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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일심각.
벽면에는 곽가장을 위해 목숨을 버린 열혈 무인들의 작호와 이
름을 적어 놓았고, 안에는 피에 절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일심각원은 일심각을 지키는 수호무인(守護武人)으로 총인원은
삼십 명에 불과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단순히 전각을
지키는 것이기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일심각을 재정비 한 사람은 초대 일심각주이자 삼정검사
중 일인인 혈영일검(血影一劍)이었다.
- 일심각이라는 전각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일심각원들
은 곽가장의 투혼을 지킨다. 투혼... 꺾이는 투혼은 불쌍하다.
우리는 꺾이지 말아야 한다.
십 세 미만의 소동(小童) 중 무골(武骨)이 뛰어난 아이만이 일
심각원으로 선발되었다.
아이들은 혹독한 수련을 거쳤다.
그들이 무슨 수련을 받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고르고 고른 신동들이지만 성인식(成人式)
을 치를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단 일 할에 불과하다는 것.
그들은 곽가장 최정예인 비수당과 대별되는 남의(藍衣)를 입었
다.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개개인이 사당 대주와 버금갈
정도로 무공이 높았으니까.
비수당이 입는 혈의(血衣)와 일심각원이 입는 남의(藍衣)는 곽
가장 최정예의 표상이었다.
곽소연은 자죽헌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자죽헌은 험난한 절벽가에 세워져 있지만 곽가장 식솔들의 발
길이 끊이지 않았다.
자죽헌에서 내려다보는 절경은 가히 압권이었다.
번화한 남창부 시가지, 드넓은 벌판...
그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것은 붉은 대나무 숲이었다.
피를 머금은 듯 빨간 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대나무들이 쪽
쪽 뻗어 있는 숲속을 걸으면 심란하던 마음이 고요한 물결처럼
가라앉고는 했다.
폐쇄된 곳도 아니었다. 곽가장 식솔이라면 누구나 자죽헌에 올
라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곽가장 식솔이라면 누구나 한 번
씩 올라와 봤고, 피곤한 심신을 편하게 해주던 곳. 그러던 곳
이 닷새 동안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귀인이 자죽헌에 머무른다는 소문도 있었고, 대살성을 잡아다
놓았다는 풍문도 있었지만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사악! 사아악...!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했다.
한여름에도 유독 자죽헌만은 가을 날씨처럼 청량했고, 한겨울
에는 반대로 봄처럼 포근했다.
곽소연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 책을 읽기에 이보다 더 좋
은 장소가 어디 있으랴.
그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단 두 곳만 가보면 된다. 서재,
그리고 자죽헌. 어느 곳에서건 다소곳이 앉아 서책에 몰두한
곽소연을 만날 수 있었다.
곽소연은 자죽헌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전과 다른 섬뜩한 기
운을 감지했다. 일심각 무인들이 터뜨리는 예기(銳氣). 예의
남빛 무복을 입고 석상(石像)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였
다.
그들은 곽소연이 곁을 스쳐 지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십 장 밖에서 이는 기척까지 감지하는 그들이고 보면 누가 나
타났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곽소연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평소에는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던 정대주 동종관이 찾아오고, 일심각에서 한 걸음
도 벗어나지 않던 무인들이 자죽헌에 몰려 있고... 평상시처럼
조용하지만 어쩐지 술렁이는 분위기.
사고(思考) 깊은 그녀는 모든 현상을 간과하지 않았다. 곽가장
에서 알지 못할 풍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문가요. 전문가에게 가치를 묻는다면 돈이라 말할 수
있지. 감여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대기를 지불하고 물
으시오.'
'내가 아는 것은 장례와 감여뿐이오.'
아직도 귓전에서 윙윙거리는 소리.
그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눈을 뜨면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그녀가 들은 모든 소리는 무
공과 무림에 국한되었다.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그랬고, 그녀
를 방문하는 귀공자들도 무가라는 점을 감안해 애써 화제를 그
쪽으로 돌렸다. 그러다 약간이라도 기분이 언잖아 보이면 얼굴
색이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하기에 급급하거나, 달콤한 소리
로 달래 주기에 여념 없던 그들.
'곽 소저, 소저를 만난 다음부터는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 없소. 소저, 제발 이 마음을...'
'곽 소저,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소. 소저만 내 아내가 되어 준
다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곽 소저...'
