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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반여량이 들어선 곳은 서재(書齋)였다.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서가(書架)가 보였고, 언뜻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고서(古書)가 가지런히 정돈된 채 익숙한 냄새를
풍겨냈다. 책을 본 것이 얼마 만인가. 한때는 책만 읽어도 배
고픈 줄을 몰랐었는데.
곽가장에 온 지 나흘째.
자죽헌이라는 곳에서 구금(拘禁)되다시피 지냈지만 전혀 불편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번거롭지 않아서 좋았다. 반여량 자신이
방 안에서 한걸음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찾아오는 사람
도 없었다.
망일(望日).
그날까지는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그리운 한한을 떠올
리며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조금이라도 세파에 휩쓸리면 겉잡을 수 없이 분출될 것 같은
분노... 아니, 끝없이 무기력하게 침몰할 것 같은 좌절을 두려
워했다. 무섭다? 싫다? 반여량은 자신의 마음 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해질녘에 찾아온 무인은 귀찮았다.
그러나 반여량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야 해. 돈을 모아야지. 한한에게 보여 주는 거야. 나도
이렇게 돈을 벌 수 있다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뭐를 어쩌
자고... 그런다고 돌아올 여자도 아닌데... 생각은 나중에 하
자. 우선은 돈을 모으고...'
날이 저물고 있는가.
석양이 서가를 황금색으로 물들여, 서탁(書卓) 위에 놓인 황매
화(黃梅花)와 썩 잘 어울렸다.
"당신이 반여량인가요?"
나이 이십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 서탁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말을 건네 왔다.
때 한 점 묻지 않은 청초한 얼굴이었다. 피부가 곱고, 얼굴 윤
곽이 선명하여 아름답다는 찬사깨나 받았을 여인이었다. 음성
또한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디맑아 듣기에 편안했다.
그녀는 얼굴에 짙은 호기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이거나 아니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표시였다.
반여량이 본 여인은 전자(前者)였다.
눈빛이 맑았고, 영혼이 깨끗했다. 인간이 인간을 대하면서 느
끼는 감응. 속마음까지 읽어 낸 첫인상이었다.
"새삼스럽게 물을 필요가 뭐 있소?"
"호호호! 그렇군요. 느낌으로 묘혈을 찾는다면서요? 나경도 필
요 없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에요?"
"소저의 방명(芳名)을 알고 싶소만..."
"아! 내 정신 좀 봐. 내 이름은 곽소연(郭素娟)이라고 해요."
'곽소연! 곽가장주의 막내딸...'
생기발랄한 태도, 사람과 쉽게 사귀는 성격, 흑요석(黑曜石)처
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곽가장에 이런 여인은 오직 한사
람, 곽가장주의 오녀(五女) 곽소연뿐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을 만났군. 장주가 부르는줄 알았는
데.'
곽소연은 어려서부터 영민했다. 학문으로만 논한다면 장주의
다섯 딸 가운데 제일 탁월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무가
의 핏줄답지 않게 무공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라면
억지로라도 가르칠 수 있으련만 이건 도통 자질이 없었다. 기
본 무공만 익히는 데 범부(凡夫)보다 세 배나 더 오래 걸렸으
니.
장주는 너무 쉽게 자유를 주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득한 다음부터 그녀는 눈
만 뜨면 서재로 달려갔다. 이미 머릿속에 달달 외우고 있는 서
책인데도 끊임없이 읽고 탐구했다.
그렇다고 학업에 전념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태도인
사색적이고, 말이 없고, 진중하게 행동하는 면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산골에 틀어박혀 산나물이나 뜯고 자란 소녀처럼 거침
없이 행동했다.
"영락없이 제 엄마야. 어쩌면 저리도 닳았누."
남의봉(南衣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그러나 정작 장주만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엄마를 닮았
다는 말도, 행동을 조심하라는 말도.
"말해봐요. 정말 그래요?"
