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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압살롬 상봉
삼하 14:28-33
28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 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31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삼하 14:28-33 / [압살롬에게 입맞추는 왕]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자기 부친을 만나지 못하고 산 지가 이미 2년이나 되었다. 29) 그래서 압살롬은 우선 요압을 불러 왕에게 보낸 뒤 자기의 요구를 전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요압이 오지 않았다. 그가 또 한번 심부름꾼을 보내어 요압을 불렀으나 이번에도 요압이 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30) 그러자 압살롬은 자기의 종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요압의 밭이 바로 내 밭 곁에 있고 그 밭에는 지금 보리가 익어서 고스러졌으니 너희가 가서 불을 질러라.' 그의 종들은 상전의 명령대로 밭에 불을 질렀다. 31) 그러자 요압이 당장에 압살롬에게로 달려와서 따졌다. `어째서 이 집 종들이 내 보리밭에 불을 질렀소?' 32) 압살롬은 이때를 놓칠세라 벌써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나는 누차 그대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번 들러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대가 번번이 거절하였소. 나는 그대에게 임금님을 찾아가서 내 말을 한가지 전해 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소. 그러니 이제 가서 내 말을 전해 주시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그술에서 돌아와 있게 되었습니까? 차라리 내가 그곳에 그냥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습니다.' 내가 일단 이곳에 와 있는 이상 임금님을 뵙고 싶소. 내가 죽을 죄인이라면 임금님께서 이제 나를 죽여도 좋소' 33) 요압은 왕에게 가서 압살롬이 부탁한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그러자 왕이 자기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압살롬이 왕 앞에 나가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 절을 하자, 왕은 두 팔로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년이나 다윗 왕을 만나지 못한 압살롬은 선처를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다윗 왕을 만나려 합니다.
요압을 찾는 압살롬(28-30) 요압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압살롬은 2년 동안 다윗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을 그술에서 데려오기 위해 드고아의 여인까지 동원하며 애를 썼던 요압이 중재에 나서지 않는 것은 의아한 일입니다. 더욱이 압살롬이 중재를 위해 요압을 두 번이나 불렀는데도 요압이 이에 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압살롬이 더 이상 자기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겨 요압의 마음이 바뀌었거나, 아니면 다윗의 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압살롬을 위한 중재에 나서기를 꺼려했을 수 있습니다. 요압의 태도가 분명해지자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압살롬이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동원할 수 있는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요압을 만난 압살롬(31-32) 압살롬의 극단적인 방법은 효과를 보았습니다. 결국 요압과 압살롬의 대화가 성사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 왜 자기를 그술에서 데려오게 했는지 다윗 왕에게 묻게 하고 만일 자기에게 죄가 있으면 자기를 죽여 달라고 다윗 왕에게 말하게 합니다. 압살롬은 아직 자신의 범죄가 얼마나 극악한 것인지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지금의 일이 부당하고 가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윤리관일 수 있습니다. 그가 인정하든 않든 압살롬은 마땅히 받을 벌보다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압살롬의 마음은 여전히 겸비하지 못했고 그의 교만함은 억제되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신앙인은 고난 중에 더 겸손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압살롬을 만난 다윗(33) 요압은 압살롬의 부탁을 성공적으로 실행합니다. 압살롬은 왕궁에 나아가 다윗 왕 앞에 엎드려 절하며 대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다가가 그에게 입을 맞추며 화해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회복되고 화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마음 속에는 감추어진 분노와 미움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언젠가 폭발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를 찾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잠시 평화를 위해 잠깐의 고통과 아픔을 피할 때, 더 큰 아픔의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적 용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고자 할 때 때로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고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자신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더 사랑하십니까? 과감히 결단한 적은 있습니까?
오늘 압살론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의도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것이든 올바르지 않은 것이든 자신만을 생각하는 모습이 압살롬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성공, 나의 삶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지 않나요? 우리는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 세상에서 보기엔 미련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입니다. 오직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집중하고 순종해가는 주의 자녀가 되길 소원합니다.
