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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령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창7:1-5절) 방주 속에 난 길
교도소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밖에서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그 안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상하고 체조하고 밥 먹고 여러 가지 주어진 일을 합니다. 아마 교도소에서는 점호 받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 중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몇몇 사람들과 짐승들이 노아의 배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인원이 마치 수련회장에 들어가는 학생들처럼 일렬 또는 이열 종대로 서서 노아의 배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밖에 모여 있을 때는 꽤 많은 것 같았는데, 다 들어가고 나니. 밖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침에는 깨고. 밤에는 잤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먹고 치우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농사도 지을 수 없었고, 다른 특별한 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운동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무료하게 홍수가 끝나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엄청난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배 안에 들어가기 전에 예배할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과 축복을 날마다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무서운 홍수가 나서 코로 호흡하는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과 다른 모든 새들과 곤충들이 다 멸망하는 중에서도 배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기쁨, 구원의 하님을 찬양하는 기쁨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홍수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아의 배는 단순한 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나 생물들은 죽어갔지만 배 안에서는 기쁨이 끊이지 않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Ⅰ.코로 호흡하는 생물들의 멸망
오늘 본문은 코로 호흡하는 모든 것들의 멸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 홍수로 멸망시킨 대상은 코로 호흡하는 모든 사람과 새와 짐승이었습니다.
7:22절)육지에 있어 그 코로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더라.”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곧 이 부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과 물속에 있는 물고기 등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는 책임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홍수에서 물고기만큼은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코로 호흡한 것들만 망하게 하셨을까? 이것은 저의 오랜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물속에서 아가미로 사는 것들이 육지나 땅위에 코로 숨 쉬는 것들보다 월등하다고 판정하신 것 같습니다.
일단 물속에서 아가미로 사는 것들은 삶의 범위가 분명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육지로 나올 수가 없어요. 이것들은 오직 물속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물고기들은 죽습니다. 삶의 범위가 처음부터 분명히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 호흡하는 것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껏 공기를 마시면서 높은 산에도 올라갈 수 있었고, 새들은 끝없이 올라가서 하늘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코로 호흡하는 생물들을 아가미로 호흡하는 생물들보다 더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홍수에서는 삶의 범위가 원래부터 한정되어 있는 물고기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자신의 존귀함을 남용하고 한 없이 높아지려고 하는, 코로 호흡하는 생물들은 전부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코로 호흡할 뿐 아니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가장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존귀와 명예를 우리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산양(山羊)이 올라가는 곳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독수리가 올라갈 수 있는 꼭대기 위에 올라가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獨步的)인 존재가 되어야 만족을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삶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이 또 다른 신(神)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입으로는 *신(神)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 호흡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엄청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자 하며, 자기가 가진 재능은 모조리 발휘해야 하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뒤떨어지면 못 견디는, 자신의 한계를 저 끝까지 넓혀야 직성이 풀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神)이 되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그냥 네모난 배가 아닙니다. 마치 피난처처럼 홍수가 끝날 때까지 잠깐 대기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곳에 놀러 갔다가 큰 비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이나 대피소 같은 곳에 피하여 몸을 웅크린 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것은 대피소의 생활입니다.
또 공습경보가 울리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대피소로 들어가서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는 단순한 대피소가 아니었습니다. 홍수가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물이 얼마나 올라왔을까?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을까?*하면서 노아도 왔다 갔다 하고. 원숭이도 왔다 갔다 하고. 새들도 불안해하는 그런 대피소가 아니었습니다.
방주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아의 배 안에 들어감으로써 과거의 생활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물로 망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두 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노아 홍수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 때. 바로의 부하들이 홍해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아주 탁월한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고전10:1-4절)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넌 것은 단순히 원수를 따돌리려는 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과거에 나를 다스렸던 죄의 지배가 끝나고..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정욕에 지배당하고 욕심대로 살며. 죄로 숨을 쉬었던 옛 사람을 완전히 장사(葬事)지내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삶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들은 죄와 함께 살아왔으며, 죄 짓는 데서 삶의 힘을 얻었고, 정욕을 채우는 데서 삶의 의욕을 얻었습니다. 정욕을 채울 수 없으면. 삶에 힘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이지요.
욕심이 생기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그들은 무언가 끊임없이 갈망하고 추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늘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욕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감사가 없이 늘 불만이고 불평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코로 호흡할 수 있게 해주셨으니.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우리는 어느 곳에나 다 갈 수 있고, 엄청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오기 위해 혀를 잘라야 하는 비운의 인어 공주가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정도로 만족을 못합니다. 욕망은 채워질수록 더 커집니다. 산에 올라갈 때. 제일 약 오르는 것은 나보다 다리 힘이 좋은 친구들이 벌써 올라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헉헉거리며 올라가면. 자기는 더 위로 올라가 버립니다.