금빛 햇살이 그녀의 반듯한 이마를 지나, 곱게 빗은 치렁한 흑
발을 건드렸다. 부드럽게 애무하듯이.
"뭐가 말이오?"
"내가 말하는 것, 못 들었어요? 정말 나경도 없이 묘혈을 알아
낼 수 있냐요?"
곽모천과 남의봉은 금실 좋기로 유명했다.
홍세(洪歲) 십팔년,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원말(元
末)에 폐지한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부활시켰다. 정확히 오십
년 만이라 유생(儒生)들은 하늘에서 금은보화라도 떨어진 듯
술렁거렸다.
하지만 일부 독서가(讀書家)들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방관적
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익힌 학문을 펼치기보다
당장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현실이 다급했다.
남의봉의 부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무가와는 인연이 먼 가난한 서생의 딸.
길게 늘어진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고 서 있는 여인을 보는 순
간 곽모천은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여자만은
손에 넣어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결심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대가는 그리 크지 않았다. 농지(農地) 다섯 필지를 떼어 주는
것으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던 미녀를 품에 안았다.
자색이 무척 곱고 특히 비파 타는 솜씨가 일품이었던 여자.
앞만 보고 달려온 곽모천에게 남의봉은 편히 쉴 수 있는 안락
처였다. 비파 소리를 듣다보면 피곤하던 육신이 개운해졌고,
느슨하던 패기도 팽팽하게 되살아났으니까.
그러나 행복은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어도 바람처럼 흩어지는
것인가. 남의봉은 내리 딸만 다섯을 낳았고, 마지막으로 곽소
연을 출산하고는 마치 곽모천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듯 조용
히 눈을 감았다.
혼인한 지 구 년 만이었다.
사실 무가의 안주인으로 무공을 모른다는 것은 커다란 결점이
었다.
아름다운 미색, 섬세한 성격, 다재다능한 재능, 부친에게 배운
높은 학문을 지녔지만 곽가장을 찾아오는 무림명숙들과는 대화
가 통하지 않았다.
곽모천의 비통한 심정은 조문객(弔問客)들에게 그대로 전달되
었다.
울음을 속으로 꾹 눌러 참았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울부짖는 딸아이들을 품에
꼭 껴안았다. 곽모천의 그런 모습은 오히려 대성통곡하는 것보
다 더욱 애처로웠다.
당시 곽모천의 나이 서른일곱. 수없이 들어오는 중신에도 불구
하고 그는 외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하하! 그 사람은 죽지 않았어. 잠시 여행을 가더니만 돌아오
지 않는군. 하하! 신선 놀음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야.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마음만 먹
으면 언제든지 만나러 갈 수 있지."
그 후로 그는 정말 혼자 살았다. 오직 한 여인, 남의봉만을 가
슴에 품은 채. 혼기를 앞둔 남녀 무림인에게 곽모천 부부는 가
장 이상적인 부부상이었다.
반여량은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상기하며 말문을 열었다.
"나를 부른 사람이 당신인지 알고 싶소만..."
"당신! 지금 당신이라고 그랬어요?"
"..."
"그래요. 제가 불렀어요. 왜요?"
반여량은 할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
고 걸어나갔다. 순간,
쉬익!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며 곽소연이 물찬 제비처럼 날렵하게
날아와 앞을 가로막았다. 무공에 소질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녀
가 펼친 기본 무공만으로도 능히 범부 서너 명은 충분히 상대
하리라.
"지금 이 행동... 무슨 뜻이야? 나하고는 말하기 싫다는 뜻이
야?"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말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
다. 표정도 앙칼지게 변했다. 아침에는 화창했다가 정오에는
폭우가 퍼붓는 여름 날씨의 급변하는 변덕.
"나에 대해서 들었소?"
"호호호! 들었으니까 부른 것 아냐?"