대다수 청년들은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감언이설(甘言利說)
도 서슴지 않았다. 때로는 어줍잖은 무력을 사용하려는 자들도
다수 있었다. 회유, 협박, 설득...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어느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엇이 아쉬워 그랬겠는가.
그들은 충분히 주사위를 굴려 보았으리라. 곽가장에는 부귀가
있고, 명예가 있고, 권력이 있다. 아버지가 쌓아온 아성(牙城)
은 견고하고 화려해서 그의 일부가 되려는 후기지수(後起之秀)
가 속출했다.
반여량은 정직했다.
'당신'이라는 호칭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내들은 공주 모시듯 떠받들기만 할 뿐, 누구나 흔히 사
용하는 호칭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분명히 못 입고 못 배운 촌놈인데...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있
다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졸린 듯 반쯤 감은 눈꺼
풀 사이로 혜지(慧智)가 번뜩이는 눈동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출신만 귀골(貴骨)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아프다. 반여량... 이 남자는 부평초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
고 떠돌고 있다.'
곽소연이 반여량에게서 받은 느낌이었다.
반여량은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자죽헌 한구석
에 몸을 돌돌 말고 마치 예전부터 있어 왔던 것처럼 기물(器
物) 속에 동화되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앉아 있었나? 식사는?
보아하니 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한마디 말도 없이 고정된 자세로 앉아 끝도 없는 세상 저편을
보는 남자. 창백한 안색에 우수 어린 눈매. 영혼은 고결하고
맑은 것 같은데, 육신은 번민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
곽소연은 슬픈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일지라도 반여량을 본다면 아픈 감
정을 읽을 수 있으리라. 여인이 본다면 강한 모성본능(母性本
能)이 자극되겠지만, 사내가 본다면 형편없는 인물로 보일 모
습이었다.
곽소연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휴우! 냄새! 이 경치 좋은 곳에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설마
구더기 천국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죠? 어서 일어나요."
"..."
반여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여전히 허공 한가
운데 걸렸고, 눈동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았다.
"뭐하고 있어요? 일어나란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가볼 곳이
있어요. 친구가 혼인하는데... 그들이 잘 살수 있을지 봐주세
요."
"나는 점복술사가 아니야.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스스
로 자초하는 것."
'크크크...! 그렇지. 맞는 말이야. 스스로 자초했어. 한한...'
철컹!
묵직한 전낭 하나가 발치께로 떨어졌다.
"정확히 열 냥이에요. 이만하면 나도 대고객이 아닌가요?"
하지만 반여량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돈... 좋지. 나는 돈을 벌어야 하고... 하지만 사람을 잘못
찾아왔군. 전에 말했을 텐데? 나는 시신을 만지는 것과 땅뙈기
봐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다른 감여가들과 달라요. 동기감응...
감응으로 느껴 주세요. 설혹 틀릴지라도 상관없어요. 이건 재
미니까."
"후후후! 재미. 재미를 보려고 은자 열 냥을 던진다? 과연 돈
많은 사람들은 다르군. 후후후! 그래, 이렇게 눈먼 돈을 챙기
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지."
반여량은 전낭을 품에 찔러 넣었다.
"앞장 서. 혼인을 치르는 곳으로."
* * *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사내아이를 낳아 부모의 장례를 치르게 하고, 철마다 조상에게
제물을 올리게 하려는 목적의식이 강한 행사 「예기(禮記)」에
서까지 혼인의 목적을 사당에서 조상들을 받들기 위한 것이라
고 단정지어 놓고 있다. 그 다음이 자손 번영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매파(媒婆)를 통해 혼인한다. 사
람과는 전혀 무관한 혼인이다. 우선 결혼하여 가정을 가진 후
사랑을 일구어 나간다.
사내들은 '혼인'이란 말 대신 '여자를 취(娶)한다.' 라는 말로
표현한다. 취(娶)라는 글자는 귀(耳)와 손(又)과 여(女)가 모
여서 만들어졌다. 여자의 귀를 잡고 끌고 온다는 뜻이다.
손화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북적거렸다.
유생, 관원, 상인, 무인, 승려...
하객(賀客)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그들이 떠올린 훈훈한
미소만은 한결같았다.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아무리 인륜지대
사라 하지만 남창부 제일 거상(巨商)인 좌옹의 잔치에 초대받
으려면 그만한 자격이 구비되어야 한다.