< 설 교 >
죄인이라면
지금까지 여러분은 ‘죄인’이라는 말에 대해 수없이 많이 들어오셨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님의 은혜를 말하기 위해 죄를 언급하기는 해도 사실 ‘죄인’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왠지 피하려고 하는 것을 보기도 하지만 죄를 말한다면 죄의 본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즉 죄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할 것이며, 분명 그것이 신자로서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로 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낮춤으로서 자신의 의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죄인 됨을 아는데 너는 왜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느냐’는 식으로 죄인임을 안다는 것을 자신의 정당성을 꾀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곧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았다는 의미가 되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면 그에 따른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인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면서도 정작 죄인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인다면 그가 진심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압살롬이 다윗을 만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내용입니다. 28-29절을 보면 “압살롬이 이태 동안을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사람을 보내어 부르되 오지 아니하고 또다시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압살롬이 왕 다윗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한 것이나, 돌아오게 하였으면서도 그 얼굴을 보지 아니한 것이 자식에 대한 어떤 갈등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죄로 인해 다윗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즉 다윗이 자신을 보고자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다윗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이 범한 죄를 생각하면 감히 다윗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윗의 얼굴 보기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죄를 범한 죄인이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있으며 죄인이라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말하고 죄인임을 인정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죄를 알고 있으며 자신의 죄인 됨을 진심으로 보는 자로서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압살롬이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다면 다윗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죄인 됨을 안다면 감히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처지임을 아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임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죄인 됨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그는 자신에 대해 그 무엇도 하나님께 나갈 조건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소위 선한 일이라는 것을 하면서 그것을 의로 삼아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을 과연 자신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 죄인 됨을 안다면 그는 자신에게서 하나님께 내어놓을 것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덮어주고 가볍게 해 줄만한 것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이 의인이라고 칭송을 할 만한 일을 행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죄인임을 아는 신자에게서는 결코 자기 자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타인의 신앙에 대해 자기 멋대로 판단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데 죄인인 주제에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을 알기에 남을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됨을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요압이 오지 않자 압살롬은 술수를 부립니다. 30-31절의 “압살롬이 그 종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놓으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놓았더니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와서 압살롬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놓았느냐”는 것을 보면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놓아 요압이 압살롬을 찾아오도록 합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윗을 만나겠다는 압살롬의 고집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압살롬은 왜 이토록 다윗을 만나고자 할까요?
15장에 보면 압살롬이 반역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반역을 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다윗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득을 위해 다윗을 만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압살롬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아우성들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기도 하고, 그것도 단순한 기도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여겼는지 기도원이라는 곳에 파묻혀서 40일 금식기도라는 것을 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을 만나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존재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죄인이라고 하면서 기를 쓰고 하나님을 만나야겠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죄인임을 모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제일가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외모를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이라는 본질 앞에서 인간의 모든 면과 조건이 무너짐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조건을 가졌다 할지라도 멸망의 대상인 죄인이라는 선언 앞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뛰어난 인물 조건, 선행으로 죄인이라는 선언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죄인이십니까? 진심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보신다면 ‘죄인이라면 어떻게 사는가?’라는 생각을 깊이 해보시기 바랍니다. ’죄인다운 모습이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우리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은총을 속에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자랑이 있고 자기 의를 높이고 판단과 비판이 있으면서 자신의 죄를 안다고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의 은총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안다고 한 그 모든 것은 나의 속 심령에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인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은혜만 말하는 것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죄인임을 열심히 외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죄인임을 말한다고 해서 자신을 신자로 여기기보다는 죄인이면 죄인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필히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는 아들의 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러한 은총을 입었습니다. 