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격은 일본 이라고 하는 나라
나라를 빼앗긴 백성은 초상집 개보다 못 하다
초상집 개가 저를 아껴주던 주인이 죽어 상문 온 손님들 사이에서 자기주인을 찾다가 이발길 저 발길에 차이는 신세가 된 것을 풍자한 말이다
나는 부모님 슬하에 삼형제 중 막내로 8살 때 경북 대구 비산동 4구 104번지에서 살았고 대구서부 보통학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국은 대동아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일으켜 한국(이하 조선)에 있는 인적 물적으로 자기들이 필요한 것은 다 들추어 빼앗아 갈 때다
우리글과 이름도 일본글과 일본 이름으로(내 아름은 히로모도 다게이지) 바뀌고 한국(이하 조선)말을 절대로 사용 못하게(1학년은 제외)했다 만약 조선말을 했다간 여러 학생들 앞에서 선생한테 죽도록 두들겨 맞았고 심지어는 방과 후에 집에 서도 조선말을 쓰다 아이들에게 들키면 그 다음날 선생에게 일러 바쳐 매를 맞았다 우리 조선 학생에게 일본은 우리 조국이고 일본의 천황이 우리 왕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충성을 다 해야 한다고 입이 달토록 교육했고 쇄뇌시혔기 때문에 우리는 한동안 일본이 우리 조국인줄 알았다
집안 어른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집집마다 아메다라스 오-미가미(자기들 시조)라는 한자로 쓴 종이 패를 나무 함지를 만들어 그 안에 부처 가미다나 라고 하여 벽에 높이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거기다 절을 하게하고 달성공원에 신사를 지어놓고 매월 8일에 사회단체와 학생들이 함께 참배하게하며 방학 때는 매일 아침 신사 참배를 하고 참배확인 카드에 도장을 받아 방학이 끝나고 개교 하는 날 학교에 제시해야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참배 했으면 연필 한 자루를 주며 칭찬을 했다
대신 신사참배를 빠진 날은 그 날수대로 매를 맞아야했다
참배를 강하게 시키는 목적은 일본이 이번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자기들 조상과 전쟁에서 죽은 영혼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학교에 등교 할 때도 개인행동은 못하고 동리별로 학생들이 모여 어느 동리 몇 반이라고 쓴 깃발을 선두에 선 학생이 들고 오와 열을 맞추고 일본 군가를 부르며 (군가 몇곡은 아직도 알고있음) 등교하고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우선 교내에 있는 신사 앞에부터 먼저가 참배를 해야 하는데 신사 약 100m전방에서는 4열종대로 줄을 맞추고 분대장이 거름 높여 갓 하면 발자국 소리도 크게 착 착 내며 신사 앞에 가 깊은 절로 참배 후 해산하여 각자 자기 교실
로 찾아갔다 그리고 조회 시간 종이 울리면 운동장에 모여 조회를 하는데 시작 할 뗀 일장기경례와 일본 애국가를 부르고 매월 8일에는 일본천황의 선전 포고문을 낭독(이때는 모두 고개를 숙이고 들어야 함)한 후 교장의 훈시로 조회를 끝 낸 다(겨울철에는 전 하생을 두 패로 갈라 하늘치기 운동을 잠시 하는데 그때 구호는 한쪽에서 베이에이(미영)라고 소리 지르면 또 한쪽에서는 게기메스(격퇴)라고 소리를 지르며 한다 교실에서도 단임 선생이 들어오면 다 함께 일장기에 절을 하고 선생께 인사 한다
그리고는 수업 시작 전에 어제 아이들이 방과 후 지금까지 조선말을 한번이라도 한 아이들을 들추어내어 매질 한 다음 수업에 들어 간다