곽소연의 웃음 소리가 날카로워지고, 말투 또한 하대말로 바뀌
었다. 그녀 역시 곽모천의 핏줄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다른 곳
이라면 몰라도 남창부 곽가장에서 곽씨 성을 쓴다면 생활 자체
가 서민들과는 틀렸다. 태어나면서부터 능라주단으로 만든 강
보(襁褓)에 몸을 뉘었다. 먹는 음식도, 입는 의복도, 사용하는
일상용품들도 서민들은 감히 꿈도 꾸어보지 못하는 화려한 것
들이었다.
생활만 편한 것이 아니다. 만나는 사람들이란 모두 명문가의
자제들이었다.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지 않던가. 혹여
지체가 조금이라도 낮은 사람은 깍듯이 예를 표하며 우러러봤
다.
그녀는 겸손했다. 하나, 일반 서민들이 보기에는 그리 겸손하
지 않았다. 그녀는 검소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은
역시 검은 비단에 하얀 꽃을 수놓은 화려한 성장(盛裝)이었다.
그녀는 예의가 발랐다. 그것은 아직까지 이토록 대놓고 무시하
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곽소연은 난생 처음으로 무시를 당한듯 얼굴이 파랗게 질려 파
르르 떨었다.
"그럼 비키시오. 나는 그대의 부친에게 일을 위탁받은 사람이
오."
"호호호...! 그러니까, 뭐야? 아버지와는 상대할 수 있어도 나
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야?"
"나는 전문가(專門家)요. 전문가에게 가치를 묻는다면 돈이라
말할 수 있지. 감여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대가를 지불
하고 물으시오."
'한한... 나는 변할 거야. 이렇게...돈, 돈... 돈 때문에 떠났
다면... 한한...'
반여량은 곽소연에게서 젊은 여인의 체취를 맡았다. 한한이 늘
풍겨주던 냄새, 알싸한 체취... 그것은 하얀 재가 되어 가라앉
은 마음을 다시 휘저어 놓았다.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은
한한이 아닌 곽소연이었다. 그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냉
엄한 현실이었다.
그는 문득 상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상방에 가면 꼭 한한이
웃으면서 반겨줄 것 같았다. 미련인가? 미련이라도 좋았다. 꿈
에서라도 그녀와 손잡고 풀밭을 뒹굴면 그만이었다. 그 이상
무엇을 바라랴.
반여량의 눈에서 처연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곽
소연에게 전달되었다. 고뇌가 물결치는 눈빛, 창백하고 피곤한
얼굴, 영혼의 샘이 말라버린 고독한 방랑자의 몸부림.
'이 남자... 애절한 사연이 있군. 일가붙이가 없다고 들었는
데?'
"좋아요. 가치를 돈으로 따진다면 드려야겠군요. 그럼 될까
요?"
"좋소."
"얼마나 드리면 되죠?"
"감여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알고 싶소?"
"전부요. 동기감응이란 것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은화 열 냥이요."
곽소연은 반여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은화 열 냥이면 네 식구가 반년은 호의호식 할 돈이었다. 그러
나 곽소연에게는 마음에 담을 금액이 아니었다. 문제는 반여량
이라는 사람 자체였다. 뭇청년들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안달들
인데 이 사내는... 그녀가 만났던 사내들과 다른 것은 분명했
다. 그리고 그 느낌은 신선했다.
곽소연은 품에서 전낭을 꺼내 통째로 넘겨주었다.
"받으세요. 얼마나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열 냥은 넘을 거예
요."
전닝은 묵직했다.
곽소연의 말대로 열 냥은 족히 넘을 무게였다. 하지만 반여량
은 전낭을 열어 은화 표면에 새겨진 자호(字號)와 봉인(封印)
을 일일이 확인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한한 때문에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시
작한 감여지만 셈에는 그리 밝지 못했다. 사부가 가르쳐 준 도
의(道義)를 저버릴 수 없었고, 천성이 재물과는 거리가 멀었
다. 감여비를 받기는 했지만 액수를 말한 적도 없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성의만 표시하면 웃으며 받아들었
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지련다. 돈을 모으기로 작정했으면 악착같
이 모아야 한다. 누군가 인색귀(吝嗇鬼:구두쇠)에게 물었다지.
