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번째 월요편지 - [재미 있는 삶], [의미 있는 삶]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잡지 한 권이 집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제목은 <IPKU(입구) MAGAZINE>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고려대 전 철학과 조성태 교수님이 고심하여 만든 잡지입니다.
제가 이사로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후원한 관계로 탄생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창간호가 반가웠습니다. 22편 글 중, 발행인 조성태 전 교수님의 글을 먼저 읽어 보았습니다. <내 삶의 운전석에 누가 앉아 있는가>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는 글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인생 주제들인 '인간' '사랑' '자아' 등에 대해 그 본질을 추구하고 실체를 묻는 'X란 무엇인가'의 질문 방식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이상적인 모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필요하고 또 유용하다. 만약 제대로 된 답이 있다면, 내 일상을 비춰볼 거울, 내 인생을 정향하는 북극성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듣던 질문입니다. <의미 있는 삶>이라는 표현에서 긍정심리학의 주장들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먼, 베스트셀러 <해피어>의 저자 하버드대 탈 벤 샤하르 교수,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장 최인철 교수 등은 이구동성으로 행복한 삶이란 <재미와 의미의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조성태 전 교수님이 말한 <의미 있는 삶>은 <재미 있는 삶>과 늘 한 짝이 되어 움직입니다. 저는 이 설명을 그동안 아무런 의미 없이 받아들였고 월요편지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여행 과정에서 이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의미>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은 자신의 경험, 문화, 가치관, 신념 등을 통해 세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합니다.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도 다 다르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의미>는 실재하는 것일까요. 상상의 소산일까요.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이라는 표현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시대, 국가, 종교에 따라 <의미 있는 삶>은 지금 우리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일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종교에서는 우리가 이해 못 할 일들이 <의미>의 이름하에 무수히 벌어졌습니다. 중세의 마녀사냥,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이슬람의 자살폭탄조 등도 그들의 <의미> 속에서는 정당했습니다.
정치집단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 정치의 양 진영도 그들 나름의 <의미> 있는 이유를 대고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지를 호소합니다.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이 절대적 기준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의미 있는 삶>을 쫓는 행위 자체가 훗날 보면 너무 허무한 것으로 드러나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20대에 의미 있던 것이 40대에 보면 허무하고, 40대에 의미 있던 것이 60대에 보면 보잘것없으며, 지금 제 나이에 의미 있는 것이 죽을 때 보면 소용없는 일이라면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까지>라는 책에 나오는 것들은 다 젊어서는 덜 의미 있는 일들인데 죽을 때 보니 정말 의미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다른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의 일부인 모세 5경은 바빌론 유수(기원전 586년경) 때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 성직자들이 이전의 구전과 기록들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이 유력한 정설입니다.
포로 생활이라는 힘든 생활을 하면서 언제 올지 모르는 해방의 시기를 바라보고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쓰인 책입니다.
그들이 쓴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가장 행복 삶'은 <에덴동산에서의 삶>입니다. 그 삶에는 공부도 일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재미>만 있었습니다. 포로 생활을 하던 성직자들은 왜 이런 삶을 꿈꾸었을까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런 삶이 좋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이런 삶을 누릴 수는 없지만 당시 포로 생활을 하던 성직자들이 모세 5경이라는 책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장대한 의미 부여를 하면서도 그들이 그린 인류 최고의 삶은 <의미>는 없고 <재미>만 있는 삶이었습니다. 참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의미> 있는 삶이 최상의 삶이라고 생각했으면 에덴동산의 삶을 "학자들이 매일 공부하고 토론하며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삶"으로 그렸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이 했다는 경연 같은 삶 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조찬 공부 모임 같은 삶 말입니다.
그러나 <의미> 부여에 통달한 성직자들은 <의미>가 아닌 <재미> 있는 삶을 이상향으로 그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재미> 있을 때는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재미>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삶이 힘들 때, 우리는 그런 삶 속에서도 <의미>를 찾습니다. 이 능력은 호모 사피엔스만 가진 고귀한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이용하여 인류는 힘든 시기를 지내왔습니다.
나치 포로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유명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의미>라는 무기가 없었으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의미>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인류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가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 즉, "의미 부여 능력" 덕분입니다.
다만 <재미>에 에덴동산에서 가졌던 지위를 되돌려 주자는 것뿐입니다. 에덴동산은 <재미> 그 자체였습니다. 이번 여행지에서 들린 호텔, 리조트, 골프장 등은 바로 현대판 에덴동산이었습니다.
<행복한 인생>이란 상황이 좋으면 각자의 형편에 맞게 현대판 에덴동산에서 <재미>를 찾고, 상황이 어려우면 <의미>라는 뗏목을 타고 고난의 강을 건너는 것 아닐까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조성태 전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 있는 삶>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만 그 비중만큼 <재미 있는 삶>도 제 자리를 찾았으면 합니다.
또 하나의 바램은 우리의 관심이 <의미>보다 <재미>에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재미> 있으신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4.3.4. 조근호 드림
<즈근호의 월요편지>
첫댓글 " <행복한 인생>이란 상황이 좋으면 각자의 형편에 맞게 현대판 에덴동산에서 <재미>를 찾고,
상황이 어려우면 <의미>라는 뗏목을 타고 고난의 강을 건너는 것. "
이 글이 가슴에 와 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