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기원전 218-167년 사이 로마의 국가 사제단 가운데서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가 지닌 문제점을 조금 더 자세히 부연할 것이다.
해당 기간 조점관(http://cafe.daum.net/shogun/9xm/8903)과 제관(pontifex, http://cafe.daum.net/shogun/9xm/8904) 목록을 살펴보면 52명(*a) 가운데서 특이하게 두 사제직을 동시에 맡은 것으로 나오는 사람이 두 명 보인다. Q.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cos.233)와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pr.217)가 바로 그들이다.
베루코수스의 경우 리비우스가 직접적으로 조점관이자 제관이었다고 밝혔으므로(Liv.30.26.10) 딱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오타킬리우스에게는 다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Liv.26.23.8에서 기원전 211년도 집정관들의 임기 말기에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가 사망한 일을 전하며, 리비우스는 그를 "제관"이라고 불렀다. 이 제관 오타킬리우스는 필시 기원전 217년의 법무관 오타킬리우스와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기원전 210년 중의 사제 사망과 신규 임명 내역을 소개할 때, 리비우스는 "제관"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의 후임과 "조점관"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의 후임을 둘 다 기재했다.(Liv.27.6.15)
혹시 같은 이름의 제관과 조점관이 따로 있었으며 제관쪽이 먼저(기원전 211년 말-기원전 210년 초 사이), 조점관쪽이 나중에(기원전 210년 봄-연말 사이) 세상을 떠났을까? -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1. 왜 Liv.26.23.8에서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는 "제관이자 조점관"이 아닌 "제관"이라고만 불렸는가?
2.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는 어떻게 제관인 동시에 조점관도 될 수가 있었는가?
1은 물론, 다소 의아하기는 해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 단순히 Liv.26.23.8이 부주의하게 쓰여졌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2는 여러가지로 고민해 볼만한 문제다.
공화정 초기부터 카이사르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점관과 제관을 확실하게 동시에 역임한 사례는 파비우스 베루코수스 딱 한 사람만 알려져 있다. 그럴 수도 있는 사례는 두 건이 더 있는데, 하나는 위의 오타킬리우스이고 나머지 하나는 조금 더 불확실하다. 사실 우리는 리비우스의 책 완본이 남아있지 않은 시기(기원전 292-219년, 기원전 165년부터 공화정 말기까지)의 사제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므로 착시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꽤 드문 사례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권위가 높은 종신직을 한 사람이 여러개 보유하는데 응당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윗세대부터 구체적인 정황을 살펴보자.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에 임명된 제관 중에 "C. 마르키우스 루틸루스"라는 사람이 있었으며 또 같은해 임명된 조점관 중에는 "C. 마르키우스"가 있었다. 두 C. 마르키우스는 동일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제관 "C. 마르키우스 루틸루스"는 높은 확률로 기원전 310년도 집정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집정관을 지낸 C. 마르키우스는 이 사람 딱 한 명 뿐이기에 조점관 "C. 마르키우스"도 동일 인물로 보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조점관을 지낸 사람이 꼭 집정관 경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둘은 동명 이인이고, 실제 관계는 일가 친척 정도(예를 들어, 부자지간)였을 수도 있다.(cf> MRR vol.1 p172, J. Vaahtera, Hermes 130 [2002])
여하간 C. 마르키우스 루틸루스가 정말 조점관과 제관을 동시에 지냈어도 그 임명은 맥락이 워낙 범상치 않다. 기원전 300년에는 오굴니우스 법에 따라 조점관직과 제관직이 플레베스에게 개방되면서 한꺼번에 해당 사제직 9자리에 플레베스 인사들이 임명되었다.(*a) 통상적인 관례와는 다른 일이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베루코수스의 경우는 어떤가? Q.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는 대략 기원전 265년부터 조점관이었다. 제관 임명은 기원전 216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임명받은 세 명의 제관 가운데 Q.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Q.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있다. 필시 전자가 베루코수스이고 후자는 기원전 237년에 집정관을 지낸 사람이다. 신규 임명된 제관이 이미 지위가 드높은 원로였던 점은 주목을 끈다.(*b) 기원전 218-167년의 조점관과 제관 가운데 달리 또 이렇게 늦게(베루코수스는 첫번째 집정관 임기로부터 17년 후, Q. 풀비우스는 21년 후) 임명받은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상당히 이례적인 둘의 제관 임명 배경은 아무래도 칸나이와 분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앞의 글에서 언급된 것 처럼 이 둘은 그 전투에서 전사한 제관 두 사람의 후임자로 뽑힌 것 같다. 