4학년부터는 점심 도시락을 싸 가는데 아침저녁 으로 죽을 먹는 집 아이들은 죽을 도시락에 싸 올 수가 없어 4학년 이상 학생에게는 도시락을 싸 오라고 매달 쌀 배급표를 주었지만 그 쌀 양은 10일간의 도시락 쌀 양 박에 되지 않았다
각 가정마다 전 가족의 한 달 분 양식 배급을 받으면 그 쌀로 밥을 지어 먹으면 약10일 바께 못 먹개 되고 나머지는 잡곡으로 준다는게 밀기울과 콩깨묵을 주어 밀기울과 콩깨묵을 석어 밥을 지어놓으면 밥이 불근 색이고 까칠까칠하다 밀기울이 오랫동안 저장되었던 것이라 뜬 냄새가나고 또 콩깨묵은 콩기름을 뺀 찌꺼기를 중국에서 거두어 모아 오느라 날자가 오래되어 뜬 냄새가 난다 뭇내 나는 쌀과 뜬내 나는 콩깨묵 과 뜬내 나는 밀기울 이 세 가지로 밥을 지어놓으면 이개 밥인지 뭔지 분간을 못하며 배가고프니 그거라도 먹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런 밥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어 우선 배를 채우기 위해 그것으로 죽을 끓여 놓으면 그 죽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말로서는 표현을 못한다
학교에서 점심시간 각자 도시락을 보면 과간 이다 그것은 도시락 아니라 요즈음 가축사료 보다도 못해 요즈음 돼지도 안 먹을 것을 내 놓고 죽지 않으려고 씹어 넘긴다 이것마저도 안 먹으면 죽을 것이고 다른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가끔 놀란 것은 그 중에서도 하얀 쌀밥을 싸 오는 아이가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공직에 있는 아이였다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리고 또 부러웠던 것은 그때 단임 선생은 일본인 여 선생인데 자기 책상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것을 보면 뽀얀 쌀밥에 칼치 생선 구은것 한 토막으로 도시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별계 인으로 보였고 침이 절로 넘어갔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갈 때는 개인별로 친구와 어울려 간다 가는 길이 큰 묘지 옆으로 가게 되는데 묘지에 나있는 길다 란 잔디 풀잎을 쥐고 단기면 그 풀잎이 빠져 나오는데 그 끝이 하얀색으로 연하고 달작 지근 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뽑아 먹는 것이 유일한 간식거리였다 봄에는 소나무의 솔 꽃송이(일명 꼬두밥)를 초여름엔 뽕나무의 익지도 않았는 오디도 싹 쓰리 해 먹었다 가을엔 산 기슬의 찔래 나무 열매도 반가운 간식거리다
한번은 친구 셋시 달성공원 담장을 몰래 넘어가 솔 꽃을 따다가 찌개(공원 감시원)에게 붓 들려 몹시 맞은 때도 있다
몸에 칼슘성분이 부족해서인지 푸석푸석한 청돌을 부수어 씹어 먹는 애 들도 잇고 배속에 회충이 들끓는 애 들도 많고 심지어는 입으로 회충이 나오는 애 들도 많았다
봄과 가을엔 원족(소풍)을 가는데 소풍을 나중엔 행군이라고 하였다 4학년이상은 소풍을 주로 대구근교에 있는 와룡산으로 가는데 한번은 가을소풍을 가니 찔래꽃 열매가 많이 익어 하나를 따 먹어보니 그 맛이 새콤달콤하여 먹을 만 해서 실컷 따 먹었더니 목이 따갑고 침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빈 도시락 통에 가득 따서 좋아 라 하며 몇 몇 아이 가 학교에 먼저 와 버렸다 나중에 선생이 인원 파학을 할 때 먼저 학교로 간 것이 들통이나 이틋 날 등교 하자마자 이하라 라는 호랑이 선생이라고 알려진 왜놈선생이 어제 소풍갔다 먼저 집으로 간 아이들을 불러내어 복갠(목칼)으로 1대식 종아리를 때리는데 10여명이 맞았고 이상하게도 매 맞은 아이들 모두가 한 대를 맞고는 아픈 줄도 모르고 제 발로 성큼성큼 몇 발작 걸어 나와서는 팍 꺼꾸러 지는 것이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한 대를 맞고 걸어 나와서는 그만 팍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게 맞은 것이 겉으로는 표가 없고 속 골병들게 때리는 방법이라고 들었다 그 후로 매 맞은 후유증이 약 한달 가까이 갔다