신자는 이 은총을 증거하고 자랑하고 선포할 존재인 것이지 누군가를 판단할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곧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음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긍휼을 입었다고 하면서도 긍휼이 없는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죄인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인에게 베풀어진 은총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죄인답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3절을 보면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 말을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저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고 말합니다. 다윗과 입을 맞추는 압살롬은 속에 반역을 품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자신의 죄를 생각했다면 다윗의 입맞춤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부르시고 입을 맞춰주는 것에 대해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에게 이것이 없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죄를 본다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입맞춤에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며 하나님의 입맞춤 앞에 있으면서 그 속에 자신을 위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예수를 말하되 그 속에 예수님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는 신자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그 마음은 예수님에게로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예수님의 은총이 아니면 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멸망의 존재임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참으로 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세상 그 무엇도 자신을 죄에서 건져내고 해방시켜주고 자유를 얻게 할 능력이 없음을 알기에 세상의 것도 무가치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런 신자가 세상의 조건, 외모를 내세워 약자를 무시하고 강자로서 군림하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게 믿으십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아는가를 보려거든 죄인답게 사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입게 된 예수님의 은총을 아십니까? 내가 은총을 아는가를 보려거든 죄인답게 사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무모한 짓
사무엘하 14:28-33
용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인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용서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의 가치됨을 유지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동네에서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한 한 여인이 울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당시 여자에게 있어 향수란 곧 ‘힘’을 의미입니다.
자신의 지탱할 수 있는 힘 말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용서의 의미를 알고부터는 자신이 이 힘을 소비할 자격이 없음을 알고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힘의 낭비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용서의 중심 인물로 놓고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이로서 용서를 받은 자에게는 용서가 나오고 용서받지 못한 자에게는 힘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요압 장군이나 압살롬에게 있어 다윗의 존재란 단순히 ‘나 보다 더 많은 힘 가진 자’라는 의미 뿐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 자랑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왜 이 성경에 나와야 할까요?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4에 보면,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윗의 혈통이란 ‘죄인의 덩어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덩어리에 들어오셔서 그 죄의 능력에서 빠져나가시므로서 영생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죄인 속에서 영생이 들어있는 형식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형식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그리고 다윗의 언약이란 죄인 속에 생명이 들어있는 식으로 이 땅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라는 분은 왕입니다. 왕이란 사람들 속에서 뽑히는 겁니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은 곧 거기서 뽑힌 왕도 죄인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필히 ‘죄로 인한 죽음’을 유일한 근거로 해서 성립됩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구태어 예수님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그토록 죄인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산상설교나 물위를 걸으시는 그런 기적으로도 구원이 되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베드로 같은 경우에 그는 직접 물 위를 걸어본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이 결코 베드로에게 구원을 주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물 위를 걸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됨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그는 자력으로 죄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죄에서 빠져나오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되심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났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고린도전서 15:17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사는 것이 없었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짓에 해당됩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을 통해 넣어주셨습니다.
따라서 힘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다윗은 힘을 제공하는 자로 오인하게 되고, 용서를 원하는 자에게는 다윗을 용서의 바탕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밧세바요 그의 아버지는 우리아입니다. 이 구조는 죄인과 그 죄로 인한 피해자 구조로 짜여져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용서라는 것이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죄가 뭔지도 드러나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압살롬은 용서보다는 힘으로 버틸려는 사람입니다. 즉 힘을 얻기 위해 죄인인 척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오는 정죄가 사라지고 자신이 내심 노리고 있던 힘을 여전히 얻을 수 있는 자격자로서의 복귀된 신분을 얻고자 합니다.
이점은 오늘날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합니다. 사람들이 ‘죄 지었다’의 의미는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이 빠지는 경우를 통해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러다보니 힘이 빠지지 아니하면 자신은 결코 저주받을 자가 아니요 축복받아 누리고 있는 그런 신분자라고 여기게 됩니다. 즉 제대로 ‘죄인’의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가진 힘이 다 날아가버리게 되면 그제사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굴어야지만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재앙이 자기에게서 아무 탈없이 어물쩍 넘어가리라고 여깁니다.
