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에 앞서 서정원(38)과 이상윤(39) 그리고 안정환(32)이 프랑스리그에 진출했다. 이들은 박주영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1997-98시즌 유럽에서 프랑스리그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다.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 수를 결정하는 UEFA 랭킹에서 프랑스리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독일, 네덜란드, 포르투갈리그에 이어 7위였다.
전 시즌 챔피언 AS 모나코와 준우승팀 파리 생제르망이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올랐다. 파리 생제르망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AS 모나코는 8강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준결승에 올랐다.
1997-98시즌 프랑스 리그에서 FC 낭트, 보르도, FC 메스, AJ 오제르, SC 바스티아, 올림피크 리옹, RC 스트라스부르 등 6개 팀이 UEFA컵에 나섰다. 이 가운데 오제르가 8강에 올랐고 스트라스부르가 16강에 진출했다.
스트라스부르는 16강전 홈경기에서 인테르 밀란을 2-0으로 이겼지만 2차전 원정 경기에서 0-3으로 무릎을 꿇어 합계 2-3으로 8강에 오르지 못했다.
안양 LG(현 FC 서울) 소속이던 서정원(38)이 프랑스리그로 둥지를 옮긴 게 이때다.
서정원은 1997-98시즌 겨울 이적시장 때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했다. 스트라스부르에 대한 서정원의 기억은 특별했다.
“스트라스부르는 작은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예쁜 동네다. 알퐁소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됐던 곳이기도 하다.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두 나라의 영토 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난 지역이어서인지 독일어 신문도 있다. 프랑스에서 부자 도시로 꼽히는 곳으로 화이트 와인이 유명하다. 유럽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축구에 대한 열정은 정말 뜨겁다.”
활약
서정원이 입단했을 때 스트라스부르는 UEFA컵에서는 선전하고 있었으나 리그에서는 강등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해 1월부터 스트라스부르의 지휘봉을 잡은 피에르 망코브스키 감독은 발이 빠르고 결정력이 높은 서정원을 4-4-2 포메이션의 2선 공격수로 활용하며 부진 탈출의 돌파구를 찾았다.
1998-99시즌 스트라스부르 선수단 사진에 르 로이(아랫줄 가운데) 감독과 서정원(아랫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보인다.(사진 제공=서정원)
제랄드 바티클과 한때 프랑스 축구의 기대주로 꼽혔던 파스칼 누마가 번갈아 가며 서정원의 파트너로 나섰다.
서정원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 대표팀 물망에 오르던 누마의 출전 기회를 줄인 망코브스키 감독의 결단을 이해하는 프랑스 언론은 많지 않았다.
훗날 프랑스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자리를 옮긴 망코브스키 감독의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서정원은 1998년 1월 22일(이하 현지시간) 리옹과 치른 데뷔전에서 골을 넣은 데 이어 두 번째 경기에서도 골을 터뜨리며 일약 팀의 간판 스타로 떠올랐다. 서정원은 1997-98시즌 리그 12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다.
그의 폭 넓은 플레이는 바티클과 누마의 득점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강등 위기에서 벗어난 스트라스부르는 ‘세오(Seo)’ 열풍에 휩싸였다.
“지금 생각해도 좋은 출발을 했던 것 같다. 관중들이 입을 모아 ‘세오, 세오’라고 외쳤다. 유럽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버스 기사가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보면 차를 세우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자주 가는 식당에선 나와 가족 모두 공짜로 음식을 대접 받았다. 1997-98시즌이 끝난 뒤에는 스트라스부르 광고에 팀을 대표해 내 얼굴이 실렸다. 지역 방송이 아닌 전국 방송에서 우리 가족을 취재했고 프랑스 축구 월간지 표지 모델로도 나온 적이 있을 만큼 화제를 모았다.”
서정원은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 아주머니와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이 아주머니는 서정원의 손을 꼭 잡으면서 “나라를 찾아 줘 고맙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사연은 이랬다. 프랑스 학교에 다니던 아주머니의 아들은 냄새 나는 중국 꼬마라는 놀림을 받았다. 견디기 어려운 따돌림이었다.
스트라스부르 유니폼을 입은 서정원의 활약상은 축구를 좋아하는 프랑스 아이들이라면 모두 알 정도였다.
아주머니의 아들은 프랑스 학생들에게 “난 세오와 같은 한국인”이라고 자랑을 했고 이후 아이를 바라보는 눈이 크게 바뀌었다는 얘기다.
서정원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인 한국과 멕시코전을 앞두고 프랑스 언론에서는 나와 호르헤 캄포스 골키퍼의 대결에 초점을 맞췄다.
168cm의 작은 키에도 순발력이 뛰어난 캄포스는 프랑스에서 꽤 유명한 선수였고 나는 현지 언론에서 아는 유일한 한국선수였다.