걸인이라 할지라도 이름만 들으면 고개를 끄떡이는 사람.
손화장에서 한담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
다.
허연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풍채 좋은 노인.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다 낙향(落鄕)하여 세월을 소진하고
있는 고승음(高承 )이었다.
살구나무 아래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노인.
얼굴이 강퍅하게 생긴 노인은 대적(大笛)으로 일가를 이룬 명
악(名樂) 연무(燕茂)였고, 술 단지처럼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
온 노인은 남창자사(南昌刺使) 하신(夏辛)이었다.
"저기 보이는 사람 있죠? 얼굴이 하얀 사람요. 저 사람이 바로
조월서원(朝月書院)에서 가장 문장이 좋다는 유관(柳瓘)이란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쪽에 있는 사람의 아버지가 남창에서 제
일 큰 단필포(緞疋鋪:포목점)를 가지고 있어요. 아버지는 죽어
라 벌기만 하고, 자식은 죽어라 쓰기만 하죠. 푸훗! 허풍이 워
낙 세서 사귈 사람이 못돼요. 그리고..."
곽소연은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그녀는 스쳐 지나는 사람마다 어디 사는 누구고, 재산이 얼마
나 되는지,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 무엇으로 명성을 떨쳤는지
를 꼬치꼬치 말해 주었다.
반여량은 곽소연의 눈에서 반짝이는 생기를 봤다.
편안한 것이다. 즐거운 것이다.
이곳이 바로 그녀가 노는 물이었다. 반여량이 개천에서 숨을
쉬었다면, 곽소연은 바다에서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한한... 이런 것을 원했구나. 이런 세계를...'
같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그리
고 한한은 이런 세계에서 숨쉬기를 바랐다. 그것을 설혹 한한
이 떠나기 전에 알았다 할지라도 반여량으로서는 도저히 어떻
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곽소연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거 소연 소저 아니오? 하하하!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
니다."
"소연 소저, 지금 풍류공자(風流公子)에 관한 말을 나누고 있
는데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소연 소저..."
"소연..."
젊은이들에게 곽소연은 우상으로 군림했다.
스물한 살이면 혼례를 치러야 한다는 곽가장 가법이 그녀를 높
은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곽소연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반여량을 향해 정겨운 웃음을 흘려 주었다.
"풍류공자란 바로 오늘 결혼하는 좌계창을 두고 한 말이에요.
대단한 바람둥이죠. 아마 남창부에서 반반한 여자라면 한 번씩
은 집적거렸을걸요?"
곽소연은 자신이 말하고도 무안한지 얼굴을 도화빛으로 물들였
다.
반여량은 곽소연의 뒤를 따르면서 손화장에 모인 사람들이 무
슨 대화를 나누는지 귀를 기울였다.
'똑같아. 똑같은 인간들이야.'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상방성 서민들과 상당
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구름 위에 군림한 사람들답게 학문,
정치 같은 고고한 분야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이곳에 모인 청년들이나 상방성 청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것이 같았고,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희희덕거리는 모습이 같았다. 격조가 높은 것
도 아니었다. 때로는 음담패설(淫談悖說)까지 서슴없이 토해
내는 것이 오히려 상방성 청년들보다 못한 것 같았다.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은 거침없는 태도, 당당한 자심감이었다.
"조금 있으면 식이 시작될 거예요. 우리 좋은 자리로 가요. 호
호! 손화장은 내가 잘 알거든요."
곽소연은 사뭇 즐거운 듯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때,
"오대미인(五大美人)이 누군지 아나?"
"오대미인? 사대미인은 들어봤어도 오대미인이라니?"
방금 스쳐 지나온 젊은이들이 또 농지거리를 늘어놓았다.
반여량은 들을 가치도 없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
다.
"월(越)나라의 시이광(施夷光). 꽃처럼 예쁘고 옥보다 아름답
다는 그녀를 서시(西施)라 부르며 일대미인으로 꼽지."
"옳거니."
"동탁(董卓)이 비구니를 범해서 낳은 딸. 그녀의 울음 소리는
매미[蟬] 같다하여 초선(貂蟬)이라 부르지. 두 번째!"
"옳지."
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주흥(酒興)부터 오른 사람들은 왁자지껄
하게 농담을 늘어놓았다.
"전한(前韓) 시대에 보평촌(寶坪村)에서 한 미인이 탄생하니
이름하여 왕소군(王昭君)이라. 세 번째!"