*내가 올라갈 때까지 좀 있어라*사정하고 간신히 올라가면. 그 친구는 또 저만큼 올라가버립니다. 욕망이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 고등학교만 들어가면. 온몸으로 영광을 돌리겠나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올라가니까 대학문은 더 높은 거예요. *주여, 대학에만 붙여 주십시오!* 대학 들어가니까 유학이 또 있어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욕망은 더 커집니다.
욕망이 없으면 살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유명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산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곧 그러한 옛 사람을 완전히 장사(葬事)지내는 것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다 하나님을 찬양하자. 우리가 코로 호흡한다고 해서 끝없이 올라가려고 하지 말고. 호흡하는 것들을 다 불러내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자. 구원의 하나님을 경배하자*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 세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넘으로써 애굽의 옛 생활과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음식과 반석에서 나오는 신령한 음료를 마시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냥 율법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임재 하셨을 때. 그들의 온 영혼이 뜨거워졌고 옛날에 가졌던 죄스러운 생각들이 전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천사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과 짐승들은 이 방주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세상의 죄악과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노아와 그 일행들은 방주에 함께 들어가서 물 위에 떠오른 것은 일종의 세례였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홍수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 배에 탄 채 물에 휩싸임으로써 세상의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방주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삶이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똑똑한 것 같지만 코로 숨만 쉬지 못하면 전부 다 죽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고 상상력이 출중해도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이 오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맙니다. 아무리 뛰어난 연구를 하다가도 죽음이 오면, 그 연구는 중단됩니다.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죽음이 오면 그만입니다. 사업을 한창 벌이다가도 죽음이 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이 오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사람은 코로 숨 쉬게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오면,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홍수가 와도 살 수 있는 길이 있고. 홍해가 가로막고 있어도 뚫고 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죽음이 와도 죽음을 뚫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연구원에서는 봄. 가을 두차례 대심방과 함께 세례식을 알리지만 침묵과 불통입니다. 물론 타 교회에서 세례를 한 번 받은(전 천주교 제외)성도는 다행이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분은 반드시 순종해야만 그리스도인이요. 직분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죄에 대해 철저히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더 이상 신(神)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온전한 도구로 나의 삶을 사용해야 합니다.
나의 욕망을 추구하고 내 가족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옛 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사는 삶은 코로 호흡하는 동안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철저하게 구별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밖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이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는 보이는데 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구별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을 버려야 이 길로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즉 내 자존심, 내 명예, 사람들이 내게 걸고 있는 기대를 버릴 때, 이 영원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원히 살고 싶지 않습니까? 죽음의 한계를 뚫고 영원히 이 기쁨의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옛날의 죄스럽던 나의 모습을 땅에 완전히 묻어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나면 안 돼요. 즉 내 자존심, 내 생각, 내 야망이 살아나면 안 돼요. 완전히 장사(葬事)지내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코로 숨 쉬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왜 그 코로 죄를 짓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세상에서도 유명해질 순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순 없습니다. 십자가로 들어가는 길은 이 세상의 욕망에 철저히 죽는 삶입니다.
죽어야 이 길로 들어갈 수 있어요. *나*를 완전히 버려야 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죽음이 와도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을 뚫고. 끝없이 연결되어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노아의 배와 같습니다.
아무리 홍수가 쏟아져도 이 배 안에 탄 사람이나 짐승들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또 이 길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홍해는 그들의 행진을 막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홍해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행진을 계속할 것이며, 죽음을 뚫는 기쁨의 예배, 기쁨의 생활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Ⅱ.새로운 삶의 특징
노아와 그의 일행은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담장을 둘러친 곳에는 그곳만의 특별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노아 일행은 밖에서는 볼 수 없는 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배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일까? 그것은 예배였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7:2-3절)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종(種)을 보존할 수 있는 암수 한 쌍씩을 노아와 함께 살 수 있는 기본 인원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짐승과 새들은 각각 암수 한 쌍씩밖에는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외로서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거룩한 짐승들이나 새는 일곱 쌍씩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였습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는 짐승과 새와 곤충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방주 생활의 중심이 곧 예배였습니다. 이 예배가 그들에게는 가장 기쁘고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예배 때마다 짐승이 죽었고. 짐승이 죽을 때마다 마음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짐승을 태울 때마다 하나님을 만날 희망을 가졌고.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들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입니다. 저는 예배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너무나도 형식적입니다. 저는 예배가 다섯 시간이나 여섯 시간, 아니면 열두 시간 정도 계속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난 후에는 찬양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또 찬양 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그것이 원래 예배의 모습입니다.
