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가 있는 아침
(113)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중앙일보
2022.03.03 00:40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장만(1566~1629)
풍파에 놀란 사공(沙工)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웨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를 하리라
-청구영언(靑丘永言)
공명정대한 경쟁과 관리
바다의 거친 바람과 파도에 놀란 뱃사공이 배를 팔아 말을 샀다. 그랬더니 꼬불꼬불한 산길을 말을 몰고 오르내리는 것이 물길보다 더 어려웠다. 이후론 배도 말도 그만두고 농사를 지어야겠구나.
장만(張晩)이 과거에 급제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7년 전쟁을 겪고 형조판서로 있던 1622년(광해군 14년), 집권 대북파(大北派)의 국정 혼란을 상소한 것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직했다. 인조 2년(1624년), 평안도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팔도도원수로 난을 평정해 1등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올랐으나, 그 3년 뒤 정묘호란 때 적을 막지 못한 죄로 삭탈관직 돼 충남 부여에 유배됐다. 이 시조는 지은이가 파란만장한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본 소회를 읊은 것이다.
‘풍파’와 ‘구절양장’은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배와 말은 문신과 무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문인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나 무인으로 옮겨 공을 세웠다. 그것은 전쟁의 시대를 산 지식인의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다. 또한 벼슬을 단념하고 농사를 짓겠다는 것은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거의 계절이다. 성취하는 사람보다 좌절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경쟁의 세계다. 공명정대한 경쟁과 관리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유자효 시인
(112) 조춘(早春)
중앙일보
2022.02.24 00:16
조춘(早春)
정인보(1893-1950)
그럴싸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볕발 아래 들려라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손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개 어이 더딘고
이른 봄 고운 자취 어디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올 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든 붓대 무능타말고 헤쳐본들 어떠리
-신생(1929.4)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가?
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솔빛은 더 푸르게 보이고, 산골에 남은 눈도 따스하게 느껴진다. 겨우내 손 못보던 토담집을 고치는 소리도 들리는 시골 풍경이다. 아직 나비의 자취는 보이지 않지만 봄의 기운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일제강점기에 상해에서 신채호·박은식·신규식·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광복 운동을 벌였다. 해방되자 ‘광복절 노래’와 ‘삼일절 노래’, ‘제헌절 노래’와 ‘개천절 노래’를 작사했으니, 우리는 4대 국경일이면 그가 지은 기념가를 부른다. 그는 1950년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납북됐다. 오늘의 우리나라는 이런 선열의 피와 땀과 눈물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유자효 시인
(111) 매화 옛 등걸에
중앙일보
2022.02.17 00:16
매화 옛 등걸에
매화(생몰연대 미상)
매화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병와가곡집
자존감 높았던 조선 기생들
매화는 명기(名妓) 구인(九人) 중의 한 사람으로 『해동가요』에 기록돼 있는 평양 기생이다. 유춘색이란 사람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와 매화와 가까이 지냈으나 나중에 춘설(春雪)이란 기생과 가까이하자 이를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매화라는 자기 이름과 꽃의 이름을 이중의 뜻이 되게 한 중의법(重義法)이다. 또한 자신의 늙어진 몸과 고목이 된 매화라는 이중의 뜻을 실은 중의법이기도 하다.
춘절(봄철)과 연적(戀敵) 춘설의 이름을 초장과 종장에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이 시조는 또한 옛날에 피었던 가지에 다시 꽃이 피듯이 한동안 안 오던 정든 이들이 올 듯도 하지만, 때아닌 봄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듯 세상이 어지러우니 못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인 뜻으로도 풀이된다.
조선의 기생들은 신분 규제에서 벗어나 시인을 비롯해 뛰어난 예인(藝人)이 많았다. 명기의 자존심 또한 높았다. 송이(松伊)라는 기생이 역시 자신의 이름에 빗대 쓴 시조 한 수를 읽는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의 낙락장송이니 나무꾼의 낫 같은 것으로는 걸어볼 생각도 말라는 기개가 고고하기만 하다.