"네 번째는 촉(蜀)의 양귀비(楊貴妃)잖아. 다섯 번째는누구
야?"
반여량과 곽소연은 그들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워낙 큰 소리로 떠드는 바람에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만 했
다.
"허! 그놈 참, 되바라지게 어른 말 중에 끼여들어?"
"에라이! 네가 어른이면 나는 할아비다."
"하하하! 좋아, 마지막 다섯 번째 미인은 폐월수화(閉月羞花),
침어낙안(沈魚落雁), 인면도화(人面桃花)...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표현할 수 없는 미인이 있지."
"그게 누구야?"
"능한한(凌 )."
"와아! 하하하!"
"푸하하핫!"
신부의 외모를 놓고 농담을 즐기는 것은 오래된 풍습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청년들은 짓궂은 농담을 할 수 없었다.
미추(美醜)는 만인에게 분명한 것이라서 상방성 사람들처럼 그
들 또한 찬사를 늘어놓기에 분분했다.
이 순간, 반여량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발걸음을 뚝 멈춰 버렸
다.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벌건 대낮이 새까맣게 채색되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 버리고, 육신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아니,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한한... 한한... 능한한!'
사람들은 능한한의 그 아름답다는 용모를 볼 수 없었다. 얼굴
을 면사(綿絲)로 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례복 위에 용이
수놓인 붉은 색 대수의(大袖衣)를 걸친 자태만 보고도 청년들
은 기성(奇聲)을 질러댔다.
똑똑!
문은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었다. 혼인서한
(婚姻書翰)을 전달하러 온 좌계창의 벗이 의례적으로 문을 두
드린 것이다.
"들어오세요."
시녀 중 한 명이 청년을 쳐다보며 고운 목소리를 토해 냈다.
"하하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신창윤가
(神槍尹家)의 막내로 이름은 윤광(尹光)이라 합니다. 곽가장
넷째 사위인 홍홍록록 윤명이 저의 형님 되시죠. 풍류공자 좌
계창의 벗으로서 혼인서한을 전해드립니다."
윤광은 면사 안을 들여다보겠다는 듯 뜨거운 눈길을 던지며 붉
은 천으로 싸인 서한을 내밀었다.
혼인증서(婚姻證書)였다.
한한이 붉은 서한을 곱게 받아 품속에 찔러 넣었다.
"하하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가시죠."
윤광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오자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폭죽이 터져 올랐다. 동시에 아름다운 선율이 갖가지 악기에서
쏟아졌다.
원래 이런 예식은 신부(新婦) 집에서 치뤄져야 한다.
홍사(紅絲)로 수놓은 가마에 오르기 전, 신부는 울음을 터뜨려
야 하고, 어머니와 자매, 친척들 역시 마주 울음을 토해 내야
한다.
그러나 여기는 손화장.
붉은 가마는 겨우 동각(東閣)에서 승룡각(承龍閣)으로 갈뿐이
다.
울어 줄 사람도 없다.
가마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신랑 가족들. 이름이 적힌 붉은
호롱을 들고 있는데, 가마 앞에 선 두 사람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호롱을 들고 있다.
홀홀단신, 천지간에 일가붙이가 아무도 없다는 표식이었다. 수
를 헤아릴 수 없이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손화장 손님인 것이
다.
그렇다면 신부측 예식은 생략하는 것이 예법에 맞았다. 하지만
신부가 극구 주장했고, 자식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좌옹은 울
며 겨자먹기로 승낙했다 한다.
'한한, 정말 너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한한, 제발 이러지
마.'
반여량은 커다란 고목에 등을 기대고 서서 짙게 가라앉은 눈으
로 가마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의 마음은 한한이 아니기를 간절히 갈구했다. 하지만 어찌
모르겠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릴 때도 분명히 기억하던 그녀
의 몸매가 아닌가.
'한한... 제발...'
그는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마음을 고통스럽게 부여잡았다.
가마가 승룡각에 도착하자 다시 폭죽이 터져 올랐다. 이번에는
신랑측에서 터뜨리는 폭죽이었다. 같은 장소, 같은 하늘에 신
랑 신부가 터뜨리는 폭죽이 함께 어울리다니.
동경(銅鏡)을 손에 든 소동(小童)이 가마 곁에 이르렀다.
"내리시지요."