압살롬은 세상의 권력의 구조를 자기 위주로 배치하려고 합니다. 최고의 힘을 마저 갖지 못해서 안달났습니다. 자신이 왜 죄인 중에 괴수인가를 아는데 안달이 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남들에게 밑지고는 못 살겠다”는 열의뿐입니다. 용서받을 죄라는 것은 자신에게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있어 용서받을 일이란 잠시 더 힘 앞에서 굴복하는 굴욕감을 견뎌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이라는 구원자, 용서하는 자를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 관림자의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관찰할 수 있는 제 3의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5:31-33에 보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란, 왼편, 오른편을 바라볼 수 있는 제 3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고 그 모든 피조물을 왼편 아니면 오른편, 오른편 아니면 왼편으로 분류될 대상이다는 사실을 알리는 위치입니다. 즉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는 인간이 스스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재판정에는 방청객들이 있지만 하늘나라 재판정에는 일체 방청객들이 없이 모두가 피고석에 있을 뿐입니다. 압살롬은 그가 생각하는 ‘힘으로 통치하는 차기왕’의 입장을 요압 장군을 통해서 시험해봅니다. 실제적인 힘 발휘에서도 요압 장군을 능가하는지 건드려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힘과 용서의 갈등이 여전히 우리 성도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두게 하시고, 지금 나를 위한 힘이 얼마나 되는지 관심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출처: https://crossvillage.tistory.com/227 [십자가마을:티스토리]
아버지의 용서를 알았다면...
삼하14장 28-33 / 조영식 목사 / 김포한신교회 http://kimpohansin.onmam.co.kr/
인생은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한 것처럼 보입니다(33절).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화해였을까요? 이후에 이어지는 압살롬의 반란을 보면은 진정한 화해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결과를 알고 있기에 그를 너무 패륜아로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그런 길을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아버지 다윗의 책임은 없었을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아버지 탓만 하기에는 무언가 허전함이 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과 화해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란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궁극적인 이유를 통하여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관계 형성
압살롬의 행동을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다윗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첫째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성폭행 하였을 때나 압살롬이 누이 다말에 대한 복수로 암논을 죽였을 때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암논의 죽음은 잊어져 가고 도망친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5년 동안 전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이런 다윗을 우유부단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다윗의 유형은 방임형 아버지에 해당합니다. 방임형의 아버지는 자녀들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칭찬도 꾸중도 하지 않으며, 자녀들을 상대해 주지도 않습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며, 제 멋대로 행동하고, 반성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으며, 기존의 권위에 반항합니다. 압살롬에게 이런 성향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압살롬은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결정하여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 반란도 일으키며, 자신의 멋대로 행동한 일에 대해 전혀 반성하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백주대낮에 아버지의 후처들을 성폭행하는 부도덕한 행위도 서슴없이 하고, 기존의 권위에 반항하여 아버지를 상대로도 반란을 일으킵니다.
방임형의 반대 유형인 과잉보호도 문제입니다.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극도로 희생하고, 모든 일을 대신해서 해주고, 징계하기 두려워서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독립성 결여로 사회적응이 어려우며, 안하무인격의 버릇없는 행동을 합니다. 또한 부모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변명만 일삼는 무책임한 인간이 됩니다. 강압적인 부모와 그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부모의 눈에 자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녀의 결점을 찾아 비난조의 훈계를 합니다. 또한 부모의 의사나 결정을 자녀에게 따르도록 강요합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욕구불만이 늘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됩니다. 또한 무슨 일을 할 때 자신감이 없으며, 불안과 염려와 실수에 대한 강박경향이 있습니다. 배척하는 부모와 그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부모가 자녀들을 감정적으로 대하고, 자녀들을 무시하기가 일쑤입니다. 또한 자녀에 대한 스킨쉽이 거의 없으며, 평상이 관심이 없다가 때로는 지나치게 화를 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주위 사람과 화합하지 못합니다. 또한 애정에 굶주려 있으며, 공격적인 행동과 비행을 저지릅니다. 편애하는 가정의 자녀들은 질투심이 강하고 자녀들 간에 경쟁심이 많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뿌린 씨앗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좋은 씨앗들을 뿌리며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2.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결과이다.
