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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곽가장은 장원(壯元)이 아니라 성(城)이라고 표현해야 옳았다.
담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 족히 한 시진이 소요된다는 말이
들릴 정도로 겉모습부터가 웅장하고 호화로웠다. 운남(雲南)에
서 나눈 대리석(大理石)으로 쌓아올린 석벽은 높이 이(二) 장
(丈)에 달했고, 길이는 재어볼 수도 없었다.
구양순체(歐陽詢體)로 쓰여진 곽가장이란 글씨는 점(點)과 획
(劃)이 완벽했다. 거리낌없고 운필(運筆)이 활달한 글씨. 곽가
장주가 직접 썼다 하니 그의 학문을 짐작하게 하는 글씨였다.
사두마차가 넉넉히 통과할 만한 정문(正門)은 현판(懸板)과 썩
잘어울려 곽가장의 위세를 드높였다.
반여량은 습관적으로 장원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정문 안에 있는 연못, 그리고 저택 뒤에 있는 가산(家山).
현무(玄武) 격인 곳에서 흘러 나온 물이 왼쪽으로 흐르니 청룡
(靑龍)이요, 물이 장원 앞 연못으로 모여드니 주작(朱雀)이라.
오른쪽으로는 관도(官道)가 이어졌으니 백호(白虎).
집을 짓는 데 최적의 터였다.
양택(陽宅:사람이 사는 집)을 짓는 데는 다섯 가지가 고려된
다. 배산면수(背山面水), 좌북조남(坐北朝南), 전저후고(前低
後高), 배수(排水), 오행상생(五行相生).
곽가장은 어느 한 구석 어긋난 곳이 없었다.
배산면수.
뒤에 산이 있으니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연못은 산으로
부터 흘러 나와 땅을 타고 흐른 기를 모아 준다. 사람이 큼지
막한 벽에 등을 기대고 쉬고 있으며, 그 앞에는 활력을 되찾게
해줄 음식이 차려져 있는 형상. 편안해 보인다. 정신도 안정되
리라.
좌북조남.
남향의 햇빛이 두루 비춘다. 겨울에는 한기를 막고, 여름에는
생기를 모아들이는 장소.
전저후고,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면서도 경사가 완만하다.
지반이 두꺼울수록 생기가 많이 쌓이는 법. 또한 지표(地表)가
건조하고, 배수가 편리하다. 수목(樹木)은 왕성하게 자라 말라
비틀어진 흔적을 볼 수 없다.
최적의 저택을 짓는 다섯 조항 중 남은 것은 오행상생뿐이었
다.
사는 사람과 저택의 방위가 맞아야 한다. 하지만 곽가장주의
생년월일을 알지 못하는 한 그런 것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틀림없이 오행상생도 맞을 것이다.
풍수는 세(勢)로 시작해서 형(形)으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방
위는 그 다음. 물론 이런 나집(邏輯:논리)을 거부하는 감파(堪
派)도 있지만 반여량은 확신했다. 방위는 시각(視覺)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부수적인 요건에 불과하다는 사부의 가르침을.
곽가장은 생기(生氣)를 흠뻑 받는 곳에 세워졌다.
"들어가자."
몸집이 우람한 장한이 거리낌없이 앞장섰다.
반여량은 그를 따라가면서 장원 구석구석을 세밀히 훑어보았
다. 그는 늘 죽음과 더불어 살았다. 시신을 염(殮)하는 것에서
부터 마지막 제(祭)를 올리고 지전(紙錢)을 사르기까지 일일이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사람들은 죽음이 있을 때만 그를 찾았다. 장의(葬儀)란 다 그
런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곽가장은 상(喪)이 난 것 같지 않았
다. 음울한 분위기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곽가장 식솔들이 입고 다니는 복색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표정도 밝았으며, 웃고 떠드는 사람까지 눈에 띄었다. 도저히
상가 분위기가 아니었다.
중문(中門) 안으로 들어서자 상황은 일변했다. 장원 안은 미리
엄명이 있었는지, 아니면 평상시 모습이 이런지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넓고 깨끗한 장원, 무덤 속같이 고요한 정적.