솔이 솔이라 하여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千尋)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볼 줄 있으랴
유자효 시인
(110) 깨진 벼루의 명(銘)
중앙일보
2022.02.10 00:16
깨진 벼루의 명(銘)
최남선(1890~1957)
다 부서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소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은 알 이 알까 하노라
-백팔번뇌
지식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일본 유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열여덟 살 때 출판사 신문관을 차리고, 이듬해 종합월간지 ‘소년’을 창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기초 책임자로 투옥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논문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발표하고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담아냈던 노랫가락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일제에 맞서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 사상과, 한민족 특유의 시가(詩歌)인 시조를 부활시켰다. 1926년에 출간된 첫 개인 시조집 『백팔번뇌』는 육당이 과거의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 형식을 모두 끝내고 택한 최종적 결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신범순 교수)
깨진 벼루를 보며 다 부서지는데 ‘어떻게 혼자 성키를’ 바라겠느냐, 금이 가도 ‘벼루는 벼루’라는 말, ‘무른 듯 단단한 속은’ 알 이가 있을 것이라는 위로는 훗날 자신이 걸었던 친일의 길을 무서우리 만치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됐으나 일체 자기변명을 하지 않았다 한다. 망국과 동족상잔 같은 민족 최악의 수난기를 살다 간 그의 생애는 지식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준엄한 반면교사라고도 하겠다. 국난의 시기를 지식인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그것을 육당의 생애에서 본다.
유자효 시인
(109) 호화(豪華)코 부귀키야
중앙일보
2022.02.03 00:39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기대승(1527-1573)
호화코 부귀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까만은
백 년이 못하여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나문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병와가곡집
“죽음을 기억하라”
신릉군은 중국 전국시대 위소왕(魏昭王)의 아들 위무기(魏無忌)이다. 저명한 정치가, 군사전략가로서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과 함께 전국시대의 4공자로 불린다.
왕자로서 그가 누린 부와 명예, 천재성은 일세를 풍미했다. 그랬던 그도 막상 죽고 나니 백 년이 못 되어 후세 사람들은 그의 무덤 위에 밭을 갈았다. 천하의 신릉군이 그럴진대 그만 못한 다른 사람들의 경우야 말해본들 무엇하겠는가. 시간과 함께 먼지가 되어 사라져갈 뿐….
고대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 소리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생애 절정의 순간에 인간은 결국 죽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근신하라는 최고의 덕담이었다.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이 새겨야 할 말이라고 하겠다.
기대승(奇大升)의 호는 고봉(高峰). 명종 말 선조 초의 대학자였다. 율곡 이이(李珥)와 벌인 이기론(理氣論) 논쟁으로 유명하다. 대사성과 대사간을 지내고, 전북 고부(古阜)에서 병사했다.
왜 단시조인가?
유자효/ 시조시인
한국 시가의 본류는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시조로 이어 온다. 시조는 고려 중기에 그 형식이 3장 6구로 정착되었다. 조윤제 박사의 「시조자수고」(1930. 11 · 신흥)에서 시조의 기본형이 초장 3 · 4 · 4(3) · 4, 중장 3 · 4 · 4(3) · 4, 종장 3 · 5 · 4 · 3이나 상당한 신축성이 있다고 정리하였다. 문자로 정착된 최초의 시조는 역동 우탁(1263~1343, 80세)의 「탄로가」 2수이다. 그 가운데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는 널리 불려 춘향전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패러디되었다. 「백발가」에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 들고, 좌수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스스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 되니"라는 구절은 이 시조가 널리 회자되어 전승되었음을 알게 한다.
시조는 3장 6구의 단수형 평시조로 지어지고 불리어 왔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 선조대에 이르러 연시조가 등장했다. 퇴계 이황의 「도산 12곡」, 율곡 이이의 「고산9곡가」, 송강 정철의 훈민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이 그러하다. 이는 단시조의 "한계를 보완 내지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2006. 8. 김용직 '시조, 그 국민시가 양식으로서의 과거, 현재, 미래')
영 ·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종장을 늘린 엇시조가 나타나고, 이어 중장과 종장을 심하게 변형한 사설시조가 등장했다. 이는 "선행하는 사대부 시조의 관념성과 대립되는 사실적 요소에 의한 현실적인 시다. 사설시조가 단명했고 급격히 쇠퇴하였지만 그것은 다음에 올 자유시의 내적 배경이 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2006. 8. 박철희 '현대시조 100년, 그 경과와 문젯점')
현대시조의 효시로는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대구 여사의 「혈죽가」를 뽑는다. 을사늑약에 항거해 민영환이 자결하자 그를 추모하고 애도한 시였다. 최초의 신시인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소년』 창간호에 발표됐으니 신체시보다 2년여 빨랐다. 1906년부터 1918년까지 발표된 시조가 660여 수를 헤아린다. 당시 시조가 활발하게 창작되었음을 알게 한다.