또 모든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여름철이면 소버짐 이라고 하는 피부병이 주로 머리에 발생하여 심하면 앞머리까지 번지고 눈에 균이 들어가면 실명 한다고 하는 무서운 피부병이다 나도 심하게 알았는데 이 소버짐 으로 그 딱지가 두텁고 넓게 덥혀 모자를 쓴것 같았고 고름 냄새도 낫다 나중엔 너무 심해지자 단임 선생님 성씨가 야스다(안씨)라고 조선사람 인데 보기가 딱했던지 약을 구해 발라주고 붕대로 온 머리를 감아 주었고 그 후로 병이 깨끗이 나았는데 지금도 그 선생님을 기억하고 고맙게 생각 한다
당시는 명절은 설날뿐인데 음력설은 못 쉬게 하니 양력 1월1일이 설날이다(당시는 왜놈 설이라고 하고 양력 설날 제사를 지내면 조상님이 응감을 안한다고 믿었음) 이 날은 쌀 배급도 1일분을 더 준다 그래도 조상님께 제사만은 꼭 음력 설날에 들려야 하기 때문에 죽을 쑤어서라도 제사는 차려야 했다 양력 설날때 1일분 더 나온 쌀을 미루어 두었다가 음력 설날 떡국제사를 들이려고 떡을 하려면 왜놈들 몰래 해야 되기 때문에 동리에 몃집 정도 있는 디딜방아에 떡쌀을 빠아 와서 쌀 가루를 쩌서 다듬이 돌에 올려놓고 다딤 방망이로 두들겨 가래 떡을 만들어 썰어서 설날 떡국 제사를 드린다 제사가 끝나고 떡국을 먹으려면 떡국이 퍼져 한 덩어리가 되어 수가락으로 뚝뚝 때어서 먹었다 양력설날 배급 나온 고기 과일 등을 두었다 음력 설날 제사를 지내고 먹는데 어째 던 이날 하루만은 주는 대로 다 먹어 배가 불러 소화를 못시켜 이틋 날 까지도 쉰 트림(소화를 못 시켜 나오는 가스 냄새)이 나와 오히려 고생하는 설날이 되기도 했다
설날 입는 옷은 평소 입엇 던 옷을 빨아 입고 신은 나무 널판자로 만든 게다를 신었고 혹시 아이들 중에는 일본아이들이 신다 버린 운동화를 씻어 노점에서 팔았는데 그런 헌 운동화라도 사서 신으면 얼마나 좋았는지 자랑거리였다 옷이나 운동화나 학용품이 학교에서 배급이 나오는데 그 양이 모자라 제비를 뽑아 지급했는데 한 번에 약 30%만 나오기 때문에 6학년 졸업 할때 까지 한번 도 못 받는 아이도 많았고 나도 4학년 때 힌 색 양복을 한 벌 받아본 적이 있다 공책 연필 등 학용품 모두가 배급제이기 때문에 아껴 써야 하고 공책은 책장 가장자리까지 다 쓰고 거기다 붗글씨 연습을 하여 공책의 힌 부분이 보이지 않아야 새 공책과 교환이 되었다 연필은 손에 쥘 수가 없도록 쓰고 쥘 수가 없으면 대나무(빗 자루대)토막에 꽂아 쓰고 그렇게도 못쓸 때 라야 새 연필로 바꾸어 주었다
노리기구는 남자 아이들은 주로 병정놀이가 마을마다 조직 되다시피 되어있어 대나무 막대기나 부지깽이로 무기를 대신했고 놀이 용어도 일본군대 용어를 썼다 여자 아이들은 고무 줄 넘기나 작은 모래주머니(오자미)를 가지고 노는 것이 주된 노리 기구였다
한번은 학교에 등교를 하려 운동장 가까이 가니 운동장의 2~3m높이 까지가
구름같이 하얀 것이 움직이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얼마 전 일본이 싱가폴 섬 나라 를 함락했다고 그 기념으로 싱가폴의 주 생산물인 고무로 공을 만들어 우리나라 전국에 있는 학생들에게 선물로 한개 식 배급했던 것이다 그 공을 받고 얼마나 좋았던지 공 마다 자기이름을 써 놓고 애지중지 갖이고 놀았고 한동안 운동장이 하얀 색으로 변해 섰다