어떻게 하면 돈을 모을 수 있느냐고. 인색귀는 그 사람을 천길
벼랑으로 데려가 동아줄을 타고 내려가라 했단다. 그가 조금
내려갔을 때, 한 손을 놓으라고 했다나. 그리고는 남은 팔마
저.
"이 팔마저 놓으면 저는 떨어져 죽습니다."
"바로 그거다. 돈이란 놈이 수중에 들어오면 꼭 쥐고 놓지 마
라. 지금 심정으로, 돈을 놓으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그러면
돈이 도망가지 않아."
그때는 웃고 말았는데...
은화는 모두 열 일곱 냥이었다.
반여량은 전낭을 품에 찔러넣고 곽소연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물어보시오."
"딩신이란 사람은...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질문이오? 그런 말에는 대답해 줄 수 없소. 내가 아는 것은
장의와 감여뿐이오."
"허! 꼭 이래야 하나요? 좋아요. 그럼 질문을 하죠. 저도 돈을
지불했으니 대가를 찾아야죠. 처음 질문을 다시 할게요. 어떻
게 나경도 없이 묘혈을 찾을수 있죠?"
"흠... 서재가 아름답군. 깔끔히 정돈되었고... 보기에도 산뜻
해 보이고..."
반여량은 창가로 걸어가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이 서재가 누구 서재인지 알고 싶소만...?"
"제 서재예요. 그런데 왜 엉뚱한 말만 하는 거죠? 저는 나경도
없이 어떻게 묘혈을 찾느냐고 물었어요."
곽소연의 눈초리가 휘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런 모습 또한
그녀의 미모를 손상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팔딱거리는 맥박
소리가 들리는 듯해 보기 좋았다.
"갑술년(甲戌年) 생(生)이니 올해 스물한 살. 자존심이 강하
고...호오! 마음을 노출시키지 않는군. 겉으로는 발랄하지만
속으로는 움츠러드는 성격. 맞소?"
'스물한 살이라. 곽가장 여인들은 가법에 따라 스물한 살이 되
면 혼인을 한다. 올해가 혼인할 나이군.'
"아...!"
곽소연은 짧은 경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했는지
곧 그녀의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피잇!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걸요? 남창부 사람이라면 제 성
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다 알아요. 나이는 물론이고. 점복
술사(占卜術士) 같은 대답 말고, 감여가다운 대답을 해봐요."
곽소연은 볼우물을 함박 지으며 싱그럽게 웃었다.
"나는 남창부에 처음 왔소. 그리고 온 다음에는 줄곧 자죽헌에
서 지냈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소. 보아하니 이
서재는 감여가의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리 어
렵지 않소. 서재의 출입문이 북쪽이니 자방(子方), 좋아하는
색이 검은색 같은데 그러면 이것도 역시 자색(子色). 그런데
서탁의 위치는 자방에서 동(東)으로 약간 틀어진 북북동(北北
東), 이는 축방(丑方)이지. 원방파 감여법."
"..."
"원방파에서는 십이신살(十二神殺)을 중시하지. 재살(災殺)은
출입문, 좋아하는 색깔에 영향을 미치고, 천살(天殺)은 서탁의
위치. 그중 재살이 자방, 천살이 축방인 사람의 생년은 인
(寅), 오(午), 술(戌) 년생. 인년생은 스물아홉이 아니면 열일
곱인데 이건 아니고, 오년생은 스물다섯 아니면 열셋... 술년
생은 스물하나 바로 소저의 나이지."
곽소연의 눈망울이 초롱해졌다.