소동다운 맑고 가녀린 음성이었다.
"호호호! 동생이 이제야 가정을 가지는군. 축하해."
"앞으로는 잘 지내야 되겠지?"
혼인하지 않은 누이는 인사하러 와서는 안 된다는 예법에 따라
혼인한 누이들이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여인은 모든 인사말을 뒤로하고 대청으로 안내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예복(禮服)을 갖춰 입은 좌계창이 기다리고 있
었다.
"일배(一拜) 천(天)!"
좌계창과 여인은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
차(茶)와 전과(全課), 원앙(鴛鴦) 등 온갖 물품들이 차려져 있
는 탁자 앞에서 신에게 절하고, 조상에게 절하고, 좌옹에게 절
하고, 서로 맞절했다. 붉은 수실이 탐스럽게 묶여진 술병에서
술을 따라 마시고, 잔을 교환해서 다시 마셨다.
예식은 정신없이 치뤄졌다.
'정말이었구나. 너였어. 너...'
반여량의 눈에서는 이제까지 발산된 적이 없는 분노의 화염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사랑을 던져 버리고 부귀를 쫓아 떠나가는 모습을 볼 때와는
감정이 또 달랐다. 일말의 자책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또 모르
겠다. 면사를 걷어올린 한한은 반여량이 예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던 밝은 웃음을 담뿍 피워 냈다. 세상 모든 것을 얻은 얼굴,
소망을 달성한 얼굴, 기쁨을 감추지 않는 당당함, 모두 보기
좋았다. 모두 보기 역겨웠다.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이대로 떠나게 해서는 안돼.'
반여량은 절박한 심정으로 내몰렸다.
그녀가 없는 쓸쓸한 세상을 어떻게 산단 말인가. 음식은 어떻
게 목으로 넘어가고, 감여를 하여 돈을 번들 어디에 쓰겠는가.
"한...?"
반여량은 거친 외침을 토해 내며 달려가려 했다. 허나, 그의
몸은 반석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마혈(痲穴)을 점한 여인, 곽소연이었다.
그녀는 반여량의 심상치 않은 태도를 눈여겨 살피다가 그가 발
작하려는 순간 마혈을 점해 버렸다.
또 한 여인, 교교였다.
곽소연이 일지(一指)를 날리는 때와 같이하여 그녀는 반여량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무리 언니가 싫어한다 해도 어찌 언니의 혼인을 보지 않겠는
가. 그녀는 혼인 하루 전 낯 남창부에 도착했고 언니 몰래 자
부되는 좌계창을 만나 손화장에 들어왔다. 물론 모든 것은 비
밀로 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언니의 눈에 뜨일세라 사람들 틈바구니로 숨어들던 그녀는 망
연자실하게 서 있는 반여량을 보았다.
'헉!'
헛바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너무 놀랐다. 반여량... 그가 어찌 알고 이 자리에 참석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놀람은 곧 흥분으로 바뀌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을 또 보게 되다니. 그런 감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심상치 않았다. 반여량의 얼굴색이 검붉게 변해 있다니. 그가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두 눈에 이글거리는 화염이 솟구
친 것도 처음이었다.
교교는 앞뒤 생각할 것 없이 한달음에 달려와 반여량의 옷깃을
붙잡고 말았다.
곽소연과 교교, 두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한한은 이런 사정을 까마득히 모른 채, 그녀가 영원히 안주할
방으로 안내되는 중이었다.
"천하일색이야. 어디서 저런 미인을 얻었어? 이거, 이제 우리
는 뒷전으로 밀려난 것 아냐?"
누군가 질투 섞인 음성을 토해 내는 소리, 그 소리를 듣고 하
하호호 웃어 젖히는 소리가 널찍한 대청을 가득 메웠다.
* * *
'반여량이라는 사내는... 휴우! 한 여인에게 쏟는 지극 정성이
무척 애절합니다. 상방분타(上坊分舵) 무인이 보내온 말이 사
실이라면, 아니 절반을 깎아서 절반만 새겨들어도 반여량이 쏟
아 부은 애정은 철심(鐵心)도 녹일 정도입니다. 그만한 애정
공세라면 돌부처도 미소를 띠며 돌아앉으련만...'
곽소연은 동종관이 들려준 말을 상기하며 반여량을 쳐다보았
다.
"풍류공자 좌계창과 한한은 궁합이 아주 잘 맞는 것 같군요.
