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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무스의 아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L. Marcius Septimi filius)는 2차 포에니 전쟁 중에 활동한 로마 장군 가운데 한 명이다.(*) 전승되는 역사 기록 속에서 그는 기원전 211년경에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경위는 이러하다. 스키피오(나중의 아프리카누스. 이하 단순히 '스키피오'라고 표기하면 모두 이 인물을 뜻함)의 아버지인 (老)푸블리우스 스키피오와 그 형, 그나이우스 스키피오가 지휘하던 로마의 스페인 방면군은 기원전 211년(혹은 그 전해?)에 하스드루발 바르카 등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싸워 대파되었다. 일부 살아남은 병사들이 에브로강선까지 도망쳤는데, 여기에서 자체적으로 자신들의 임시 지휘관으로 뽑은 사람이 바로 L. 마르키우스였다. 그는 재빨리 방어 태세를 정비한 뒤 군을 지휘하여 추격해온 카르타고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L. 마르키우스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리비우스는, 그가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로부터 온갖 전쟁 기술을 배운 유능한 젊은이였다고 했다.(25.37) 원래 신분은 기사로, 또 다른 정보원에 따르면 천부장 직책에 있었다.(ValMax.2.7.15. cf. 키케로는 백부장이라고 했지만[Balb.15.34], 천부장쪽이 더 타당해 보인다.) 잔군 가운데는 지휘권상으로 더 선임인 사람도 있었던 것 같지만 서열을 넘어 마르키우스가 임시 지휘관으로 선출되었고, 이는 그가 군 내에서 이미 명망이 상당한 장교였음을 시사한다. 아마 후일 스키피오의 휘하에서 라일리우스 등과 함께 부장으로 활약하는 "L. 마르키우스"도 필시 이 사람과 동일 인물일 것이다.
리비우스의 정보원이 된 연대기들은 카르타고 추격군 격파 사건을 몹시 과장되게 묘사해놓았다.(25.39) 예를 들어, 클라우디우스 콰드리가리우스는 카르타고군의 전사자가 37,000명이나 되었다는 터무니없는 기록을 취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L. 마르키우스가 재집결한 패잔병을 지휘하여 에브로강선을 방어해 낸 것은 사실로 보인다.(아래 *참조) 이 성공으로 인해 로마인들은 스페인의 일부나마 계속 점하여 반격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고, 반대로 카르타고인들은 일단 대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을 소탕하지도, 이탈리아의 한니발에게 지원군을 보내지도 못한 채 적군이 다시 재건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즉, 비록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의미가 크고, 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나는 이 '숨은 명장' L. 마르키우스의 존재는, 기원전 210년에 불과 26세의 나이였던 스키피오가 스페인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오게 된 일을 해석할 때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째서인가? 문제는 L. 마르키우스가 방어에 성공한 뒤 원로원에 보낸 보고서에서 시작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것은 "법무관권한이 원로원에(propraetor senatui)" 라는 문구로 시작했는데(**), 정작 그 어떤 합법적인 기관도 L. 마르키우스를 법무관권한으로 임명한 바가 없었다. 따라서 이는 엄연한 사칭이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중에는 여러 사람이 정식 행정관 선거에서 선출되지 않고도(즉, 법적으로는 여전히 개인[privatus]의 자격으로) 집정관의 대행 권한이니, 법무관의 대행 권한이니 하는 직권을 달고 군대를 지휘했다. 그 전쟁중 개인이 이러한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는 방법은 다음 세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는 원로원에서 결의 형식으로 추천하고, 민회(아마도, 트리부스 평민회)에서 이를 가결시키는 것이다. 민회 가결은 거의 요식행위였던 것 같지만, 국제상 결코 생략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도시 법무관이 임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원전 215년에 사르디니아에서 임시로 군대를 지휘한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가 이 경우에 해당했다.
셋째는 원로원의 추천 없이 민회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그 절차는 찬반투표였을 수도 있고, 일종의 선거였을 수도 있다. 스키피오가 바로 이 절차를 통해 "집정관권한"으로 뽑혔다.