입고 있는 의복이 허름하고, 하는 행동이 궁상맞아 호감이 많
이가신 상태였는데 말을 들어 보니 전혀 색다른 세계가 아닌
가. 단순히 사물이 놓인 형태만 가지고 주인을 짐작할 수 있다
니. 곽소연은 처음 접해 보는 신세계에 무섭게 빨려들어 갔다.
"놀라워요. 감여가 이런 것인 줄 몰랐어요. 솔직히 조금 무시
했는데... 사과할 게요. 괜찮죠? 다음은요? 빨리 말해 봐요."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직접 찾아볼 의향이 있
소?"
"무슨 소리예요? 설마 묘혈을 같이 찾자는 말은 아니죠?"
"바로 맞췄소."
"피잇! 엉터리. 곽가장에서 어떻게 묘혈을 찾아요. 설마 그 핑
계를 대고 빠져나가려는 것은 아니겠죠?"
반여량은 곽소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역시 순진했다. 이런 여인이라면 동기감응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여량은 곽소연의 집중력을 믿기로 작정했다.
"석양이 아름답소?"
"아름답죠. 석양이 싫다는 사람도 있나요?"
"다시 한 번 보겠소?"
곽소연은 의아한 눈으로 반여량을 바라보더니 창문을 향해 고
개를 돌렸다.
순백의 피부와 어울린 황금 물결, 얼마나 아름다은가?
곽소연은 잠시 저녁 노을을 감상하다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아름답소?"
"그래요."
"좋소. 이제부터 나경 없이 어떻게 묘혈을 찾는지 가르쳐 주겠
소. 같이 찾아봅시다. 자, 눈을 감으시오."
곽소연은 재미있는 장난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입가에 미소를
띠며 눈을 감았다.
"감았어요."
"쉿! 이제부터는 말을 하지 마시오. 오로지 내가 하는 말만 들
으시오. 마음속에 의혹이나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차분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오로지 내 말에만 귀를 기울이시오. 준
비됐소?"
"..."
"좋소. 이제는 서재에서 떠납시다. 나는 말만 할 뿐 같이 가지
않소. 여행은 혼자서 즐기시오. 자, 살아 오면서 가장 마음이
편했던 장소로 갑시다. 산이 될 수도 있고, 들이 될 수도 있
고, 바다가 될 수도 있소. 가장 편하고 행복했던 시절, 그 장
소로..."
곽소연은 늘 혼자였다.
아버지는 늘 분주하셨고, 언니들은 무공 수련에 바빴다. 무공
에 소질이 있으면 언니들과 같이 나눈 이야기가 더 많았을 텐
데.
'무연이는 몇 초식째 수련 중이지?'
'환육초(幻六招). 언니는?'
'호호! 나는 이제 환오초야. 우리 자매들 중에서 큰언니를 빼
고는 무연이가 제일 나은 것 같애.'
'둘째 언니는?'
"..."
어느 대화에도 끼여들 곳이 없었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 주는
사람은 오직 내랑( 娘:유모)뿐이었다. 하지만 내랑도 그녀 나
이 아홉살이 되던 해, 곽가장을 떠났다.
곽소연은 점차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무공을 익히지 않
아도 좋다는 허락을 얻은 다음부터는 오로지 서재에서만 살았
다. 고서를 읽고, 책 속의 세상에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
고...
그녀의 사고(思考)는 깊어졌고, 세상을 보는 안목은 넓어졌다.
그러나 서재 밖으로 나서면 예전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행동이란 것을 잘 알기
에.
곽소연이 가장 마음 편한 곳, 그곳은 바로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이제 노을을 봅시다.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아
름답지 않소?"
곽소연의 입가에 잔물결이 일렁거렸다. 그러나 반여량은 그 웃
음을 보지 못했다. 자신도 눈을 감고 감정을 동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한한과 마주 앉아 석양을 바라보던 들녘으로 빨려 들어갔
다.
'호호호! 해가 빨리 져서 싫어.'
'이 다음에... 더 넓은 들녘에서 보게 해줄게.'