어떤 부모님을 만났더라도 주님을 믿으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압살롬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될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과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변화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이 누이 다말의 복수로 이복형인 암논을 죽이고, 외할아버지 그술 왕의 집으로 도망친 3년의 기간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2년 동안 아버지 다윗을 대면하지 못하였습니다(28절). 왜 압살롬은 5년 동안 아버지 다윗 왕을 대면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아무리 아버지 다윗을 만나고 싶더라도 자신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만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진정한 회개 없이는 왕이 되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대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을 보고자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고 합니다(32절). 압살롬처럼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죄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다고 죄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압살롬처럼 왕이 되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 재산 절반을 탕진하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둘째 아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와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화해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15:21). 정말 압살롬과 대조를 이룹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만났지만 죄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처리되지 않는 죄는 상황과 조건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가 없는 화해는 거짓 화해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을 때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알았다면...
압살롬의 처리되지 않는 죄는 결국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패륜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이 자신을 향하여 무조건적으로 용서했다는 마음을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너무나 큰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 왕에게로 도망칠 때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는 마음속에 용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삼하13:37절). 다윗의 용서한 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에 드러납니다(삼하13:39). 아버지 다윗왕은 아들 압살롬을 이미 사랑으로 용서하고 또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변함이 없고 일관성이 있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 상항에 따라서 다시 예전의 감정이 나타나는 것은 진정한 용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용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고 일관성 있게 나타납니다. 다윗 왕이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과 전쟁 중에도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합니다(삼하18:5). 다윗은 나중에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슬피 울었습니다. 그가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라고 합니다(삼하18:33). 이것이 자신의 큰 아들을 죽이고, 자신에게 반역하고, 자신의 후궁들을 범하고, 자신을 죽이려 한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용서의 반응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압살롬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일관되게 용서를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정말 아쉬운 것은 압살롬이 이런 아버지 다윗왕의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도 아버지랑 참으로 어려운 관계였습니다. 그로인해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면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자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도 저를 향하여 ‘이런 사랑을 주셨구나!’ 라는 마음이 들면서 부모님과 화해의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압살롬과 같은 동일한 우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윗보다도 더 놀라운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고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다윗이 아무리 용서를 하였을지라도 아들 압살롬이 회개하지 않으면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용서를 이루었을지라도 우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치와 동일한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주님의 놀라운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아버지의 마음
삼하 18:28-33
작년 9월경 인터넷에서는 작자 미상의 '아버지란 누구인가?'라는 글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습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아서 아버지의 마음이란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그 글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아버지란 누구인지를.....
아버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땐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땐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괜찮아"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직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여보!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텐대...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려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배 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 안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부모는 하나님의 그림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인간이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시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하나님을 닮은 사랑을 담아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그림자처럼 보게하고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여러종류의 사랑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사랑, 혹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 어떤 뜨거운 남녀간의 사랑도 어머니의 사랑이야기만큼 눈물겹고 기슴시리지는 않습니다.
지난주간 한 일간신문에 소개가 되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101세 할머니의 사랑도 역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광주시 북구 우산동 13평짜리 주공아파트에 사는 올해 101세된 박옥량 할머니는 1930년대에 중학교 교편을 잡을 정도로 인텔리여성이었습니다. 그런 할머니에게 1935년생인 딸이 하나 있었는데 올해로 68세된 조의순 할머니입니다. 이 조의순 딸이 네 살이던 1939년 집에서 의순이를 보던 가정부가 잘못 실수로 땅에 아이를 떨어뜨렸는데 머리와 목을 심하게 다쳐서는 그만 전신마비 불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남편마저 다른 여자를 얻어 나가버리고 이 박 할머니는 혼자서 이 딸을 키우게 됩니다. 그후로 오늘까지 무려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할머니는 혼자서 오직 이 딸의 손과 발이 되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말이 64년이지 한 사람의 평생보다도 더 긴 세월을, 오로지 마비가 된 딸의 수발노릇만 하며 지내온 것입니다.
