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자아(atman)’ ‘중생(sattva)’ ‘영혼(jiva)’ ‘개아(pudgala)’
<금강경>을 좋아하고 그 뜻을 새기면서 거기에 나오는 4상인 아.인.중생.수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골몰하는 가운데
도올의 금강경 해설을 만났는데.. 그 안에 아상은 atman, 인상은 pudgala, 중생상은 sattva, 수자상은 jiva라고 하고..
각각에 대한 해석을 보고 4상에 대한 이해가 자리잡았다.
그 후 남방불교를 공부한 학인들의 금강경 설명을 보면서 도올과 비슷한 설명을 하는 것을 보고
4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알면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금강경>을 그 당시 중국인에게 한문으로 역한 구마라집 법사의 천재적 번역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구마 법사의 천재성.. 무슨 말인가..
구마라집의 4상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수자상은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부드럽지 못하지만..
<금강경>이 나올 당시 인도 상황을 알지 못한 중국인이지만 한문인 아.인.중생.수자를 이해하면
<금강경>에서 4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문만 보아도..
보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아니 된다고 하니..
보살은 나(와 너)라는 모습이, 사람(과 사람이 아닌 자)라는 모습이, 중생(과 중생이 아니다)라는 모습, 수자(와 단명하는 자)라는 모습이.. 즉 분별하는 모습이 있으면 아니 되는 거구나 하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이제는 당시 인도 상황을 알 수 있는 지식이 풍부하니.. <금강경>이 나올 당시 4상의 뜻을 보면..
아상인 아트만과 수자상인 지바는 석가세존 당시 부터 있던 브라만교와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자아이고,
인상인 푸드갈라는 상좌부 불교 안에서 윤회하는 자아가 있어 그것을 푸드갈라라 이름한 부파가 있고,
중생상은 대승불교에서도 부처가 되기 전 까지 중생이란 자아가 있다고 믿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보살은 세존께서 항상 강조하는 나는 아트만이라는 주인인 존재가 있어..
그 나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알면 아니 된다는 무아[안아트만]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중생상 sattva.. 부처가 아닌 나는 중생이라 하면서..
아상 atman.. 아트만과 같은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가.. 또는
인상 pudgala.. 윤회를 믿는다면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가.. 또는
수자상 jiva.. 그리고 부처가 되면 중생은 사라지고 영원히 부처로 있을 것으로 믿고 있지 않는가..
아니다. 그러면 아니 된다. 하여 보살은 없어야만 한다. 무엇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영원상이!.
그러기에 보살이라 하면 4상이든 9상이든.. 핵심은 자아라는 자가 있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4상을 한글로 설명하면서.. 자기중심, 인간중심, 중생중심, 생명중심이라고 새기어..
보살은 자기중심, 인간중심, 중생중심, 생명중심이라면 보살이 아니라고 새기는 곳이 있어 눈길을 멈추게 한다.
무아란 자기 중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이 될 수 없고, 중생 중심이면 아니되고, 생명이 중심이 되면 아니된다는 것으로..
무아 설명을 자기 중심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생명 중심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생명 중심이 아니라면 무엇이 중심이라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4상을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보살은 스스로 주체인 자아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니..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 주체인 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에
내가 말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는 게 아닌..
말하는 자를 나라 하고, 생각하는 자를 나라 하고, 행동하는 자를 나라고 하며..
내가 말한다와 말하는 자를 나라고 하는 것의 차이를 알도록 한다.
다시 말하지만 보살이 4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무아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 <금강경>의 4상을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불교 식의 표현하는 방법으로..
네 가지 각각은 <금강경>이 나올 당시 그 사회에서 그리고 불교 안에서 인정하는 자아 존재를..
꼭 짚어내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금강경>의 태도를 바로 보고 있다면..
불교 전법사는 현대인이 인정하는 자아를 짚어내어 보살은 그런 자아가 있으면 아니 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자아는 무엇인가?.
현대는 과학 시대라 하듯.. 유물론적인 과학적 사고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1. 유물론의 귀결은 나의 인생은 단 한번 뿐이라 하듯 지금 존재하는 자아 ego를 의심하지 않는다.
즉 이 몸과 생각의 주체 또는 주인이 있고, 그 이름을 에고라 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은 몸과 생각의 주체인 자아 ego가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2. 기독교는 천국을 주장하며 천국에 영원히 사는 자아 soul가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영원한 자아 soul가 있다고 믿으면 보살이 아니다.
3. 그런가 하면 불교 안에서는 죽어서 가는 극락이 있다고 믿어 돌아가시면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극락에서 영생하는 자아 jiva가 있다고 하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
그런데.. 불자로서 극락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금강경>을 공부하는 불자라면 극락이란 아라한이 되기 전인 수다원이나 사다함, 아나함에 이른 자가 머무는 곳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여 보살이라 하면서 에고, 천국, 극락이 있으면 보살이 아님을 분명히 보아야만 한다.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보살은 4상이 없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이다.
덧붙여 상(相)은 상(想)이 고체처럼 단단한 존재가 된 상태를 말한다.
아상(相)은 자아라는 개념이 존재처럼 굳어있는 게 된다.
그러니 아상(相)을 없애는 작업은 아상(想)을 없애는 작업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