예배는 엄청난 기쁨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며, 나의 모든 무거운 짐이 다 해결되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하게 회복시켰다는 확신이 찾아올 때,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앉아서 찬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서 뛰면서 찬양하게 되지요. 앉아서 기도한다는 것도 불가능 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모여서 계속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립니다. 이것이 진짜 예배지요.
노아의 제사는 단순히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의식적인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방문하시는 때가 있었던 것처럼. 노아의 배 안에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우리는 잃어버렸던 존귀한 모습을 되찾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구박당하고. 먹고 사는 일에 찌들대로 찌든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완전한 영광의 모습이 회복되며, 왕의 모습이 회복됩니다.
사람들은 영광중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온 힘을 다 합니다. 그 기쁨을 찬양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이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싶을 정도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시간이 곧 예배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쁨이 곧 예배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에서 하나님과 만나면서 기쁨을 얻지 못하면. 절대로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밥도 먹고. 빨래도 하고. 학교생활도 하고. 직장생활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나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시며, 나의 일그러진 형상을 회복시키시는 이 예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과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이 예배에서 오는 것입니다. 노아의 배에 탄 사람들과 짐승들은 하늘의 엄청난 영광과 축복을 그 안에서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 시간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고 우리 안에 죄로 일그러진 부분과 먹고사는 일에 시달린 모든 부분을 다 치료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며,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영광의 모습을 주시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을 내 속에 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돈 버는 것으로 기뻐하고,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그러나 제일 큰 기쁨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과 영광과 존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다른 것으로 기뻐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예배에서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답답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배에서 이러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복된 시간이 곧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입니까?
만약 예배에 이처럼 감동과 충격이 없으며, 예배 시간이 가장 복스럽고 귀중한 시간이 되지 못한다면, 예배에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나의 자신감과 원래의 모습들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면, 나의 신앙을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예배도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예 이 새로운 길에 들어서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 길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생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장사에 찌 들고. 공부에 찌 들고 고부간의 갈등에 시달렸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만나면, 그 모든 것이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어떠한 기쁨과 존귀함도 예배 때.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과 존귀함에는 비교 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홍수로부터 구원받는 것도 기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기쁜 것입니다. 죽은 예배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내 속에 있는 불만과 불평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요.
욕심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의 정욕과 탐욕은 이 놀라운 기쁨을 전부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예배를 준비하게 하시고, 방주 안에서 하나님과 엄청난 교제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아마 방주 안의 생활은 바쁘고 불편했을 것입니다. 노아의 식구들은 짐승들에게 먹이도 주어야 했고, 배설물도 치워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여덟 명이 하기에는 엄청난 양이었을 것입니다. 또 시끄럽기는 얼마나 시끄러웠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배 때가 되면, 짐승들도 다 알고 기다립니다. 짐승들끼리도 *야, 이제 우리 그만 떠들자. 굉장한 시간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노아는 아들들과 함께 거룩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노아는 그러면서 식구들 앞에서 간단한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임재 하셨습니다. 좁은 배 안에서의 생활이나. 고된 하루가 아무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찬양에는 짐승들도 다 함께 참여 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배드릴 때, 아이들 때문에 어렵다고 하지만. 이건 아이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짐승들하고 같이 예배드리기는 더 어려워요. 짐승들이 아이들보다 더 떠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부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짐승들도 기뻐서 눈물을 흘렸을 것 같아요. 말들도 기뻐하고, 소들도 기뻐하고, 멧돼지도 *저의 찬양을 받으소서!*했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곳이 곧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버린 에덴동산이 이 작은 배 안에서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에덴동산 때도 짐승들이 짝을 지어 몰려와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피 흘리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아직 그 나라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노아의 방주 안에도 짐승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 흘리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죄에 빠졌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쁨과 감격은 더 컸습니다. 인간의 무서운 죄악을 다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더 크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주의 예배는 에덴의 예배를 뛰어넘는 감격과 눈물이 있는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염려와 걱정이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노아같이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2천 년 전에 흘린 그 피를 믿어야 합니다.