그 세월동안 딸의 손발 노릇을 하느라 이 어머니는 늙을 틈도, 아플 여유조차도 없었습니다. '내가 아프면 이 딸의 수족노릇은 누가 하나?' 하는 염려때문에 어머니는 마음놓고 아플 수 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늙고 또 늙어서 올해로 101세가 되었습니다. 온 몸이 마비되어 하루종일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 딸을 두고는 이 어머니는 죽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전설같은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언제나 가슴을 찡하게 하고,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몫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완벽하지 못합니다만 그러나 아버지로서, 혹은 어머니로서 자식을 향해 쏟아붓는 사랑에 있어서는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싶은 완전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부모들을 통해 보여주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아버지로서 다윗왕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29절 말씀을 볼까요? "소년 압살롬은 잘 있느냐?"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아버지 다윗을 내어쫓고 죽이겠다고 군사를 풀어 추적을 하고 있던 때 였습니다.
압살롬은 원래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압살롬은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하고 오히려 역모를 꾀하고, 군사를 모집해서는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역모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격분합니다만, 그러나 그 역모의 주동자가 다름아닌 아들 압살롬이란 말을 듣고는 아무 소리없이 짐을 싸들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과 싸울 수는 없다, 차라리 왕 자리를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이것이 아버지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피난가는 길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다윗을 조롱하고 모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 몸에서 나온 아들도 나를 죽이려 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하는 모욕을 내가 어떻게 막으랴' 하고는 묵묵히 그 욕을 다 먹고 맙니다. 자식의 존경을 잃었는데 다른 사람이 하는 모욕이 무어 그리 대수롭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의 존경을 잃었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흔히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왜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힘이 없습니까? 지혜가 모자랍니까? 경험이 없습니까?
어느 것을 보아도 부모가 자식에게 질 이유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마음을 아프고 상하게 해서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이 부모에겐 없는겁니다. 차라리 지고 양보하더라도 자식의 마음만은 잃고 싶지않고, 자식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이기고 싶은 것이 부모에게는 없기 때문에 부모가 지는겁니다.
그것을 자식들은 모릅니다. 그저 제가 잘나고 제가 똑똑해서 부모를 이긴줄 알지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모르는겁니다. 그래서 기고만장합니다.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내 말에는 꼼짝도 못해" 다른데서는 꼼짝 못하는 자식도 부모앞에서는 큰소리를 치고, 대단한 것처럼 폼을 잡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줄 몰라요.
디윗이 쫓겨가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거인 골리앗을 이긴 다윗입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살아온 백전노장 다윗입니다. 그런 다윗이 힘이 없어서 쫓겨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상대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앞에 두고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바로 아버지요 부모의 마음입니다.---(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러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앞에서 한없이 약하십니다.)
그후에 압살롬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불가피하게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전장으로 나가는 장수들에게 이런 부탁의 말을 합니다.
삼하 18장 5절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부탁이 있을 수 있습니까? 국가의 반역을 꾀한 역적이고,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죽이려고 달려든 패륜아입니다. 그런 압살롬과 싸우러 나가는 장수들에게 기껏 하는 부탁이 '나를 봐서 너그러이 대하라'
압살롬 사건에서 다윗이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 '소년 압살롬'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 장정을 가리켜 '소년'이라고 끝까지 호칭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눈에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은 아직도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리디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해하려는 패륜아가 아니라, 보호를 받고 용서를 받아야할 철부지 소년의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되는 죄악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시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로 단지 형식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친아들과 같은 사랑을 쏟아부으십니다.