중문 밖과는 너무 대조적인 풍경이라서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
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곽가장에서도 중지(重地)가 아닌가.
장한은 전각(殿閣)을 돌아 가산(家山)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산 중턱에 위치한 암동(岩洞).
암동 입구에는 남의(藍衣)를 입은 무인 다섯 명이 눈에 날카로
운 빛을 사방에 뿌리며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시신이다!'
익히 아는 냄새였다.
암동 근처에 이르자마자 반여량은 장의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
한 기운를 감지했다. 시신이 뿜어내는 스산한 기운이었다. 또
한 코를 찌르는 악취! 시취(屍臭)가 이 정도로 강하다면 죽은
지 보름은 경과했으리라.
다른 냄새도 맡아졌다.
시취를 제거한다는 초연향(超沿香) 냄새였다.
다른 때 같으면 은은한 정감이 울어 나겠지만 지금은 타는 갈
증과 함께 숨막히는 답답함만 가중시켰다. 전혀 낯선 곳, 무가
(武家)에서 만나는 시신이기 때문도 했지만 아직 일을 할 준비
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한한을 잃은 고통은 쉽게 잊혀질
성질이 아니었다.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암동 안에 울려퍼졌다.
걷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주작등(朱雀燈)
이 일 장 간격으로 빛을 뿌려 냈고,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충
분히 걸을 만큼 동굴 안은 넉넉했다. 더욱이 동굴은 안으로 들
어갈수록 넓어져 종래에는 큼지막한 광장이 되어 버렸다.
십팔반 병기가 보였다. 또한 석벽 곳곳에 검에 긁힌 자국이 가
득한 것으로 미루어 폐관수련(閉關修練)할 때 사용하는 연공실
(練功室)이 분명했다.
정중앙에 놓여 있는 묵중한 석관.
그것은 무인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석상(石像)처럼 숨소리 한 올 흘리지 않고 늘어서 있는
무인 두 명과 노인 한 명. 연공실에는 단 세 명뿐이었다. 그
중 눈과 눈썹 사이가 넓고, 턱은 갸름하게 돌아갔으며, 수염을
곱게 다듬어 청수해 보이는 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어왔다.
"어서 오시게.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네."
'곽가장주 곽모천!'
그는 육순(六旬)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러나 나이답지 않게 팽
팽한 생기로 가득해 젊은이들보다 더욱 활기차 보였다. 선비들
이 즐겨 입는 사령대금관수삼(斜領大襟寬袖衫)을 입고, 머리에
는 사방평정건(四方平定巾)이라는 유건(儒巾)을 써서 무인 같
지 않았다.
"나는 산귀(算鬼)라는 사람일세. 들어봤는가?"
반여량은 눈을 반짝였다.
어찌 모르랴!
말을 건네 온 노인은 곽가장주가 아니었다. 사감파(四堪派)의
총수(總帥) 가운데 한 명, 원방파(元方派) 총수였다.
자(字)는 태문(泰文), 호(號)는 산귀(算鬼), 삼원산방파(三元
算方派) 감여가(堪與家) 만여 명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그였
다.
당금 중원에서 감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네 곳 중 한 곳을
찾았다. 실력 여부는 차치하고 사감파에서 인정하지 않은 감여
가는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세태였다.
강서성의 산귀, 삼원산방파의 총수로 방위혁(方位學)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다. 삼원산방파는 약칭(略稱)으로 원방파라
불렸다.
사천성(四川省)의 무자(無子), 강서성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감파(堪派)로 삼합산방파(三合算方派)의 총수였다. 강서성 사
람들에게는 생소한 삼합산방. 그러나 사천성의 무자가 뛰어난
감여가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삼합삼방파의 약칭은 합방파였
다.
삼합형국파(三合形局派)의 총단은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에 있었다. 합국파라고도 불리는 삼합형국파의 총수는 면수(沔
水). 지세를 파악하는 데는 당적할 사람이 없을 거라는 풍문이
나돌 정도로 뛰어난 감여가였다.