오히려 한국에서 인기가 덜 했던 것 같다. 만약 한국에서 유럽축구에 대한 관심이 지금의 10분의 1 정도만 됐어도, 그래서 여러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면 1998-99시즌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갈등
1998-99시즌 서정원에게 시련이 닥쳤다. 망코브스키 감독이 프랑스 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합류하면서 스트라스부르는 클로드 르 로이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맞았다.
(SPORTS2.0)
르 로이 감독은 1988년 카메룬 대표팀을 이끌고 네이션스컵 정상에 올랐고 세네갈, 콩코, 가나 등 주로 아프리카에서 감독 생활을 한 지도자다.
아프리카 통인 르 로이 감독은 스트라스부르에서도 아프리카 선수를 중용했다. 베스트11 가운데 9명이 바뀌었고 서정원은 벤치로 밀렸다.
1998-99시즌 서정원은 리그 4경기에 교체로 출전하는 데 그쳤다. 골도 없었다. 서정원을 벤치로 보낸 르 로이 감독의 결정에 스트라스부르 팬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경기마다 ‘세오, 세오’를 외쳤고 궁지에 몰린 르 로이 감독은 서정원을 경기 막판 교체로 내보냈다.
서정원은 “나도 화가 났지만 나보다 더 화가 난 사람들이 있었다. 스트라스부르 팬들이었다. 나와 관련된 보도도 무척 많았는데 ‘세오를 왜 선발로 내보내지 않느냐’란 질문에 르 로이 감독은 교묘하게 핵심을 피해 갔다.
르 로이 감독은 결국 나를 임대로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그때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서정원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구단에 연락도 없이 가족들과 훌쩍 여행을 떠났다. 무단이탈이었다.
복잡한 상황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던 서정원은 ‘K리그로 돌아가 1년만 있자’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여기에는 프랑스리그에서 인기 몰이를 했던 만큼 어느 때고 마음만 먹으면 유럽 무대에 다시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1998-99시즌 프랑스리그의 우승팀은 보르도였다. 공격수 실뱅 윌토르와 공격형 미드필더 요한 미쿠의 조합이 위력을 떨쳤다.
윌토르는 22골을 넣어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미쿠는 9골을 터트리며 팀 우승을 도왔다.
윌토르는 2000년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날로 이적했고 미쿠는 2000년 세리에 A의 파르마에 이어 2002년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으로 진출했다.
준우승을 차지한 올림피크 마르세유는 파브리지오 라바넬리와 플로랑 모리스가 27골을 합작했다. 라바넬리는 2000년 세리에 A의 라치오로 옮겼고 모리스는 이듬해 프리메라리가의 셀타 비고로 이적했다.
3위 리옹에는 17골을 몰아친 공격수 알랭 카베글리아가 있었고 4위 모나코에서는 공격수 다비 트레제게와 골키퍼 파비앙 바르테즈의 팀 공헌도가 높았다.
당시 30살의 노장이던 카베글리아는 빅리그 도전을 포기했지만 트레제게와 바르테즈는 2000년 각각 유벤투스와 맨유로 둥지를 옮겼다.
쾰른에서 발행되는 <익스프레스>는 서정원의 쾰른 입단 소식을 한글로도 전했다(위). 그러나 서정원의 쾰른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일간지 <아볼라>는 서정원의 벤피카 이적 소식을 보도했다(아래).(사진 제공=서정원)
21살의 신예였던 스타드 렌 소속의 공격수 샤바니 농다는 15골로 득점 3위에 올랐고 23살이던 몽트펠리에의 로랑 로베르는 11골을 넣으며 득점력을 갖춘 미드필더로 이름값을 높였다.
농다는 이후 세리에 A의 AS 로마로 이적했고 로베르는 프리미어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었다.
서정원이 몸담았던 스트라스부르는 1998-99시즌 리그 12위로 부진했다. 시즌이 끝났을 때 스트라스부르에 서정원의 이름은 없었다.
“사람은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난 그러지 못했다. 구단에 연락도 없이 여행을 간 게 잘못이다. 르 로이 감독의 뜻대로 임대로 다른 팀을 찾았어야 했다. 에이전트가 있었다면 보다 현명한 결정을 했을 텐데 그때는 주위에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시즌 도중 수원 삼성으로 돌아왔고 다시 유럽 진출을 꾀할 때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그걸로 유럽 빅리그 진출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조언
프랑스리그에서 가장 열정적인 팬을 보유하고 있는 팀으로 마르세유가 꼽힌다. 마르세유의 홈구장인 스타드 벨로드롬은 6만 명의 수용 규모를 자랑한다.
마르세유 팬들은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스타디움을 꽉 채우고 상대팀 선수들을 향해 거친 소리를 내뱉는다.
