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 (1914~1918)... 사망자 1000만명 이상으로 추정.
병사들은 적군의 총알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참고를 팠다.(이 과정에서 굴삭기가 발명되었다.) 참호는 취사장과 화장실 심지어 극장까지 갖추고 있을정도로 거대화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지루하고 비참했다.
참호쥐-Trench Rat
많은 병사들이 참호에서 사망했고 그들은 거의 그 근처에 묻혔다, 만약 참호가 망가지거나 붕괴되면 다시 참호를 파야했는데 많은 수의 부패된 시체들이 이과정에서 발견되곤 했다. 이 시체들은 참호안의 쥐들에게는 좋은 먹이가 되었는데 보통 한쌍의 쥐가 일년에 880마리의 새끼를 생산했으므로 참호안은 쥐들로 가득차게 된다.
일부 쥐들은 비성장적으로 크게 자라기도 했는데 한 병사는 "쥐들은 거대했는데 만약 부상당한 병사가 스스로 자기를 지킬힘이 없다면 부상자들을 먹기도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쥐들은 매우 공격적이어서 주머니나 슬리핑백안의 식량을 노리기도 했다. 2~3마리의 쥐들이 보통 한명의 전사자 시체에서 발견되곤 했다. 이 쥐들은 보통 먼저 눈을 파먹고 구덩이를 만들어 시체를 파먹곤 했다.
한병사는 정찰중에 발견한 시체더미를 보고 "나는 얼마간의 쥐가 시체의 코트로부터 기어다니는 것을보았다. 나는 그중 시체 한구를 건드렸는데 엄청난 쥐떼가 기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헬멧이 구르면서 얼굴이 보였는데 그 찌그린 얼굴에서는 눈이 없었고 입으로부터 쥐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Lice
참호안의 병사들은 엄청난 이로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가 몸에서 기어다니며 온몸에 부스러기와 같은 자국을 남겼는데 이는 또한 시고 썩은 냄새를 유발하기도 했다. 이를 잡기위해 많은 방법이 동원되었는데 양초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옷을 태우지 않고 양초를 이용해 이를 잡기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군내에서도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비라인으로 임무를 교대한 병사들에게 목욕을 시키고 입던 옷들은 커다란 세탁기계에서 세탁해 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3시간정도후면 다시금 많은 이들이 몸을 기어다니곤 했다.
이들은 가려움증을 유발했고 병을 옮기기도 했는데 발열(pyrrexhia)이나 참호열병(trench fever)을 ?ケ穗? 주요 요인이었다.
끔찍한 음식 - Food
서부전선의 연합군들은 음식의 양이나 질면에서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대대마다 있는 취사장은 매우 열악해서 단지 2개의 큰 냄비가 전부였다. 이 장비로 모든 음식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신선한 음식을 보급하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는데 8일에 한번 빵이 전선으로 보내졌고 이마져 안정적이지는 못했다. 따라서 병사들은 가능한 모든 재료와 방법을 동원해 이상한 음식을 만들어내곤 했다.
취사장은 최전방 참호와 거리가 멀어서 음식이 도착할 때에는 항상 차갑게 식어 있었다.
따라서 영국군에서는 취사장을 전방라인 근처로 ?グ若쨉? 항상 포탄이 떨어지는
이곳에서 재대로된 뜨거운 음식을 만들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음식들은 대부분 캔에 담기어 보급되었는데 마코노치(Maconochie)라 불리는 캔은 안에 잘 게 썬 순무와 당근이 진한 스프와 함께 담겨 있었다. 한 영국병사는 "만약 마코노치가 따뜻하다면 이는 좋은 음식이었으나 차가운 상황에서는 음식이라고 할 수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병사들은 또한 장교들은 잘 먹고 있으나 일반병사들은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무거운 장비
서부전선에서 영국군이 돌격작전을 펼 때 한명의 병사는 보통 30kg의 장비를 휴대하였다.