삼원형국파(三元形局派)의 총단은 하남성(河南省) 여주(汝州)
에 위치했다. 총수는 낙월노인(落月老人). 강북(江北)에서는
감여비로 황금 아니면 받지 않는다는 거물이었다. 감여도 잘하
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호화스럽게 사는 사
람.
사감파가 같은 중원에 있으면서도 서로 감여 방법이 다른 것은
지형적인 요건 때문이었다.
우선 중원을 남북으로 나눈 장강.
장강을 중심으로 북쪽은 산악이 많고, 남쪽은 주로 평야지대였
다. 당연히 북방 감여가들은 산세를 위주로, 평야가 많은 남방
감여가들은 방위학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지
세(地勢)를 중시하는 형국파(形局派)와 방위를 중시하는 산방
파(算方派).
장강에 가로막혀 남북 문화가 달라졌듯이 동서(東西) 문화를
나눈것은 산맥이었다.
태행산맥(太行山脈)에서 복우산맥(伏牛山脈)으로, 다시 대파산
맥(大巴山脈), 누산산맥(樓山山脈)으로 이어지는 고봉(高峰)
들.
호광성과 사천성이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서로 문물이 크게 다
른것은 산맥에 가로막혀 교역하기가 수월치 않은 까닭이었다.
문물과 마찬가지로 감여도 산악 쪽은 천지인(天地人)을 개별로
보는 삼합파(三合派)가, 평야 쪽은 천지인을 하나로 보는 삼원
파(三元派)가 주축을 이루었다.
장강과 산맥.
중원은 네 쪽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마다 삼원.삼합 중 하나,
산방.형국 중 하나를 지역 특성에 맞게 선택하여 접목시켰다.
그 중 천지인을 하나로 보고 방위학을 중시하는 원방파 총수가
바로 이 노인인 것이다.
"고명(高名)은 많이 들었습니다. 반여량이라 합니다."
반여량은 정중히 포권지례(包拳之禮)를 취해 보였다.
"허허허! 우리 수인사는 나중에 나눔세. 우선 시신을 봐주겠는
가?"
산귀는 온화한 안색만큼이나 음성도 부드러웠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마음은 편안치 못했다.
산귀까지 있는데 자신을 부르다니 석실까지 안내해 준 장한을
처음 만났을 때 불현듯 들었던 의문이 되살아났다. 장한은 석
실에 있는 다른 무인들처럼 한구석에서 묵묵히 자신을 응시하
는 중이었다.
반여량은 석관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순간,
"우욱!"
뱃속에서 토악질이 치밀었다.
악취의 근원은 이 석관이다. 바람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석실에
구더기가 스멀거리는 시신이 누워 있으니 냄새가 이리 독할 수
밖에.
시신은 눈 뜨고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수십 구의 시
신을 염해 봤지만 이토록 처참한 시신은 처음이었다. 설혹 길
에서 객사(客死)한 시신이라 할지라도 이보다는 나을 성싶었
다.
간신히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하고 나자,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에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석개(石蓋)는 왜 열어 놓았을까? 염은 왜 하지 않았을까?
산귀는 반여량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다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
았다 싶자 초연향을 들어 분향(焚香)한 다음 등을 돌려 얼굴을
마주했다.
"시신을 보고 느낀 점은 없는가?"
반여량이 채 허리를 펴기도 전에 날아온 질문이었다.
"일단 가매장(假埋葬)이라도 시키시지 않고..."
반여량은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산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명당이 좋다지만 칠월
염복 더위에 시신을 이대로 방치해 두다니. 이것은 시신에 대
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감여가가 지켜야 할 기본 윤리마저도
잊어 버린 태도였다. 어떻게 감파의 총수라는 사람이 시신을
방치해 둔단 말인가.
산귀는 처음과 다름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같은 감여가이기에 하는 말이네 만 사람이 죽으면 독특한 시
기(屍氣)를 뿜어 내지 않는가? 자네가 이 시신을 보고 느낀 시
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네?"
