드디어 난을 일으켜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사쯔마의 하급 무사들 역시 상업과 수공업을 장악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유럽의 부루지아를 흉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주도한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산업화 사회는 그들의 할 일을 또 한번 빼앗아갔다.
더 이상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었다.
실업자가 된 그들이 일본 야쿠자의 원조가 되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전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에도 막부를 세운 이후로, 근세 일본은 200년 넘게 에도 막부의 지배하에 있었다.
막부 체계는 도쿠가와 가문의 근거지인 에도에 세워진 막부가 300명 정도의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 위에 군림하고, 또 각 다이묘가 많은 수의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번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봉건제였으며, 다이묘 밑으로는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를 이루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오랜 내란을 끝내고 확고한 지배체계를 구축하였고 조선 원정 실패의 여파도 안정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에도 막부 시대 동안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상공업이 번성하였으며 문화도 융성하였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무라이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무사 계급 내에서 에도 막부에 대한 여론은 악화 일로로 접어들었다.
지속적 평화와 방만한 국가 경영의 시기 동안 사족의 지위는 점차 흔들리고 있었으며, 막부는 18세기에 발생한 일련의 자연재해와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아무리 무술과 학문을 수양해도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마음대로 뜻을 펼칠 수 없는 현실에 분개하는 사무라이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막부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13세기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들을 통해 성리학이 전래되고,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유학자들과 조선통신사를 통해 성리학이 융성하면서,
성리학 특유의 통합적이면서도 수직적인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 사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된 일본'이라는 생각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성리학이 중국 사상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본 고유의 정신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국학이 발생하고 유행하였는데, 국학은 일본 토착 종교인 신토와 결합하여 천황을 숭배하는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때문에 점차적으로 천황을 막부보다 더 높게 쳐주는 풍조가 발생하였다.
막부가 천황의 칙허 없이 굴욕적인 외교 조약을 처리했다는 사실에 대해 강경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젊은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존황양이 사상이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처음에 이 젊은 무사들은 일본도를 들고 외국인이나 친외국 세력을 모두 베어버리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현실을 깨닫게 되자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우고 막부를 타도하자는 쪽으로 태도를 전환했다.
이들을 '토막파(討幕派)'라고 부르는데 특히 다이묘나 번의 상층부가 존황양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조슈 번, 사쓰마 번, 도사 번, 히젠 번 등에서 토막파 무사들의 영향력이 거셌고,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과 같은 사상가들은 많은 토막파 문하생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반면에 막부는 강경책과 유화책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면서 대응의 일관성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막부의 권위만 계속 실추됐다.
1860년 막부의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토막파 미토 탈번 낭인들에 의해 암살되자, 막부는 다이묘들에게는 유화책을 펼치고 대신 과격한 무사들을 탄압하려고 했다.
막부는 각 다이묘가 스스로 개혁을 수행하고 서양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사쓰마 번과 죠슈 번 등이 개혁에 성공해 막부 못지않는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막부는 교토의 천황 조정과 에도 막부의 제휴, 소위 공무합체(公武合体)라고 불리는 합의를 제안했는데, 이 조치는 여러 웅번들에게 막부의 의사결정권을 교토에서 열리는 다이묘 회의로 대폭 옮기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막부는 공무합체운동으로 여러 다이묘들의 호의를 살 수 있었지만, 다이묘와 무사들을 갈라놓고 토막파 무사들을 억누르겠다는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862년부터 1863년 사이에 전국에서 존황양이를 외치는 무사들이 교토로 몰려들었으며, 고메이 천황은 이들에게 화답하여 막부에 양이를 실천하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압박에 몰린 막부는 1863년 5월까지 양이를 실행하겠다고 천명했지만, 현실적으로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은근슬쩍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조슈 번의 양이파 무사들이 무단으로 미국과 프랑스 등의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했다가 미군과 프랑스군의 보복 공격을 받아서 박살이 난 사건이 벌어졌다.
막부는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나섰고, 이 때문에 1864년 교토의 존황양이파 무사들이 조슈로 퇴거했다가 천황의 신변을 확보하여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막부측의 사쓰마-아이즈 연합군에 의해 조기에 진압됐고, 막부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조슈 정벌에 나섰다.
막부는 사쓰마를 비롯한 여러 군대를 소집하여 대군을 끌고 왔고, 이를 상대할 수 없다고 여긴 죠슈 번은 최고위 3명의 중신들이 할복하고 급진 토막파들을 다 쳐내면서 막부에 항복했다.
1865년부터 막부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진행시켰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군대에 서양 무기와 서구식 훈련을 도입했고, 서양의 과학 기술과 학문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막부 내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의 속도는 미진했다.
또 막부뿐 아니라 몇몇 웅번에서는 광범위한 사회정치 개혁이 벌어졌는데, 특히 조슈 번에서는 출신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정치 구조를 간소화시키는 개혁이 시행되었다.
1866년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등극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지난 100여년간 지속된 무능한 쇼군들과는 달리 상당히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는데, 그래서 역사가들 중에 요시노부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막부가 최소한 수십년은 더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역사에서 요시노부에게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슈 번의 토막파는 1864년의 패배로 힘을 잃었지만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토막파는 서양 무기와 서양식 편제를 이용해 비정규군을 육성했고, 특히 부대 편성의 임무를 맡은 타카스기 신사쿠는 무사가 아닌 농민의 입대를 허용하는 참신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1865년에 벌어진 조슈 번의 내전에서 토막파의 무사+농민 혼성부대는 보수파를 격파하고 번의 지배권을 탈환했다. 토막파는 번의 풍부한 재정을 쏟아부어 영국으로부터 무기와 함선을 구입해 막부에 대항해 싸울 군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조슈 번 혼자만의 힘으로는 막부와 친막부 다이묘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한편 사쓰마 번은 조슈 번처럼 토막파 사족들의 세력이 크고 수십 년 전부터 진행된 개혁을 통해 막부에 대항할 만한 풍부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막부의 편에 서 있었고 지난 1차 조슈 정벌에서는 막부 진영으로 조슈와 싸우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슈와 사쓰마가 막부에 맞서 동맹을 맺기에는 외부인의 설득이 필요했다. 도사 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가 조슈와 사쓰마 사이에 가교를 놓아주었고, 1866년 비밀리에 삿초 동맹이 맺어졌다.
막부로써는 조슈에 토막파가 복권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66년 여름 조슈를 응징하기 위해 군사 행동에 나섰으며 여러 친번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조슈와 동맹을 맺은 사쓰마는 병력 파견을 거부했고, 사기가 낮았던 막부군은 참패를 당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막부 체제의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일본은 하급 사무라이들과 국민들이 힘을 합쳐 관리한 물과 토목 기술의 힘으로 풍요를 누렸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사쯔마와 조슈지역의 하급 무사들이 일으킨 쿠테타로 메이지 유신을 완성하여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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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는 오사카의 상업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폭군으로 알려진 이면에는 오다의 위대함이 가려져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