이는 소통과 2개의 수류탄 220발의 탄환과 철제헬멧,철조망 절단기,야전붕대, 참호편성용장비와 두꺼운 코트, 2개의 모래주머니, 화장지, 수통, 식량자루,얇은 매스, 면도기구, 여유분의 양말, 메세지책과 비상용 식량이 그것이었다.
이 많은 장비들로 인한 무게는 무인지대에서의 빠른 움직임을 불가능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참호족염-Trench Foot
1차대전중 많은 병사들이 참호족염에 걸리게 되는데 이는 비위생적인 상태에서 냉기와 습기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물에 잠긴 참호안에서 병사들은발을 보호해줄 만한 마른 양말이나 군화없이 수시간동안 서있곤 했는데 이동안 발은 점차 감각을 잃게 되고 피부는 빨간빛이나 파란빛으로 변해가게 된다.
만약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이 발은 괴저에 걸려 결국 발을 절단해야하는 사태가 되었다.
이 참호족염은 특히 전쟁초반 심각하였는데 1913년에서 15년사이에만 약 2만여명의 영국군 병사들이 참호족염으로 인해 치료를 받았다.
이 참호족염을 예방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항상 그들의 발을 건조한 상태로 만들고 하루에 여러번 양말을 갈아 신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15년말 영국군에서는 병사한명당 3컬레의 양말이 보급되었고 명령에 따라 하루 최소 2번이상 양말을 갈아 신어야 했다. 그리고 발을 건조하게 유지시키기위해 병사들은 고래기름으로 만들어진 그리스를 발랐는데 이로인해 보통 한 개 대대에서 10갤론의 고래기름을 하루에 사용하곤 했다.
자해-Self-Inflicted Wounds
전사나 영원히 불구로 살 게 될 것을 예상하게 된 병사들은 차라리 소위 본토귀환부상(blighty wound)을 입어 집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일부병사들이 스스로 총을 발사해 전방으로부터 빠져나가려고 시도하게 된다. 자해부상 (SIW:Self-inflicted wounds)은 적발되면 사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는데 전쟁기간동안 총 3,894명의 영국병사들이 적발되었고 이중에서 처형된 병사는 없었지만 거의 군 교도소로 보내진다.
또한 참호안에서의 자살도 계속되었는데, 가장 일반적인 자살방법은 자신의 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방법이었다. 다른방법으로는 일부로 사격계단(Fire step)에 올라 몸을 드러내 적의 저격수가 자신을 명중시키도록 하는것이었다.
들것 운반병- Stretcher-Bearers
돌격작전중에 부상당한 병사를 돌보는 행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병사들이 비상시를 대비해 구급용 붕대를 가지고 다녔고 부상을 입었을 때는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붕대로 처리한후 들 것 운반병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개 중대에 단지 4명의 운반병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자주 위생병의 역할까지 하곤 했다.
일부 부상자들은 무인지대에 갇혀 포탄 구덩이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죽어가기도 했고 진흙탕에 묻혀 위험한 상황이 되거나 실종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 병사는 가슴에 총상을 입고 이틀에 걸처 스스로 아군참호까지 기어오기도 했고 또 다른 병사는 무려 13일동안 무인지대에서 보내다 들것 운반병들에게 발견될 때까지 버틴 경우도 있었다.
정상적인 환경하에서는 2명이 한 개의 한명의 명사를 들 것에 실어 나를 수 있었으나 큰비가 내리거나 하면 온통 진흙탕이되어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 되곤 했다.
이럴 경우에는 한명의 부상자를 나르는데 여러명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렇게 ?ケ瘦? 힘든 상황에서는 ?ケ穗? 도중 상처가 악화되기도 했고 때때로 충격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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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굴삭기 자체는 파나마 운하 팔 때도 있지 않았나염?
정말이지 저런 환경에서 전쟁을 해야하다니... 원래 전쟁이 참혹하다지만...
이런 맛나는 글은 역사게시판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욤?
끔찍하다 정말...
데스워치라는 영화를 보면 참호쥐,,,ㄷㄷㄷ
ㅜㅜ 전쟁이 영원히 없어졌으면......