"음...!"
침음을 토한 반여량은 심상치 않은 예감에 시신을 다시 바라보
았다. 좀 전처럼 가볍게 흘겨보는 눈길이 아니라 세밀하게 탐
색하는 눈길로. 원방파 총수가 이런 질문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아! 죽어도 죽지 못하는 사람!"
반여량은 신음을 토해 냈다.
생전에 무인인 듯싶었던 시신은 평온해 보였다. 욕됨 한 점 없
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묻어 나왔다.
'허허허! 일평생 잘 살아왔어. 후회도 미련도 없어. 하지만 나
를 죽인 자는... 아! 겁나. 너무... 무서워.'
짜릿한 전율과 함께 감응(感應)이 느껴졌다.
원래 이런 감응은 직계 자손이 느껴야 온당했다.
고사(古史)를 살펴보면 고개를 수그리게 만드는 전설이 있다.
남조시대(南朝時代), 궁궐에 매달린 동종(銅鐘)이 바람도 없는
데 스스로 울렸다. 연유를 알아보니 동종이 울린 그 시각 삼천
여 리나 떨어진 동광산(銅鑛山)에 지진(地震)이 발생했다는 것
이다.
한낱 동종마저 제 뿌리를 아는데 하물며 부모에게서 뼈와 살과
정혈(精血)을 물려받은 자손이야 두말하면 무엇하랴. 그러나
실체로 고인과 영(靈)을 교류하는 상주(喪主)는 몇 되지 않았
다. 명당을 찾는 풍습이 영의 교류를 인정한 것에서 시작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진정한 효심(孝心)을 찾아보기가 어
려운 세태였다.
'그러지요. 이제 이승에 대한 염려는 떨쳐 버리고 편히 가십시
오.'
색다른 시기였다.
못다 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영혼은 구천을 방황한
다.
공포! 영혼까지 얼려 버린 공포!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긴다는 무인에게 이만한 공포를 심어 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하기는 무인도 사람이니 죽음 앞에서야
똑같겠지. 어느 누구라고 목숨에 대한 미련이 없을까.
반여량은 시신에 정신을 빼앗겨 등뒤에 서 있는 무인들의 눈가
에 떠오른 경악 어린 표정을 보지 못했다.
"언뜻 보면 달포쯤 지난 시신 같은데 실은 죽은 지 두 달이나
지났군요. 염할 생각이라면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원방파 총수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흘려 버
린 소리였다. 건방지지 않은가? 평상시 같으면 감히 얼굴도 마
주할 수 없는 감여계 대선배가 눈앞에 있는데 감여에 대해서
논하다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산귀는 조금도 언찮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의향까지 물어왔다.
"매장을 하면 고인의 한(恨)이 삭지 않죠. 차라리 화장(火葬)
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런가?"
산귀의 태연한 대답에 반여량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흠...! 시신이 두 달이나 지난 사실을 알아낸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네. 풍수에 대한 깊이를 짐작하겠어. 그런데 화장을 하
라.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산귀는 처음 자세 그대로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입만 방긋거
렸다.
"이 사람을 죽인 병기는 검."
"그래서?"
"음유한 검이죠."
"계속 말해보게."
"죽은 시신이 내뿜는 음기(陰氣)가 이 정도라면... 격살당할
당시는 상당했을 겁니다. 아마 상대할 자가 거의 없는 절정 고
수이거나 광인(狂人)일 겁니다."
"으음...!"
산귀는 처음으로 인간다운 감정을 드러냈다.
"기(氣)는 양날의 검과 같죠. 잘 쓰면 육신을 보(補)하지만 잘
못쓰면 오히려 몸을 해치는... 검을 맞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음기가 뼈와 내장에 스며들었죠. 그것이 당연히 내뿜어야 할
시기(屍氣) 대신에 음기를 내뿜게 된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
"불행을 당한 시신은 묻어 주는 것보다 화장해 주는 것이 영혼
을 편히 쉬게 하는 길이라... 배웠습니다만..."
"그래도 이 친구를 묻어 주겠다면?"