그래서 혹 우리가 범죄할 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의 눈으로 보십니다. 징계하고 죽어 마땅한 죄인이 아니라, 아직 연약하고, 아직 잘 몰라서 그릇되게 행하는 자녀를 긍휼의 눈으로 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당신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징계가 아니라 은혜를 베푸십니다. 심판이 아니라 깨닫고 돌아오도록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를 불문하고 용서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나를 봐서 압살롬을 살려놓으라...고 호소하는 다윗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다하고서 '잘못했습니다 아버지'...하고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도록 꼭 살려주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었습니까?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징계의 매를 멈추게 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겁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기다리는 겁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분명히 죄를 짓고 말씀을 어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이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사악함을 보시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의 연약함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늘아버지의 은혜가 임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안 살아도 잘되는줄로 착각하지 말고, 속히 용납하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앞에 달려 나아가,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하십시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가장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어도 "잘못했습니다, 아버지"하는 회개의 말한마디에 모든 진노가 풀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마지막 장면을 봅시다. 전투의 결과를 가지고 달려오는 전령에게 다윗이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이 무엇입니까? 29절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여기에 사랑에 눈먼 아버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정권의 운명을 건 대 전투의 결과를 알려주러온 전령에게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전쟁의 승패가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큰 승리를 거두었는가?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전령에게 물은 제일 첫 질문은 어처구니없게도 '반역자 압살롬의 생사'였습니다.
첫번째 전령이 그 대답을 못하자 두번째 달려온 전령에게 다윗은 다시 한번 묻습니다. 32절
성도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큰 일을 하는가? 하는 것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얼마나 위대한 헌신을 하고, 얼마나 주목받을 만한 일을 하는가? 이것들은 하나님의 나중관심사입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위를 염려하십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받는 아픔과 상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괴로움의 문제, 내 사랑하는 아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아파하는지, 얼마나 고통속에서 신음하고 있는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믿음을 지키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견디어 가고 있는지....하나님은 이런 일에 온 마음이 먼저 쏠리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앞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들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위와 행복한 삶에 얼마나 온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는지 아십니까? 복음송 가사에 이런게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며,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어느 때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인자한 귀를 너에게 기울이고 계시다가 작은 고통의 신음소리에도 벌떡 일어나서 그 작은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라...고 노래했습니다. 자식의 고통소리 신음소리에도 벌떡 일어날 만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믿으십니까? 이 사랑을 믿고 지금 의지하고 있습니까? ...............
33절 이하를 봅시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버지 다윗은 통곡을 합니다. 그의 울음소리를 들어봅시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아들의 죽음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는 울었습니다. 통곡을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도, 이제 왕권을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도 그에겐 하나도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아들의 죽음앞에 정신을 잃고 통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내가 대신 죽었더면...내가 대신 죽었더면..."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 사랑의 절정입니다. 고통받는 자식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의 절대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영원히 저주받는 죽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친히 고난의 현장으로 찾아오셔서는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었던 저주의 십자가를 직접 자원해서 지심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을 대신해서 실제로 죽어주셨습니다.
오늘 죽은 압살롬을 대신해서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하고 통곡하고 몸부림치는 다윗의 마음이 바로 이 땅의 범죄한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어버이의 사랑에 순종과 공경으로 반응하라, 보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아, 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어버이의 사랑에 순종하고 공경할 때 하나님은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인정하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버이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어버이의 사랑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마음을 다해 순종하고 있습니까, 정성으로 공경하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 사랑과 공경을 나타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앞에 부끄러움이 없게 살고 있으십니까?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은 숭고하고 거룩한 마음이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양육해 온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께 최고의 감사를 드리기를 결단합시다. 순종하고 공경하며 살기를 새롭게 다짐하십시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오늘 젊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에게 쏟는 사랑의 절반, 아니 그 절반의 절반 만큼이라도 그 부모님들에게로 향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 노인문제의 90퍼센트는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순종과 공경이 사라진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닮은 어버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마음에 순종과 공경으로 보답함으로 이 세상과 구별되고, 영원한 어버이이신 하나님께 까지 영광과 찬송을 돌려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