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밖 세상은 연말연시 아랑곳 하지 않고..
폭력, 전쟁, 질병 그리고 재해로 시달리고 있다.
'이제 말세 시대인가..' 하는 염려가 떠나지 않을 만큼 혼란으로 하루를 시작해 날이 저문다.
이런 불안을 조금이라도 거두어 내려면 우리가 앞장서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고 공자님이 말하셨듯이
우리가 먼저 밝힐 것은 나를 닦아 힘을 길러야 한다.
<금강경> 역시 천하의 평화를 바란다면 먼저 수신재가 할 것을 가르친다.
다만 공자는 세상의 평화롭게 하려면 먼저 자기 스스로 닦아야 한다고 하는데 반해
<금강경>을 통해 부처님은
'나[자아]인 아상과 너[대상, 세상]인 법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남' 을 우선 이해하라고 하신다.
이렇듯 나와 대상인 너 일체가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나와 너가 일어나는 마음을 찾아..
오로지 마음만 공부하면 되는 거 아닌가..
공부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연상하듯.. 내가 하는 것.
그런데 유치원부터 초. 중. 고. 대학에 다니며 공부하는 목적은 솔직히 말하면 출가가 아니라 출세 아닌지.^^.
마음이 무엇인지 깨치려는 게 아닌 세상에서 성공이 공부 목적이라는 것..
해서 너, 나 가르지 않고 성공하겠다고 열심히 공부했건만..
주위를 돌아보니 위에서 말하듯 폭력과 전쟁이 그치질 않고 있다.
그것은 공부 목적인 자기 자신의 성공인 출세가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애초 공부 목적이 잘못이라는 것.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어떤 목적을 가르치고 학생은 배워야 할까?.
아름다운 이 세상에 / 너와 나 사랑으로 / 우리 함께 만들어가요
둘이 아닌 하나 되는 세상 / 하늘 높이 날아가는 / 작은 새 날개 짓에
우리의 희망과 자유 / 꿈을 실어 날아보자..
-찬불가 '너와 나'에서 -
찬불가 내용은 인생의 목적이 출세가 아니라
열반 세계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임을 분명히 노래하고 있다.
즉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가.. 좋은 대학에 가는 목적이.. 좋은 회사에 취직해야 하는 이유가..
그리고 돈을 많이 버는 목적은 바로
사회를 열반 세계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그러기에 <금강경>에서는 '보살인 나는 일체중생인 너를 열반에 이르도록 제도해야 한다'라고 하며..
나인 아상과 너인 법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금강경, 제2분>에 나오는 수보리 장로의 질문인..
"내가 보살이 되고자 마음을 냈으면 어떻게 실천하며, 어떻게 나를 항복받아야만 합니까?"
하는 질문을 하고..
부처님은 그에 대한 답을 친절히 해 주시니..
보살이라면.. 만나는 대상을 지극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바램을 내고.. 그를 도와주는 실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절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절에서 여성 불자님들을 보살이라고 칭하는 데.. 그 이유를 알고는 있는지?.
먼저 절 안에서 대접받기를 바라는 오만한 마음으로 언행을 하고 있다면.. 그가 보살이라 불릴 수 있을까..
보살이라 불리려면 절에 와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 궁금해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까를 찾아 실천해야 한다.
보살은 여성 불자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요새는 남성 불자를 거사 또는 처사라 칭하는데..
처사는 말은 조선조 시대 절에 기거하면서 이런저런 허드레 일을 하는 남자를 지칭하던 말이고,
거사는 평소 참선 공부나 경 공부를 열심히 해 나름 깨달음이 있는 남자를 칭하는 말이다.
재가 신도에 대한 바른 호칭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 보살이라 해야 한다.
관세음보살님을 여성으로 아는 것 같은데.. 지장보살님도 여성으로 보이는지?.
문수보살이나 대세지보살님이 여성으로 보이는지?.
그러니 남성 불자는 김성호 보살님, 최만득 보살님.. 이라 불러야 하는데..^^..
무시하지 못하는 게 관습임을 염두에 둔다면 하루아침에 남자를 보살이라 칭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리라.
아무튼 남성은 처사라는 말은 일단 버리고.. 거사라 칭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초심 남성 불자라도 언젠가는 거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기에..
아니지, 절에 와서 법회는 참석하지만 그 외에는 잡담이나 하면서
대접만 받으려는 남자가 있으면 처사라 칭하는 게 딱이 아닌가?.
물론 '처사는 처사가 아니라[즉비], 말이 처사일 뿐[시명]' 임이 틀림없지만..
다시 <금강경, 제3 대승정종분>을 보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다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평화]에 들게 하리라.’ 하여..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 뜻은
보살이라면 나라는 존재감을 세우지 않고 보살행을 실천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치적으로 보면..
마음에서 모든 게 일어나는 것이라면 마음에서 중생이란 생각을 멸하면 그만 아닌가?.
굳이 너나 중생을 열반에 이르도록 보살행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법당에 앉아 마음이 공함만을 깨치면 되는 게 아니냐는 것.
<금강경, 제6분>에
"이런 사람[보살]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셋·넷·다섯 부처님께만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백천만 부처님께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하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전생에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 전생담에서 보듯.. 수많은 과거 생에 선행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 자신을 보면.. 만나는 이들에게 보살심이 그냥 일어나고 있는지?.
'아니요' 라고 하는 이들은..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지 않았기에
지금은 공부하는 학생처럼 선행을 열심히 할 때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 선근을 심는 작업이기에..
과거 선행을 많이 하지 않았다면..
24시간.. 365일.. 7년을 쉬지 않고 참선을 해도 결코 마음이 공함을 깨치지 못하리라.
너 자신을 알라는 테스형의 주문이나
쌓은 만큼 복을 받는다 선지식의 가르침은
우리 자신을 비껴가지 못하므로..()..
혼자라는 생각으로 가던 길 / 이제는 함께 걸어요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 다 함께 손을 잡아 봐요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감사합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