'지금. 지금 그래줘.'
"..."
'지금. 그래 달라니까.'
한한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때는 그 소리조차 아름다
웠다. 꼭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해거름이 밀려온다고 상상해 봅시다. 빛살이 내 몸을 지납니
다. 아! 몸이 금빛 물결로 변하는군요. 마음도 변합니다. 그리
고 나는 속에 둥둥 떠다닙니다. 물결 따라 가 봅시다. 내 마음
을 가장 편하게 해주던 것... 그것을 찾아서."
반여량이 가장 좋아한 것은 서적, 그 중에서도 감룡경이었다.
그 속에는 행복이 담겨 있었다.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지은 집
이 아니라 집다운 집에서 한한과 단란한 웃음꽃을 피웠다.
'양택으로 적합한 지형에 방위까지 고려하여 지은 집, 그 안에
서는 모두가 행복할 거야. 모두가...'
곽소연이 가장 좋아한 것도 서적이었다. 그녀는 많은 서적들
가운데 유독 묵자(墨子)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유가(儒家)
의 인(仁)과 같이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유가와는 달리 남기는
것이 없어 마음에 들었다.
겸애(兼愛)는 남김없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는 존비친소
(尊卑親疎)를 전제로 한다. 사랑에 전제라니.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한다면 아낌없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라고는 누구를 죽였다는 말이나, 아니면
누구를 굴복시켰다는 말뿐이라서 더욱 사랑에 굶주렸는지 모른
다.
'자신(自身), 자가(自家), 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
人), 타가(他家), 타국(他國)도 사랑해야 해.'
"이제는 갑시다. 가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했던 것을 만져
봅시다. 그러면 더욱 마음이 온화해지고 편안해질 겁니다."
곽소연은 신들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서기로 걸어갔다.
묵자가 놓여 있는 곳은 눈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곽소연은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다.
"집어요. 마음놓고... 그것은 나에게 평안을 안겨 줄 겁니다."
곽소연은 여러 권이 겹쳐 쌓여진 곳에서 서적 한 권을 집어 들
었다.
"이제 눈을 뜹시다."
눈을 떴다. 먼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응? 서 있다니? 서탁
에서는 언제 일어났단 말인가? 그리고 언제 걸었을까? 손에 들
린 것은...? 하지만 마음은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했다. 정말
붉은 노을속에 푹 잠겼다 나온 사람처럼.
"묵자."
그녀는 고요를 깨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묵자를 좋아하는군요. 겸애교리(兼愛敎理)라... 좋은 책입니
다."
"지, 지금 이게...! 사술이야!"
"동기감응입니다. 소저의 생각을 읽었을 뿐,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생각이 생각을 움직였고, 몸이 따랐죠. 이것이 나경 없
이 묘혈을 찾는 비법."
"이해할 수 없어!"
"죽은 시신에도 삼혼칠백(三魂七魄)이 있습니다. 신(神)과 귀
(鬼). 신귀는 다시 죽습니다. 그래서 죽은 악마, 계(繼)와 영
혼(靈魂)으로 변하죠. 우리의 생각이 일치했듯이 시신과 영
(靈)이 일치하면 감응을 느낄 수 있습니다."
"...!"
곽소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모양새는 허름했지만 예
지(叡智)에 빛나는 눈동자, 무공을 익힌 사람처럼 다부진 몸,
곽가장 여식인 줄 알면서도 전혀 비굴하지 않은 기품. 그리고
지금 보여준 감응은...
반여량은 호기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사내였다.
* * *
"어떻습니까?"
"사술이 아닌가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산귀가 보증했으니 믿어도 좋을 겁니
다."
"으음...!"
곽소연은 침음을 터트렸다.
