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 Skagerrakschlacht, 1916년)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 Skagerrakschlacht)은 1916년 5월 31일 ~ 6월 1일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세계 해전사상 유일하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함대가 서로 부딪친 대해전이다. 독일 측에서는 스카게라크 해전이라고 부른다.
20세기 초반 당시 강대국 국력의 상징이었던 전함은 그 중요성만큼이나 귀중하게 다뤄져 실전에서 대함대가 격돌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해전을 제외한 기타 해전은 2~4척 규모의 분견대 단위로 작전을 나가다가 순양함이나 순양전함 한두척이 가라앉거나 피해를 입는 양상의 해전이 벌어졌고,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그런데 양국 합쳐 드레드노트급 전함만 44척이 동원된, 근대 이후 유일무이하다 할 수준의 대해전이 바로 유틀란트 해전이다.
2. 상세
독일은 1900년대 초반 해군력을 급속히 키워가며 영국이 가진 해상지배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애초 독일은 영국이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영국이 지중해 등지에 전력을 분산할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실제로 영국이 해군전력을 스코틀랜드 북방의 스캐파플로에 집중, 북해를 봉쇄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독일 해군은 영국 대함대(Grand Fleet)를 일부 끌어내 축차적으로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전략을 내세웠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1916년 5월 히퍼 제독이 이끄는 순양전함 전대가 미끼용으로 먼저, 그리고 쉐어 제독이 이끄는 본함대가 뒤를 이어 출격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개전 초 침몰한 독일 해군 함정에서 암호표를 입수해 독일 해군의 무선 통신을 거의 모두 감청해낼 수 있었다. 때문에 영국의 존 젤리코 제독은 이참에 독일의 대양함대(High Sea Fleet)를 때려잡기 위해 낚인척 데이비드 비티 제독의 순양전함 전대를 먼저 내보내고 대함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총 보다시피 총 전력에서 영국이 확실한 우위를 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데이비드 비티 제독이 지휘하는 제1순양전함전대와 히퍼 제독이 지휘하는 정찰함대의 전력차이는 10:5이었으나 비티와 에반 토마스간의 신호 미스로 전함전대가 순양전함들과 분리되게 된다. 이 상태에서 비티는 히퍼가 지휘하는 정찰함대를 발견하고 그대로 공격에 들어가면서 총 전력에서는 2:1이지만는 실제로는 6:5로 감소한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된다. 거기다 영국측은 사격 배분의 실수로 독일 순양전함 한척이 공격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공격하게 놔두게 된다. 결국 전투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함 라이온이 대파당하고 20분 간격으로 인디퍼티거블과 퀸 메리 2 척의 순양전함이 격침당하는 등 고전을 겪었다. 오죽하면 전대사령관인 비티 제독이 기함의 함장에게 "오늘따라 우리 망할 배들이 뭔가 문제가 있는것 같다."면서 낙담할 정도였다. 다행히 뒤쳐졌던 전함전대가 합류하여 히퍼의 함대에게 반격을 가해서 다시 영국측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독일의 주력함대가 이미 바다로 튀어나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비티가 후퇴하기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때 5 전함전대는 또 신호를 못받아서 뒤쳐지게 된다. 덕분에 5전함전대가 독일 주력함대에게 포탄 몇발을 얻어맞기는 했으나 큰 피해는 아니었고 비티는 독일 함대를 젤리코가 지휘하는 주력함대쪽으로 유인하기 시작한다. 이후 비티에게 후드 제독이 지휘하는 제3순양전함 전대가 합류하게 된다.
독일 함대는 영국 주력함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신나게 영국 함대를 추격하였고 젤리코는 독일 함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단종진을 치고 독일 함대를 T자로 가로지르면서 포격을 가한다. 그제서야 영국 주력함대의 존재를 알아차린 독일의 셰어 제독은 서둘러서 함대를 반전시켜서 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20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고 영국은 23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으며 제3 순양전함 전대의 기함 인빈시블이 탄약고 유폭으로 격침되고 독일 순양전함 뤼초우가 심한 손상을 입고 무력화된다. 그러나 셰어는 이 상황에서 다시 함대를 반전시켜서 영국 함대에게 들이미는(...) 오판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젤리코는 또 한번 독일 함대를 T자로 가로지르면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 함대를 난타하게 되고 셰어는 다시 한번 후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37발의 명중탄을 기록한 반면 독일은 2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였을 뿐이다. 셰어는 다시 한번 후퇴하였고 영국 함대의 전열을 돌파하기는 불가능하고 야간에 후퇴해야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후퇴과정에서 주변 경계 및 기타 업무를 맡은 순양함 이하급의 보조함선간의 야간전이 더 치열했다. 게다가 독일의 함대 주력이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영국의 순양함과 구축함이 형성한 경계선을 힘으로 돌파하면서 오히려 난전 자체는 야간과 후퇴과정에서 심했다. 물론 상대의 급수가 너무 차이가 나는지라 보조함끼리의 전투는 영국이 우세했지만, 독일 함대 주력과 영국 보조함의 전투는 영국이 밀려버리는 사태가 전개된다.
전체적으로 영국은 순양전함 3척, 장갑순양함 3척, 구축함 8척 총 11만 3천 3백톤 규모의 손실을 입은 반면, 독일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경순양함 4척, 어뢰정 5척 총 6만 2천 300톤의 손실을 입는데 그친다.