"... 오십 년은 지나야 시신이 완전히 썩을 겁니다."
남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친한 벗끼리 격의 없이 주고받는 말처
럼 들렸다. 그러나 한 사람은 감여계에 명성이 자자한 거장이
요, 또 한사람은 감여계 말을 빌리자면 이제 눈을 뜬 햇병아리
였다.
감여란 상학(相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통한 사람이 드문 이유
는 조형(造形)을 보는 감수성이 특출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관
상(觀相)하나를 보는 것도 수 년의 세월이 필요한데 하물며 지
세지형(地勢地形)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감여가들이 담론을 펼칠 때 늘상 거론되는 것이 금계포란형(金
鷄抱卵形)이었다.
혈(穴)을 골라 묘를 쓰면 후인(後人) 중에 신동(神童)이 나온
다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진 지형. 뿐인가? 재물까지 빗물 고여
들듯이 모여 대부호(大富豪)가 된다는 천하의 길지였다.
닭이 알을 품었다는 금계포란형.
하지만 금계포란형을 실체로 알아보기까지는 수십 년이 필요했
다. 지세란 것은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 조감(鳥瞰)한다 할지
라도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산세(山勢)만 보고 닭이 알을 품
었는지, 까마귀가 알을 품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쪽에
서 보면 분명 닭같이 보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학처럼도 보이는
것을.
이래서 산수를 금수(禽獸)에 빗대어 설명하는 형국론(形局論)
은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형국론을 무시할수도 없었다.
설천기지리(洩天機地理)에서는 감여를 세(勢), 형(形). 방위
(方位)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 형국파는 형(形)에
산방파는 방위에 치중한다는 것뿐이지 어느 쪽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수십, 수백 번 금계포란형을
살펴보고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감여계(堪與界)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이 듣는 소리가 있다.
십 년 동안 산천을 돌아다니다 보면 산세(山勢)가 보인다. 또
십년 동안 떠돌면 산의 기운이 보이고, 거기에 십 년을 더 보
태면 방위의 윤곽을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감여였다. 그런데 이제 스물여섯 먹은 애
송이가 감여를 익혔으면 얼마나 익혔겠는가. 그래도 산귀는 신
중하게 들었다.
"나도 감여가이다 보니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에 대한 이치
는 어느 정도 깨닫고 있네. 만약에 말일세. 음기가 가장 성한
땅에다가 장례를 치른다면 어떻겠는가?"
반여량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산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정말 산귀인가? 원방파 총수라는 사람이 이제 갓 입
문한 사람에게 되지도 않는 질문을 하다니.
"순음(順陰)과 순음이 만나는 것을 역(易)에서는 곤위지(坤爲
地)라 하죠."
"알고 있네. 곤위지는 바로 어머니의 대지(大地)를 말함이네.
넓은 포용력(包容力)과 끝없는 생성력(生成力)을 지닌... 이
친구가 음유한 검에 당했으니 음기가 가장 강한 땅을 골라 주
면 어떨까 싶네만."
"대지의 음기는 인간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육신이야
티끌에 불과한 것. 이 사람을 정말 음기가 가장 강한 땅에 묻
는다면, 묻는 순간 귀기(鬼氣)를 느낄 겁니다. 음기가 강한 시
신일수록 양반합(陽反合), 양기가 가장 강한 땅에 묻어야 한다
는 이치도 모릅니까?"
약간 짜증 섞인 음성이었다.
반여량은 결국 산귀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감여가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감여를 전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
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심란한데 알 만한 사람이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
"허허허! 미안하네. 사실 동기감응 감여는 인정받지 못한 감여
인지라 잠시 시험했네. 자네는 감응만큼이나 소양도 깊구먼.
허허! 이 사람은 화장시킬 것이네."
"...?"
"자네를 부른 것은 기운을 읽고, 그 기운을 따라가 달라고 불
렀네. 동기감응으로 기운을 읽는 게 정말 가능하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반여량은 산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산귀는 진지했다. 추호도 거짓이 없었다.