당시 우리들은 잠시 고생을 참고 견디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일본은 큰집 조선은 작은집 으로 형제지간처럼 동맹을 맺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 코쟁이들(당시 미국과 영국인의 표현) 을 우리가 다스리며 조선사람 일부는 미국이나 영국에 가서 관직을 맡아야하고 최소한 파출소 소장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머리가 돌도록 교육 하였기 때문에 나는 조선의 역사는 손톱만큼도 모르고 일본 역사가 2600년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믿고 천황폐하 만세라고 머리가 쇄뇌가 된 상태라 어떤 고생도 감수 할 수 있다고 철저히 마음다짐을 했었다 (이때는 부모님이나 집안 어른분께서 우리역사는 입박에 내는것은 철저히금했다) 그레서 일요일은 멀리 산(주로 앞산)에 가서 소나무 공이 (비행기에 쓰는 기름을 얻기 위해서)를 배어 모우고 아주까리 나무 대를 배어 웅댕이 물에 담구어 불으면 껍질을 배껴 인조 실을 뽑아 군복을 만들기 위해 웅댕이 마다 아주가리 대 를 가득 채워 넣고 물러지기를 기다리고 봄에는 왕 버드나무의 열매를 따서 말리면 거기서 고급 솜이 나오는데 그 솜으로 비행사 옷에 넣기 위해 한반에서 몇 포대 식을 모아 납품하기위해 모든 학생들에께 학년별 반별로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 죽기 살기로 많이 모아 납품 하는 것이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이고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하는 그날부터 우리는 만고에 호강을 하는 것 이라는 일념으로 공부하는 날 보다 일 하는 날이 더 많아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불평 없이 충성을 다 했었다
저의 형들은 군수물 제작 공장에 다닌 덕에 일본군에는 안 갔고 당시 17살된 누나는 징용에 안 보내려고 나이 많은 홀아비에게 강제로 시집보냈고 지금의 저의 처형도 징용에 안 보내려고 노총각에게 억지로 시집보냈는데 시집간 그해 남편은 징용에 붇들려 가고 처형은 패병에 걸려 시름시름하다 일직 죽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15일 일본 천황이 라디오(라디오는 한 동리에 1대가 있을 정도)를 통해 목멘 소리로 항복 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 또래 아이들은 눈물을 글성이며 또 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할 정도로 우리는 일본 놈으로 깊이 쇄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살아온 세대가 지금의 80대이다 지금에 와서 대략 생각나는 것만 거짓 없이 추려 보았다
우리세대는 신기하게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이 되었으면 만만세 를 부르며 살아야 할 터인데 해방 후 바로 친일파 색출을 위한 10.1사건으로 난리가나고 남과 북으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그런대로 살아가는가 하는데 6.25전쟁으로 남북이 아직까지도 갈라지고 있다
만고에 악한 짓만 해온 일본은 우리나라 남북 전쟁때문에 더 잘 살개되고 더 큰소리 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원자탄 맛은 먼저 맛 보았지만 철천지 한맻인 과거가 꿈에라도 보일까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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