그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림은 정대주 동종관이였
다. 그는 올해로 회갑(回甲)을 맞았다. 귀공자였던 용모에는
주름살이 가득했고, 새까맣던 머리는 하얀 백발로 변했다. 게
다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문사(文士)였고, 정대의 특성상 생각
을 많이 해서인지 요즘 들어 잔병치레가 급격히 심해졌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린 탈명화검이 일흔넷, 삼각 중 하나인
일심각(一心閣)을 장주의 셋째 사위 홍홍록록(紅紅綠綠) 윤명
(尹明)에게 물려주고 후인양성에 부심하고 있는 혈영일검이 예
순다섯, 이하극륜(二河極輪)이 예순둘, 동종관만 회갑연을 치
르고 나면 곽모천이 곽가장주를 맡을 당시의 혈우(血友) 중 생
존한 자들은 전부 육순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동종관은 감상에 젖어들던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버님을 속일 수는 없어요."
"속이자는 게 아닙니다. 대소저(大小姐)를 바른 길로 인도하자
는 것입니다. 이건 직감인데... 대소저가 저리 되신 것은 분
명히 이번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려서 잘 기억나시지 않겠
지만 대소저가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 열 살. 옥순산 전투를 치
른 다음이죠.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탈명화검이 사라진 것과 때
를 같이 합니다."
"설마...?"
동어구천 동종관은 곽소연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대소저 곽사연(郭思娟)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
은 강서 제일 패자인 곽모천도 어쩔 수 없었다.
곽사연은 홍세(洪歲) 이십년에 태어났다.
타고난 재지가 총명하여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고, 무가
(武家)의 핏줄답게 무공에 대한 성취도 높았다. 삼혼검법(三魂
劍法)의 진수(眞髓)를 오래 전에 터득하여 절정고수 반열에 들
어선 절세미녀.
당연히 많은 명문세가에서 청혼(請婚)이 쇄도했음은 물론이었
다. 그러나 곽가장에서는 좋은 혼사 자리를 모두 사양할 수밖
에 없었다. 느닷없이 검을 뽑아 휘두르는가 하면 곽가장을 찾
아온 무림(武林) 명숙(名宿)에게 욕지거리는 물론 침 세례까지
퍼붓는 사람을 어떻게 혼인시킨단 말인가. 생일 선물로 받은
명마(名馬) 한혈마(汗血馬)의 목을 자르는가 하면, 비무를 한
답시고 수하 문도의 손을 자르기도 했으니. 그녀의 기행을 열
거하자면 열 손가락을 다 꼽아도 모자라리라.
결국 보다못한 장주는 여산(麗山) 구원사(鳩圓寺)의 주지스님
인 운종(雲鍾) 스님에게 여식을 맡기고 말았다. 고민 없는 가
정 없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동종관은 기회를 놓칠세라 다그쳤다.
"쿨럭! 맞을 겁니다. 오소저도 아시겠지만 장주님은 포기가 빠
른 분이십니다. 만약 이번 일과 연관이 있고, 장주님의 의향대
로 일이 해결된다면 대소저는 영원히 곽가장에 돌아오지 못합
니다. 쿨럭!"
"어쩌면 좋죠?"
"직접 확인해 보셨지 않습니까? 그자의 능력은 예사롭지 않습
니다. 순수하게 명당을 구할 요량이라면 산귀로 충분할 겁니
다. 비밀에 부쳐질 성질도 아니고요. 여기 오기 전에 들은 소
식이 있는데, 일심각 전부가 이번 여행에 동참한다 합니다. 아
직까지 곽가장에서 이런 예(例)는 없었습니다."
"예에? 그런 소식을 어떻게?"
'소저, 정대올시다. 중원의 모든 정보를 떡 주무르듯이 주무른
다는...곽가장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감지하지 못한대서
야.'
"허허허! 소저가 반여량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한 놈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정대의 눈은 있습니다. 지금은 이 정도만 알아
두십시오. 소저는 아무 생각 마시고 제 말씀대로 따라가십시
오."
"제가 따라간다고 무슨 힘이 되나요? 아버님은 하시겠다면 하
시는 분이잖아요?"