L. 마르키우스는 이 중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단지 다른 유사 사례가 없었을 뿐 취임 자체는 합법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어렵다. 전승되는 한 그는 현장의 병사들로부터 임시로 신임받은 사령관이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는 합법적으로 개최된 평민회나 권한 있는 행정관의 개입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리비우스는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인민의 명령(즉, 합법적인 선출)도 없었고, 원로원의 허락도 없었다"고 진술했다.(26.2)
군대가 화급을 당했을 때 큰 공적을 세운 장교가 어째서 이런 경솔한 사칭 행위를 저질렀는가? 어쩌면 L. 마르키우스는 자신의 지위를 본국에서 인정해 주어, '임시' 사령관에서 진짜 사령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야심을 가졌다면, 되도록 원로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단순히 법률적인 문제에 무지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기사였다고 하므로, 교육받을 기회가 없어서 무식하게 되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고대에 교육은 의무가 아니었으므로 무술이나 군대일에만 열중하다가 정치적 절차상의 세세한 규범까지 배우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일 경우, 왜 같이 있던 사람들이 실수를 바로잡아주지 않았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L. 마르키우스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원로원은 이 문제를 결코 단순히 다룰 수 없었다. 혹시 이것을 선례로 삼아, 먼 곳에 파견된 군대의 병사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지휘관을 뽑아 세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ref: Liv.26.2) 하지만 그렇다고 마르키우스를 당장 처벌하거나 하는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으면 그가 정말 반란군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종류의 위험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되도록 빨리 합법적으로 권한을 부여받은 지휘관을 스페인으로 보내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일단 기원전 211년 가을쯤에 증원군과 함께 스페인에 파견된 사람은, 참가하고 있던 카푸아 함락 작전이 그해에 성공한 후 당장 임무가 없었던 법무관권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네로는 단 1년 정도만 스페인 방면군을 지휘한 뒤 이임하게 된다. 카시우스 디오는 네로가 문책성의 경질을 당했다고 시사했다. 즉, 작전 도중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거의 다 잡아놓고도 놓친 것 때문에 비난받았다고 하는 것이다.(fr.57) 개연성은 있지만 꼭 믿을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경위야 아무튼 기원전 210년 중에는 확실히 네로를 대신할 새로운 스페인 사령관이 임명될 필요성이 존재했을 것이고, 바로 이 시점에서 스키피오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리비우스는 사령관 선거 당일, 기대와는 달리 입후보자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시민들이 절망하고 있던 도중, 갑자기 젊은 스키피오가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당선된 극적인 에피소드를 기록했다.(26.18) 그런데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이런 겉보기만큼 극적이지 않고, 실은 배후에서 "어레인지"가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의혹은 몸젠 선생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바가 있거니와,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사실 스페인 전선은 기원전 211년에 네로가 증원군을 데려가서 군대를 재건했으므로, 그해 초에 푸블리우스와 그나이우스 형제가 전사하고 에브로강선마저 내주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일 때만큼은 전혀 위태했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전장이므로 위험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정도 리스크를 띤 곳이라면 당시 최전선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데 왜 일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될 기회를 노리는 입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필시 스키피오 외에는 아무도 입후보하지 않도록 무언가 큰 세력이 뒤에서 조종했기 때문이다. 왜 조종했는가? 스키피오를 이미 스페인에 보내기로 내정해 놓았기에, 경력이나 나이에 있어 그보다 외견상 더 적합해 보이는 인물이 입후보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여러가지 가능한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당시 원로원이 그저 되는대로 선거를 치러서 '아무나 입후보해서 뽑히면 좋고 아니면, 어쩌지...'라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혹시 스페인에 가려는 사람이 정말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민회에 모인 유권자들이 "기왕 이렇게 된 바에" 이미 거기서 오랫동안 싸웠고, 지휘도 꽤 잘 해냈던 L. 마르키우스를 실제 사령관으로 뽑아버릴 공산이 매우 커지기 때문이다. 최소한 누가 출마 의향이 있는지 파악해 두는 정도의 배후 움직임은 필시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사전 조사에서도 자기가 출마하겠다며 나선 사람은 스키피오 한 명 뿐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 젊은이가 갑자기 딴 소리를 하지 않는 한 위협 국면을 제거하는데는 그것으로 이미 충분해진다.
즉, 나는 L. 마르키우스라는 돌출 변수를 고려할 때, 선거를 배후에서 조종했건 아니건 원로원쪽에서 스키피오의 출마를 사전에 이미 파악하고 최소한 '그에 방해될만한 일은 하지 않는' 형식으로라도 이를 승인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일단 이정도 해석까지만 가할 것이다.
*그 이름과, 소개된 몇가지 특기 사항, 단편적인 활동 내역과 그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는 유능함 등을 제외하면 우리는 오늘날 L. 마르키우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사실 그의 정확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수수께끼다. 앞에서도 나온 것과 같이 그는 "셉티무스의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이 "셉티무스"는 굳이 번역하자면 "7남"이라는 뜻으로, 로마인들의 첫째 이름인 퀸투스("5남"), 데키무스("10남")등과 같은 계열이지만(물론, 이런 이름의 소유자들이 정말로 꼭 5남, 10남이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어쩌면 코그노멘이었을 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무스"가 그의 이름이 되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정도이며, Liv.32.2에 실제 그런 표기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착오일 가능성도 있다. 전후 L. 마르키우스의 행적은 미상하다. 리비우스는 그의 승리를 기리는 봉납물이 카피톨리누스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어쩐지 로마에 돌아와서 잘 지냈다는 인상을 주는 단서이다. 본문에서 다루는 사칭건으로 처벌받았다는 증거는, 최소한 나는 아는 바가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 너무 오래되어 굳이 들추어내려는 사람이 없어졌거나, 혹은 스키피오의 비호를 받았을 수도 있다.
**'법무관권한'은 propraetor의 번역이다. 문자적으로는 '법무관 대행'에 가까우며, 현대적인 용어로는 '법무관 권한 대행'에 근접한다. 그러나 꼭 같은 것은 아니므로, 일부러 다소 낯선 용어를 택하였다. 마르키우스가 보낸 서신 속의 원래 문구는 아마 ValMax.2.7.15에 기재된 "L. Marcius pro praetore"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공화정기에 "proconsul"이나 "propraetor"가 단독 직함으로 쓰이지는 않은것 같다. 비록 우리는 후대의 관습에 따라 편의상 이 용어들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원문 http://shaw.egloos.com/3995887 (2013/12/6) 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