3. 결과
겉으로 보이는 영국의 전술적 패배원인으로는 도거뱅크 해전의 교훈으로 독일 전함들이 탄약고와 포탑에 철저한 방염대책을 추가한데 반면 영국은 속사에 주력하기 위해 포탑내에 적정량보다 많은 포탄과 탄약을 쌓아놓는 등 탄약의 안전한 취급에 대해서는 기존보다 더 소홀해졌고, 이것이 포탑/바벳을 뚫고 들어온 적탄에 포탑과 양탄기에 쌓인 탄약들이 유폭하며 함을 폭침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티제독의 순양전함 전대에서 특히 부각되었는데 속사에 집중하느라 안전대책과 명중률에 소홀해졌고 이에 대해서 젤리코 제독이 지적을 했음에도 반발하고 무시했고 그 결과 유틀란트 해전에서 순양전함이 폭침하면서도 전과는 거의 올리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정작 본인의 기함은 대파되었지만 살아돌아왔다.
당장 독일의 순양전함들은 미친듯이 두들겨 맞고 거의 침몰 직전까지 몰렸지만 강도높은 훈련과 이전 해전들을 분석해 얻은 결론들을 바탕으로 한 잘 짜여진 메뉴얼대로 응급수리를 하고 탄약고를 재빨리 침수시켜 유폭를 막는 등 적절한 대응으로 결국 살아남았다. 물론 건조당시 예상했던 적의 화력을 훨씬 능가하는 15인치 철갑탄을 몇 발이나 맞았으므로 살아서 돌아왔을때 자이틀리츠는 침수가 심해 배의 흘수가 너무 깊어져서 입항이 힘들 정도로 손상이 심해 장기간의 수리가 요구되어 한동안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전술적인 측면에 한정하더라도 독일의 압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격침된 함정중 1급 전력은 영국의 퀸 메리와 독일의 뤼초우뿐이다. 영국의 인빈시블과 인디패티거블은 비교적 오래된 함정이라 비교적 가치가 적어서 손해이기는 하지만 앞의 두 함정만큼의 손해는 아니다. 그리고 독일의 포메른은 아예 가치가 없는(...) 프리드레드노트 전함이고 격침된 영국의 장갑순양함 3척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한편 침몰한 독일의 경순양함 4척중 3척은 최신형이라 배수량에 비해서는 손해가 큰 편이다. 게다가 독일 함정의 평균 수리기간은 영국 함정의 수리기간의 2배가 넘어가고 수리가 필요한 군함은 영국의 2배인 14척이었다. 무엇보다도 젤리코는 귀환한 당일에 해전 이전의 전력 거의 전부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독일의 셰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영국의 승리였다. 비록 젤리코의 뒤를 이어 대함대의 사령관이 된 비티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독일 해군이 출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전략적인 승리도 독일 해군의 출동의지에 달려 있었다는 어정쩡한 것이었지만, 결국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한 독일 해군은 이후 영국 수상함대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고 군항 안에 숨죽인 채 얌전히 있게 되고, 잠수함을 이용한 통상파괴전에 집중하게 된다. 이에 대한 아래의 명쾌한 비유가 유명하다.
"The imprisoned got out of their cell, punched the jailer & then returned."
"죄수가 감방에서 나와 간수를 후려치고 다시 감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통상파괴전이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영국을 굶겨 죽이지도 못했다. 게다가 100일 공세이후 패전이 결정된 독일을 빠르게 항복시킨 단초도 킬 군항의 반란으로 알려진 수병 폭동이었다.
4. 영향
사실상 유일한 함대결전이라 그 후 전함 설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조준장비의 발달로 장거리 사격전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갑판으로 떨어지는 대낙각탄에 대한 방어가 중요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함의 측면방어 대신 갑판방어가 중요시되고 동시에 주포의 대구경화가 진행된다. 또한 전함과 함께 함대결전에 쓰이기엔 순양전함이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1차대전 직전에 불었던 순양전함 건조 열풍도 사그라들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순양전함 건조계획은 존재했다. 미국의 렉싱턴급 순양전함, 일본의 아마기급 순양전함, 영국의 G3급 순양전함은 전부 유틀란트 해전 이후 계획된 함선들이다. 물론 이중 순양전함으로 완공된것은 없으나 이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원인이지 유틀란트 해전으로 취소된 건 아니다.
소수 의견으로는 근대 백여 년동안 세계 제일의 실력을 자랑한다던 영국 해군이 건설된지 고작 30년도 못 채운 독일 해군을 거의 모든 함대 세력을 동원한 전투에서 명시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반대로 명시적으로 전술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점에서 유틀란트 해전은 영국 해군이 몰락하는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있다.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측 사령관이었던 젤리코와 비티는 킹 조지 5세급 전함의 4번함과 5번함의 이름으로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해전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에 의해서 각각 앤슨과 하우로 교체당했다. 사실 독일 함대를 전멸시킬뻔한 기회가 있었지만 양측 사령관의 불화와 선택으로 그걸 놓쳤다는 시각이 우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 전부 해전 이후에도 잘만 승진해서 해군참모총장(First Sea Lord)까지 역임했던걸 보면 보면 두 사람의 경력에 큰 문제로 작용한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 더해서 젤리코는 선전보다는 경과보고와 분석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고가 늦었다는 어른의 사정까지 가세해서 일이 커졌다. 물론 영국 함대가 크게 패했다는 비보도 아니거니와, 비록 피해를 더 크게 입긴 했으나 사실상 거의 전술적 무승부였기에 급하게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겠으나, 해전의 결과가 영국에 늦게 도착했고 앞서 해전의 결과가 도착한 독일의 승전 주장 때문에 영국의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다. 결국 젤리코의 보고가 도착하고 처칠이 그 보고를 바탕으로 영국의 전략적 승전을 알리는 바람에 여론이 다시 돌아왔지만 이때의 경험 때문에 처칠이 젤리코와 비티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