어쩌면 사람들 심성이 그리 독한지."
"..."
교교는 할말을 잊었다.
남이 언니를 욕하는 것은 싫었지만 현실이 그런 것을 어찌하
랴. 그러나 말을 계속 듣고 있다가는 또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반공(潘公)은 무슨 일로 이곳에...?"
'반공?'
곽소연은 교교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았
다. 마치 소중한 물건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왜 그럴까?
"저희 장에서 감여를 부탁했어요. 대가는 은화 서른 냥.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죠."
'은화 서른 냥? 황금 서른 냥이라도 달려들 사람이 아닌데.'
"그렇군요."
곽소연의 마음은 또 한 번 무너졌다.
혼절해 있는 반여량을 쳐다보는 교교의 애잔한 눈빛, 그 눈빛
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반여량을 염려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허전한 마음... 촌놈이 누구를 안들 무슨 상관이라고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 올까. 그런데 이 여자는 누구일까? 동종관의
말에 따르면 한한의 동생이라던데, 반여량과는 어떤 관계일까?
언니가 사랑하는 사내에게 정을 주지는 않았겠지.
"우리는 이제 곽가장으로 돌아갈 거예요. 교 소저는?"
곽소연은 특별히 '우리'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유치한 언행이었다.
"상방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러겠어요? 동향(同鄕)끼리 만났으니 회포(懷抱)나 풀고 가
세요.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데."
'또! 아, 오늘 내가 왜 이러지?'
곽소연은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처음 만나는 여인에게 그것도 그리 예쁘지도 않은 여인에게 원
인 모르게 치솟는 이 적개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가만있어도
미운 사람. 곽소연에게 교교는 그런 여인이었다.
"아니에요. 갈 길이 멀어서... 저는 이만..."
교교는 다시 한 번 혼절한 반여량을 쳐다보고는 이별을 고했
다.
한한은 붉은 비단에 금빛으로 써진 희(囍) 자(字), 결린(結璘:
결혼의 신)과 쌍선(雙仙)이 그려진 그림, 그녀의 미모를 대구
(對句)로 써 놓은 수많은 글 속에 파묻혀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으리라.
내일 모레, 한한은 좌계창과 함께 여자 쪽 가족을 만나야 하는
데... 여자 쪽 조상에게 예도 올려야 하는데... 그럴 여자가
아니지. 친동생까지 먼 친척이라고 속였으니, 교교를 만난다거
나 돌아가신 부모의 제사를 올릴 턱이 없겠지.
십 일째 되는 날은 신부 혼자서 친가를 방문한다.
그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좌계창과 함께 등왕각(謄王閣)이나 구경하든지 아니면 우민사
(佑民寺} 동종(銅鍾)을 보러가리라.
틀림없다. 혼인은 십일 간 치뤄지지만 방문할 곳이 없는 이상
열흘까지 끌 필요가 없다.
'휴우! 언니는 황후상(皇后相)을 타고 났대요. 그래서 귀하게
될 몸이라고... 언니는 틀림없이 잘 살 거예요.'
반여량은 독기(毒氣)를 피워 올렸다.
사부는 힘이 없어 뛰어난 감여가임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야 했다. 자신은 힘이 없어 사랑하는 여인 하나 지키지 못했
다.
힘... 힘...!
그 종류가 무엇이든 힘은 있어야 한다. 강자(强者)가 물러서는
것은 아량이지만, 약자(弱者)가 물러서는 것은 비굴이다. 똑같
은 일을 당하고 똑같이 행동해도 결과는 천양지차.
'힘을 갖겠다. 돈? 돈이라면 모아주지. 정(情)? 이제 그 누구
에게도 주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빼앗기만 하겠다. 그렇게 사
는 것이 세상이라면... 얼마든지 따라주지.'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사이한 미소를 흘
려냈지만 억지로 짓는 웃음에 지나지 않았다.
사부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자연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이
순수해야 한다. 미움, 증오, 쾌락 같은 말과는 상종하지 말아
야 한다.
한한을 잃은 아픔은 세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십육 년간 살아온 인생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첫댓글
추석명절 잘들 보내셨나요~
제가 착각하여 제 1장 3을 올린다는게
3장 3을 올리는 바람에 중간에
끊을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답니다.~ㅋ.
조금 지루 할 수도 있겠지만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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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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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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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입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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