내 정신이나 생각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멍청하게 앉아 있거나. 시간이 나는 대로 졸면서 예배를 드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이 그리스도의 피를 온전히 의지하며 나왔습니다.* 해야 합니다. 찬송가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나올 때,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내 속을 완전히 뒤집어엎으시며, 상처로 무거웠던 내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비결입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 생각하며 방황하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안에 어떤 존귀한 것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며. 미련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이 *배설물(똥)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것에 매달리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가장 존귀한 것은 하나님께 다 있습니다.
왕의 진수성찬이 다 그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기쁨을 아는 자들은 죽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홍수로 죽었지만. 예배의 기쁨을 아는 자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고, 그들의 예배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내가 완전히 변하여 새로워지며, 나의 존귀함이 회복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멸망할 짐승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배에서 무엇을 누리며.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보면. 바로 그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상한 마음과 우리의 탐욕이 할퀴어 놓은 상처를 치료하시고 우리의 참된 존귀함을 회복시켜 주시며, 자신감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Ⅲ.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예배용 짐승과 그렇지 않은 짐승을 각각 거룩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하고 계십니다.
7:2-3절)너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노아 시대에도 모세 시대처럼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구별이 있었을까? 모세의 율법 특히 레위기에 보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이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주로 *먹을 수 있는 짐승이냐 아니냐.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수 있다 해서 다 제사로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는 짐승들은 따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나타나는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구분이 모세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식용의 개념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이 본문에 나오는 구별은 그런 넓은 의미의 구별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구별, 즉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노아에게 정결한 동물은 모세 때처럼 *먹을 수 있는 모든 동물이 아니라 *제사로 드릴 수 있는 동물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구분을 하셨을까? 그저 이스라엘 백성의 건강을 위해서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신 것일까?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으면, 콜레스테롤 치수가 높아져서 당뇨병이나 고혈압으로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짐승들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만, 사람은 어떤 것을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을 먹을 수 없는지 알고 있습니다.
죽어서 사람들의 음식이 될 수 있는 짐승이 있는가 하면, 죽어도 먹을 수 없어서 버려야 하는 짐승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먹을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예배로 드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짐승들이 다 같아 보여도 그중에는 홍수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이 있는가 하면, 노아 방주에 타서 구원받을 것이 있고, 그중에서 특히 하나님께 예배로 사용될 짐승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다 똑같아 보여요. 차이가 있다면, 피부색이나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 키, 롱다리나 숏다리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똑똑하고 일 잘하면,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짐승을 구분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굉장히 존귀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스스로 아무리 잘났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은 *멸망할 짐승으로 구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계십니다. 멸망용인지 구원용인지 다 구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도 거룩한 것이 있고. 거룩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구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지 않은 마음으로, 자기 욕심으로 하는 것은 모두 다 추잡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방주에서 나와서 또 이 세상의 죄 성과 싸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곧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다 거룩한 것이 아니며, 다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은 아닙니다. 정욕으로 그 일을 하면 죄가 됩니다.
그 일은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며, 마음속에 있는 총명을 더 어둡게 할 것입니다. 정욕으로 어떤 일을 하면, 생각이 어두워집니다. 한번 욕심으로 살면 총기가 갑자기 어두워져요.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는 거룩한 경계선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돈 안 든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면, 완전히 총기가 어두워져 버립니다. 또 볼 것이 있고 보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해서 보면 안 될 것을 보면, 가장 중요한 예배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불꽃이 한번 식으면, 다시 피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기쁨이 한번 없어져 버리면, 다시 생기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돈도 받아야 할 것이 있고, 받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직업도 가질 것이 있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 때문에 거룩한 것을 버리고, 부정한 것을 택하면, 내 속에 불타오르고 있는 예배의 기쁨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이 기쁨의 불씨를 꺼뜨려서는 안 됩니다. 주의하십시오. 마음을 지키십시오. 내 마음에 부정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욕심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잃었더라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쁨을 찾은 사람은 죽음을 뚫고 나아갈 것입니다. 홍수가 쏟아져도, 홍해의 물결이 덮쳐도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기쁨이 회복되게 하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내 마음에 있는 아픔과 서러움과 답답함을 전부 다 씻어주시고, 나의 존귀함을 회복시켜 주실 때, 우리는 뛰면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 믿는 사람들의 삶보다 더 비참해집니다. 이 세상에서도 당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능력 받지 못한 채.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일 예배하는 기쁨과 하나님을 만나는 존귀함이 계속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있을 때, 죽음도 우리의 기쁨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찬송가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6월 5일(주일 예배)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주 중 감동받은 양식 재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를 ▽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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