서정원은 “마르세유 원정을 갔는데 스트라스부르 팀 동료들이 ‘프랑스 말을 못 알아듣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라는 얘기를 했다. 6만여 팬이 온갖 비속어를 쏟아 내는 데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그만큼 마르세유 원정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박주영(23)이 이적한 모나코는 마르세유와 정반대다. 프랑스리그에서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은 곳으로 꼽힌다. 1만8천여 석인 모나코의 홈구장 루이 2세 스타디움은 빈자리가 꽤 많이 눈에 띈다.
서정원은 “모나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다. 그래서인지 유럽에서는 보기 드물게 축구 인기가 높지 않다. 술과 여자 그리고 도박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곳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박)주영이도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서정원은 몸 관리에 철저한 선수였다. 프랑스리그에서 뛰던 시절을 포함해 10년 넘게 프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 65~67kg의 몸무게를 유지했다.
일정한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모르는 노력이 뒷받침됐다.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탄산음료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서정원은 1kg이 늘어나는 것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축구선수는 몸무게가 1kg만 증가해도 경기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음주는 축구선수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다리 근육이 풀리고 그러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다치게 된다. 절제하는 생활 자세가 기본 가운데 기본이다. 더불어 경기와 관련된 준비를 빈틈없이 해야 한다. 유럽에서 뛰는 아시아 선수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제나 좋은 경기력을 보여야 한다. 어쩌다 한번 부진해도 그것으로 점수가 크게 깎이고 만회하기가 어렵다. 아시아 선수를 바라보는 유럽 사람들의 시각은 동남아 선수를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시각과 같다고 보면 된다.”
서정원은 선수 시절 경기를 잘 치른 뒤에는 이틀 동안 신문을 보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포르투갈의 일간지 <아볼라>는 서정원의 벤피카 이적 소식과 함께 예상 포메이션도 보도했지만 서정원의 벤피카행은 이뤄지지 않았다.(사진 제공=서정원)
“스스로를 컨트롤하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골이라도 넣으면 신문을 비롯해 주위에서 온통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분위기가 꼭 이틀 정도는 이어졌다. 그래서 그 기간에는 신문을 일부러 멀리 했다. 사람은 칭찬에 약하다. 칭찬에 익숙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자만심을 갖게 되고 현실에 안주하려고 한다. 나도 스트라스부르에 있을 때 그래선 안됐는데 객기를 부렸다. (박)주영이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서정원을 영입하려 했던 유럽 팀들
서정원(38)은 1997년 12월 프랑스리그의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하기에 앞서 적지 않은 유럽 팀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1991년 데트마르 크라머 올림픽대표팀 감독 시절 독일 분데스리가 팀들이 관심을 내비쳤고 이듬해 바르셀로나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FC 바르셀로나 이적이 추진됐다. 그러나 군 문제로 무산됐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맹활약한 서정원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유럽 팀들로부터 보다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았다.
1996년 겨울에는 독일 빌레펠트와 쾰른이 관심을 보였다. 쾰른에서는 선수단과 단 하루 훈련을 같이 했을 뿐인데 지역 신문을 통해 이적이 성사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서정원은 “훈련 다음 날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역 신문 1면에 한글로 ‘쾰른에 온 걸 환영합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쾰른과 빌레펠트는 이적료 등 조건에서 의견 차이가 커 이적이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스트라스부르로 옮긴 1997년 겨울에도 서정원은 애초 포르투갈리그의 벤피카로 이적하려 했다.
당시 벤피카는 누노 고메스와 조앙 핀투 등 스타 플레이어를 데리고 있었지만 포르투갈리그의 명문 클럽으로서는 초라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순위를 끌어올려야 했던 벤피카는 서정원을 영입하는 대신 ‘1998년 프랑스월드컵 예선에는 뛰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 벤피카 유니폼을 제작했고 입단 사진 촬영까지 마친 상황에서 서정원은 벤피카를 포기하고 프랑스 리그로 갔다.
프랑스리그 릴OSC가 서정원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릴은 그때만 해도 2부 리그에 속해 있었고 클럽의 자금 사정이 썩 좋지 않아 이적료를 분할 지급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안 되겠다 싶어 한국으로 돌아오려던 서정원에게 스트라스부르에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서정원의 능력을 높이 샀던 릴의 관계자가 친구 사이인 스트라스부르 부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좋은 선수가 있으니 계약하라’고 권유했던 것이다.
서정원은 “유럽의 적지 않은 팀들에게서 영입 제의를 받았고 이 가운데 내로라하는 명문 팀들도 꽤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이런 얘기를 해도 주위 사람들이 잘 믿지를 않는다. 그런데 이는 정말이다. 입단 테스트를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첫댓글 쎄오가 그 때 유럽에 있었어야 했음.... 뭐 그랬다면 2002년의 박지성은 없었을지도 -_-;;
오 그때 전 유럽리그에 관심을 가졌던 몇안되는 사람중 하나죠. 그때만해도 프랑스에 왠 강팀이 이렇게 많은가 했는데 프랑스가 3위 정도 였다니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