긴급한 시기이므로 힘이 센 원로가 더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존재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베루코수스의 조점관-제관 겸임은 무척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이제 다시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에게로 돌아왔다. 이 사람의 임명에 대해 앞의 두 사례와 비견될 만한 특수한 면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보다는, 알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오타킬리우스가 제관이나 조점관에 임명된 사건은 현전하는 리비우스의 완본 부분에는 없으므로, 기원전 218년보다 앞선 일일 가능성이 높다. 법무관이 되기도 전이므로, 중대 국면에서 유력한 원로에게 힘이 실리거나 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얼마 되지도 않는 다른 사례와 비교하는 것도 곤란해지고 말았다. 그 시기의 여러 사건들이 사제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고, 사실 로마 내부의 상황에 대한 전승 자체가 얼마 되지 않는다. 예컨대 리비우스 책의 요약집(periochae)은 현전하지만 원래의 내용을 아주 짧막짧막하게 간추린 것일 따름인데다 모든 내용이 다 요약되지도 않았다. 오타킬리우스의 제관-조점관 겸임에 개연성이 충분한지 판단할 근거 자체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든 손을 놓을 수 밖에 없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기원전 210년의 사제관 신규 임명에 대한 Liv.27.6.15에 오류가 있다는 의심도 가능하다.(cf> MRR vol.1 p284) 즉 Liv.26.23.8에서의 호칭처럼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는 "제관"이었을 따름이며, 기원전 210년 중에 사망한 조점관의 이름이 잘못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사망한 조점관의 유력한 후보는 C. 아틸리우스 세라누스(기원전 218년 법무관으로 보임)이다. 이 사람은 기원전 217년에 조점관이었음이 확인되지만, 그 후 기원전 167년까지도 사망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가능한 해석 하나 이상은 아니다. 세라누스는 놀랍게 장수했을지도 모른다. 또 사실 리비우스는 사제관들의 사망과 후임자 임명도 전부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전혀 엉뚱한 사람이 뒤바뀐 조점관이었을 수도 있고, 그런 것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는 조점관이 아니었을 것 같다. 단 한번 기록의 실수 때문에 혼란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그나마 문제를 적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청년" T. 오타킬리우스의 조점관-제관 겸임을 가능하게 만든 사건 같은 것은 없었다고 판단하기에는 우리가 물려받은 자료가 너무 적다. 중간에 언급한, "제관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와 "조점관 T.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가 별개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최후의 발악을 위한 카드로만 남겨야 할 것이다.
*a 제관 4명, 조점관 5명. 리비우스는 오굴니우스 법 이전의 제관은 4명이었다고 썼다.(Liv.10.6.6) 그런데 기원전 218-167년의 제관은 9명으로 보인다. 이 문제와 제관단에 언제부터 플레베스가 5명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찰은 Oakley의 commentary vol.iv p88-92를 참고.
*b Q.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는 기원전 233, 228, 215, 214, 209년에 집정관을 지냈고 기원전 230(-229)년에 감찰관이었다. 기원전 221년(?)과 기원전 217년에는 독재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203년에 사망할 때 까지 원로원 최고의원이었다. 조점관 자리에는 62년간 있었다.(Liv.30.26.7, ValMax.8.13.3 cf>Plin:HN.7.156에서는 63년)
베루코수스의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으나 첫 번째 집정관 임기가 기원전 233년이었던데서 짐작할 때 대략 기원전 270년대 초중엽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따라서 그는 기원전 265년에 상당히 어린 나이였을 때 조점관단에 합류했을 것이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204년에 T.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조점관이 되었을 때 "매우 어렸"으며, 이런 일은 당시의 사제관 임명에서 아주 드물었다고 썼다.(Liv.29.38.7) Hahm은 이를 근거로 기원전 265년에 파비우스가 16세는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리비우스가 말한 "당시"의 범위가 그렇게 넓었을지 의문이다. 파비우스가 예외 사례가 아니라고 판단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Q.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37, 224, 212, 209년에 집정관을 지냈다. 기원전 231년에 감찰관이었고 기원전 213년에 기병대장, 기원전 210년에 독재관이었다. Q. 풀비우스의 형제(동생?)인 Cn.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12년에 법무관이었고 아들로 보이는 동명의 인물이 기원전 179년의 집정관이었다. 이러한 시기상의 차이가 단지 나이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Q. 풀비우스는 동생과는 거의 25년, 아들과는 약 60년 터울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꽤 기이하다. 나는 Q. 풀비우스가 실제로는 비교적 젊은 나이(30대 초-중반?)에 집정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법무관을 거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의 생년은 기원전 270년대 말 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