현대시조가 확실한 이론적 바탕을 갖게 된 것은 가람 이병기(1891~1968, 77세)에 의해서였다. 그는 1913년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부터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6년, 시조회를 발기하였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 11. 24~12.13.), 「율격과 시조」(동아일보, 1928. 11. 28.), 「시조원류론」(신생, 1929. 1`5.), 「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신민, 1930. 1.), 「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 1. 23~2. 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연구」(진단학보, 1934. 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에서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문장사)을 출간하였다. 그는 동아일보의 시조 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 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에 조남령, 오신혜, 김상옥, 장옹두, 이호우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해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광복 이후, 시조는 눈부신 양적, 질적 팽창을 가져왔다. 이제 시조는 국민시를 넘어 세계화를 꿈꾸고 있다. K-Pop, K-Movie에 이어 K-Poem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의 단가와 하이쿠가 어떻게 세계문학이 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유럽에서의 일본 붐은 1851년 런던 세계박람회가 효시가 된다. 처음 보는 일본의 문물은 서양인들의 이목을 끌었고, 이국적인 동양풍 문화에 매료됐다. 미국 작가 존 루터 롱은 게이샤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썼으며, 이는 푸치니에 의해 「나비부인」이란 이름으로 오페라화되었다.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浮世繪도 수집 대상이 되었다. 고흐의 그림에도 벽에 걸려 있는 우키요에가 등장한다.
문학에서는 일본 고유의 시 단가和歌와 하이쿠俳句가 서양인들을 매료시켰다. 5 · 7 · 5자로 이루어진 17자의 짧은 정형시, 거기에 7 · 7자의 14자를 더한 31자의 단시는 촌철살인의 매력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서양 시인들은 그들의 언어로 단가와 하이크를 짓기 시작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영어로 하이쿠를 지어 발표하자 일약 세계시의 반열에 일본 전통시가 합류하게 되었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m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In a Station of the Metro(Ezra Pound)
인파 속 이 얼굴들의 환영:
축축하고 검은, 가지의 꽃잎들.
지하철 역에서
여기에서 우리는 시조 세계화의 한 가능성을 본다. 한국의 자유시는 서양에서 온 것이다. 한국의 시라고 할 때, 한국만의 시 형식이 있다는 것은 강점이 된다. 우리에게는 800년 된 문학 장르가 있다. 그것은 자수율을 갖고 있는 정형시인데 현대에도 쓰이고 있는 시조다. 여기까지는 일본의 하이쿠나 단가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하이쿠나 단가가 그 형식을 엄격하게 지키는 데 비해 시조는 분명하다. 엇시조, 사설시조가 있으며, 연시조가 널리 지어지고 있다. 여기에다가 형식의 파괴를 시도하는 시조시인들도 있다. 이것이 국내에서는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시조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문제가 된다.
우선 엇시조나 사설시조를 외국어로 번역하면, 외국인들이 볼 때 자유시와 구분이 어렵다. 왜 그것이 한국의 고유 시 형태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또한 연시조의 경우도 왜 꼭 시조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분방한 자유시의 세계, 심지어 장시와 산문시까지 씌어지는 마당에 번역된 연시조를 한국 고유의 시로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한국 시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할 때 가장 강점을 갖는 것은 단시조다. 3장 6구 45자 내외의 시조는 긴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한국의 전통시로 곧바로 받아들인다. 나는 외국 시인들에게 영어로 시조 짓기를 강의해 본 적이 있다. 시조의 정형성에 대한 설명을 하고 함께 시조를 지어 보았는데, 그들은 한 시간 안에 영어로 시조를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시라는 데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한 그들의 언어로 시조 짓기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문화원에서도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데 시조 강의와 시조 짓기가 좋은 무기라는 생각을 하였다.
단시조는 오늘날과 같은 사이버 시대에 꼭 어울리는 시 형식이다. 손전화 화면에 시 한 편이 쏙 들어온다. 그리고 원리만 이해하면 짓기가 쉽다. 단시조를 무기로 한국 전통시의 세계화에 나설 때가 되었다. ▧
----------------
* 『한국문학인』 2020-여름호 <이 계절의 쟁점/ 시조>에서
* 유자효/ 1947년 부산 출생, 1972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집 『성 수요일의 저녁』 『심장과 뼈』 『아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