"복수라고 들었네."
"복수?"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네. '시신이 발하는 기운이 있는 곳에
원수가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 말밖에는 들은 것이 없으
니까. 각설하고... 휴우! 음기가 가장 강한 곳을 더듬어 가야
하네. 여기서부터 음기가 가장 강한 방향을 더듬어 가는 걸세.
강한 곳에 이르면 더 강한 음기가 풍겨오는 곳으로... 그렇게
가다보면 더 이상 갈곳이 없는 땅에 도달하겠지. 그곳일세. 패
주님이 찾는 땅은. 그곳이 비록 중원에서 천 리 밖에 있다 할
지라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네. 가다가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데 가장 적임자로 나는... 자네를
추천했네. 자네는 유일하게 동기감응(同氣感應) 감여를 하고
있으니까. 이제 여기 온 이유를 알겠는가?"
"후후후! 사감파에서 동기감응 감여를 인정한다는 말씀입니
까?"
반여량의 음성은 조소에 가까웠다.
"사감파가 아닐세. 우리 원방파도 아니고. 하지만 나 개인에게
묻는다면... 인정하네. 천하에... 다시없는 감여법이지."
'사부... 이 소리를 들었습니까? 그렇군요. 사부님이 가르쳐
준 감여법은 이렇게 뛰어난 것이었군요. 후후! 이제 편안하십
니까?'
반여량은 초췌한 몰골로 이승을 등진 사부 안철주(安鐵週)를
떠올렸다.
안철주.
이십여 년 전, 감여계(堪與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가(大
家)였다. 하지만 뭇사람들의 질시 속에 음지(陰地)에 묻혀야
했던 비운의 사내이기도 했다.
감여가들이 한결같이 시신을 외면한데 비해 안철주는 시신으로
부터 느껴지는 기운을 중요시했다. 시기(屍氣)를 읽고 난 후에
야 그에 맞는 묘혈을 정할 수 있다나?
삼척동자(三尺童子)가 들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자연이
뿜어 내는 기(氣)를 읽는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어떻게 죽은 사
람의 기운을 읽어 낼 수 있단 말인가.
- 산천초목(山川草木)에도 기(氣)가 있으니, 기(氣)를 느껴라.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소에 음택을 쓰면 반드시 발복(發
福)하리라. 또한 잠자리가 편안하고, 자고 일어난 다음 몸이
개운한 곳에 양택을 지으면 무병장수하리라.
산세니 방위니 따질 필요가 무엇인가? 인간이 지닌 기(氣)를
활성화할 수 있는 장소만 고르면 그만인 것을...
모든 감여가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理想)이었다.
간룡법(看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정혈법(定
血法) 또는 소주길흉(所主吉凶)이나 형국론(形局論)이 아닌 동
기감응(同氣感應)에 의한 감여.
동기감응은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구한다. 흔히들 말하기 쉬워
동기감응이라고 하지만 옆에서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일어나도
모를 정도로 일점(一點)에 정신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기에
동기감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다. 그만큼 뇌력
(腦力)이 뛰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감여가들 사이에서도 난해하기가 이를 데 없어 배운 자가 전무
하다는 감여법이었다.
자연이 내뿜는 기운을 느낄 수만 있다면 풍수도구를 사용할 필
요가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산세를 보고, 방위를
재는 등 부산을 떠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행히도 중원을 석권하고 있는 네 감파는 동기감응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심으로야 고금(古今)에 유래 없는 뛰어난 감여가
라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보일 수 없었다. 동기
감응을 인정하면 네 감파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안철주는 성격이 고집스러워 타종(他種)의 감여를 인정
하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나 장소를 불문하고 기존 감여가들을
비웃었다.
"형편없는 위술(僞術)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모사꾼들."
나경과 산술(算術)에 의존하는 산방(算方), 지형 분석에 의존
하는 형국(形局). 방위를 보는 견해에 따라 천지인(天地人) 삼
반(三盤)으로 나누는 삼합(三合)과 천지인을 통괄하여 또 다른
방위를 산출해 내는 삼원(三元).