"우리 정대는 입을 맞췄습니다. 대소저님을 곽가장에 돌아올
수 있도록 미거(未擧)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할 겁니다. 아시잖
습니까? 우리 정대에는 쓸데없이 머리만 굴리는 퇴물(退物)들
이 있다는 것을... 허허! 중간에 돌아가는 상황을 알면 적절한
대책이 나올 겁니다. 클럭! 저희 생각이 틀렸다면 그것처럼 다
행스런 일은 없고요."
"허락하시지 않을 거예요."
"부탁이나 드려보시지요. 되고 안 되고는 하늘의 뜻 아니겠습
니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데 좋은 소식이 있겠
죠."
동종관은 한시름 놓았다.
그는 곽소연이 동행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확신했다.
신계각주의 밀명을 받자마자 바로 떠오른 사람이 곽소연이었
다. 천성이 착해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 말
이 진심인 줄 아는 여자. 됐다. 이로써 신계각이 빠진 여행에
눈과 귀가 생겼다. 오소저 곽소연은 탈명화검의 죽음에 대한
단서를 충실히 전달해 주리라. 장주가 허락한다면.
그러나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동종관은 자신이 직
접 나설 결심이었다. 미행(尾行). 곽가장 무인이 곽가장 무인
을 미행한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알았어요. 부탁이나 드려 볼 게요. 하지만 안 된다고 하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설혹 이번 일이 잘 안 되더라도 언니를
위해 힘써 주세요. 절에 갇혀 있을 언니를 생각하면..."
곽소연은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 * *
"허허허! 철이 없구나. 어디를 따라간다고? 허허허...! 쓸데없
는 소리 말고 장(莊)에서 책이나 읽고 있거라."
대답은 역시 거절이었다. 하지만 곽소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
다.
"처음으로 드리는 부탁이잖아요. 저는 무공이 약하기 때문에
강호를 돌아다닐 기회가 없었어요. 이번에 다녀오지 않으
면..."
"유람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야.
괜히 정신만 어수선해져. 정 여행이 하고 싶다면 대주 두어 명
을 딸려 줄 테니 다른 곳으로 가거라."
"흑...!"
곽소연은 서러운지 눈물을 흘렸다.
"저는... 어머님 얼굴도 몰라요. 제가 왜 이번 여행에 따라가
려는지 아세요? 정성을 다해서 어머님을 모시고 싶어요. 그러
려면 묘(墓)를 대하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잖아요. 성현의 말씀
이라면 서적을 통해 배우면 되지만 묘를 대하는 것은... 아버
님, 소녀가 언제 이런 부탁을 드렸나요? 이번 기회에 감여가와
같이 다니면서 묘를 대하는 근본 마음을 배우고 싶어요."
곽모천은 놀란 듯 딸을 쳐다보았다.
"묘를 대하는 근본 마음이라? 허허허...! 그것도 좋겠지. 이제
야 철이 들었구나. 좋다. 따라가거라. 단 말썽부리지 말고."
"저, 정말이세요?"
곽소연은 놀란 듯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불가능이 이루어졌다. 동어구천 동종관은 단 일 할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신계각까지 제외시킨 여행에 무공도 형편없는 딸
을 동행시키다니.
'이건 너무 이상한데?'
동종관은 정대가 엉뚱한 일에 끼어들지 않았나 싶어 잠시 혼란
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일에 늘 주축이 되었던 신계각을 제외
하고 일심각에 일을 맡긴 저의가 무엇일까? 신계각에 알리기
싫었다면?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다. 신계각은 몰라야 하고 일
심각과 딸은 알아도 된다? 그런 일이 무엇일까? 무엇...?
생각을 깊게 하자 그의 마음은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어쨌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남은 것은 결과. 동종관
은 곽소연에게 줄 밀마(密碼:암호)를 챙겨 들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ㄳ
즐독 합니다!
즐강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합니다 ㅡ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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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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