어느 감여법이건 풍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공언해 버렸
다. 혼자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공공연
히 매도하고 다니는 데는 참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중원의 모든 감여가들은 일제히 동기감응을 부정해 버렸
다.
사람들을 속이기는 쉬웠다.
직관(直觀)으로 묘혈을 파악하는 동기감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 산방파와 형국파처럼 산세를 이치에 맞게 설명할 수도 없
다. 감여가들에게 분신(分身)처럼 따라다니는 풍수도구와 나경
도 사용하지 않는다. 기감(氣感)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혼(魂)이 빠져 나간 시신에서 기(氣)를 읽어? 하하하!'
'과대망상(誇大妄想)이야. 과대망상. 그거 머리가 돈 놈 아
냐?'
저명한 유사(儒士)들조차 비웃고 말았다.
유사가 감여를 아는 것은 당연했다.
일반적으로 감여는 청오자(靑烏子:한나라, 중국 최초의 풍수
책인 청오경(靑烏經)을 씀. 장경(葬經)이라 부름)나 곽박(郭
璞:276~324년, 동진(洞晉) 때 사람으로 금낭경(金囊經)을 남
김. 장서(葬書)라 부름. 중국 풍수를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
부터 태동된 것으로 알지만 근본은 노장사상(老莊思想)이었다.
활용성이 있으면 먼저 사용하고 본다는, 현실에 응용할 수 있
어야 한다는 생각이 오늘날의 감여를 일궈냈다. 그 후 전국시
대(戰國時代)에 접어들면서 병진(兵陣)이 연구되었고, 기문둔
갑(奇門遁甲)이라는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니 사고(思考)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유사가 감여가보다
뛰어난 학식을 지녔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린 것이다.
세상은 그랬다.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뛰어난 사내는 설자리가 없었다.
많은 감여가들과 유생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가운데 안
철주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떠
올렸지만 그런 잔소(殘笑)가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결국 세상
에서 도태되어야 했던 사람은 안철주였다.
"좋습니다. 동기감응이 필요하다면 해야지요. 하지만 시신이
내뿜는 기운은 음기. 음기가 가장 강한 곳이라면 굳이..."
반여량은 이내 한 지형을 생각해 냈다.
강랑산(康郞山).
파양호(播陽湖)에 있는 작은 산이지만 지기(地氣)와 수기(水
氣)가 어우러져 음기가 강하기로는 더없는 땅이었다. 강랑산은
바로 남룡(南龍)에 근원을 든 음지였다.
민산에서 발원한 기운이 대지를 지나는 동안 형성된 사기(邪
氣)를 흘려 버린 천형의 땅.
남창부에서 음기를 쫓아가다 보면 결국 강랑산에 이르고 만다.
거기서 더 강한 음기를 쫓을 수는 없다. 목적지가 정해진 것이
다. 그런데 왜 멀리 돌아가고자 하는가. 지맥(地脈)은 일직선
으로 곧게 뻗은 것이 아니다. 산세를 따라 물길을 따라 이리
휘고 저리 굽어져 있기 마련이다. 또한 분맥(分脈)은 미친년
머리처럼 헝클어져 가지런히 정돈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
이 아니다.
"물론 강랑산이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 다시 말하지만
패주님은 여기서부터, 이 시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더듬어 가
기를 원하시네. 대가로는 은화 서른 냥을 줄 생각일세. 상당한
금액이지. 쓰기에 따라서는 팔자를 고칠 수도 있는 돈이야."
은화 서른 냥을 주겠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언제까지 찾아야 합니까"
"흠! 빠를수록 좋겠지. 이제 석개를 덮어야겠어. 허허! 자네가
오는 동안 계속 이 냄새를 맡았더니 골치가 다 아프네그려. 패
주님께 말씀을 올리겠네. 명이 떨어지면 바로 움직여야 할 거
야. 그 동안 편히 쉬게나."
산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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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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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작가 가 풍수에 해박한 이 같아요 !
감사합니다 .
항상 감사 합니다.그리고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입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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